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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프레는 클레르발의 꿈을 꾼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2차 창작 회지 소장본 | 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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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2차 창작 회지 소장본 | 2020.01

- CP: 빅터앙리

- 회지 사양: A5 | 내지 40 페이지 | 무선제본

- 표지 디자인: 덴비 님


1

이는 앙리 뒤프레가 꾼 기묘한 꿈의 기록이다.

전쟁이 끝난 후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뒤프레는 워털루에서 제네바로 귀환했다. 제네바는 프랑켄슈타인의 연고지이지 뒤프레와는 전혀 연이 없는 곳이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가 자신을 따라오리라는 데 의심 한 치 두지 않았다. 뒤프레와 만나기 전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지위에서 열람할 수 있는 뒤프레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탐독했다. 그에게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은 그를 영입하는 데 가산점을 받은 항목이었다. 물론 군에 입대하기 전 뒤프레에게도 소속이 있긴 했다. 독일의 잉골슈타트. 그러나 그곳에서 학계를 발칵 뒤집은 논문을 발표한 그는 자신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는 이들에 의해 입지가 불확실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는 자신의 출생지를 떠난 후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으며, 대학에 입학한 후엔 성장지 역시 자주 방문하지 않았고, 잉골슈타트에서도 연구실과 집을 오갈 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사실을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인 그에게 느낀 동질감의 비중은 작았다. 뒤프레는 새로운 소속이 필요했고, 프랑켄슈타인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었다. 비록 프랑켄슈타인 역시 달가워하지 않는 고향이지만 아무도 그를 그곳에서 영원히 추방할 순 없었다. 그가 가지고 태어난 정당한 권리를 뺏을 이 어디에도 없다. 저주받은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프랑켄슈타인 성의 열쇠를 손에 넣을 이는 마지막 자손인 그와 엘렌뿐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제네바에서 자신이 환대받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남들보다 영특한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고작 십몇 년 흐른 정도로 사람들은 불탄 성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너져 없어졌으면 또 모를까, 쓰러지지 않은 고목처럼 그 자리 그대로 죽은 채 남겨진 성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누나가 그곳을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남매에게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새겨진 곳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곳으로 돌아가 그날 시작된 자신의 꿈을, 사명을 완수하리라 결심한 프랑켄슈타인이었지만 사실 이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엘렌마저 그곳을 찾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곳을 넘보지 않았을 것이고, 프랑켄슈타인이 원한 건 그게 다였다. 제네바의 환대 따위 알 바냐. 프랑켄슈타인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그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곳을 바랐다. 이젠 그‘들’의 연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시작이 있었던 곳에서 끝을 내어 수미상응하는 건 분명 멋진 맺음이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멋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만약 프랑켄슈타인 성이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다면 프랑켄슈타인은 ‘매우 당연하게도’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뒤프레의 연구실이 있던 잉골슈타트로 가면 갔지.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적당히 조용한 다른 곳을 물색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성은 그에게 그 정도의 의미였다. 아마도.

그런고로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 성에 아주 오랜만에 발을 들인 외부인이었다. 백 년은 잠든 듯, 남들보다 시간이 배는 흐른 것처럼 삭아가던 성에 돌아온 젊은 주인과 아직 이 모든 것이 낯선 손님. 프랑켄슈타인과 뒤프레를, 검은 성은 녹슨 경첩의 울음소리로 환영했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연고지에 큰 집착을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뒤프레 역시 자신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는 프랑켄슈타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기에 이 연구엔 프랑켄슈타인이 함께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가 만약 제네바가 아니라 파리로 간다고 하더라도 저에게 따라오겠느냐는 말 한마디면 어디든 따라갔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뒤프레가 프랑켄슈타인의 이상에 도취한 것 같이 프랑켄슈타인 역시 뒤프레란 재인을 탐했고 이는 누구든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러니 뒤프레를 대체하는 더욱 완벽한 인재를 찾아내지 않는 이상 프랑켄슈타인은 반드시 뒤프레를 사로잡으려 할 테니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뒤프레가 그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그를 따라가 그의 연구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의 꿈을 함께 이루게 해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품은 호감을 떠나서, 호감을 품기도 전에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제네바에 도착해 프랑켄슈타인 성에 짐을 푼 그들은 여독을 풀 생각은 않고 워털루에서 옮겨온 실험 기구를 설치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모든 설비가 완료되었을 때 그들은 매우 큰 만족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그제야 포도주병의 코르크 마개를 땄다. 첫날 밤은 그것만으로 끝났다. 기기들의 부피가 크고 룽게까지 거들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들어도 버거운 무게인 것들이 많았기에 이미 밤의 절반 정도는 지나갔을 때였다. 그래도 마개가 빠져나오며 내는 퐁, 소리는 경쾌하기 그지없어서 그날 들은 모든 더러운 소리를 씻어냈다. 프랑켄슈타인은 즐거워했다. 뒤프레는 기뻐했다. 본격적인 실험은 재료가 도착하는 이튿날부터 시작될 것이다. 오로지 기대로 가득 찬 밤은 웃음이 넘쳤다.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선 온갖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야 했다. 그들은 지난 세월 속에 쌓아온 모든 지식을 활용해 다양한 실험을 했고, 그 실험들이 전부 즉각 결과를 도출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전위차를 측정하는 건 간단하다. 전압계의 프로브를 재고자 하는 두 곳에 꽂으면 바로 계기판을 확인해 값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실험이 이와 같았으면 그들은 결과를 확인하고 오차를 분석하고 변수를 통제하고 환경을 조정하여 재실험하는 일련의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기에 그들의 실험 사이사이에는 결과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시간이 존재했다. 프랑켄슈타인과 뒤프레는 정해놓은 휴식 시간 외 비는 시간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은 뒤프레보다 프랑켄슈타인이 좀 더 심했지만, 쉴 땐 쉬어야 한다고 휴식 시간에도 논문을 한 자라도 더 읽으려는 프랑켄슈타인을 억지로 데리고 나가 바깥공기를 쐬게 만드는 뒤프레도 자신이 정한 연구 시간에 한해서는 엄격했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이 연구가 그들의 숙원이기 때문이었다. 취미이고 특기이며 그들의 흥미를 끌고 맹목적으로 달려들게 했다.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의 꿈이었다.

그들은 둘뿐이었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실험을 한 번에 하나씩만 진행하다가는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을 때쯤엔 머리끝이 희끗희끗해질 게 분명했다. 아니면 뭉텅뭉텅 빠져있던가. 그래서 그들은 보통 여러 실험을 동시에 진행했고 유기적으로 얽힌 실험들의 순서가 꼬여서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이는 거의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빽빽한 계획 아래에서 가능했고 그들의 유능함과 협동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손발이 제 것인 마냥 착착 호흡을 맞추는 그들은 다른 이들이었으면 수 배의 시간이 걸릴 일을 단숨에 해치웠다. 그들은 서로에게 훌륭한 동반자였다. 사실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아귀가 맞아떨어질 줄 알지 못했다. 입이 맞는다고 손이 맞진 않으니까, 직접 맞춰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두 사람의 합만큼이나 빈틈없이 맞물린 계획은 순조롭게 실현되었다. 그들은 함께 그들의 꿈이 그려진 퍼즐을 맞춰갔다. 프랑켄슈타인만의 꿈이나 뒤프레만의 꿈이 아니었다. 그들의 꿈이었다.

그러니 그리도 세세하게 짜놓은 계획에 틈이 생긴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리라. 아주 정밀한 시계여도 미세하게 밀린 초침이 결국 분침을 밀어내고 마는데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이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신만이 가능한 일이고 신에게 도전하는 이들은 아직까진 인간이었다. 아무리 골몰히 고민하고 애를 써서 짜낸 계획에도 예상치 못한 일은 단어 그대로 예상할 수 없기에 들어있지 않다. 계획에 없기에 준비한 것도 없다. 준비한 게 없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에 그렇게 큰 구멍이 생긴 건 아니었다. 바늘구멍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문제도 없었다.

“빅터. 이쪽은 다 끝났는데 뭐 도와줄 거 없을까?

