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즈

I'll wait

노아재인 밴드 au

제목은 동명의 노래에서 따왔습니다.

kygo, sasha sloan - I'll wait



[Don’t your parents know that you live like that in Korea?]

“Shut the fuck up idiot, that’s none of my business.”

[Huh? What a bastard.]

“Yeah, the worst bastard has to go to practice.” 

가벼운 비아냥을 끝으로 통화를 끝낸 노아의 낯은 그리 개운하지 못했다. 통화를 하느라 몇 모금 빨지도 못하고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툭 떨궈 발로 비벼 끈다. 담뱃갑 뚜껑 열어젖히며 손목시계를 흘긋 봤다. 한 대 더 피울 시간이 되려나. 툭툭, 새 담배를 밀어올리던 손이 머뭇한다. 그냥 연습 끝나고 나와서 피우는 게 나을지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고,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은 노아가 몸을 돌려 골목을 벗어난다. 한국으로 온 지 꼬박 8년, 아직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어릴 적 친구는 드물었다. 그런데 꼭 잊을라치면 이런 소리를 지껄여대니 아무렇지 않다가도 짜증이 왈칵왈칵 치미는 것이다. 괜히 전화해서 짜증 나게 하고 있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딱 다섯 칸 내려가면 그때부터 지하 특유의 퀴퀴한 내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처음엔 곰팡내라 불쾌히 여기던 것도 몇 3년쯤 매일같이 맡다 보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지하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한 악기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완전한 음악의 형태를 하고 있진 않은, 악기 각각의 소리. 노아가 아직도 빅맥이라는 밴드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은 뭐 대단한 꿈이나 청사진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드럼 스틱을 쥐고 곡에 몰입하는 순간만큼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부모님에 대한 나름의 반항으로 미국에서 한국까지 왔으나 뚜렷한 목표라곤 없이 무작정 도망쳐온 곳에서 삶이 달라져 봐야 얼마나 드라마틱 하게 달라졌겠는가. 그저 그런 일상의 굴곡 속에서 답답함만이 쌓여가는 가운데 스트레스라도 해소해 보겠답시고 시작한 게 드럼이었을 뿐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하다 보니 조금 재미가 붙었다. 보다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어려운 것을 연습하다 보니 눈에 띄기라도 한 건지 종종 드러머로 불려가 공연을 하게 됐다. 그러다 몇 개의 인디밴드를 거쳐 지금의 팀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연습실의 가장 바깥 문을 지나 안쪽의 방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노아가 마주치는 낯선 얼굴에게 꾸벅 말없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얼굴을 보는 건 오늘로 네 번째, 합을 맞춰본 건 세 번째인 객원 보컬이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활동하는 이름이 Jane이라고 했던가. 실제 이름도 재인이라고 했다. 이름만 들었을 때엔 어쩐 일로 여자 보컬을 객원으로 초빙했나 싶었다. 그야, 밴드엔 시커먼 남자들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노아의 편협한 생각을 비웃듯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자였다. 저보다 마르고, 어딘지 피로하고 예민해 보이는 사람. 어련히 알아서 잘 데려왔을 테니 실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그리고 얇은 입술 사이로 노래의 첫 소절이 세상을 향해 흘러나왔을 때, 노아는 막연하게 직감했다. 이 목소리를 꽤나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I ‘ll wait



품에서 작게 뒤척이는 움직임이 얕은 수면에 빠진 의식을 건져 올린다. 조용히 눈꺼풀을 밀어 뜬다. 불투명한 시트지를 붙인 창밖에서 들이친 희미한 불빛이 천장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움직임 없이 눈만 굴려 협탁에 놓인 심플한 전자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새벽 네 시에 가까운 시간. 재인과 한바탕 구르고 같이 샤워를 한 다음 누운 게 세 시쯤이었으니 잠을 자고 있었다기보다 잠에 들까 말까 하던 참이었다고 봐야 할 듯했다. 느리고 고른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는 재인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는다. 지쳐 깊게 잠에 든 얼굴이 곤했다. 

노아는 이 얼굴의 다른 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웃을 때, 화를 낼 때, 기분이 좋거나 나쁠 때, 흥분해서 발갛게 달아올랐을 때, 더한 자극을 조를 때, 절정에 다다랐을 때, …마치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을 때. 아니, 천재인은 정노아를 사랑하고 있다. 노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재인 또한 노아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아슬아슬 유지되고 있는 이 기묘하고 비틀린 관계는 대체 뭐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재인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을 조심스레 빼내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벗어난다. 

