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자작 캐릭터 x 애인 캐릭터 첫 만남 서사
봄이었다. 도쿄에서 맞는 첫 봄.
토오노 시즈카는 들뜰 수밖에 없었다. 4월에 시작되는 신학기는 시즈카가 도쿄에서 내딛는 첫 발걸음이자, 부단히도 노력해 온 지난 3년의 결실이었다. 테니스의 왕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도쿄 내 고등학교 중 최고의 테니스부를 목표삼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3년.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눈밭에서 뛰노는 강아지처럼 뒹굴었다.
여차여차 돈을 모아 부모님이 잘 아시는 지인께 소개받은, 도쿄 변두리의 한적한 거리 속 그림처럼 묻혀있는 하숙집에 발을 들였다. 작게 난 창문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봄꽃들이 시즈카의 마음을 더욱 간질였다. 도쿄, 도쿄로구나! 시즈카는 펼쳐놓은 이불 속에서 한참을 깔깔댔다. 이불에 스며있는, 텁텁한 옷장 냄새마저 자신을 반기는 듯하였다. 일주일 뒤엔 꿈에도 그리던 고등학교 입학식이다. 그렇게 생각하곤 시즈카는 몸을 일으켰다. 일주일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하자! 짐도 풀고, 주변 지리도 익히고, 학교 가는 길도… 아, 맞다!
시즈카는 눈을 번쩍 떴다. 학교, 학교부터 가 보자! 그동안 몇 번 가보긴 했지만 이제부터 집이 될 하숙집에서 학교로 가본 적은 없었다. 물론 지도상의 길을 머릿속에 익히고 또 익혔지만 직접 가 보는 것과는 천차만별일 터였다. 시즈카는 곧장 튀어나가 문을 열었다. 짐은 나중에 풀면 되지! 부랴부랴 서두르는 발걸음이 위험하다 싶더니만, 결국 철퍼덕 소리와 함께 마룻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푸른 머리를 휘날리며 집을 나서는 시즈카였다.
무사히 도착한 학교는 다행히도 교문을 개방해두었다. 아직은 봄 방학기간이라 한산한 교정이 팔을 벌려 시즈카를 반겼다. 호들갑스레 불어온 바람이 시즈카의 등을 떠밀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시즈카는 교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정면엔 넓은 운동장과 햇빛에 비쳐 유독 빛나는 본관 건물. 좌측엔 본관만큼이나 큰 규모를 자랑하는 체육관. 우측엔 색이 약간 바랜(그러나 이마저도 시즈카에겐 멋스럽게 느껴졌다.) 별관과 큰 등나무가 하나. 곳곳에는 봄을 알리듯 만개한 벚나무가 살랑거렸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왠지 모를 따듯함과 포근함을 느끼면서, 시즈카는 벚나무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자세히 보니 벚꽃 말고도 다른 봄꽃들도 속속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아, 여간 조경에 신경 쓰는 학교가 아닌 듯했다. 색색의 조화로운 꽃잎들이 마치 누군가가 색종이를 잘라 흩뿌려 놓은 것같이 아담하고 조촐했다. 시즈카는 그와 닮은 수줍은 미소를 지을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걷다 보니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 또한 그 나이대임을 아주 잘 간증할 수 있는 산물이리라. 실실대며 낭랑한 새소리에 몸을 맡기고 왈츠를 추듯 한 걸음, 한 걸음. 그러다 시즈카는 어느 벚나무 아래에서 우뚝 멈춰 섰다.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이 특히나 쌀쌀한 탓도 아니었고, 걷는 걸음이 힘들어져서도 아니었다. 문득 사람 없는 교정을 활보하는 것이 양심에 찔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몇 걸음 앞에, 느릿하게 팔을 흔드는 하얀 벚나무 아래에, 그보다 더 하이얀 누군가가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즈카는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엔, 영락없이 요정인 줄로만 알았다. 보기만 해도 포근하게 다가오는 새하얀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검은 리본이 포인트로 묶여 살랑, 흔들렸다. 흐드러진 벚나무에서 떨어트리는 꽃잎들을 받아주듯이, 조심스레 하나를 골라잡은 모양새가 퍽 신선 같았다. 시즈카는 눈을 끔벅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요정이나 신을 마주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지? 인사? 그래, 인사를 하는 거야!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즈카는 이 하얀 꽃의 정령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안, 안녕하신가!"
