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즈

Persído

정노아 오리지널 로그(w. 재인)

*이탤릭체는 영어 대화



날벼락이라는 건 원래부터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대체로 맑게 갠 하늘에서, 일말의 전조도 없이 우르릉 꽝. 거기다 벼락은 인간의 속도로 결코 따라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어쨌든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최소 한 번쯤은 무력하게 날벼락을 맞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실생활에 적용을 해보자면… 잘 자고 있다 난데없이 고막으로 내리꽂히는 비명에 강제로 일어나게 된 상황에 제법 적절한 표현이리라. 부스스하게 반쯤 몸을 일으킨 노아가 길게 하품하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잘 자고 있는데 왜 소릴 질러….” 

“이거 미…미, 미친놈 아냐!” 

꾹 말아쥔 주먹이 노아의 머리에 꿍 내려앉았다. 두 번째 날벼락이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노아가 침대 위로 다시 풀썩 엎어지거나 말거나 재인의 입에선 윽박지르는 투의 말이 쏟아져나왔다. 

“너 주방이랑 화, 화장실이랑 거, 거실 말고는 도, 도, 돌아다니지 말라고 해, 했어 안 했어!” 

그 문제라면 노아도 할 말—사실은 양심에 털이 나지 않고선 할 수 없는—은 있었다. 맞은 자리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노아가 반쯤 감겨있던 눈에 힘을 줘 또렷한 시선으로 재인을 쳐다보았다. 

“아니이…. 소파에서 계속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 힘들어서 거기선 안 자. 못 자.”

“소, 소파 그거 넓잖아. 소, 소파베드 겨, 겸용이야.” 

비슷하게 날벼락을 맞은 낯을 하고 재인이 짜증스레 주장했다. 침대로도 쓸 수 있는 소파라고. 

“아무리 그래도 소파랑 침대랑 같아?” 

보란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대는 노아의 태도에 재인은 숫제 씩씩거렸다. 

“너 그래서 언제 집 구해서 나가는데!! 이틀 준다고 했잖아!!! 이게 벌써 몇 달이야, 이 자식아?” 

“어엉, 한 달 됐나? 아니 근데 형도 웃기네. 그럴 거면 선인장은 왜 받아줬는데?”

“그럼 대뜸 사 온 걸 내다 버리라고 해?! 그리고 두 달이거든? 은근슬쩍 줄이지 마라.” 

“와. 진짜 차갑다, 차가워. 잘 때는 잘만 껴안아 놓고 맨정신이 되니까 이제 손절한다 이거지? 그럼 잘 때 같이 껴안지나 말던가. 파고들지나 말던가. 아니, 좀 껴안고 잤다고 하늘이 무너지길 해 땅이 무너지길 해. 그런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어? 형은 사람이……”

중얼중얼 투덜투덜 한참 이어지는 군소리를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던 재인이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언제 나갈 거냐니까?

“그냥 같이 살면 안 돼?”

“야 처, 처음이랑 마, 말이 다, 다, 다르잖아! 그럴, 거면 워, 월세 내!!” 

평소보다 두 배쯤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은 재인이 씩씩대다, 잔뜩 열받은 얼굴을 하고 노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슈퍼 싱글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쳐있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노아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눈을 치떴다. 

“형은 그렇다고 사람을 걷어차냐?! 침대도 좁은데? 어? 월세 낸다, 내! 대신 월세 내면 집 공간 다 쓸 수 있게 해줘!” 

“그럼 월 800 내.” 

“미쳤어? 치사하게 그럴 거야? 나 그럼 계속 형 침대에서 자버린다?”

“그래라, 난 소파에서 잘 거니까.” 

나란히 머리에 새집을 지은 채 바락바락 큰 소리를 내봤자, 그 어느 쪽에게도 썩 유의미한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잠이 다 달아난 얼굴로 거칠게 머리칼을 꾹꾹 눌러 앉히던 재인이 문득 솟구치는 억울함에 막 바닥에서 일어서던 노아를 쏘아보았다. 

“야, 내 집인데 왜 내가 소파에서 자야 해?”

“억울하면 같이 침대에서 자던가? 원래 목마른 놈이 절을 떠나는 거랬어.” 

멍청아. ‘모,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 판다’겠지.”

노아가 재인의 집에 무작정 밀고 들어와 눌러앉은 지 약 두 달, 몇 번의 투닥거림을 더 거친 후에야 재인은 컴퓨터를 넣어두었던 방의 반 정도를 노아에게 내주기로 했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던 잡동사니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슈퍼 싱글 침대가 들어차는 광경을 지켜보며 재인이 눈썹을 구겼다. 분명 처음엔 이틀만 재워달라고 하기에 그 정도야 아주 못 재워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야금야금 하루씩 이틀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두 달을 지나버린 것이다. 재인은 노아가 슬그머니 눌러앉기 시작할 무렵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너 근데 왜 나한테 찾아왔어?’ 

‘패티 형은 횡성에 있고, 치즈 형은 그런 이야기 꺼내면 수신 차단할 것 같고. 빵놈한테는 아무리 그래도 형이 돼서 신세 지겠다고 하긴 좀 그렇잖아. 그리고 형은 뭐, 좀 더 오래전부터 보기도 했으니까.’ 

…이거 결국 내가 제일 만만했다는 뜻 아닌가?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재인의 시선이 새 침대에 시트와 이불을 정리하는 노아의 뒷모습에 가 닿았다. 열받네.

“악! 또 왜 때리는데!” 

“생각해 보니까 열받아서.”

“또 뭐가?!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한창 정리에 매진하다 밑도 끝도 없이 손날에 머리를 맞은 노아가 어처구니없단 낯으로 재인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물론 재인은 콧방귀를 낄 뿐이었으므로 허허롭게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지만.

“근데 컴퓨터는 계속 여기 둬?”

“옮길 데 없어. 싫으면 나가든가.” 

대체로 양심의 많은 면적에 털이 난 상태긴 했으나, 무작정 밀고 들어와 눌러 붙은 저에게 재인이 어쨌든 일부나마 공간을 베풀기로 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므로. 노아는 얌전히 입을 닫고 무구한 낯으로 시익 웃어 보였다. 뻔뻔히 느물거리는 웃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인이 방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여기엔 노아가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재인이 컴퓨터를 쓰는 이유의 절반 정도는 게임을 위해서라는 것과, 주로 밤에 게임을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재인 역시 노아의 잠귀가 밝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때문에 노아는 단잠에 빠졌다가도 근처를 서성이는 인기척이나,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라던가, 컴퓨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에 항상 잠에서 깨곤 했다. 