“여기도 딱히. 산소 포화도 결과는? 어디에 있지?

“그쪽 둘째 선반 위에. 근데 그건 아직 다른 데이터 값이 나와야지 같이 분석할 수 있어서 저번에 검토한 그대로야.

“흠. 그렇군.

그저 더는 할 게 없었다. 그뿐.

한동안 실험실엔 플라스크에서 액체 시료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서류철에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날이 싸늘해 불을 붙인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무언가를 읽고 있긴 했으나 눈에 글자가 들어오진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검토해 더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게 없는 보고서이기도 했고, 이틀 전부터 철야 작업을 한 눈이 지나치게 피로한 탓도 컸다. 읽지 못하고 미뤄둔 책과 논문은 있지만 앞선 이유로 제대로 내용을 이해하려면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 두 번, 세 번은 다시 읽어야 할 테고, 이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다.

“나는…… 아닐세.

대체, 왜 시간이 남는 것인가? 정답을 아는 그들은 상대에게 묻지 않았다.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들이 지나치게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매번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단축하여 실험을 완수했고,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는 능력도 뛰어나 결론을 금방 도출해냈다. 예비로 잡아놓은 시간에 그렇게 조금씩 앞당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더해지니 결과는 이렇게 기대하지 않는 휴식 시간과 맞닥뜨림이었다. 덤으로 얻은 휴식이었다. 나쁠 게 뭐 있겠냐마는 적어도 두 사람은 당황했다. 아마 두 사람만이 이런 깜짝 선물에 어쩔 줄 몰라 헤맬 것이다. 그들의 연구는 항상 정확하고 정밀해야 하며 미세한 오차나 모호함은 결단코 존재해선 안 되었다. 이런 긴장 속에서 실험에 임하니 그들의 생활, 태도, 자세마저 연구를 따라갔다. 그나마 뒤프레는 연구실 안과 밖에서 자신을 전환하는 데 능숙했다.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듯, 평소엔 배시시 잘 웃고 농담도 잘 던지고 모서리에 무릎도 자주 찧고 가파른 프랑켄슈타인 성의 계단에서 넘어질 뻔하다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나 놓고 천만다행이라며 안도하며 다시 웃다가도, 연구에 몰입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아직 신체를 접합할 때보다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 뒤프레를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비교해 프랑켄슈타인은 ‘비교적’ 한결같았다. 평소가 대체 어떻길래 그러하냐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지레짐작해서 기겁하고 질색하고 꺼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유년 시절에 기인한 성격이었다. 이는 바꾸기가 절대 쉽지 않다.

뒤프레는 이중적이라고 표현될지도 모르나―그러나 이는 틀린 표현이다. 그는 같은 상황에선 상대가 누구든 항상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프랑켄슈타인보다는 휴식을 잘 활용했다. 적어도 연구와 관련된 논문을 읽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걸 휴식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잉여시간과 마주하고 함께 공황에 빠졌으나 프랑켄슈타인보다 먼저 빠져나온 뒤프레는 제가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일 중독자인 프랑켄슈타인은 저대로 두면 괜히 이 자료 뒤적거리고, 저 자료 뒤적거리면서 뭘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과열된 채 시간을 보낼 게 분명해 보였다. 휴식을, 연구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는 데 필요한 시간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는 분명 선물이었다. 그걸 알아채는 데 남들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쓰긴 했지만, 뒤프레는 이 선물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또 다른 낭비라고 확신했다.

“빅터.

“응. 앙리. 무슨 일인가?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가 부르기 무섭게 고개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뒤프레는 자신에게 일을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프랑켄슈타인에게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난 좀 잘게.

“뭐?

뒤프레는 의자에서 일어나 연구실 한쪽 벽에 놓아둔 소파로 걸어갔다. 제발 건강 상하지 않게 쉬엄쉬엄하라는 룽게의 간청에 놓긴 했으나, 쪽잠을 잘 때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과 달리 두 사람 다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자거나 의자에 기대 조는 바람에 방치된 가구 중 하나였다. 최근에는 종이뭉치와 서류들이 허리 높이로 쌓여 본래의 의도는 잊힌 지 오래였는데, 실로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가 소파에 놓인 짐들을 바닥으로 치우기 전까지 사람이 앉거나 누울 수 있게 만들어진 가구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뒤프레가 저에게 다시 한번 검토를 맡길 자료라도 찾으러 가는 줄 알았으니. 짐을 치운 소파는 다행인지 아닌지 빼곡하게 들어찬 잡동사니들 덕에 먼지는 많이 없었다. 뒤프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저를 따라온 프랑켄슈타인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벗은 구두를 소파 아래에 널브러뜨렸다. 의자 등받이에 벗어서 걸쳐놨던 겉옷도 들고 왔다.

“그러니 너도 자. 내가 일어난 다음에.

“앙리?

“자, 빅터. 자네에게 할 일을 주겠네. 15분 후 내가 깨어날 때까지 지금 램프를 켜놓은 실험 기구들을 잘 지켜보고 있게나. 둘 중 하나는 깨어 있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잖은가. 15분 후에 깨우는 거 잊지 말고. 두 번만 교대하면 바로 다음 실험을 진행할 수 있겠지. 내 말 알겠나?

결국, 15분 후에 깨워달라는 간단한 부탁인데도 프랑켄슈타인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 뒤프레의 태도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마치 그들이 워털루에 있을 때를 연상하게 했다. 그때와 반대로 프랑켄슈타인에게 부탁하는 처지가 된 뒤프레는 2주면 가능하겠냐며, 명령이 아닌 부탁이라던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말을 맺는 순간까지 웃지 않았다. 다만 프랑켄슈타인이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이 중대한 명령을 받들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엔 속에서 터진 웃음이 입꼬리를 올리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걱정하지 말게, 앙리.

“빅터, 자네를 믿어.

끝까지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며 뒤프레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팔걸이를 베개 삼고 겉옷을 담요로, 배 위로 가지런히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잠들지 못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틀간 밤을 새웠고 15분은 수면 상태에 빠지는 데―적어도 뒤프레에게는―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딱 그 시간만 잤다가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은 되지만, 이는 프랑켄슈타인이 반드시 해내고 말 터이므로 그에게 맡겨두면 되었다. 설사 잠들지 못하더라도 뻑뻑한 눈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다. 뒤프레는 안심했고, 마음이 편해지니 졸음이 쏟아졌다. 자신이 몸을 뉜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소파는 마치 늪처럼 뒤프레의 몸을 자꾸 아래로 끌어당겼다. 아래로, 이대로 계속 끌려간다면 소파 안에 갇히게 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은 뒤프레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 함께 끊어졌다. 뒤프레는 깊이 잠들었다.

육체에서 끊어진 의식은 어디로 가는가? 두뇌에 잠드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가? 이는 그들이 마침내 생명 창조를 완수하는 순간에야 알게 될 신의 비밀이었다. 그러니 뒤프레는 자신의 의식이 제 두개골 안에 갇힌, 무의식이 창조한 세계를 엿본 건지, 기적적으로, 아무나 겪지 못할 신의 권능을 체험한 건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뒤프레는 기묘한 꿈을 꾸었다.

2

눈을 떴다. 한 소년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눈꺼풀이 걷힌 제 눈을 보자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소년이다. 그는 제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팔을 붙잡고 흔들어 저를 붙잡은 검은 잠을 적극적으로 내쫓으려 한 소년의 손은 덜 자란 그의 키만큼이나 작았다. 그래서인가, 자신은 눈을 뜨기 전 저를 깨우려 드는 이의 정체를 좀처럼 알지 못해 고뇌했다. 목소리의 주인과 작은 손의 주인이 동일인물임은 추론했지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어린아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눈을 떠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건 저의 패배 선언이었다. 눈을 떠 말갛게 갠 소년의 얼굴과 마주하자, 소년은 저를 깨우기 위해 몇 번이고 불렀던 이름을 다시 한번, 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발음했다. 변성기가 오려면 멀었는지 소년의 목소리는 청아하기만 하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터뜨린 웃음은 호수의 물처럼 투명하다. 바닥까지 빛이 환히 비쳐 그늘진 곳을 찾기 힘든, 탁해지기엔 눈 부신 빛을 내뿜는 소년.