재인의 기운을 쪽 빼 지쳐 잠들게 했으니 쉽게 깨어나진 않으리란 걸 앎에도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책을 비롯해 잡다한 것이 꽂혀있는 책꽂이의 가장 아래 칸에서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 침대 옆으로 돌아온다. 작은 불 하나 켜지 않고 익숙한 손길로 구급상자를 열고 연고와 밴드를 꺼내들었다. 이미 어둠에 익은 눈은 바깥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약간의 불빛만으로도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재인의 얼굴에 생긴 상처를 알아보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혹여라도 깨우게 될까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놓는 손길이 끝까지 조심스러웠다. 

“……”

구급상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침대로 돌아와 재인의 몸을 다시 끌어안았을 즈음에야 낮은 한숨이 흘렀다. 재인이 제게 찾아와 며칠만 재워달라고 하는 것도 이제 일상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만큼 익숙하기 그지없는 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재인은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기 전이면 꼭 제게로 왔고, 그런 날이면 자연스레 몸을 섞었다. 좁은 슈퍼싱글의 스프링이 삐걱이고, 달뜬 숨이 귓가에서 수없이 쏟아지고, 촉촉하게 땀 배어난 살갗이 맞닿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팔다리가 매달리듯 저를 감아온다. 더러 짧게 깎은 손톱이 등을 긁어내릴 때도 있었다. 

재인을 몇 번이고 절정에 몰아붙이며 그를 향해 비참한 제 사랑과 원망을 쏟아낸다. 사실 재인과 몸을 섞을 때면 노아는 울고 싶었다. 그의 애인이라는 허울 좋은 꼬리표를 단 쓰레기들처럼 재인을 상처 입히고 싶었다. 왜 제게 이렇게나 잔인하게 구는 건지 따져 물어야 옳았다. 그러나 노아는 단 한 번도 재인에게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없었다. 그를 너무나 사랑하고 갈구하게 된 죄로 감히 얻고자 하는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이 기이한 관계마저 끊어져 버릴까 봐. 재인을 안으며 흥분으로 덥혀진 심장이 갈빗대 안에서 크게 뛸 적마다 피가 아닌 독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정노아에게 천재인은 황홀하고 달콤하며 사랑스러운 동시에 지독한 독인 셈이다. 

수십, 수백 번 저 스스로를 다그치고 멍청하다 욕하고 깎아내려도 저는 언제까지고 재인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이었다. 멍들고 문드러진 마음으로 재인을 사랑하는 만큼, 딱 그것과 똑같은 크기로 속상했다. 재인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알면서도 사랑을 모른 척 외면해서? 아니, 제 마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은 모르고 있다고 해도 괜찮았고, 우습게 보고 있어도 괜찮았다. 노아는 다만 재인이 그 스스로를 좀 더 아끼길 바랐다. 그저 그런 놈이라든지 더러는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새끼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으면 했다. 제게 다시 찾아오는 일 따위 없어도 좋으니 그를 진심으로 귀히 여기고 아껴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났으면 했다. 

사람의 생에 이렇게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사랑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껏 지나쳐온 사랑은 그저 어린애들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하게 될 정도로 모질고 지독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이라면, 이 감정은 재앙으로 분류되어야만 했다. 한 존재의 마음을 이렇게나 무너뜨리고 죽이는 것이 어떻게 재앙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노아는 재인을 향한 이 사랑에 기꺼이 익사하고 싶었다. 내가 형을 이렇게 사랑해. 그 증명을 해 보이고 싶어서. 

하여 노아는 재인이 제게 기껏 시간을 내라고 하고선 데려온 곳이 그의 엑스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녹음실이어도 별다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비록 표정까지 완벽히 감출 수 없었을지 모르나 그 정도는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도 되는 양 소파에 우두커니 앉은 노아를 두고 녹음 부스에 들어선 재인은 익숙한 태로 헤드셋을 쓰고 호흡을 다듬고 있었다. 재인의 노래라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어떤 음색을 내는지, 어떤 버릇이 있는지, 그가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말해 봐, 어떻게 해야 살아가고, 웃고, 사랑할 수 있어?

