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胡蝶之夢
※ 시점은 1894년이나, 편의상 일부 단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용어들은 현대식으로 표기하였습니다. (ex 잔듸 → 잔디)
※ cp연성이긴하나 논cp로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 약 스압주의
胡蝶之夢
김옥균이 죽었다.
죽기 전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총성이 울리고부터 선명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총 소리를 듣고 갑판 위에 올라온 사람들이 어떤 반응이었는지, 어떻게 그 위에서 죽지않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돌아 온 자신을 내려다보며 임금이 무엇을 명했는지까지도. 다만 기억나는 것은 죽기 전 선생이 전해달라 했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 말을 전할 때가 되어서야, 정훈은 자신이 왕에게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정훈의 간청으로 김옥균과 뜻을 함께했던 개화파 인사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누구는 짧은 기간동안 옥살이를 하고, 누구는 유배를 가고. 또 누구는 장형에 처해지는 둥 처벌은 있었지만 그 중에서 죽은 이는 누구도 없었다. 비록 자신의 청으로 살아난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 무슨 상관이랴. 정훈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김옥균에 대한 처분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 마냥. 효시를 시작으로 왕이 그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절차에는 일말의 주저가 없었다. 정훈은 그 모든 과정들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궁에 여러차례 불려나가며 안면을 튼 관리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생전 김옥균의 재산들을 처분하기 전 그가 정훈에게 서간을 보냈다. 혹시나 김옥균에게서 두고 온 물건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있을 리가 없었지만 정훈은 터덜터덜 걸어 버려진 김옥균의 생가로 향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10여 년 전에 주인을 잃은 집은 흉가가 된 지 오래였다. 안동 김씨에 당대 명망있는 세력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 그의 성품을 집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진 않았는데 -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마당 한 쪽에 쌓여있는 짐들이 익숙했다. 다른 사람의 짐도 조금씩 섞인 걸 보니 청국으로 떠날 때 배에 실었던 그대로 대강 쌓아놓은 듯 보였다. 가까이서 살펴본 김옥균의 짐은 썩 많지 않았다.
서책 몇 권과 낡은 옷가지가 전부인 짐을 천천히 풀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김옥균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짐이 이렇게 단촐할 이유가 없었으니. 어디서부터 계획된 것이었을까, 그는 어디에서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정훈이 쌓여있는 짐들을 내려놓다가 자줏빛 천으로 묶인 상자를 발견한 것은 그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었을 것이다.
"......."
상자를 열자 낯익은 옷이 나왔다. 한복인데, 정훈은 김옥균이 생전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낯이 익었다. 족히 십 여 년은 훨씬 전에 지어진 듯한 도포는 시간이 흐른 세월만큼이나 낡고 바래졌지만 여전히 고아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입은 적은 없지만 틈틈히 손을 본 듯 했다. 정훈은 가만히 옷을 내려다 보았다. 마당에 널려진 여타 다른 옷가지들처럼 던져놓으면 되는 일인데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옷을 들고 천천히 마루에 앉았다.
은은한 벽옥빛과 푸른 대나무의 색을 함께 담고있는 옷을 바라보며 한정훈은 몇 주 내내 미뤄왔던 기억을 끄집어 냈다.
"김옥균 선생님."
한정훈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집안이 몰락했을 때에도, 혼자서 연고도 없는 불란서로 떠날 때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또 그리고? 김옥균을 죽인 다음에는? 그가 죽은 후에 나는 어땠더라? 돌이켜보아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울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 그때도 마찬가지로 울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한다.
김옥균이 죽던 불과 몇 주 전의 기억이 벌써 몇 해는 지난 것 마냥 흐릿하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곱게 개인 부드러운 옥빛 천을 손으로 쓸어보며 정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정훈."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게 도무지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뒤뜰에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 내가 미치기라도 한걸까? - 생각하던 찰나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훈.”
정훈은 홀린 듯 일어났다. 천천히 걷고있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고, 깨닫기도 전에 정훈은 달리고 있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그럴수록 정훈의 심박동은 점차 빨라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 했다. 자신이 뛰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벽에 손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정훈은 터질듯 쿵쿵대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고개를 들었다.