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소년을 통해서 그제야 깨닫는다.

“앙리!

앙리는, 풀밭 위에 누워 잠들었던 앙리는 소년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네 번째 깜박임에서야 앙리는 겨우 소년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안도가 섞인 목소리를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앙리도, 소년의 이름을 발음하면서 어색한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었다. 소년도, 소년과 함께 있는 자신도.

“빅터.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어넘기는 바람도, 아직 색이 진해지지 않은, 기껏해야 발목께에 머무는 여린 풀잎의 풀냄새와 한 움큼은 모아야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손톱만 한 들꽃도. 세상에 홀로 떨어져 나와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방황하며 비를 맞고 방아쇠를 당겼던 과거는 꿈인 듯 잊혔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은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은 이곳에 있어야 했다. 이곳에―.

“낮잠은 좋지만, 슬슬 저녁잠이 되어가. 저녁잠을 자면 밤잠을 설치게 되잖아. 이제 일어나자. 앙리.

“빅터.

“응. ?

이곳의 ‘앙리’로, 그렇게 태어났어야 했다. 그렇게,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로 누군가 앙리의 귀에 속삭였다. 유일하게 그 소리를 들은 앙리는 아무 말도, 빅터의 이름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앙리는 알았다. 이 소리를 그 외에 아무도 듣지 못하는 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작은 소리라 귓가에 바싹 닿지 않는 한 듣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앙리의 과거를 부정하는 그 목소리는 앙리가 살아오면서 들은 어떤 소리보다도 가장 거대했다. 바로 곁에서 포가 발사되는 소리를 들은 앙리인데도 감히 그 순위에 반박을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하고 명백하게 그를 압도했다. 이는 기껏해야 둘, , 백이 모여 내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세상 모든 존재가 한순간에 한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러므로 세상 안에서는 도리어 들을 수 없고 세상 밖에서만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가 속삭였다: , 앙리. 앙리 뒤프레. 왜 이제야 돌아왔나.

“빅터.

“앙리?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있는 이곳에, 왜 이제야 돌아왔나.

“빅터 프랑켄슈타인.

이제는 여기에도 네 자리가 없는데.

“빅…….

“아, 엘리자베스! 지금 갈게!

앙리의 손이 빅터에게 닿기 직전, 고개를 돌린 빅터는 몸을 일으켜 앙리의 곁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앙리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어린 빅터의 사촌 누이를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던 파티에서 스쳤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무리지만 그녀와 빅터의 약혼이 그들이 아주 어릴 적에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왜인지 잊지 않았다. 앙리는 빅터만큼 어린 그녀의 이름이 엘리자베스였는지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닌지라 오래 품지 않고 놓아주었다. 그동안 빅터는 경사진 언덕을 빠르게 올라가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어서 일어나 올라오라고 손짓하는 엘리자베스는 앙리에게 보이는 태도가 빅터에게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아직은 빅터에게 연정 없이 남매간의 우애만을 느끼기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앙리는 그들에게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얼른 올라와, 앙리!

엘리자베스의 부름에 앙리는 몸을 일으켰다. 이때 앙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꿈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앙리가 이곳에 영원히 머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가장 처음에 꿈과 앙리를 동조한 이, 그의 손에서 분리 역시 시작되었다. 분리는 곧 꿈에서 깨어남을 의미했다. 그는, 짓궂게 웃으며 혀를 쏙 내민 빅터였다. 앙리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아니면 앙리의 꿈에서 의미 있을 자 없으므로.

“가자, 앙리―.

눈을 떴다.

15분 다 됐네, 앙리.

“빅터.

뒤프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과 거꾸로 마주친 눈이 또다시 네 번째로 깜박였을 때야 이름 하나를 겨우 혀끝에서 소리 냈을 뿐이다. 15분 동안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램프를 지켰다고 말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친우의 부탁을 완수한 것에 기뻐하느라 뒤프레의 반응이 느린 것에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잠에 겨워 바로 정신을 차리기 힘든가 보다 생각하리라. 과연 프랑켄슈타인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뒤프레를 보며 꿈에서 그러했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꿈이라도 꿨나?

“아니…….

소파 밑에서 신발을 찾아 신은 뒤프레는 이제 교대할 차례라고 말하는 상기된 얼굴의 프랑켄슈타인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뒤프레는 들뜬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그들이 지나치게 오래 깨어 있었다는 걸 재차 실감했다.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은 지금 그를 옭아맨 수면 부족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판단이 돌아오는 즉시 뒤프레를 쫓아가 따질지도 모른다. ‘자네, 대체 그 부탁은 뭐였나. 나를 어린애로 아는 건가?’ 그러면 뒤프레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그의 무기 중 하나인 말간 얼굴로 되묻거나, 아니면 프랑켄슈타인의 태도에 짐짓 불쾌한 척을 하며 무슨 뜻이냐며 잡아떼다가, 결국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뒤프레는 감추는 데 재능이 없고,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의 거짓말을 쉽게 간파했다. 좀 더 뻔뻔해지라는 충고에 이 이상은 무리라고 포기한 건 뒤프레였다.

“빅터, 자네 말이야, 혹시…….

“음?

팔을 들어 소매로 눈을 가린 프랑켄슈타인이 입을 열지 않고 목울대만을 울려 대꾸했다. 뒤프레가 그랬듯 바로 잠들 줄 알았는데 프랑켄슈타인의 목소리는 졸음이 전혀 끼지 않아 또렷했다. 이어질 질문을 기다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앞에서 뒤프레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게…….

아무리 프랑켄슈타인이라도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선 무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대체 무언가. 지식이 없으면 마땅히 무지하다마는, 뒤프레는 위 명제가 참이 아니라고 단호히 선언해왔다. 모든 경우에서 참이어야 성립되는 명제를 부정하는 예외, 프랑켄슈타인이 바로 그 예외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뒤프레에겐 언제고 프랑켄슈타인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고 프랑켄슈타인은 대다수 상황에서, 위험이 뒤따르고 반드시 무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뒤프레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뒤프레가 프랑켄슈타인에게 더욱 집착하는 계기와 상통했다.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는 친우여. 그대와 함께라면 하나 앞에 서른을 세는 것도, 일흔을 보는 것도, 아흔을 이루는 것도 가능하겠지.: 뒤프레가 프랑켄슈타인을 좇은 본질적인 이유였다.

그러니 뒤프레는 지금 프랑켄슈타인에게 얼만큼의 정보를 내놓을지 고민하는 게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건넨 정보로 어느 정도까지 유추할 수 있는지, 뒤프레의 속을 어디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프랑켄슈타인은 알지 못하는 게 맞다. 그런데도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이 눈을 뜨더라도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뒤를 돌았다. 표정을 통해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게?

“저번 파티에서 뵈었던 자네 사촌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시더라. 엘리자베스, 셨나?

“자네, 그게 궁금했나?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리 공을 들이나 했더니 겨우 그것이냐며 실소하는 프랑켄슈타인을 뒤로하며 뒤프레도 멋쩍게 웃었다. 어려운 질문도, 그의 심중을 건드려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도 아니기에 프랑켄슈타인은 가볍게 답을 들려주었다.

“줄리아라네. 슈테판 숙부님의 외동딸이지. 엘리자베스? 아마 엘렌과 혼동한 게 아닌가 싶은데.

“동생은 있나? 자네.

“없어. 누님과 나 둘뿐이야.

“아그리파의 저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도태되었지. 진보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 건 높게 친다만 이젠 밟을 일 없는 썩은 판자다.

“혹시 이곳 제네바에―.

마지막 질문을 끝마치기 전 뒤프레는 왜 자신이 등을 돌려 프랑켄슈타인을 마주 보았는지 알지 못했다. 여전히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으리라 기대했나, 프랑켄슈타인이 언제부터 팔을 치우고 저의 등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을 한 건지 뒤프레는 알 길이 없다. 인제 와서 물러서기엔 더없이 수상하게만 느껴질 질문을 한 바가지 쏟아낸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끝까지, 가장 처음 묻고 싶었으나 마지막까지 참아낸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내놓을 뿐.