아뿔싸, 이렇게까지 우렁차게 출사표를 던질 생각은 없었다. 제풀에 놀라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당당한 게 좋은 거지! 어디 가서 쫄지 말라고 하던 아버지의 당부를 기억해 내곤, 시즈카는 부러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내보였다. 하지만 너무나 당당한 인사였던지, 상대는 꽤나 놀라서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놀라서 동그라진 눈이 예뻤다. 토끼 같다. 마음대로 그렇게 상상해버리고는 흠흠, 하며 덧붙였다.
"놀랐다면 미안하지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당신은, …음, 요정인가? 아님 정령?"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아마 비웃을 지도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 시즈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상대가 시즈카의 말을 듣고 살풋, 웃었을 때, 시즈카는 그야말로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마침내 상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상냥했으며 차분했다. 나중에 시즈카는 이 장면을 '늦잠 자다가 햇빛 때문에 느지막이 일어난 구름' 같은 장면이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봐주셨다면 감사하지만, 사람이에요."
말도 안 돼! 시즈카는 약하게 탄성을 질렀다. 이런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어! 시즈카는 쪼르르 달려가 상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잡, 잡히잖아? 이럴 수가! 한껏 커진 눈이 상대를 응시했다.
"틀림없이 요정인 줄 알았는데! 그, 그럼, 정체가 뭐지?"
"들어와 계신 곳에 재학 중인 학생이에요."
"그, 그 말은, 서, 서, 서… 선배가 될 사람이라는…"
선배님한테 무슨 무례를 저지르고 만 것인가! 시즈카는 곧장 자신의 뺨 한 대를 갈겼다. 자신만의 망상에 잠겨 선배님을 오해하고 말다니! 이게 정녕 테니스왕의 자질인가? 창피해서인지, 한 대를 맞아서 그런 건지, 빨갛게 물들어 가는 볼로 시즈카는 소리쳤다.
"무, 무례를 저질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 이 죄는 두고두고 사죄를…"
"괜찮아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끄흑, 시즈카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천사 같은 분에게 나는 무슨 짓을... 아직 입학조차 하지 않았는데 선배님께 밉보이다니, 망했구나. 당당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안절부절못하는 시즈카가 꽤나 웃겼던지, 상대는 다시금 포근한 웃음을 허공에 담아 보냈다.
"신입생이신가 봐요.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 이름은 시즈카! 지만 다들 그냥 시짱, 이라고 자주 부른다! 서, 서, 선배님도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편히! 불러주면! 고맙겠다! 그으, 선배님 성함은…"
"유키에요. 시즈카 씨도 부르고 싶은 대로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와 함께 소르르 피어오르는 미소는 정말이지 다시 봐도 꽃의 정령을 방불케했다. 누가 이 사람을 인간계에 실수로 떨어트린 건지. 때맞춰 부는 바람이 시즈카와 유키의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둘 다 헤집어진 머리칼을 급히 정돈하다가, 결국은 참지 못한 웃음을 동시에 터트렸다. 시원스레 웃고 나니 괜스레 하늘이 더 맑아 보였다.
눈부신 교정 안의 한가한 만남. 우수수 날아가는 꽃잎들이 축복하는 도쿄에서의 첫걸음. 시즈카는 하얀 벚나무 속에서 그 첫걸음을 떼었다. 심히 포근하고 황홀한 첫걸음을. 문득 시즈카 씨, 하는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유난히 하얀 벚꽃들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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