어김없이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잠에서 깬 노아가 눈을 감은 채 딸칵이는 마우스 소리와 딴에는 조심하려 하는 키보드 소리에 한숨을 삼켰다. 방을 뺏은 입장에서 되도록 재인의 컴퓨터 생활에 괜한 말을 덧대고 싶지 않았지만, 제아무리 노아라 해도 내리 나흘간 밤잠을 설치다 보니 인내심이 얄팍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된 건지 점차 빠르고 격해지는 소음에 결국 눈을 뜬 노아가 컴퓨터 책상을 향해 돌아누워 머리를 받치고 재인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현란하게 변하는 화면은 노아도 익히 아는 게임이었다. 저 역시 게임을 자주 하곤 했으니까. 저 게임 한판 시작하면 기본 삼십 분은 걸리는데. 조용히 베개 옆에 내려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 반. 맨날 이 밤에 게임을 하니까 낮까지 일어나질 못하지. 고개를 작게 저은 노아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드문드문 보이는 게임의 상황을 읽는다. 대충 게임이 삼십 분은 훌쩍 넘을 것 같아, 못 박힌 듯 모니터를 향해있는 머리를 보며 재인을 부를까 말까 고민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마침 캐릭터가 죽자 시원하게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올린 재인이 화를 삭이듯 의자를 빙글 돌렸다. 

“아, 이 씨바—”

“…….”

“…….”

“나 형 방 가서 잘래.”

머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는 재인에게 툭 내뱉은 노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마, 막판이야… 이것,만 하, 하고…… 아, 이 개새끼가—”

“…….” 

“금방 끄, 끝나.”

제게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화면을 향해 욕부터 내뱉는 모습이 딱 게임 중독자의 것과 비슷해서 노아가 들으란 듯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 한숨이 재인의 귀에 가 닿았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도 약 이십 분 정도를 더 쓴 재인이 바쁜 손길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베개를 끌어안고 제 핸드폰을 만지작대고 있던 노아가 고개를 들어 재인을 쳐다보았다. 

“…왜.”

“…잘 자라고.”

“어. 자, 잘 자라.” 

다시 평화를 찾은 고요한 방, 누워서 뒤척이며 편안한 자세를 잡은 노아가 눈을 감았다. 낮에 운동이라도 시켜서 밤에 게임 할 체력이라곤 요만큼도 없게 만들어 놔야지. 

“야, 정노아. 이리 조, 좀 와, 봐.” 

다음 날 노아의 은밀한 계획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한 줌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노아는 제 방—이자 재인의 컴퓨터방—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느적느적 방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본체에서 선들을 뽑아내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챙겨 든 재인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걸 마주한 노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해?” 

“책상 옮기게.” 

“엥. 옮길 데 없다며.”

“없어.” 

“근데?” 

대꾸를 할까 말까 고민하듯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재인이 그저 노아를 지나쳐 멀어졌다. 짧은 정적 후 상황을 파악한 노아의 입매가 히죽, 짓궂게 휘어졌다. 모니터와 본체를 양팔에 하나씩 들어 올린 노아가 목소리를 키웠다.

“형 이거 나 생각해서 옮겨주는 거야?” 

“나 편하려고 옮기는 거거든?!”

컴퓨터 책상을 재인의 침실로 옮기고 난 뒤 두 사람의 룸메이트 생활은 대체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가벼운 잔소리를 주고받긴 했으나 서로의 생활에 대해 크게 터치하지 않았고, 완전히 상반되는 식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먹는 것으로 서로의 불편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때때로 같은 때에 시간이 비면 소파에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함께 하기도 했다. 물론 매 순간이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카톡으로 말하면 되지 왜 방으로 오래?” 

“왔으면 방 불 좀 꺼줘.” 

“아! 이번엔 그거 아니라며!! 심각하다매!! 장난해?! 이 정도도 안 움직이니까 형이 그렇게 매가리가 없는 거 아니야. 어? 이 형이 진짜…”

“어~ 그래서 네가 평생 불 꺼줘야겠다~” 

“아주 평생 같이 살자고 하지?” 

“어 살어~ 월세 천만 원씩 내고~” 

“하… 됐다, 말을 말자.”

같이 살기 시작하며 노아가 파악한 재인은 상당한 게으름뱅이였다. 베짱이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자고 일어나는 게 제멋대로였고 과장을 한 스푼 보태 먹는 양이라곤 쥐꼬리만 했다. 시시때때로 저를 부려 먹으려 꾀를 쓰곤 해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눈치를 제법 써야 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꼽아야 할 것이 더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같이 지내는 것이 그저 불편하기만 하진 않았다. 

종종 가볍게 맥주를 나눠 마시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함께 외식을 하기도 했고, 마땅한 게임 상대가 없을 때 서로 어울려 게임을 하곤 했다. 여름쯤 공식적으로 눌러앉기 시작한 생활이 어느덧 겨울을 맞이했을 무렵 노아와 재인은 서로의 존재에 퍽 익숙해진 상태였다. 장기 보관 창고에 넣어두었던 옷을 집으로 완전히 가지고 들어왔던 날 재인은 점점 늘어가는 노아의 짐을 보며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이거 다 내다 버리고 발가벗겨야 네가 내 집을 나가지.” 

열어젖힌 상자에서 겨울옷을 차곡차곡 꺼내놓던 노아가 흘긋 시선을 던졌다. 

“발가벗겨서 뭐 할 건데. 변태야, 형?”

“하긴 뭘 해, 네 등짝에 내 손자국 잘 남나 보겠지.” 

“형은 진짜 난폭한 성질 좀 죽여. 그게 다 운동을 안 해서 예민한 거야. 알아?” 

“넌 왜 항상 매를 버는지 난 그게 의문인데.” 

“아! 진짜! 또, 또!”

투닥거리는 일이 잦긴 했으나, 어쨌든. 서로를 룸메이트로 잘 수용해 가는 중이었다. 

“형, 크리스마스에 나갈 계획 있어?” 

“아니. 너는.” 

“올해는 나도 계획 없는데.” 

“올해는?”

“작년엔 파티 갔었지. 형은 좀 나가고 그래.”

“싫어. 추워. 사람 많아.”

“어휴.” 

이렇다 할 크리스마스 계획이 없다는 점은 이윽고 다가온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맥주캔을 기울이기에 그럭저럭 합당한 구실이었다. 캐롤이 흘러나오는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과 북적이며 한껏 부대끼지 않아도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싶을 수는 있으니까. 시시껄렁한 주제들을 입에 올리며 안주 삼아 두 캔째의 맥주를 비워갈 무렵, 대화의 주제는 ‘거리에 넘쳐나는 커플들이 야기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흘러가 있었다. 

“어… 그러니까 결국 형이 크리스마스에도 솔로라서 열받는다는 거 아냐.”