“앙리, 라는 친구가 있었나? 앙리 클레르발. 그런 이름일 텐데.

“자네, 아까는…….

“허언이네. 모두 잊어주게.

뒤프레는 다시 등을 돌렸다. 미몽에 사로잡혀 괴이한 소리를 늘어놓았다는 부끄러움이 뒤프레의 심장을 옥좼다. 열이 올라 얼굴이 붉게 달았다. 이 일로 프랑켄슈타인이 저에게 실망해도 변명하지 못하리라. 못 보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괜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지만, 빗자루로 쓸어내듯 열을 모아 내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뒤프레는 자신의 뒤로 소파에서 일어난 프랑켄슈타인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엔 기민하진 않더라도 이 정도로 감이 떨어지지는 않은데 그만큼 그의 모든 신경이 그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증명이었다.

“앙리.

“빅터.

뒤프레는 제 앞으로 불쑥 머리를 들이민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숨을 흘렸다.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뒤프레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고 프랑켄슈타인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책상과 뒤프레 사이에 끼어든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의 어깨 위에 손을 턱 내려놓았다. 우습게도 뒤프레는 그제야 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림자처럼 겹쳐진 제네바의 노을이 걷히고 귓가에 맴돌던 어린 소년·소녀의 웃음소리 역시 안개처럼 흐려졌다가 안개마저 완전히 걷혔다. 뒤프레는 눈을 감았다 떴다. 꿈은 끝났고 뒤프레가 발을 딛고 선 이곳은, 프랑켄슈타인과 닿아있는 이곳은 현실이었다.

“아까는 꿈 같은 거 안 꿨다고 그러더니. 역시 거짓말이었어.

“그냥, 개꿈이었네. 이젠 괜찮아. 정말로.

뒤프레는 진심을 담아 웃었지만, 거울을 보지 않은 그는 잠들기 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를 지적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더 잠드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건 뒤프레를 전혀 돕지 못할 충고 같았다. 그는 친우가 무엇 때문에 이리 괴로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뒤프레가 전혀 정보를 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다만 프랑켄슈타인에게 개인적인 질문은 섣불리 던지지 않는 뒤프레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캐내던 것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란 건 자명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뒤프레는 잊으라고 했던 질문을 프랑켄슈타인은 아직 기억했다.

“그런 친구는 없네.

“뭐?

“자네 말고 다른 앙리는 없다고. 자네가 내 유일한 앙리야. 대답이 되었나?

프랑켄슈타인은 뒤프레가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떼어내는 걸 지켜보았다. 이내 그는 입꼬리를 올려 빙긋 웃었다.

“응. 대답해줘서 고마워.

“자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

뒤프레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역시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개꿈이었다는 확신을 얻었고, 덕분에 마음은 잠들기 전처럼 가벼워졌으니. 풍랑 속에 갇힌 배처럼 흔들리던 중심이 다시 공고한 땅 위에 내려섰다. 돌풍이 멎으니 분간되는 사리는 뒤프레가 다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돕고, 올곧은 방향으로 나그네의 발을 이끈다. 뒤프레를 잡아준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말대로,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그건 밤하늘의 별도 마찬가지였다. 별은 그저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빛나기만 하면 되었다. 별을 보며 길을 찾는 건 인간의 몫이었다. 혼란을 잠재우는 것도, 현실을 분명히 바라보는 것도. 문득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이라면 그가 바라는 대로 별과 같은 사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저에겐 그런 사내였다.

뒤프레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을 원하는 순간 원하는 내용으로 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를 자각몽이라고 하여 타고난 자질로, 또는 훈련을 통해서 마음먹은 대로 조절하는 자도 있다고 하건만 뒤프레는 아니었다. 꿈은 그가 피할 수 없으며 고를 수 없으며 불러올 수도 없는 미지였고, 뒤프레가 정복하려는 미지와 연이 아예 없지는 않겠으나 지금으로선 곁가지의 잎새나 될까 싶은 부분이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뒤프레는 본디 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이 없으니 아무리 기묘해도 자연히 잊게 되었으며, 그날의 꿈을 이어 꾸던 날엔 매우 놀란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그뿐, 뒤프레가 처음 꿈을 꾸고 깨어난 날만큼 꿈에 매달리는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뒤프레의 현실은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또 다른 프랑켄슈타인이 있는 세상의 ‘앙리’는 분명 뒤프레보다 훨씬 행복하였으나 모든 점에서 우위를 차지하진 않았다. 이곳엔 이곳의 프랑켄슈타인이 있었다. 뒤프레가 자신의 유일한 ‘앙리’라고 말해주는, 그리고 그 유일한 ‘앙리’가 필요한 프랑켄슈타인이. 뒤프레는 그와 함께 꿈을 꿀 것이고, 꿈을 이룰 것이다. 위대한 생명 창조의 역사를 두 사람의 손으로 이룰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없었다. 그날 새벽, 앙리는 역마차에서 내렸다. 밤새 달려 국경을 넘은 마차의 문이 열린 순간 앙리는 여관 맞은편에 서 있는 빅터와 마주쳤다. 앙리는 오랫동안 빅터와 만나지 못했으나―우스운 표현이다. 꿈에서 깨어나 매일 아침 마주하는 그는 빅터가 아니란 말인가?―빅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앙리는 마부가 짐을 내리게 두고 저는 마차에서 뛰쳐 나와 빅터에게 달려갔다. 빅터를 끌어안은 앙리는 이곳에선 스스럼없이 그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세상에, 빅터. 네가 바로 이곳에 있다니 믿기지 않아. 이곳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만난 게 너라니, 이건 행운이야.

“나도 너를 만나 정말 기쁘다, 클레르발. 네가 올 줄은 정말 몰랐어.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공부하는 빅터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 이는 정말 우연으로 성사된 재회였다. 앙리는 빅터를 꽉 힘주어 안은 후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빅터의 얼굴을 제대로 다시 본 건 그때였다.

“앙리?

빅터는, 어린 소년일 적 처음 만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이제 꿈 밖의 그와 나이가 같았다. 같은 모습으로 성장해 같은 목소리를 지녔다. 그러나 그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의 웃음이 달랐다. 이곳의 빅터는 아버지를 잃지 않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나 그처럼 비참하게 어머니를 잃고 제대로 작별조차 하지 못한 채로 보내지는 않았다. 고향에서 쫓겨나지 않은 그의 인생은 평온했고, 세상을 냉소하지 않은 그는 순수한 열정으로 지식을 사랑했다. 이곳에서 앙리는 정말 행복했지만 빅터 역시 그러했고, 앙리가 이 세상을 현실이 아님에도 깊이 사랑하는 이유는 그 점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비록 그들이 함께 꿈을 이루는 세상은 아니겠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친우의 모습을 보는 건 봄바람 불어와 실어나르는 꽃향기를 맡을 때처럼 설렜으므로.

“앙리 클레르발?

꽃이 모두 지는 계절이 와도, 빅터가 앙리의 곁을 떠나던 날에도 앙리가 크게 슬퍼하지 않은 건 이곳의 빅터는 언제까지나 행복하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덧없다. 신은 헛되다. 존재하긴 하되 그건 분명 악신일 거라고 조소하던 프랑켄슈타인의 웃음이 어째서 그에게 자리 잡았는가. 그는 어째서 프랑켄슈타인이 되어 가는가. 위대한 이상은 처음부터 그의 영혼에 새겨져 어떤 환경 속에서든, 어떤 조건에서든 반드시 개화해서 운명을 휘젓는가. 그 속에서 그의 영혼은 속절없이 상처 입고 마는 것인가.

앙리는 탄식했다: 나는 그 꿈속에 살 순 없었나. 빅터. 정녕 그러한가.