"......!"
분명 십 수 년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집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을 생각하면 별채와 뒷마당 역시 그래야 할진데, 정훈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갈라진 나무 등걸과 무성한 잡풀들로 뒤덮인 초평(草坪)이 아니었다. 누가봐도 잘 정돈된 들판 위로 겨우 발목까지 오는 잔디가 정훈의 복사뼈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 잔디밭 위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마한 들꽃들부터 붉은 메밀꽃, 군자란, 석산(石蒜), 백양꽃 등이 만개하여 푸른 평원벽야와는 대조되는 짙붉은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그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삼주수(三珠樹)가 우거진 군락지가 있었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정훈은 그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무 아래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서는 푸른 수국과 도라지꽃, 그리고 처음 보는 꽃이 잔뜩 흐드러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정훈은 그 꽃이 우담화임을 알았다. 홍록(紅綠)이 만개한 정원 위로 벌과 나비 떼가 춤추듯 날고 있었고, 못에는 노랗고 붉은 연꽃들이 난발(爛發)하였다.
정훈은 혼란스러웠다. -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걸까? - 하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림(園林)을 둘러보던 정훈의 시선이 한 곳에 닿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훈의 머릿속을 아프게 누르던 잡념들이 삽시간에 걷혀 사라졌다.
“정훈.”
“...선생님.”
낯익은 그 얼굴을 보자 주변의 절경은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주만에 다시 보는 김옥균은 정훈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마지막으로 갑판 위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바닷바람으로 흐트러진 머리칼과 패인 볼 대신, 잘 정돈되어 넘긴 머리와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정훈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지만 단단한 어깨 아래로는 은은한 옥빛 도포자락이 늘어져있었다.
"와 줘서 고맙네, 정훈.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왔구만. 하하하."
옥균의 인사를 받은 정훈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참을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김옥균 선생이 내 눈앞에 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그 아무리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본 적도 없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릴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정훈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 앞의 김옥균이 헛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라 생각했다. 비취색의 도포를 두른 옥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선명했다.
미소짓는 옥균의 얼굴을 마주하며 정훈은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천하의 김옥균 선생이 그리도 허망하게 죽을 리가 있나!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쏜 총으로. 지독한 악몽을 꾼 것이 틀림없었다. 눈 앞의 그의 모습이 헛 것일리가 없었고, 자신이 김옥균을 죽였을리도 없다. 이리도 생생한 감각이 죄 거짓일리가 없다. 그래, 전부 다 내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훈은 웃음이 나왔다. 꿈을 진짜라고 착각해버린 자신이 우습지 않을 수 있으랴.
더 이상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훈은 한 걸음에 옥균의 곁으로 가쁘게 걸어갔다.
"선생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 광경은 전부 무엇이고요."
"예전 사용인이 꾸며준 정원인데 자네가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네. 내가 아끼던 뜰에 자네가 있으니 기쁘구만. 자, 이리 오지. 여기에 좀 앉게나."
옷자락을 걷어올리며 차림새를 갈무리하는 손도, 콧잔등에 걸친 안경도, 자신에게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도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옥균은 연못 근처에 자리한 누각으로 정훈을 안내했다. 정훈은 앞장서 걸어가는 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땅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게 선생의 등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불규칙적으로 걷는 선생의 보폭을 따라 걸으며 오른쪽을 바라보니 소나무 아래로 푸른 학 한마리가 앉아있었다. 정훈은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다 다시 선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지각(池閣)에 올라간 김옥균 선생은 한쪽에 있던 바둑판을 가운데로 끌어왔다. 정훈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선생의 앞에 앉았다.