“…….”

“맞잖아?” 

“마, 맞긴 뭐,가 마, 맞아?!”

발끈하기는. 중얼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던 노아가 문득 떠오른 듯 대수롭지 않게 툭 뱉었다. 

“근데 형 애인 사귄 적은 있어?”

“……있어.” 

한 박자 늦게 되돌아온 떨떠름한 대답을 잠시 곱씹던 노아가 히죽, 얄미운 기색으로 웃어 보였다. 

“없네.” 

“있다고 해, 했다.” 

“없으면서.” 

“이, 있다니까?”

“에이, 진짜 있으면 그렇게 박박 안 우기지. 모쏠 맞네.” 

적당히 놀리려고 해도 반응이 이렇게 재미있어서야, 자꾸만 놀리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 아닌가. 숫제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노아를 쏘아보던 재인이 식탁 아래에서 정강이를 걷어찼다. 노아의 웃음을 멈추게 하기엔 부족했지만 말이다.

“야 나도 다 해봤어. 내가 못 할 것 같냐?”

“엥. 거짓말. 형 완전 앞도 뒤도 체리보이 같은데.” 

상상도 못 한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재인이 뒤늦게 발끈한 얼굴로 받아쳤다. 

“그러는 너는 뭘 얼마나 해봤길래 그렇게 자신만만한데?” 

“형 다리에 힘도 안 들어가게 만들어 줄 수 있지.”

“하, 어디 해 봐.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똑바로 걸어가는 거 보여준다.”

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의뭉스러운 소리를 내뱉은 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당히 장난만 치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구는 걸 보면 꼭 후회하게끔 해주고 싶어지는 건 어쩌면 제 성격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좀 못돼먹은 걸지도. 그리고 뭐랄까. 딱히 못 잘 것도 없지 않나? 

“형, 마지막으로 발 뺄 기회 줄게. 도망칠 수 있게 해줄 때 발 빼는 게 좋을걸?” 

피식 웃어 보이는 노아를 빤히 쳐다보던 재인이 이내 가소롭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 기회 너한테 필요한 거 아니고? 지금이라도 형아 잘못했어요, 해.” 

어이구. 노아는 속으로만 짐짓 안타까운 척 혀를 찼다. 이걸 안 도망가네.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노아의 손이 재인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킨다. 갑작스런 행동에 화등잔만 하게 커진 재인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 보며, 입술을 부딪치기 전 부러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왜 그 말을 지금 하겠어? 잘못은 이제부터 실컷 할 건데.”





객기에서 비롯된 크리스마스의 밤 이후 노아와 재인은 종종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다. 막상 자보니 나쁘지도 않았고, 서야할 게 안 서는 일도 없었거니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껄끄럽지도 않았다는 게 노아의 입장이었는데, 재인의 생각이 어떠했을지는 재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서로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관계를 가지는 일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져 갔다. 노아는 아주 드물게 재인과 저 사이를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몸을 섞는 일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은 여전히 룸메이트였고, 편한 형동생 사이였다. 그러나 애초에 그리 심각하고 진지하게 품기 시작한 고민은 아니었으므로 결론은 생각보다 금방 윤곽을 드러냈다. 어쩌면 이 관계는 FWB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멕시코?” 

“어. 가서 두어 달 일 좀 하고 오려고.” 

해가 바뀌고 짧게 찾아온 봄이 끝물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재인을 깨워 늦은 점심을 먹다가 접한 뜬금없는 멕시코행 소식에 노아가 눈을 꿈뻑였다. 

“왜?” 

“자극이 필요해.” 

“멕시코면 약?”

입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재인에게 노아가 설핏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약이면 그쪽은 보통 갱이 얽혀있을 텐데. 세상 어디 질 좋은 갱이 있겠냐만서도, 멕시코는 특히 좀 더 질이 나쁘지 않나?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아? 꼭 가야 해?” 

“어. 가야겠어.” 

평소완 달리 단호하고 확고한 기색으로 의사를 밝힌 재인은 일주일 뒤 노아가 만든 위조 신분으로 멕시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재인을 공항으로 태워다 준 아침까지도 노아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뛰어들기에 멕시코는 과하지 않은가 생각했으나, 본인이 가야겠다는데 자신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뜯어말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한 것 같아 입국장으로 사라지는 재인에게 손이나 휘적휘적 흔들어 보일 따름이었다. 

솔직히 자극이 필요하다는 재인의 말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바닥의 삶을 사는 이들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저 역시 한 번씩은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 아슬아슬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었으니까. 지난 크로우즈 건 역시 그렇기 때문에 발을 담갔던 게 아닌가. 워낙 큰 건이었던 터라 촉각을 곤두세운 경찰들의 시선이 조금 허물어질 때까지 한국에선 몸을 사리기로 했으니 꼭 무언가 자극이 필요하다면 외국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맞는 수순이긴 했다. 

[야 좀 오래 걸릴 것 같다 피자 먹으면서 기다려] 

꼬박 두 달 뒤 재인으로부터 짧고 불길하기 그지없는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노아는 좀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을 약간 후회했다. 뭔가 일이 꼬였다는 뉘앙스는 잔뜩 묻어나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두루뭉술한 내용이라는 점이 노아를 더 찝찝하게 만들었다. 재인의 행방을 추적해볼까 싶었다가도, 그것이 되레 재인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될까 선뜻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기다리라고 했다는 것은 어쨌든 돌아오긴 하겠다는 뜻이겠거니 따위의 생각을 씹어 삼키는 사이 두 달이 지나고, 다섯 달이 지나고……. 연 단위의 시간을 세어야 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대략 이 년 하고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즘 노아는 재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집에 산재한 재인의 물건을 냅다 처분 해버릴 생각을 하니 어쩐지 조금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도 같아서. 조금씩 미루고 미루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또 기다리는 일이 다였다. 어쩌면 관성적인 기다림이었을지도 모르고. 

하여 어느 초여름의 아침,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을 때 노아는 대수롭지 않게 우체국에서 등기라도 보낸 모양이지 따위의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문을 열고 마주한 낯익은 얼굴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와, 4년만인가?’ 같은 멍청한 문장이었으리라. 재인은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보다 날카로워졌고, 조금 더 말라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지쳐 보였다. 

재인은 며칠 내내 자고 씻고 먹고 또 자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사이 재인이 깨어있을 때 들은 바에 의하면 원래는 정말 딱 두 달만 일을 해주고 돌아올 생각이었다던가. 그러나 재인을 불러들인 쪽에서 여권을 빼앗고 위협하여 계속 약을 만들게 했고, 이런저런 다사다난한 우여곡절 끝에 그들의 약 제조 공장을 시원하게 폭탄—이 대목에서 노아는 자신이 어느 아침 CNN 채널로 접한 ‘멕시코의 설탕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마약 제조 공장이었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재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으로 날려버린 뒤 따라붙는 꼬리와 추적을 피해 온갖 나라를 떠돌다 간신히 돌아왔다고 했다. 