3

뒤프레는 가장 처음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꿈속에서 자신을 잊지 않았다. 자신을 잊으려면 먼저 프랑켄슈타인을 잊어야 한다. 미래를 아는 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가장 큰 신의 권능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른 건 다 지워내도 뒤프레에게서 그만은 지우지 못하리란 확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존재치 않았다. 그러니 이는 뒤프레의 기원에 가까웠다. 그러나 뒤프레는 감히 확신했다. 전능한 신이어도, 자신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일지라도 저에게서 프랑켄슈타인을, 프랑켄슈타인과 함께한 기억을 빼앗지는 못하리라. 맹신에 이른 기도의 대상은 신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이었다.

한 번도 그에게 고백하진 못했으나 제가 프랑켄슈타인에게 갖는 신의는 여러 번 간증한 뒤프레다.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과 만난 순간을 기적에 빗대곤 했다. 그의 생각과 신념, 의지는 일식이 일어나도 검은 그림자 밖으로 넘실거리는 하얀 불꽃처럼 무엇으로 가려지지 않았고, 뒤프레는 태양에게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리더라도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을 계속 좇으리라. 그가 계속 빛나는 한 자신은 그러리라, 이는 뒤프레의 두 번째 확신이었다.

만약 프랑켄슈타인에게 그의 이상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자신은 그를 좇았을까? 뒤프레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질문을 제게 던지지 않았다. 의미 없는 질문이기에 대답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 역시 사치라고 여겼다. 이상은 프랑켄슈타인을 이루는 일부다. 이상이 없는 프랑켄슈타인은 과연 프랑켄슈타인인가? 뒤프레는 단번에 고개를 저어 부정할 터다. 같은 유전자로 구성되었더라도 그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꿈속의 ‘빅터’는 뒤프레의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못했다. 프랑켄슈타인이 겪은 시련만이 그에게 ‘그 이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 뒤프레는 몹시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테지만 그게 다다. 프랑켄슈타인의 이상을 뒤프레가 먼저 포기하여 그가 꿈을 꾸지 못하도록, 대신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리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과연 이런 제가 그의 친구인가? 비열한 자신을 위한 변명마저 졸렬하다: 프랑켄슈타인이 먼저 뒤프레를 친구라고 불러주었다. 그가 먼저 정의한 관계를 따라 뒤프레는 그의 친구였다.

반면 꿈속의 클레르발은 ‘빅터’의 진정한 친우였다. 거짓된 뒤프레와는 달랐다. 제네바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앙리 클레르발은 빅터와 친형제와 다를 바 없이 함께 자랐고, 빅터의 수많은 다정한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빅터와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지켰다. 이곳의 빅터는 뒤프레를 매혹한 이상을 말하지 않았으나 대신 클레르발이 지어내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클레르발은 빅터의 사고를 완벽하게 따라가진 못했으나 그와 진실한 우정을 쌓아나갔다. 벗 사이의 정은 가히 그러해야 했다. 뒤프레와 프랑켄슈타인과 다르게.

그동안 뒤프레는, 거울에 비춘 듯 현실과 닮았으나 빛으로 왜곡된 상과 같은 꿈을 지켜보았다. 뒤프레가 프랑켄슈타인을 잊지 못하니 최초에 그러했듯 클레르발과 완벽하게 동조하는 건 이제 무리였으나 클레르발의 감정을 느끼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빅터와 함께 달렸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뒹굴었다. 그는 클레르발이었으나 종종 뒤프레가 되었고, 둘 모두가 되어 빅터의 손을 잡아끌기도 했다. 그때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저 ‘앙리’였다. 앙리는 그곳에서 물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배우이면서 관객이 되고, 참여자이면서 방관자가 되었다. 그리고 빅터를 사랑했다. 그가 비록 뒤프레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닐지라도, 앙리는 뒤프레이면서 아니기도 했기에 사랑스러운 그를 그대로 보아넘기지 못했다. 빅터를 볼 때마다 느끼는 순수한 기쁨, 환희. 그게 사랑의 전부는 아니겠으나, , 뒤프레가 사랑하기엔 부족하겠으나 앙리가 빅터를 사랑하기에는 충분했다. 넘쳐흐른 감정이 적신 세상은 호수처럼 반짝였다. 교회의 유리만큼 찬란했다. 그러했는데.

“앙리?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뒤프레는 울고 싶었다. 클레르발에게서 튕겨 나온 뒤프레는 실로 오래도록 울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마른 눈가에 젖은 자국이 깊이 남을 정도로 뒤프레는 진실로 슬퍼했다. 한낱 꿈속의 그로 인해 이렇게나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리 슬픈가. 빅터가 저를 배제하고 생명 창조의 역사를 연 것이 그리도 서운한가. 그래 봤자 그건 꿈이고 현실에선 이렇게 함께 힘을 합쳐 하루하루 새로운 페이지를 적어가고 있건만, 고작 꿈에서 소외된 것이 섭섭하고 울적할 일인가. 뒤프레는 자신을 걱정하는 프랑켄슈타인에게 괜찮다며 웃었지만, 잔뜩 부은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어서 도리어 프랑켄슈타인의 미심쩍은 시선을 눈으로 받아칠 수고는 덜었다. 좋지 못한 꿈을 꾸었다 얘기하면 간단할지도 모르나,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나 베갯잇을 적신 거냐고 캐묻는 프랑켄슈타인은 피하고 싶었다. 무서웠다고 어찌 말하리. 그의 꿈에 자신이 함께하지 못할까 봐. 그가 자신을 두고 혼자 가버릴 게 두려워 울었다고 말하기엔 뒤프레의 자존심이 아직 굳건했다.

“괜찮아.

처음엔 내심 기뻤다. 제네바에 도착한 뒤프레는 적대적인 시선에 둘러싸였고, 이곳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즉시 알아차렸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랬다면 뒤프레는 긴장을 풀려는 시도로 어색한 미소나마 입에 달고 두 손을 머리 높이로 올려서 자신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음을 그들에게 보였을 것이다. 자신은 그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을 데려온 이곳의 프랑켄슈타인을 봐서라도 저를 믿어달라고, 그리 호소했을 테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그들이 뒤프레를 경계했다면 프랑켄슈타인을 보는 눈에 담긴 건 착각할 수 없는 적의와 혐오였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프랑켄슈타인 역시 그가 받은 첫 번째 귀향 선물에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못 볼 꼴을 보였네. 하지만 신경 쓰지 말게. 악취 나는 거짓말쟁이들의 말을 들어서 무엇하겠나. 그들의 혀는 뱀 혓바닥이랑 진배없어. 진실이 섞였을지 모르나 결단코 온전하지 못해. 제가 베어 문 곳을 썩은 살로 채워 넣은 사과라지.

전쟁이 끝난 것과 프랑켄슈타인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으나 그곳에서도 프랑켄슈타인은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고, 오랜만에 재회한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몇 안 되는 이들마저 무안하게 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숨겨지지 않았음에도 프랑켄슈타인은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되려 그는 이 모든 일에 진절머리를 냈다. 그들의 연구실이 프랑켄슈타인 성에 완벽하게 갖춰져 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잠글 때까지, 그는 피하지 못한 모든 사람과 나눈 극도로 짧은 대화에도 질색하며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분명 무례했다. 특히 엘렌과 줄리아에겐 반드시 사과해야 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뒤프레는 오롯이 그만을 탓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는 뒤프레가 엘렌에게서 그의 과거를 듣기 전이다. 그러나 꼭 직접 당사자에게 들어야만 알겠는가. 프랑켄슈타인이 길을 지나갈 때, 멀리서 그를 발견한 이들의 수군거림은 프랑켄슈타인이 그들 바로 앞을 지나갈 때도 그치지 않았다. 마녀의 자식. 저주받은 추방자. 아이들을 뒤로 숨기는 이들의 악의는 뒤프레의 상상을 초월했다. ‘가까이하지 마라. 저 자와 함께 있다간 너도 저주받는다.’ 윽박 질린 아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했다. 불탄 성의 매캐한 재 냄새가 난다고 코를 쥐는 아이가 있었다. 검은 코트에 팔이 스친 아이는 마녀의 병이 옮았다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대다수 어른은 아이의 팔을 당겨 집안으로 끌고 가느라 바빴다. 그들의 눈을 과연 코웃음 치는 것으로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친구여. 멸시를 개의치 않는 프랑켄슈타인 대신 뒤프레는 괴로워했다. 프랑켄슈타인의 동료라며 저에게도 쏟아지는 적개심은 아무렇지 않다. 뒤프레의 고통은 프랑켄슈타인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점에서 찾아왔다. 익숙한가, 내 벗이여.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이 ‘홀로 유학 생활을 감당하기엔’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나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익숙하다면, 어린 프랑켄슈타인은 대체 얼마나 큰 고통을 짊어졌단 말인가.