대국(對國)과 함께 이어지는 대화는 지극히도 평범한,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이야기였다. 함께 읽었던 책의 내용, 불란서에서의 생활이나 조선의 미래에 대한 대화, 정원과 꽃에 관한 질문까지 무엇하나 특별할 게 없는 대화였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옥균은 평소처럼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웃었고, 옥균의 앞에서 거의 웃은 적이 없던 정훈도 함께 따라 웃으며 바둑을 두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옥균이 두 차례 모두 이겼고, 세번째 판 역시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시진 동안 바둑을 두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정훈은 은연중에 대화를 이어감에 어려움을 느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정훈의 뒷목을 쿡쿡 찌르는 듯했다. 웃고있는 선생의 얼굴이 어딘지 이질적이었다. 정작 선생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정훈은 점차 말이 줄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다가도 어딘가 자꾸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대화가 헛도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 나쁜 꿈 이야기로 빠질 것만 같았다. 김옥균 선생에게만은 그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았다. 누가 반기겠는가, 꿈 속에서 내가 당신을 죽였다는 말을.
그리고 마치 이런 정훈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옥균이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정훈?"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려던 정훈은 멈칫하며 말을 삼켰다. 언젠가 옥균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 질문이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알고 있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떠오르려는 생각을 누르며 정훈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누각 아래 연못 주변으로 푸른 달맞이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기석(棋石)을 놓으려던 정훈의 손이 멈췄다. 정훈은 꽃을 다시 바라보았다. 달맞이꽃이 원래 물빛이었던가? 왜 나는 이걸 당연히 여겼지? 생각하던 정훈은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목련과 사과꽃이 한 뿌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청학(靑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바둑돌이 놓인 자리를 내려다보던 정훈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곳은 어디입니까.”
“수는 안 두고 여즉 그런걸 생각하고 있었나?”
낄낄 웃는 선생의 말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생의 질문을 곱씹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달맞이꽃이, 아니지, 정원이 어딘가 이상해서, 왜 달맞이꽃이 푸른색이지. 왜 수국과 군자란이 함께 피어있지. -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정훈?- 처음 보는 꽃의 이름을 왜 나는 한번에 알 수 있었지. 이건 내 무의식인가? 어떻게 십 수년동안 버려진 집의 뒷마당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지? -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 선생께서는 이 곳에 어떻게 오게 되신거지? 푸른빛의 학이 정말 실존한다고? - 정훈? - 선생은 분명 그때, - 무슨 생각을 그리, - 배위에서, -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 아니지, 그건 전부 내 꿈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지. - 정훈. - 그때 청국으로 떠난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었더라. 왜 이리도 기억이 뿌옇지. - 정훈. - 피안화는 다른 말로 저승꽃이라고 부른다던데, - 정훈. - 선생이 걸치고 있는 도포는 뭐지? 내가 저 옷을 어디서 봤었지? 정훈. 왜 이 차림이 낯설지가 않지? 정훈. 선생님 잠시만, 잠시만 말씀을, 정훈. 머릿속이 소랍합니다. 아주 잠시만, 정훈. 선생님. 정훈. 정훈? 정훈.
정훈.
정훈?
선생께서 언제 또 내 이름을 불렀었지?
정훈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김옥균의 얼굴이 태연했다.
“선생님.”
“사람이 아까부터 자꾸 집중은 안 하고.. 왜 또 부르나.”
“이 곳은 어디입니까?”
“….”
“이번에도 대답을 피하실겁니까?”
묻는 정훈의 얼굴을 바라보던 옥균이 너털 웃음을 지었다.
“피하다니… 히히, 내가 언제.”
“대답해주십시오.”
“난 그냥 알고있었을 뿐일세. 자네가 깨달을거란걸.”
“그래서 말씀을 아끼셨다고요?”
“내가 설명해봐야 뭐하나. 때때로 어떤 일은 반드시 본인이 스스로 일깨워야만 하는 것도 있는 걸세.”
“…그래서, 이곳은 정말 저승입니까?”
“편한대로 생각하게. 뭐 말이야 많지 않은가. 하하하.. 저승, 구천, 연옥, 염라국… 또 뭐가 있었지. 불란서에서는 뭐라고 부르나?”
“….”
“농담 안 받아주는건 여전하구만 그래. 에잉… 아까는 잘 웃었으면서.”