“내가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지?”

지난 4년의 전말을 듣고 기가 차 얼마간 할 말을 잃고 있던 노아의 타박에 재인이 대꾸 없이 눈을 굴렸다. 

“근데 네가 여기 계속 살고 있을 줄은 몰랐네.” 

“뭐… 언제는 기다리라며? 아니, 그럼 형은 여기 내가 사는지 안 사는지 확신도 없이 찾아온 거야?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려고 했지. 돌아올 곳이 여기밖에 안 떠오르는데 어떡해.”

무어라 더 타박을 덧붙이려던 노아가 짧은 침묵 끝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습관적으로 밥알을 깨작이는 젓가락을 보며 저 버릇은 4년이 지나도 안 없어졌네 같은 생각을 흘려보내다, 무심결에 툭 내뱉었다. 좋겠네, 형은 돌아올 곳 있어서. 재인의 시선이 노아의 얼굴에 닿는다. 뒤늦게 제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온 건지 깨달은 노아가 조금쯤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뭐, 뭔 소리야. 너도 이리 도, 돌아오면 되, 되잖아.” 

“…엥. 나도 여기로 돌아와도 돼?”

“왜 안 되는데?” 

“어…, 아니, 뭐… 안 될 건 없긴 하지…?” 

간결하고 시원한 재인의 대답에 노아는 머쓱하게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돌아갈 곳에 대한 갈망 또는 바람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어떠한 욕심은 익히 오래전부터 알고 있어 온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심리적으로 발 붙이고 안착할 수 있는 곳’이라고 칭할 수 있을 텐데, 노아는 자신의 이런 갈망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부모에게 묻고 싶었다.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정할 때 당신들의 자식이 어떻게 자라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냐고. 정말 그 결정에 자식인 저에 대한 고려가 손톱만큼이라도 존재하긴 했냐고. 

제아무리 LA가 크고 탄탄한 한인사회를 구성하고 있다곤 해도, 노아는 그 사회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는 또래의 친구들을 보며 어떠한 친밀감이나 안정감을 느껴본 일이 드물었다. 그저 모두가 이방인 같았고, 미국 땅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한인 특유의 공동체적 ‘정’이란 것은 대부분의 때에 노아를 더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늘 서로를 지켜보는 시선이라던가, 정이라는 미명 아래 존중되지 않는 프라이버시와 서로의 입을 통해 부풀려지고 와전되어 전해지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삶의 매 순간 피로를 더하며 노아에게 붕 뜬 부유감을 떠안기곤 했다. 

혹시나 이 두터운 한인사회의 그늘에서 벗어나면 어디든 안착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11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부득부득 우겨 샌프란시스코의 학교로 전학을 감행했다. 어쩌면 부모님은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아들에게서 UCB로의 진학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노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부유감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단지 노아 저 스스로가 마음을 열지 못한 탓이다. 어쩌면 미약한 원망의 표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노아의 부유감은 사라지지 않은 채 나날이 선명해질 뿐이었고, 이윽고 12학년을 마치고 졸업식만을 앞둔 무렵 노아는 부모님에게 말했다. 제 핏줄의 고향인 한국 땅에 가고 싶다고. 노아가 세 살이던 당시 함께 이민을 와 미국인으로 살고 있으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품고 사는 부모님은 노아의 발언에 퍽 감격한 눈치였는데, 물론 그것은 모두 노아의 의도와 계산에 따른 마땅한 결괏값이었다.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열여덟에 한국 땅을 밟았던 노아는 서른넷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제 속에 자리한 부유감을 어쩌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하게도 한 번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돌아와도 된다는 말을 4년씩이나 행방불명되었다가 귀가한 집주인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 최대한 빠르게 지방에 집 구해서 잠시 가 있을 거야.”

“혹시 꼬리 붙었을까 봐?” 

“어. 그리고….” 

핸드폰에 눈길만 고정한 채 내용도 읽지 않고 화면 스크롤만 죽죽 내리던 노아가 재인에게 흘긋 시선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지. 

“내 신분 사망 처리해 줘.” 

“…뭐? 형 진짜 신분?”

“그때 쓴 신분 가짜인 거 중간에 뽀록났고, 그럼 내 진짜 신분도 털렸을 게 뻔하니까. 꼬리 자를 거면 확실하게 잘라야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일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멕시코 갱의 끈질김은 미국에 살 적부터 마치 도시괴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잊을 만하면 귀에 들어오곤 했으므로. 소문의 상당수에 과장이 섞이지 않았을 리 없지만, 재인의 안전을 위해서 깔끔하고 확실하게 모든 걸 잘라내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재인의 낯을 보며 노아는 곤란한 듯 뺨을 긁적였다. 한국은 인명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전산 시스템 상에 등록되어 관리된다. 빈틈을 파고들어야 하니 일을 처리하기가 까다롭다는 단점은 있으나 한 번 처리된 것은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번복의 여지가 없다시피 했다. 재인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태어난 시점부터 현재까지 쭉 가져온 신분을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자세히는 몰라도 재인이 가족과 모종의 거리감을 갖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괜찮겠어?” 

“상관없어. 사망 신고는 내 형이 한 걸로 해두면 너도 귀찮을 일은 없을 거야.” 

하여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즈음 천재인은 죽은 사람의 이름이 되었다. 살아있는 이름을 사망 처리하는 작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님에도 제법 가까운 이의 신분을 죽은 것으로 만들자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사망 신고에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준비하며 노아는 재인에게 김현수라는 무난하고 흔한 이름을 새 신분으로 쓸 수 있도록 작업해 주었고, 비슷한 시점에 재인은 적당히 조용하고 느긋하게 늘어져 있을 수 있는 지역으로 혼자 살기 알맞은 새집을 구했다. 

집 계약을 앞두고 재인은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가진 돈을 거의 탈탈 털어 썼다고 했다. 그야 브로커들은 부르는 게 값인 인간들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노아는 재인이 약간의 과장을 섞어 하는 말일 거라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정확히 알진 못해도 당시 재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바닥을 보일 정도는 아니라고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가 직접 확인한 재인의 잔고는 정말 간신히 바닥에서 찰랑이고 있어서, 재인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에는 노아의 재산이 힘을 내야 했다. 

“형 진짜 나한테 잘해라.”

“네가 그 집에서 4년 산 건 생각 안 해?”

“…와, 진짜 어이없다. 그리고 이제 거기도 내 거거든?”