꿈속에서 뒤프레는 어린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다시 만났다. 고독한 프랑켄슈타인의 유년을 함께할 기회였다. 뒤프레는 언제고 프랑켄슈타인과 조금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므로 꿈속에서 얻은 기회에 기뻐했다. 꿈은 허황하며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꿈속에서 뒤프레가 어린 빅터를 돌보고 보살핀다고 하여 이미 어른이 된 프랑켄슈타인의 과거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뒤프레의 만족감뿐이지만,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을 돕는 자신에 도취하지 않았다. 뒤프레는 그저 꿈속의 프랑켄슈타인만은 고통받지 않길 바랐고, 그와 함께 돌을 맞을 각오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곁에 있겠다고 작정했다. 꿈속의 그라도 연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뒤프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꿈속의 빅터에겐 프랑켄슈타인이 겪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 각오는 실천 없이 끝났다만 이는 더욱 반겨 마땅한 일이었다. 함께 비를 맞고 돌을 맞겠다고 했지만 빅터에겐 튼튼한 우산이 있었고 아무도 그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없으니 뒤프레는 안도했다. 또한, 기뻐했다. 그 탓에 빅터가 뒤프레의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저 밖에 그의 프랑켄슈타인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뒤프레는 빅터가 저를 배신한 게 아니란 걸 안다. 빅터의 이상에 동참하기엔 클레르발의 지식은 모자랐고, 편중되었으며―그는 문학을 전공했다. 맙소사, 문학이라니!―무엇보다 클레르발은 신을 동경하고 신이 창조한 만물, 자연을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신에게 도전하여 인간의 한계를 넓히는 연구에 동반자를 구한다면 뒤프레의 기준으로도 가장 먼저 제외할 조건을 두루 갖춘 자가 클레르발이었다. 게다가 진정 클레르발이었으면 빅터의 연구를 기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실험의 비윤리적 요소를 폭로하고 고발하진 않겠지만 비밀을 지키는 선에서 협조를 마치고 침묵할 테지. 클레르발이었으면 빅터의 비밀에 서운함은 느꼈을지라도 감추고픈 마음을 십분 이해했을 것이다. 클레르발이었으면 빅터의 비밀을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뒤프레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애당초 뒤프레가 아니었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생명 창조 실험의 공동 연구자 앙리 뒤프레가 아니면 그 누가, 감히 누가 짐작이라도 하겠냔 말이다. 저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본질을 더 잘 아는 자 나와보라. 그의 이상을 이해하는 자 말해보라! 앙리 클레르발도 앙리 뒤프레를 이기지 못한다. 그는 진정한 벗일진 몰라도 프랑켄슈타인과 동행하는 건, 같은 이상을 공유하는 건 오롯이 그, 뒤프레만이 가능하다. 프랑켄슈타인의 앙리는 오로지 그뿐이다. 빅터의 앙리는 오롯이 자신뿐이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클레르발이 겪는 슬픔 따위 뒤프레가 신경 쓸 게 아니다―뒤프레는 자신이 내린 결론에 이 이상 더 역겨워질 자신을 잃었다. 꿈속의 자신을 질투하는 건 흔하다만 그를 깎아내리고 모욕하여 현실의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는다니. 꼴사나워도 정도가 있지, 정말로 기분이 나아졌다는 걸 알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꾼 꿈속에서 앙리는 빅터를 보며 웃고 있었다. 빅터는 울적했으나 이를 감추려 했다. 앙리는 그의 우울함이 불행히도 일찍 명을 달리한 그의 막내아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앙리는 빅터와 함께 잉골슈타트에 있었고,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다만 편지로 그 애의 참혹한 죽음의 정황을 전해 받았다. 빅터는 그 아이를 살해한 자로 고발당한 소녀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소식을 전한 엘리자베스 역시 그녀의 결백을 믿었지만 안타깝게도 누명을 쓴 소녀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사건은 갈무리되었다. 이 일은 빅터와 엘리자베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빅터는 오랫동안 근심했고, 이윽고 여행을 떠나 기분을 전환하기로 했다. 그 여행의 동반자로 빅터는 앙리를 불렀다. 네덜란드를 지나 잉글랜드에서 체류하다 프랑스를 거쳐 돌아오는 계획에 걸리는 시간은 2년이었다.

그들은 지금 배를 타고 테이 강 기슭을 따라 퍼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간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는지 빅터의 얼굴은 처음보다 단정해졌고, 이는 앙리도 마찬가지였으나 빅터가 이를 눈치챘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함께 떠나자 제의한 건 빅터였으나 빅터는 여행에 그리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고, 신이 건조한 위대한 자연 요새도, 인간의 힘으로 이룩한 수백 년 전 건축물도 그의 시선을 잡아끌거나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앙리는 빅터가 단순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 하여 빅터에게 직접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소중한 가족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나친 관심은 그에게 독이 되리라. 앙리는 그를 배려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자신의 호기심은 뒤로 미뤘다. 그가 창조해낸 피조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같은, 클레르발로선 절대 알지도, 묻지도 못할 질문은 뒤프레 안에만 담아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빅터가 갑작스레 통보했다.

“혼자 있게 해줘.

“뭐?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앙리. 잠시만 우리 헤어져 있자. 금방 돌아올게.

“빅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앙리는 빅터를 말리지 못했다. 빅터는 끝끝내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고 둘러대며 진실을 숨겼고, 앙리는 그의 고집을 꺾기 위해 노력했으나 빅터를 혼자 두지 않겠다던 저의 의지만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빅터는 생각이 정리되는 즉시 돌아올 것이며 허튼 생각 하는 게 절대 아니니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앙리를 오랫동안 설득해야 했다. 빅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어도 앙리는 헤어지기 전 붙잡은 그의 손을 쉽게 놔주지 못했다. 빅터도 앙리의 마음을 이해하여 먼저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빨리 돌아와. 네가 없으면 불안하니까.

진심이었다. 빅터가 제 마음을 알까 모르겠다만 앙리는 그가 되도록 제 곁에 머무르길 바랐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곳에 있어야 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저에게 도움을 청하고 저 역시 그를 돕기 위해 달려갈 수 있었다. 빅터는 그 말에 다만 웃었으나 잠을 설쳤는지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럼 갈게. 앙리.

앙리가 손을 놔주자 빅터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짊어 멨다. 앙리는 그를 적어도 웃으면서 배웅해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잘 가. 빅터.

며칠 후 뒤프레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용수철 튕기듯 침대에서 벗어나 제 목을 붙잡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이리저리 살핀 그의 목은 흉 하나 없이 깨끗했으나 뒤프레는 이를 믿지 못하겠는지 몇 번이고 제 목을 살피며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무 흉 없이 곧게 뻗은 흰 목에 검은 멍 자국이 생기길 기대하는지, 뒤프레는 실로 오랜만에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심하진 않았다. 이제 더는 꿈을 꾸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에, 뒤프레에겐 대신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영별의 인사. 이후 뒤프레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클레르발이 죽은 밤이었다.

4

이는 앙리 ――――이 꾼 기묘한 ―의 기록이다.