“왜 저를 이곳으로 부른것입니까.”
“내가 부른건가? 자네가 온 거지.”
“….”
“여기가 어디인지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
“선생께서는, 정말로…”
“정말로 저세상 간 게 맞냐고? 히히…”
“…제가…. ㄱ…. 선생님을…”
“.....”
“정말로…. 제가,”
“정훈. 이렇게 좋은 이름인데 이때껏 불러준 적이 없어 미안하구만.”
김옥균은 정훈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이 웃는거야 여러번 봤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정훈은 옥균의 이 얼굴을 전에도 봤던 적이 있었다. 옥균의 입꼬리에 가있던 정훈의 시선이 그의 눈을 향했고, 그제서야 정훈은 깨달았다. 선생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건 그날 그 갑판 위에서 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이 미소도,
“왜 그리도 태연하셨습니까? 웃음까지 보여주시고.”
“그래서 싫었는가?”
“죽기로 마음먹으시고선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냔 말입니다.
“그게 뭐 별거라고. 히히히…”
“이렇게 다시 만나실 것도 알고 계셨던겁니까? 그래서 웃으실 수 있었던거고요?”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나도, 자네도. 여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은가.”
“...이 곳은.. 진짜일겁니다. 네, 진짜입니다. 이곳이 현실입니다. 선생님.”
“하지만 자네는 이미 깨달았잖은가.”
“….”
“이왕 깨달았으니, 내 정말로 가기 전에 자네에게 몇 마디 말만 더 전해도 되겠는가?”
김옥균의 말을 들은 정훈의 심장이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뜀박질을 한 것마냥 심박동 소리가 귓가에서 쿵쿵대며 울렸고,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정훈은 애써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손바닥을 몇 번이고 고쳐쥐었다.
“선생님,”
"정훈. 자네를 믿네."
"예."
"앞으로 자네가 가야 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리라 생각하네."
"물론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저희가 같이..."
"내가 없이도 잘 해낼걸세."
"…예?"
"이런 짐을 맡기고 떠나는 날 부디 용서하게나. 내 진심으로, 진심으로 자네에게 미안하네."
"선생님, 어딜... 어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마지막으로 자네 얼굴도 보았으니, 이제 되었네. 마음 편히 갈 수 있을거같으이."
"안됩니다, 선생님. 저, 저와 함께 가십시오. 가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가시는 길이 험하실테니,"
"자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그게 무슨....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는 말씀이십니까, 여기ㄴ..."
말을 채 마치지 못한 채 정훈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 현실이라고, 내가 당신을 죽인 것이 꿈이라고 선생이 말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옥균은 여전히 같은 미소로 정훈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날던 흰 나비가 정훈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자네가 나에게 했던 부탁을 내가 자네에게 돌려주겠네. 살아남게. 꼭 살아남아서 후일을 기약하게."
"싫습니다. 선생께서는 떠나시면서, 어찌 저에게 그렇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정훈."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제발..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선생님.”
“….”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날때부터 지금까지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살아왔습니다. 겨우 쥔 것은 이제 겨우 다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저는 돌아가봤자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선생님, 이 곳이 꿈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도 이 곳에 머무르게 해주십시오. 제발,"
"혼란스럽겠지. 두려울거야. 이해하네.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꼭 알아두게.”
“선생님.”
“언제라도 자네는 혼자가 아닐세. 앞으로 계속해서 알게될거야.”
"제발… 선생님,"
“이제 시간이 되었네. 고마웠어, 정훈.”