이후 꼬박 한 달간 재인은 연락도 없이 두문불출했다. 4년이나 소식이 없다 돌아온 재인이니 그사이에 고독사라도 한 것은 아닌지, 과연 살아있기는 한 건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거기다 새로 마련한 핸드폰마저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만 돌아오고 있으니 괜히 심란해진 노아가 종종 재인의 생사를 확인하러 지방으로 내려가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번번이 게임 폐인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베짱이도 형님으로 모실 법한 게으른 모습을 보고서 혀를 내두르며 올라오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어련히 또 게임이나 하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그 주의 토요일 저녁쯤 재인으로부터 자신의 심심함을 토로하는 메시지가 오곤 했다. 

그렇게 어느샌가 노아는 매주 재인의 집으로 내려가 주말을 보내고 올라오길 일종의 루틴처럼 반복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이 다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딱히 그렇고 그런 주제의 대화를 하던 때도 아니었고 그저 작은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아 콘솔 게임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임의 한 스테이지가 끝나고 공개되는 스코어 화면을 두고서 이건 버그라느니, 그냥 내가 잘났고 네가 못났다느니 시답잖은 말로 투닥거리던 즈음. 

불빛이라곤 맞은편 벽에 걸린 티비의 빛뿐이어서 그랬을까? 

문득 서로의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버린 탓일까?

어쩌면 과거의 기억이 불쑥 고개를 치켜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둘 사이의 경계선이 너무 많이 흐려진 것이 원인이었거나. 

노아와 재인은 이전처럼 같이 식사를 하고, 게임을 하고, 몸을 섞었다. 어느샌가 그게 그냥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노아는 재인과의 사이에서 이어지는 관계성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지를 위해 애쓰거나 힘주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편안했고, 안정적이었다. 룸메이트로 함께 지낸 시간이 있으니 서로의 솔직한 구석을 드러내는 것에 이렇다 할 거부감이 없기도 했고. 

재인은 노아가 매 주말 재인의 집에 출근 도장을 찍은 지 꼭 다섯 달을 채우고야 본래 살던 집으로 다시 옮겨왔다. 매주 이렇게 오가는데 쓴 돈으로 집을 사도 샀겠다고, 기진맥진한 재인을 욕조에 담근 채 물을 끼얹던 노아가 투덜거린 탓이다. 과장해서 부풀리지 말라며 쏘아붙였던 재인도 금세 이사를 결정한 것을 보면 매주 왔다갔다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란 판단을 내리긴 한 모양이었다. 다섯 달쯤 상황을 살폈으나 더는 따라붙은 추적도 없는 듯 했고 말이다. 




“아, 맞다. 형 나 유럽 좀 다녀온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나란히 앉아 티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이스틱을 조작하던 노아가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 툭하니 내뱉었다. 

“유럽 어디? 왜.”

마찬가지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재인이 가볍게 되물었고, 노아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프랑스. 예술품 위조 제안이 왔는데 한 번 해볼까, 싶어서.”

“너 언제는 예술품은 품이 많이 들어서 귀찮다며.”

“저번에 그 달걀 작업 해보니까 좀 재미있길래? 나도 요즘 심심하기도 하고.”

“얼마나 있다가 오는데.” 

“나한테 일 물어준 놈 말로는 2주만 작업하고 빠지면 된다던데?”

‘자극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멕시코의 갱과 일을 하겠답시고 훌쩍 떠났던 재인을 도파민 중독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제가 하려는 일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 이제 더는 재인에게 도파민 중독자라고 놀릴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흠. 의뭉스러운 소리를 내뱉은 재인이 게임을 일시 정지시키며 노아를 쳐다보았다. 

“안전한 건 맞아? 잘 확인 해봤어? 치즈한테 한 번 확인받는 게 좋지 않냐?” 

“지금 그러기엔 일정이 좀 빠듯해. 결정한 지 조금 된 거라서.”

“언제 출발인데.”

“어… 이틀 뒤?”

그걸 왜 고작 이틀 전에 말하냐는 듯 황당하다는 낯을 해 보이는 재인에게 노아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의미로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출국일로부터 딱 2주째가 되던 날, 공항이 아닌 항구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은 채 노아는 스스로의 안일함을 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흥미를 당기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나름대로 아는 얼굴에게 일을 제안받은 터라 조금 쉽게 생각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구린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대신 제 선에서 살펴보고 치운 것이었는데. 

굳이 구실을 찾자면 재수가 없었던 셈이다. 이번 건을 위해 모인 이들 가운데 프랑스 경찰의 위조 범죄 관련 추적망에 포함된 사람—당사자는 자신이 추적당하는 중이라는 사실도 몰랐다며 싹싹 빌었으나 모두가 그를 현장에서 버리고 도주하길 택했다—이 있었고, 그 덕분에 노아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를 거쳐 그리스, 터키로 이어진 다사다난한 도피 끝에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백팩 하나만을 어깨에 삐딱하게 걸친 채 꼬박 석 달 만에 마주하는 익숙한 도어락을 보며 노아는 우습게도 아주 조금 긴장했다.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더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 번호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재인이 이사를 가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약간의 어색함을 감춘 채 노아가 마치 어제 집에서 나왔던 양 자연스럽게 들어서자 평소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있던 재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벙찐 얼굴을 해 보였다. 그 표정을 보며 노아는 재인이 4년여 만에 돌아왔을 적 제 표정이 저랬을까, 따위의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허, 헛것을 보, 보나……”

“어… 형 안녕? 좀 늦었지?” 

나름 벙쪄있는 재인의 황당함을 희석해 주려 가볍게 인사를 건넸는데, 아무래도 역효과였음이 틀림없었다. 재인의 낯에 시시각각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으니까. 이윽고 화가 난 얼굴을 마주하며 노아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늦어? 좀? 이게 조, 좀 늦은 거, 거야? 어?” 

당장이라도 걷어찰 기세로 다가오는 재인을 피해 뒷걸음질하며 노아가 말리듯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아니, 일단 내 말부터 좀 들어 봐. 형, 있잖아?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사정이 있거든?” 

재인의 접근을 멈추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차오른 화는 여전해 보여서, 노아는 재인의 동정심을 자극해 보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곤 눈썹 끝을 늘어뜨리며 퍽 불쌍한 표정을 지어냈다. 

“그전에 무사히 돌아온 동생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노아에게 시커먼 꿍꿍이속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미심쩍은 얼굴로 다가와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투덕여준 재인이 이제 말해보라는 듯 한 걸음 떨어져 팔짱을 끼고 섰다. 

“음, 작업 마무리쯤에 경찰한테 잡힐 뻔해서 여기저기 우회해서 오느라 늦었어. 하마터면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거나 미국으로 송환될 뻔. 악!”