창이 없는 지하였기에 뒤프레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지상에 있었을 적 보았던 피처럼 붉은 저녁놀은 스러졌는지, 막연히 추측만 가능한 어둠 속에서 뒤프레의 눈을 띄운 건 갈증이었다. 그는 지난밤부터 단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다. 갈라진 목은 고통스러웠으나 아픔이 있고 갈망이 있으니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니 뒤프레는 설령 자신이 피를 토하고 목소리를 잃는다 할지라도 물 한 잔 얻지 못할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는 실로 담담히 제 처우를 받아들였다. 무고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죄인에겐 한 줌 숨조차 사치였다. 하얀 커튼을 밀치고 들어온 햇빛과 눈인사를 나누는 아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아직도 잠에 취했느냐며, 노크와 함께 문을 넘어와 저를 가볍게 질타하는 그에게 미소지었던 자신은 이 어둠 속에 매장될 것이다. 그들이 죽인 생명처럼. 다만 그의 죽음은 애도 받지 못하고 장송곡은 연주되지 않으며 들짐승이 파헤치든 말든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빈 땅에 매장되리라. 죽어서도 지옥에서 안식 없이 고통받으리라: 뒤프레가 치를 죗값이었다.

뒤프레는 프랑켄슈타인이 장의사를 죽인 밤이 걷히기도 전에 경찰서장을 찾아가 자수했다. 잠옷을 입고 수면 모자를 쓴 서장은 오밤중의 방문자를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맞이했으나 곧 피투성이인 뒤프레를 확인하고 그날의 수면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는 강단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뒤로 불운한 그의 가족이 뒤프레와 뒤프레가 가져온 살인의 증좌를 보고 까무러치는 순간에도 졸도하지 않고 견뎌냈다. 뒤프레가 자신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 부패하기 시작한 월터의 머리였다.

뒤프레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튿날 재판정에 선 그는 살해당한 이의 가족과 친우들 앞에서 다시 한번 자신이 피해자를 살해한 과정을 진술했다. 유가족은 오열했으며 대중은 분노했고,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판사는 감형 없이 선고했다. 판사가 나무망치를 세 번 두드리고 결과가 확정됐다. 두 건의 참혹한 살인의 대가는 참수형이었다.

판사는 뒤프레가 그의 목을 단두대에 걸칠 것을 명했다. 뒤프레는 죽어 마땅한 사형수로서 으레 그들이 그러하듯 판사를 원망하진 않았다. 뒤프레는 저에게 죽음을 선고한 이가 판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운명이었다. 그들이 줄곧 반항하고 불응한 운명이 그에게 단두대를 가리켰다. 운명, 그는 뒤프레가 프랑켄슈타인과 처음 만난 순간 뒤프레의 생을 수확할 날짜를 정해 낫을 목 아래로 들이밀었다. 원망해도 좋으리라. 저주해도 마땅하리라. 그러나 뒤프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운명에 순종했다.

그 밤, 장의사가 내민 자루에서 죽은 월터의 머리를 목격한 뒤프레는 운명을, 신을 저주했다. ‘신이시여, 우리가 이토록 오만하였습니까. 우리의 바람이 이토록 단죄받아 마땅한 중죄였습니까.’ 그러나 그때가 되어 뒤프레는 비로소 의식했다. 운명이 제게 안배한 역할을, 신의 뜻을. 장의사가 코와 눈, 입에서 피를 흘리며 움직이지 않고 프랑켄슈타인이 손에서 돌을 떨어뜨렸을 때, 뒤프레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악문 입술이 소리 없이 기도문을 달싹였다.

―빅터를 데리고 나가.

하늘에 계신 창조주를 내가 믿사오며, 인간을 사랑하사 시련에는 반드시 그 크기에 상응하는 깨달음을 주신다는 것을 내가 믿사오니.

―모든 건 내가 한 짓이야.

한 치 앞을 모르고 탑을 짓는 우매한 인간을 꾸짖으사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순종케 하시나이다.

―자네는 모르는 거야.

프랑켄슈타인이 판사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침묵할 때 뒤프레는 그를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되려 그는 만족했다. 걷잡지 못할 만큼 환희했다! 이로써 그는 완벽하게 프랑켄슈타인의 꿈을, 이상을,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저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뒤프레가 그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프랑켄슈타인은 구원받았다. 뒤프레의 피로 씻은 그는 이제 눈처럼 희고 어린 양처럼 순결하리니. ‘신께서 하늘 위에서 만물의 창조를 이루신 것과 같이 그의 창조가 이 땅 위에서 이뤄질 것을 내가 믿사옵나이다.’ 뒤프레의 기도가 끝났다. 프랑켄슈타인의 항변이 그의 외숙에 의해 무마되고 사형집행일이 공표되었을 때였다.

뒤프레는 미소지으려 했다. 쇠창살을 붙잡은 프랑켄슈타인의 손가락 마디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뒤프레는 참으로 모진 부탁을 입에 담았다. 울 일이 아니니 웃으며 저를 보내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이 차마 들어주지 못할 부탁임을 그 역시 모르지 않으나 알면서도 그리했으니 그는 참으로 모진 사람이었다. 다만 저는 이제 바라던 대로 당신의 꿈속에 함께 살아갈 것이니 이는 저의 죽음이 아니고 우리의 헤어짐도 아니리다. 비록 저의 눈앞에 당신이 말한 미래가 펼쳐지지 않는다고 해도 저희는 함께 꿈꾸었고 그 꿈 저의 눈 밖에서나마 이뤄질지니. 짧은 생이었으나 뒤프레는 진실로 행복했다. 프랑켄슈타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은 그토록 가혹했다. 뒤프레는 그토록 잔인했다. 그토록 잔인하려면, 그리도 모질려면 끝까지 모질 것이지, 뒤프레는 미소지으려 했다. 도저히 미소지을 수가 없었다. 뒤프레는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지 않으려 했으나 가슴이 북받쳤다. 뒤프레는, 주저앉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계단에서 주저앉았다.

괜찮다며 자신을 달래려 해도 쉽지 않은 건 그렇지 않다는 걸 저 역시 알기 때문이다. 아직 올라야 할 계단이 이렇게 많은데 가쁘게 차오른 숨에 눈앞이 핑 돌았다. 주께서도 독이 든 잔을 거둬주십사 기도했는데 한낱 인간에 불과한 제가 어찌 감히 죽음을 반기며 다가온 끝을 의연히 받들까. 뒤프레는 고개를 들어 제 아래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살인자에게 심판을! 저 잔인한 살인자를 죽여 목을 내거소서! 저를 증오하는 그들의 외침 정당한데 뒤프레의 몸은 떨림을 멈추지 않고 과연 이 끝이 제가 바란 끝인가 돌연 의심이 드는 순간. 뒤프레는 그 가운데 서 있는 프랑켄슈타인과 눈이 마주쳤다. 뒤프레가 저를 본 걸 안 프랑켄슈타인은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앙리! 앙리 뒤프레!’ 뒤프레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눈을 깜박였다. 꿈에서 눈을 떴을 때 그리했듯, 꿈에서 깨어날 때 그러했듯, 네 번의 깜박임 후에 뒤프레는 그를 알아보았으며,

, 빅터.

나의 빅터. 나의 빅터 프랑켄슈타인.

뒤프레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뒤프레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계단도, 자신의 끝도.

클레르발의 죽음은 뒤프레에게도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그가 죽은 밤, 뒤프레는 본능적으로 다음이 제 차례임을 깨달았다. 클레르발이 죽었으니 남은 건 뒤프레의 죽음뿐. , 클레르발. 꿈속의 벗이여. 뒤프레는 그가 살해당한 밤을 떠올렸다. 열어둔 창문으로 뺨에 닿는 밤바람이 참 상쾌했다. 빅터에게 편지를 쓰다 말고 펜을 내려놓은 그는 문득 낮에 거닌 해변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신발을 한 손에 모아쥐고 그의 맨발에 하얀 모래톱이 파고든다. 그의 머리 위론 하얀 달이, 시야 끝엔 파도가 낮게 출렁였다.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바람이 미는 대로 나아가면 흰 물결이 그의 발을 부드러이 쓸어내리고 도망가길 반복했다. 계획하지 않은 밤 산책이었으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밤이 좋겠노라 노래할 만큼 클레르발의 밤 산책은 현실과 유리되었고, 그는 자신의 뒤로 다가온 살인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래가 소리를 먹어 감춘 탓이었다.

살인자는 클레르발의 바로 등 뒤에 섰다. 클레르발은 그제야 그림자가 하나 더 늘어난 걸 눈치채고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의아했으나 살인자를 본 그의 눈동자는 황망히 흔들렸다. 비명은 없었다. 살인자가 클레르발의 목 위로 손을 올린 순간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다.