말을 마친 채 일어나 걸어가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경들이 서서히 어두워져갔다. 일어나 따라가려해도 두 발이 땅에 뿌리를 박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정훈은 쉼없이 옥균을 불렀으나, 마치 눈을 뜬 채로 가위에 눌리는 사람과 같이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옥균의 도포 자락이 사라지고, 연옥색의 잔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이윽고 빠르게 풍경이 바뀌었다. 푸르른 초목과 만개한 꽃으로 뒤덮인 방비(芳菲)한 절경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저잣거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아주 오래 전 조선 땅을 떠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던 아득히 먼 어느 날에, 정훈은 먼 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옥빛을 띈 단아한 도포와 당당하고 망설임없는 걸음 보폭, 꼿꼿하게 세운 등허리. 정훈은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던 지금과는 달리 훨씬 강하고 냉철해보이던 십 여년 전의 김옥균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눈빛만은, 자신을 보며 미소짓던 그때와 다르지가 않아서, 정훈은 눈시울이 시렸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명명하게 알고있는 시선 그리고 그 눈동자를. 왜 여즉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렇게나 많이 자신을 비춰주었는데도.
정훈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두 볼이 척척하게 젖어들어갔지만 정훈은 알지 못했다. 잔원(潺湲)하는 눈물이 정훈의 볼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체루(涕淚)에 젖은 정훈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갔다. 눈물을 아무리 닦고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궁으로 들어가는 선생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옥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훈은 선생을 불렀다. 아무리 외치고 울어봐도 멱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옥균의 모습이 사라진 풍경 위로 흰 나비가 날았다. 온 몸이 천근처럼 무겁고 눈 앞이 어둑한데, 나비는 사라지지 않고 정훈의 오른쪽 팔에 앉았다. 하지만 정훈은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김옥균을 불렀다. 선생님, 김옥균 선생님. 선생님. 저에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더 해주십시오. 선생님, 어찌 이리도 이기적이십니까. 남은 저는 어찌해야합니까, 선생님. 눈 앞이 온통 칠흑같고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진것만 같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한단 말입니까. 제발 대답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정말 왜 하필, 왜 하필 저입니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되지 못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 곁에서 제발, 지금이 단지 일장춘몽에 불과한걸 압니다.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이곳에서 당신과 살아가게 해주면, 그러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평생 도망치기만 했으니, 지금이라고 그렇게 하면 왜 안됩니까. 예! 맞습니다. 저는 평생 도망쳐왔지만,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을 만난 후에 그제서야 있을 곳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나비가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이제는 떠나고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냥 이 곳에서 머무르게 해주십시오. 제발.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선생님, 선생님.
“정훈. 정훈!”
들리는 목소리에 정훈은 눈을 떴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잠시 정신이 들지 않아 황망하게 일어나려다 넘어지니, 그런 정훈을 잡아주는 팔이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건가?”
“…종윤 선생님?”
정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짐이 가득 쌓인 김옥균의 택사(宅舍) 마당 앞, 대청마루에 앉은 채였다. 위를 올려다보니 자신을 바라보는 종윤의 표정이 황당해보였다. 자네는 여기까지 와서 잠이 오는가? 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던 탓에 목과 허리가 굳어 뻐근했다. 황급히 마루를 짚고 일어나니 정훈의 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정훈은 허둥거리며 그것을 집어들었다. 정훈의 손을 내려다보는 종윤의 표정이 미묘했다.
“…이건,”
“이건 또 어디에 있던건가? 이게 왜.. 옥균이 청으로 떠나는 길에 이걸 챙겼다고 하던가?”
“이 옷을 아십니까?”
“어찌 모르겠나.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옷이라고 그리도 귀히 아끼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입으면 닳아질까 뭐라도 묻을까 걱정하며 잘 꺼내지도 않고, 정말 중요한 날에만 꺼내입곤 했다네. 보게, 그 세월이 지났는데 여즉 새 옷같지 않은가. 얼마나 애지중지했으면.”
“….”
“잘 입지도 않으면서 늘 수선을 맡기고, 그것도 무슨 일이 날까 싶어 자기가 직접 보는 앞에서… 에휴, 되었네. 이런 얘길 들려주려 온 건 아니고.”
“그러고보니 이 곳엔 어찌 오셨습니까?”
“자네를 찾아갔는데 이 곳으로 갔을거라 말하길래 왔네. 오랜만에 이 집도 볼 겸해서.”