“그러게 내가 그거 치즈한테 한 번 파달라고 해보랬지.”

“그땐 이미 시간적 여유가 없었잖……아, 알겠어. 내가 잘못했지. 그치.”

또 한 차례 머리를 쥐어박을 듯 주먹을 들어 보이는 서슬 퍼런 재인의 눈빛에 줄줄 늘어놓으려던 변명을 삼킨 노아가 얌전히 제 잘못을 시인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린 것은 사실이니까. 재인은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다섯 바가지쯤은 되는 듯 했으나,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노아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감정이 조금 실린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환영의 의미를 띤 손길이라는 걸 깨닫자 정말 돌아와도 괜찮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사실 저 하나 탁신 할 곳이야 반드시 여기가 아니더라도 손가락을 여럿 꼽을 만큼 존재하긴 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머무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곳과 반드시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곳 정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희한하다면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서로 너무 허물이 없어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귀국 후 노아는 한동안 몸을 사렸다. 물론 재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하거나 진짜 신분을 사망한 것처럼 위조하는 정도의 연막을 치지는 않았지만, 작고 사소한 의뢰만 수락하여 작업하고 나머지는 다양한 구실을 들어 거절했다. 딱히 당장 돈이 아쉬운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몇 달쯤 놀고먹는 정도로 빈털터리가 될 빈약한 잔고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마음 편하게 반백수 생활을 즐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 온 뒤로 몇 달씩 놀고먹었던 때가 딱히 없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쉬는 것에 딱히 부채감이 들지도 않아 좋았다. 

느긋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노아는 왠지 모르게 방황하는 것 같은 재인에게 종종 제안을 건넸다. 미니어처 만들기를 해보라던가, 그게 재미가 없다면 유리 공예는 어떠냐던가, 간단히 배울 수 있는 악기를 떠안겨 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표면적으로는 재인이 심심해 보인다는 이유였고 그 아래 감춘 진심으로는 재인이 위험하지 않은 일로 방향을 틀어도 괜찮지 않을까와 같은 것이 있었다. 

4년의 행방불명 기간을 보낸 후 재인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노아의 시선이었으므로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자극만 좇아 위험한 일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을 더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4년씩이나 코앞까지 들이닥친 위험과 매 순간 함께하고 나면 저였어도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될 것 같긴 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재인은 노아가 들이미는 것들을 무작정 거절하지 않고 최소한 한 번씩은 체험해 보곤 했다. 들이밀었을 때 가타부타 무작정 싫다고 밀어내지 않으니 노아도 이런저런 다양한 것을 찾아 넌지시 내미는 일에 흥미를 붙여갔다. 거기 더해 재인은 경험 후 노아에게 꼭 체험한 것에 대한 소감을 전했는데, 그 소감을 듣는 것이 의외로 즐겁고 재미있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느꼈던 점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싫었던 점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썩 내키지는 않지만 한 번 체험은 해보겠다는 뉘앙스를 풍길 때 어떤 낯을 하는지, 그 이후에 자신의 감상을 말하는 눈빛은 어떻게 변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하나둘 알게 되었다. 무작정 밀고 들어와 살면서 한 번도 관찰해본 적 없던 천재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새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동거인으로서의 재인을 이전보다 더 가깝고 편안하게 느끼게 되었고, 거기 더해 지금껏 몰랐던 재인의 취향이나 흥미와 같은 사적인 것들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까. 비록 함께 살기 시작하고 6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게 문제라면 소소한 문제점일 수도 있겠으나…. 뭐. 평생 모르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이제 와서 내가 이런 얘기하는 거 우습긴 한데 그냥 이렇게 지내는 거, 괜찮지 않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의 점심 무렵이었다. 아파트 상가의 반찬가게에서 사 온 연근조림 한 조각을 집어 들던 노아의 시선이 재인에게로 향했다. 그러잖아도 이전의 대화 이후 모종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 보여 이유를 물으려던 참이긴 했다만. 갑자기?

“……. 이렇게 지낸다는 게 어떤 건데?”

“그냥… 너랑 나랑 둘이 이렇게 지내는 것 말이야.”

아삭아삭 입안에서 부서지는 연근을 다 씹어 삼킨 뒤에야 노아가 흠, 하는 소리를 내뱉는다. 잠시 이 대화 이전에 주고받았던 내용을 복기했다. 홍콩에서 서류를 다량 위조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는데, 중간중간 소통하며 진행해야 하는 일인지라 홍콩에 얼마간 머물다 와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의뢰를 수락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는 이야길 했었다. 그러고는 한참 말이 없다 싶었더니. 대화의 서두를 뗄 즘부터 느려지던 재인의 젓가락이 좀처럼 밥그릇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아는 시선을 거기 둔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이전부터 괜찮았어. 이렇게 지내는 거 말이야. 내가 형이랑 이렇게 지내도 괜찮은 건지 형 마음을 확신할 수 없는 거랑은 별개로. 그리고 실제로도 형은 안 괜찮은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위험한 일까지 수락해 멕시코에 갔다가 4년간 그 고생을 한 게 아니냐는 말은 적당히 삼켰다. 괜히 아픈 곳을 찌를 필요는 없을 테니까. 재인이 말하고자 하는 ‘이렇게'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노아는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이 그리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인의 생각은 다른 듯 했었지만 말이다. 마치 확인하듯 흘긋 시선을 들어 저를 쳐다보는 재인에게 어깨를 가벼이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재인의 시선이 다시 밥그릇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별로… 안 괜찮았던 건 아닌데……. 오히려 너무 편하다고 할까… 익숙해져서 그런 거지.” 

“익숙해지는 게 별로야?” 

“익숙해지는 게 별로라는 뜻이 아니라………”

말꼬리를 흐린 재인이 젓가락으로 밥알을 깨작였다가, 쿡쿡 찌르길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재인의 고개는 더더욱 수그러들어 노아의 시선에선 이제 아예 머리꼭지만 보일 따름이었다. 제법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지만, 노아는 인내심 있게 재인의 말이 다시 이어지기를 기다려 주었다. 재인이 그렇게 단호하게 멕시코로 향했던 이유 또한 이와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 탓이다.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또 모르겠으나 재인이 한 주제를 스스로 언급한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길 털어놓겠다는 뜻이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려 듣는 일일 것이다. 

“익숙해지고 나면, 나중에 너랑 따로 살게 되면…… 힘들 거 아냐. 그러니까………… 너 없이도 혼자 알아서 잘… 지낼 줄 알아야지.”