뒤프레는 이미 유언을 남겼기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느냐는 집행인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생 이 일을 가업으로 해온 집행인에게 뒤프레처럼 말을 남기지 않는 사형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프레의 머리를 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줏빛 구름에 안긴 붉은 해가 타들어 갔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재 날리는 밤이 걷히기 전 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뒤프레는 눈을 들어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보고는, 모든 생에 견주어 가장 힘겹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안돼애애애애애애애!

네 번의 깜박임, 점멸하는 세상, 육체에서 끊어진 의식은 어디로 가는가, 두뇌에 잠드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가. 시퍼렇게 벼린 처형대의 칼날이 목 뒤에 내려앉고, 뒤프레는 붉어진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리고 마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으나, 세상은 고장 난 전등처럼 저절로 불을 켜고 끄길 반복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절규가 이명처럼 귓속에서 맴돌다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꽃봉오리라면 똑, 소리가 났을 것이고, 풀줄기라면 서걱, 소리와 함께 잘려나갔을 테지만, 둘 다 아닌 뒤프레의 목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양동이에 떨어졌다. 완전한 정적. 온전한 어둠. 죽음은 암막에 둘러싸여 요람에 눕는 것과 같구나, 이토록 아늑하다니. 뒤프레는 눈을 감았다. 영원히.

눈을 떴다.

클레르발은 인간이 창조한 세상을,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이들의 이야기를 익애했다. 문학을 공경하고 흠모하는 그는 신이 주신 재능으로 피워낸 인간의 공상을 예찬했다. 그래서인가 클레르발은 근래만큼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밤이 걷히고 아침이 개면 그는 가장 먼저 책상으로 달려갔다. 꿈은 워낙 안개와 같아서 적어두지 않으면 흔적 없이 흐려진다마는, 클레르발이 지난밤 제가 꾼 꿈을 기록하는 건 꿈을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꿈을 잊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다.

잊을 수 있나, 그토록 선명한 풍경을. 선명한 감정을, 선명한 아픔을. 처음 꿈을 꾸었을 땐 이로 인해 무척 괴로웠다. 도저히 잊히지 않는 꿈은 저를 놔주지도 않았고 원하지 않은 생각을 계속하는 건 분명히 고통이었다. 어디론가 머리통 밖으로 이 꿈들을 내몰면 좋으련만, 들어온 곳을 모르니 그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지도 못하던 그때, 클레르발은 꿈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글자를 조합해 단어를 만들고, 단어를 엮어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매듭지어 펜촉의 잉크 끝에 매달았다. 꿈을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클레르발은 도리어 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수 장의 종이에 내보낸 지난한 꿈이 손가락 사이에 걸려 사그락댔다.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클레르발이 느낀 희열엔 무엇도 이기지 못했다. 고통이 뒤집혀 낙이 된 순간. 클레르발은 더는 밤을 질색하지 않았다. 밤은 영감의 광이었다. 클레르발은 전지적 관찰자가 되어 자신의 공상을 관극했다. 눈을 뜨면 간밤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 풀어놓길 거듭했다.

지금은 꿈을 꾸는 아침마다 펜을 휘갈겨 종이를 한 바닥 채우는 데 썩 뿌듯함을 느끼는 클레르발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특별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자신의 글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클레르발은 시계도 보지 않고 있다가 그날 약속 시각에 제대로 늦고야 말았다.

“또 그 꿈이로군.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빅터가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클레르발은 멋쩍게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냉큼 앉았다. 그러고는 빅터의 손을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다분히 장난스러운 행동이었다.

“미안.

빅터는 과히 좋다고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딱딱히 굳은 입매를 풀지 않았지만 사과하는 클레르발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클레르발은, 자신이 잘못한 상황에서 눈치 없이 여유로운 사람이 결코 아니나, 그날 그의 기분은 평소처럼 빅터의 심기를 살피어 풀어주기엔 조금 넘칠 만큼 들떠 있었다. 클레르발이 그러니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자신의 기분을 맞춰줬는지 아는 빅터는 오래 뚱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삐딱하게 꼰 다리를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해보라며 손을 돌리는 빅터에 클레르발은 눈을 반짝였다. 빅터가 클레르발의 주 관심사인 문학에 흥미가 없는 건 익히 안다만, 유독 꿈에 관해선 더욱 질색하며 듣고 싶지 않다는 티를 숨기지 않아 내심 서운했던 클레르발이었다. 다만 클레르발은 처음 자신이 꾼 꿈을 듣고 새하얗게 질리던 빅터의 얼굴을 기억했고, 그의 반응에, 빅터에겐 확실히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날 이후 꿈에 관해선 입을 다물었다. 수 해 전의 일이었다.

빅터는 클레르발이 꿈을 꾸고 저를 만나러 올 때마다 귀신같이 눈치챘다. 제대로 감췄다고 생각한 클레르발은 대체 어디서 그렇게 티가 나는지 궁금했으나 빅터는 클레르발이 꿈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불만스러워했기에 묻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클레르발은 빅터의 허락을 받은 지금도 꿈의 내용을 말하는 건 최소한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로써 꿈이 완전히 끝났다네.

‘그렇군.’ 빅터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가 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일 줄 몰랐던 클레르발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다물어버린 그를 보며 반달 모양의 눈웃음을 지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빅터는 다시 한숨을 쉬고는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뭐라 대꾸하길 원하나.

“질문해. 궁금한 거 있잖아.

“내 속을 네가 어떻게 알고.

“다 아는 수가 있지. 얼른 물어봐. 대답해줄 때.

빅터에겐 빙글거리는 클레르발을 이길 재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줄곧, 빅터의 고집은 쇠심줄처럼 질기기로 유명했지만 클레르발이 굽히지 않기로 마음먹은 뜻엔 어떤 수를 써도 이기지 못했다. 과연 클레르발이 빅터보다 더한 고집쟁이였기에 그랬을까. 어릴 때부터 줄곧, 빅터는 제 마음 한구석에 울음이 싸인 보가 있는 걸 알았다. 클레르발을 볼 때마다 보는 요동쳤고, 빅터는 강보를 끌어안고 클레르발 앞에서 터지지 않도록 그를 달래야 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해내는 감정 정제 과정의 일부지만 어릴 땐 격한 감정과 함께 있으면 갈무리하기가 힘들었다. 둘 중 하나를 놓아야 한다면 고집을 떨어뜨리리라. 빅터는 강보를 지켰고, 클레르발에게 졌으며, 그런 일이 무수히 반복된 지금은 조금 다른 이유로 클레르발에게 이기기 힘들었다. 빅터가 강보 속에 담긴 울음을 클레르발에게 털어놓을 날이 오지 않으리란 사실만은 분명했다.

빅터는 팔을 괴었다. 오래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턱없이 짧은 질문이었다.

“어땠나.

“무엇이?

“마지막이.

클레르발은 흐음 소리를 내며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미소지었다.

“아름다웠네, 오로라가.

“아름다웠다, .

“정말로 눈부셨어. 빅터, 장담하건대 네가 지금까지 본 그 무엇도 그것에 비견되진 못할 거야.

“안 믿기는데.

오로라를 회상하던 클레르발은 눈을 떠 빅터를 흘겨보았다. 빅터는 클레르발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생각을 읽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빅터 네가 뭘 알겠니.’ ‘과학자들은 시와 노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더니 너도 그럴 줄이야.’ ‘낭만이 없다니까, 정말. 어릴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가 읽지 말라 한 아그리파의 저작을 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하마터면 나도 빅터처럼 될 뻔했어.

이만하면 클레르발의 툴툴거림까지 충분히 들어줬다고 생각한 빅터가 가장 바깥쪽의 포크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빅터에게 오로라의 찬란함을 설득하길 포기한 클레르발의 맺는말에 빅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신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어 더럽히지 못할 곳에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을 숨겨두셨더군. 빅터, 이해하겠어?

빅터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오래도록 침묵하며 앙리를 응시했다. 눈이 아플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은 그는 침묵의 끝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응.

대답은 짧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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