그러나 노래의 첫 소절이 시작되었을 때, 노아는 뒤늦게 깨달았다. 드러머인 자신이 무대 위 재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곡이 끝나고 관객의 반응을 맞이하고 선 재인의 뒷모습은 익숙해도 그가 어떤 낯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담아 노래를 하는지, 한껏 노래에 집중해 빠져든 재인이 어떻게 가사를 풀어내는지 노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재인의 호소인 것이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롤러코스터 맨 앞줄에 앉아 있어. 말도 안 되는 짓도 잔뜩 벌였지,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아무 문제도 없는데 사는 건 왜 이렇게 힘겨울까? 두 손을 든 채 벌벌 떨고 있어. 

노아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곡에 몰입 중인 재인을 홀린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가사를 읊조려 뱉는 입술이며 얼굴에 스미는 낯선 감정과 제 귓가로 감겨드는 목소리까지 무엇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은 몹시 기이한 감각이었다. 부스 안에 선 재인이 내뱉는 고백이자 갈구를 처음 마주한 노아는 어느덧 음악이 끝나고, 헤드셋을 벗은 재인이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눈을 깜빡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아, 가, 가이드인데, 너무 잘 불러서…, 어떡하지?"

한참 놓고 있던 넋을 문득 주워섬기면 재인의 너스레가 귓바퀴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듣는 사람이 기가 죽겠다며 투덜거리는 재인의 전 애인 목소리도 배경처럼 희미하게 스쳐 지난다. 새끼손가락에 슬며시 감겨드는 재인의 손가락이 혼란한 의식을 콕콕 찔러 환기시키는 것만 같았다. 귓가엔 여전히 재인의 노래가 맴돈다. 오늘 밤 내가 하는 말이 들린다면, 말해 줘. 어떻게 살면서, 웃고, 사랑까지 할 수 있어? 그저 가사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어도 재인이 저를 향해 내뱉는 물음이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기묘한 짝사랑을 오래 하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정노아.

천재인은 표류하는 배다. 닻을 내리기엔 너무나 겁이 많고 조심스러워서 언제까지고 떠다니길 선택한 배. 아무리 제게로 찾아와 머물러도 좀처럼 붙들어지지 않아, 그의 닻을 대신하여 제 마음을 얼마나 수장시켰던가. 그런 재인이 이제야 제 곁에서 닻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다 혼란했다. 의심 가득한 눈빛에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한 재인의 반응이 낯설다면 낯설었다. 녹음실을 벗어나고도 한참토록 말이 없는 노아를 향해 재인이 슬그머니 말을 붙인다.

"저, 저녁 합주, 안 가면 안 돼?"

"…안 돼."

"왜? 나랑 놀자."

"……."

이 형이 왜 안 하던 투정을 다 하지. 쉽게 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러는 것이 얄미워 짐짓 눈을 흘기자 재인의 웃음소리가 둘 사이의 공기를 가벼이 휘젓는다. 그러면 노아는 또 저를 끌어당기는 재인의 손길에 기꺼이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짝 다가온 얼굴은 무언가를 덜어낸 사람처럼 한결 편해 보였고, 어떠한 생동감을 품고 빛나는 두 눈은 전에 없이 시선을 잡아끌어 도저히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었다. 정노아는 여전히 천재인을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을 수 있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 언제까지 머, 먹여 살릴 수 있어?"

그 순간, 기대로 반짝이는 눈을 보며 정노아는 직감한다. 이 대화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란 것을. 그리고 이것이 지난했던 제 기묘한 짝사랑의 종점이라는 것을. 혼자서는 박차고 올라갈 수 없던 심해로부터 끌어올려진다. 셀 수 없이 잠겨 죽어야 했던 무형의 사랑이 이제야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노아는 더 이상 익사하지 않을 것이다.

"노아야. 나 오늘 노래, 자, 잘했어?"

다시는 놓을 일 없다는 듯 제 손을 붙든 재인의 손에 시선이 가 닿는다. 기나긴 표류를 끝내고 제 곁에서 정박하기로 한 배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단히 손을 맞잡는다. 끌어올려 새하얀 손등에 입술을 꾹 붙였다 뗀다. 그제야 해사한 웃음이 얼굴 위로 번진다.

"당연한 걸 묻네, 형은. 완전 잘했지."

"그 앞 지, 질문의, 답은?"

노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형 이제 큰일 났어. 형이 이제 그만하라고 해도 평생 먹여살릴 거거든."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