노아는 애꿎은 밥알만 괴롭혀대는 머리 꼭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재인의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대부분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으니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재인의 어떠한 면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고민을 해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인데 왜 그렇게까지 어렵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걱정되면 그냥 나보고 계속 같이 있자고 하면 되잖아?”

“……말로 꺼내면… 거절당할 수도 있고……”

음, 하는 짧은 침음성과 함께 잠시 이마를 짚은 노아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형은 부딪혀 보기도 전부터 걱정을 과하게 사서 해.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해 봐. 부딪혀 볼 줄도 알아야지.”

어떤 사람—예컨대 재인 같은—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자꾸 부딪히고 닳아 봐야 단단해지고 깨닫는 것도 많아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노아의 시선에서 재인은 세상의 많은 것을 지나치게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반복된 거절의 경험에서 기인했으리란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거절 한두 번 쯤 당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 …거절당해도 상관없는 관계면 진작 물어봤어.”

시선은 여전히 밥에 둔 채 재인이 얼핏 불만을 토로하듯 말했다. 그즈음 노아는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거절당하는 게 상관있다는 건데. 근데, 그래서 뭐. 그것으로 완전히 게임오버라고 생각하는 건 억울하지 않나? 

“만약 거절당하면 그 이유 정돈 물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유가 형이 조금 달라졌을 때 사라지는 문제라면 변화를 약속하는 식으로 잡을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형의 의견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여러 번 부딪혀 봐도 되는 거잖아. 이게 단 한 번의 기회만 있는 종류의 상황은 아닐 텐데. 아냐?”

“…….”

“그러고 보니까 형은 내가 꼭 무조건 거절할 거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열받는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데 그럼에도 제가 단칼에 선을 그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단 뜻이 아닌가 싶어서.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노아가 재인의 일부를 알아 왔듯이, 재인 역시 노아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다. 고집스레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던 재인이 띄엄띄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거절한다는 건 싫은 거잖아. 싫다는 걸 억지로……… 할 만큼 내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솔직히, 아니라곤 생각하는데… 최악을 가정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결국 이 고민은 재인 스스로의 자존감에 달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노아의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답답한 마음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노아는 잠시 눈을 꾸욱 감았다 뜨며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겁 많은 두더지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형, 잘 생각해 봐. 내가 형이랑 지내는 게 싫었으면 집에 꼬박 들어왔을까? 형이 나 피하려고 작업실에만 콕 박혀 있었던 것처럼 어디 다른 데 가서 며칠씩 안 들어왔겠지. 형이 불편했으면 형이랑 잤겠어? 잔 이후에도 계속 이 집에 있었을까? 싫었으면 살다가 떠나도 벌써 떠났을 거야. 형은 최악을 가정하기 전에, 그동안 겪어온 시간과 경험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있는데 왜 괜히 겁부터 집어먹고 최악만 생각해.” 

물론 사람에 따라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그에 따른 대처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가 그동안 봐 온 재인은 그런 부류라기보다, 그저 인간관계에서 겪은 거절의 경험들이 쌓이고 쌓인 탓에 상처받는 일이 두려울 뿐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살면서 상처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받더라도 그것을 무던히 소화해 낼 수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노아가 본 재인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상처 받는 걸 무서워 하지마, 형. 그거 별거 아니야. 그 정도로 형 안 무너져.” 

“……. …다행이네, 너한텐 그런 게 별거 아니면.” 

“…….”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여기 살겠단 얘기야?”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었다. 하고 싶었던 말을 이미 한 번 혹은 그 이상 삼켰던 노아는 결국 약간의 한숨과 함께 제 한쪽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아니, 형은 파란색 깃발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이건 파란 깃발이야, 하고 말을 꼭 해줘야 알아?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말이 되어 입으로 튀어나오려 목구멍 끝까지 치밀었으나 노아는 스스로를 다독여 하고 싶었던 말을 참았다. 지금의 이 대화에 재인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건 알고 있으므로. 재인을 도망가게 하는 것보다 제가 그에 대해 확실히 대답해 주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다. 

“응. 형이 내가 필요 없어져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 여기 계속 살 거야.” 

“……응.”

대화 내내 밥알을 괴롭히던 재인이 드디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슬쩍 허리를 펴 건너다본 그릇 안의 밥은 겨우 반이 줄어있을 뿐이었다. 입맛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을 보며 노아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저러니까 맨날 종잇장이지. 





“야 정노아.”

“엉.”

“그래서 우린………… 뭐야?” 

올리브유가 늘어선 진열대 앞에서 뭘 사면 좋을지 고민에 빠져 있던 노아의 시선이 카트를 붙들고 선 재인에게로 빙글 돌아갔다. 그거 다 해결된 고민 아니었어? 다시 시작하는 거야? 형은 무슨 그런 질문을 마트에서 올리브유 고르는데 하니. 

“뭐였으면 좋겠는데?”

관계의 명명이 그렇게 중요한가? 노아에게 있어 이렇다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관계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일이었다. 그야 명명된 관계 아래 있었던 이들은 하나같이 저 좋을 대로 노아를 판단하고는 다가와 곁에 머무르다 저 혼자 지치고 실망하며 관계의 종언을 고하고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련의 반복 끝에 노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명명하길 포기했다. 어차피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지칭되었다 지워질 구분이라면 이쪽에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올리브유를 하나 골라 담은 노아가 걸음을 옮기자 카트에 기대어 서있던 재인이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 노아 저 자신이야 굳이 이 관계를 명명하지 않은 채 지낼 수 있다 해도 재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가 제각각의 성향과 생각을 갖고 살아가니까. 그래서 재인이 이 관계를 명확히 구분 짓고 싶다면야, 사실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다. 몇 걸음 앞서있던 노아가 빙글 몸을 돌려세우며 재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대답을 묻는 눈짓에 슬그머니 진열대로 시선을 돌린 재인이 뭐랄까, 하며 어렵사리 운을 뗐다. 

“……………. 이 정도면 그, 그냥, 부, 부부 아니야……?”

둥그렇게 뜬 눈을 끔뻑인 노아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기껏해야 ‘같이 살고, 먹고, 자고…. 그렇다고 가족…이라기엔 가족과 섹스를 하진 않지. 그럼 그냥 동거하는 애인 사이 아닌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개방적인 재인의 대답이 놀라운 노아가 오, 하고 짤막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갑자기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건너뛴다고?

“완전… 의외의 대답이네. 형이 그런 단어를 쓸 줄 몰랐어.”

“…왜.”

“아니, 그러니까……”

슬렁슬렁 뒤로 걸음을 옮기다가, 마침 지나가던 매대에 진열된 마요네즈를 집어 든 노아가 물티슈 옆에 플라스틱병을 툭 떨구며 가볍게 물었다. 

“형 나랑 부부 할 수 있어?”

“…….”