“저를 찾으셨다고요?”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옥균이 맡긴.. 일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동지들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도포를 내려다보던 정훈은 고개를 들어 종윤의 얼굴을 마주했다. 갑자기 마주치는 눈에 종윤은 맞물리는 시선을 길게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정훈은 그것이 섭섭지 않았다. 막역지우를 죽인 사람 앞에서 이성을 차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먼저 대문으로 향하는 종윤을 따라 일어나며, 정훈은 도포를 들고 일어났다. 흘끗 뒤를 돌아보던 종윤의 시선이 도포에 향했다. 그래, 가지고 가세. 다른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남기세나. 나야 꼴도 보기 싫지만… 옥균이는 이걸 바랄걸세. 말을 하며 종윤은 정훈이 들고있는 옷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종윤의 손이 가는 대로 정훈 역시 시선을 내렸다.
“왜 그러나 자네?”
갑자기 발걸음이 멈춘 정훈에 놀란 종윤이 물었다. 정훈은 자신의 손에 들린 옷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연옥빛 도포에는 온통 꽃과 나비의 자수들이 놓여져 있었다. 왜 아까는 보지 못했었지. 정훈은 문득 아까의 일을 떠올리곤 뒤뜰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금 가 봐야 아까와 같은 절경은 없겠지. 있을 턱이 없다. 알고 있었음에도 정훈은 입 안이 썼다. 정말 김옥균 선생이 다시 그 곳에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영 헷갈렸다. 다 썩어 무너져가는 집이 진짜인지, 무릉도원을 눈 앞에 옮겨놓은듯 했던 아름다운 정원이 진짜인지. 당췌 둘 중 어디가 현실인지 아직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우려 고개를 훼훼 젓자 종윤이 그걸 보고 픽 웃었다. 잠이 덜 깼나? 무슨 꿈을 꿨길래 이래? 정훈은 대답하지 않으며 종윤과 대문을 나섰다. 이 집에 들어올 때에는 혼자였는데, 나갈때는 둘이 되었다. 정훈은 옥균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종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다시 텅 비어 적막한 집 마당으로는 어디에서 온 건지 모를 흰 나비 한마리가 날아들어왔다. 나비는 한참을 날아다녔다. 그 모습이 꼭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집안의 썩어가는 기둥부터 땅에 떨어져 깨진 수키와, 기둥 아래 주춧돌, 바닥에 돌멩이, 다 부서진 대문, 한쪽에 쌓여있는 짐들까지. 한참을 날며 차례차례 내려앉은 흰 나비는 허공을 맴돌다 정훈이 앉았던 마루 위로 내려앉았다. 볕이 내리쬐는 마루 위에 한참을 머물던 나비는 다시 날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비의 날개짓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김옥균의 사택은, 그제서야 온전하게 고요해졌다.
※ 정원 묘사 장면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 동물들에 대해 찾아보시면 왜 둘이 있던 공간이 현실이 아닌지 더 명확하게 아실 수 있습니다 (거의 써놓긴 했는데 안 쓴 것도 있어서)
※ 꿈에서 깨기 전 정훈의 독백을 드래그하시면 나머지 말들이 나옵니다
※ 제목은 해석 안 해도 다 아시겠죠? 호접지몽입니다 원래 호접몽으로 하려다가 네글자가 더 멋있어보여서 걍 이렇게 함
이거 쓴다고 나흘동안 글리프 못 들어온거 실환가? 근데 쓴게 똥이야
사실 초연 곤투때 쓰다가 던진 글이었는데 지금 아니면 진짜 평생 안 쓸거같아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괴감 존나 드네요 글 너무 못쓰고 묘사도 못하고.. 중세~전근대 이 시대에 쓰였던 말들 너무 몰라서 어유야담 옆에 펼쳐놓고썼음… 어우당 선생님 감사합니다
진짜 캐붕 망했네요 창피해서 언제고 비번 걸 수 있음ㅜ
이런 글이라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 왜캐 재미없냐 근데 그래서 이게 뭔 내용인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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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독창적인 달팽이
너무좋아요... 선생님은 정말 천재십니다... 정말 최고에요...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장면이 너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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