“할 수 있냐니까? 아, 참. 케첩도 얼마 안 남았더라. 거기 밑에 있는 거 하나 담아줘.”

“어….”

허리를 굽혀 케첩 병을 집어 드는 재인의 옆얼굴에 빤히 시선을 두고 있던 노아가 짓궂게 웃음 지었다.

“그냥 이제부터 공식적으로 부부 할까, 여보?” 

바닥으로 추락한 플라스틱병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들고 있던 걸 떨어트린 재인이 그대로 굳어있자, 노아가 킥킥 웃으며 다가가 떨어진 것을 주워다 카트에 담았다. 

“엽, 뭐? 무, 뭐라, 고?”

삽시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재인을 보며 노아의 어깨가 점차 들썩이기 시작했다. 역시 재인은 놀리기만 하면 반응이 곧장 와서 즐거웠다. 물론 재인이 이 생각을 알게 된다면 또 한 번 주먹을 휘두르겠지만 말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공공장소인 만큼 차마 큰 소리로 웃지는 못하고 키득거리기만 하던 노아가 재인에게 성큼 다가가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기왕 시작한 장난이니 크리티컬 한 번은 날려줘야지. 

“여.보.♡”

재인이 우뚝 굳었다. 마치 메두사의 뱀 머리를 보고 석상이 된 고대적 그리스인처럼 미동도 없었다. 놀리는 게 이렇게 재미있어서 어쩌지. 노아가 저를 손가락질하며 웃거나 말거나 재인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뻣뻣하게 멈춰 있을 따름이었다. 저러다 그로기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면 곧장 저를 때리기라도 할까, 노아는 카트와 함께 도주하기를 택했다. 그렇게 소스류가 있던 코너와는 한껏 멀리 떨어진 수산 코너에 다다랐을 무렵에야 재인으로부터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집에 따로 가자]

대충 예상하고 있던 범위 내의 반응이었으므로, 노아는 킬킬 웃으며 곧장 답장했다. 

[lol 따로 가면 일주일 동안 그렇게 부를 건데 감당할 수 있겠어?]

딱히 진심으로 하는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또 달리 생각하니 재인을 놀리기 위해서라면 일주일 내내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니. 생각보다 재미있을지도.

[어디야]

정확히 2분의 틈을 두고 돌아온 답장에 히죽 웃은 노아가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5분의 시간이 더 지나고 저만치서부터 후드를 푹 눌러 쓴 재인이 품에 몇 가지 물건을 안고 모습을 드러냈다. 카트를 밀어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란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노아가 화사하게 재인을 반겼다. 

“왔어?”

“그, 그래, 왔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카트에다 가져온 물건들을 와르르 떨군 재인이 소주를 사 가겠다 탄식처럼 덧붙이자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한 노아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왜 소주가 땡기냐는 질문은 웃음소리와 뒤섞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나 놀리는 기색까지 모를 수는 없었으므로 재인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노아의 등을 퍽 때렸다. 등을 맞고서도 노아는 계산대 앞에 다다를 때까지 저 혼자 간간이 피실피실 웃었다. 

물론 그사이에 재인이 그만 웃으라며 두어 번쯤 으르렁댔으나 노아의 웃음기를 잡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포기한 낯으로 무력하게 귀가한 재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언제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을 익숙하게 일별한 노아가 장 봐 온 것들을 정리해 냉장고며 벽장 등 있어야 할 곳에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마지막으로 물건을 담아왔던 재사용 비닐봉투까지 곱게 접어 수납함에 넣고 돌아섰을 즈음, 재인은 어느샌가 소파 한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있었다. 

익히 아는 자세였다. 노아는 재인의 저 자세를 ‘방어자세'라고 혼자 이름 붙여 불렀는데, 저런 자세를 하고 있는 재인은 매사에 상당히 방어적인 태도를 곧잘 내비쳤기 때문이다. 거실과 주방이 이어지는 애매한 중간쯤에 멈춰 선 노아가 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노아를 흘긋 보고는 말을 할 듯 말 듯 몇 번 어물거리는가 싶던 재인이 착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마트에서…… 그러니까… 진심이야?”

역시 그 주제구나. 마트에서 내비친 자신의 대답이 ‘확신을 얻고 싶어 하는' 재인에게 부족했으리란 건 예상할 수 있었다. 재인은 가벼운 태도로 내뱉는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분하는 것을 으레 어려워했으니까. 검지로 뺨을 긁적인 노아가 여상한 투로 대꾸했다. 

“진심이 아니면 말 안 했지? 가볍게 말고 무겁게 말해줄까? 형 도망 안 갈 자신 있어?” 

선택은 재인의 몫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노아는 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두어 마디는 훌쩍 지나갔을 법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재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무겁게까지는 됐으니까 진지하게 좀 말해봐. 난 그렇게 툭 던지면 못 알아듣는다고.”

혀끝까지 튀어나온 ‘바보'라는 단어를 혀 아래에 감추며 가벼운 한숨을 내쉰 노아가 재인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말 이전에 이미 행동으로 많이 드러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재인에게는 전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탓에 저보다 높이 위치한 재인의 눈을 가만 마주한다. 노아는 재인과 자신이 일반적인 수순을 밟아 형성되는 관계와는 그 형태가 사뭇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야, 관계를 정의하기 이전에 이미 서로가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되었으니까. 세상의 모든 애정이 용암처럼 절절 끓을 수는 없듯이 용암처럼 뜨겁지 않은 애정을 거짓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가지런히 모인 재인의 발등 위를 덮어 가리듯 손을 얹었다. 

“우리가 제대로 사귄 적은 없긴 한데, 형 말대로 이 정도면 그냥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긴 해. 나는 형 옆에 있으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형이 닻처럼 날 발붙이게 해. 여기가 내 자리 같아. 그래서 멀어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리고 난 형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거든. 그런 거면… 그냥 부부 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관계에 이름만 안 붙었다 뿐이지 이미 부부가 할 법한 일들 다 하고 있잖아?”

다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하나 풀어낸 재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는다. 제법 어이없는 발언이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므로, 노아는 잠자코 마른 발등에 두 손을 얹은 채 시시각각 표정이 달라지는 하얀 낯을 올려다보았다. 저 머리 안에서 어떤 생각이 이뤄지고 있는 걸까. 재인의 생각 패턴은 이제 거의 다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자신이 없었다. 멕시코로 훌쩍 떠났던 것처럼 또 도망가려고 하면 어쩌지. 노아가 혼자만의 불안 아닌 불안에 잠겨가고 있을 때, 머리를 뒤로 젖혀 소파 등받이에 툭 기댄 재인이 대답을 내뱉었다. 

“………적어도 사귀는 걸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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