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어바등-재희무현

[재희무현] 스무 살 첫 눈 (2)

화재사건을 겪지 않은 행복한 세상의 재희x이런저런 사정으로 졸업 못한 무현

(1): https://glph.to/owds6h

-둘 다 대학생입니다

“이건 내 친구…의 친구 이야긴데.”

술집에 모여서 어묵탕 하나 시켜놓고 맥주만 퍼마시고 있던 친구들이 저들끼리 떠들다가 재희를 쳐다봤다. 웬일로 김재희가 놀자는 부름에 답했다 했더니 와선 맥주 한 모금 겨우 마시고 죽을 상으로 앉아 있어서 그냥 무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술이 들어가 기분이 조금 좋아진 친구들은 기꺼이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응. 뭔데.”

“걔가, 어, 꽤 잘생겼거든?”

“하하…. 응, 그래서?”

친구들은 최대한 진지하게 들어주는 척 했다. 누가 봐도 자신의 이야기건만 고민에 정신이 빠져서 잘 둘러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걔가 호감 가는 사람이 있어서 연락도 자주 하고 데이트 약속도 잡았는데 아무 반응이 없더래.”

“어어, 그랬구나.”

옆자리의 친구가 맥주잔을 재희의 앞으로 밀어주자 재희가 무의식적으로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오히려 꾸미고 갔더니 ‘너 데이트 가니?’하고 묻더라는거야.”

“저런….”

“완-전 관심 없어보이는데 포기하라고 해.”

흥미를 잃은 남자들과 달리 양손에 턱을 괴고 눈을 반짝이며 듣던 여자들이 안타깝게 반응하자, 대화하던 상대를 빼앗긴 남자애가 툴툴거렸다. 넌 맥주나 더 처 마셔. 바로 옆에 앉은 여자애가 남자애의 입에 병맥주를 꽂았다.

“근데….”

“근데?”

“알고보니까 그 사람이 나보다 여덟 살이 많더라고.”

“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주어를 자신으로 잡았지만 친구들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어차피 재희 본인 이야기라는 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날, 아니 걔를 연애 상대로 안 보는걸까? 너무 어려서?”

“그럴 듯한데.”

“나라도 여덟 살 어리면 좀.”

“근데 우리 나이에 여덟 살 어린거면 초등학생이잖아. 비교가 안 되지 않냐?”

“어쨌든 그 분도 걜 볼 때 그렇게 생각할테니까 비슷할 듯?”

재희의 말에 친구들 사이에서 잠깐 소란이 일었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였다. 여덟 살은 좀 많이 어리지. 그 대답에 재희의 이마가 테이블에 쿵 부딪쳤다. 어느샌가 재희의 맥주 잔은 텅 비어 있었다.


“흐에헤엥, 무현이 형이다아앙~”

“….”

“아, 안녕하세요.”

무현은 테이블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 앉은 재희를 보고 이마를 짚었다. 덜 취한 친구들은 무현을 보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얘 많이 마셨어요?”

“글쎄요…. 제가 알기론 별로 안 마셨는데.”

“500 한 잔? 아니다, 허찬준. 너가 얘꺼 한 번 더 시켰냐?”

“고민 많아보이길래 하나 시켜줬지.”

“그럼 500 두 잔이요.”

500 두 잔에 이 꼴이 됐다고? 무현이 의심과 허무가 섞인 눈으로 재희를 내려봤다. 친구들도 멋쩍게 뺨을 긁거나 시선을 돌렸다. 얼마 안 마셔서 금방 깰 것 같아 잠시 뒀다가 보낼 생각이었다는데 그 사이 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무현은 잔뜩 취해 혀가 꼬부라진 친한 후배의 전화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달려왔다.

“하…어쨌든 이왕 왔으니까 제가 챙길게요.”

“네, 넵.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선배님.”

무현이 낑낑거리며 재희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이 그를 도와 무현의 어깨에 기댈 수 있게 도왔다. 재희가 휘청거리며 기대다가 무현의 목을 끌어안자 무현이 끙끙거리며 그를 데리고 가게를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은 문이 닫히자마자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착하게 생겼다. 스물여덟으로는 안 보이는데. 재희 취향이 순두부상이었나?

어쨌든, 저 분이 재희의 그 분인건 확실하다. 이 결론에 꼴아 있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재희는 이 문장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멍하니 처음 보는 벽지와 조명을 쳐다보던 재희는 숨을 다섯 번 쉬고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좁은 원룸이었다. 싱글침대 하나에 책상 겸 식탁 하나, 그리고 그 너머가 바로 현관이었다. 재희는 제 몸을 훑어봤다. 어제 입은 옷 그대로였다. 벗겼다가 입힌 흔적도 없었다. 뭣보다 침대는 혼자 누우면 공간이 빠듯해서 누가 같이 잘 수 있는 너비가 아니었다. 술김에 누구랑 사고친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고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두리번거리던 재희는 책상 위의 노트북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까이 다가가 노트북을 열어보자 잠금화면이 떴다. PMH. 아. 이런 망할.

재희가 허둥지둥 사라진 양말을 찾아다니다가 구석에서 막 발견하고 급하게 신었다. 아직 한 짝을 덜 신었는데 도어락이 띠리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 깼어요?”

“…하하하, 안녕하세요 선배.”

“어디 급하게 갈 일 있어요?”

“네? 네. 아침 수업이-”

“오늘 일요일이에요.”

“….”

“국밥 사왔으니까 먹어요.”

“네.”

재희는 무현이 시키는대로 얌전히 책상 겸 식탁에 앉았다. 노트북을 대충 침대 위로 치우자 무현이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올렸다. 잘 먹겠습니다. 무현이 숟가락을 들고 중얼거리자 재희도 따라서 웅얼거렸다. 쓰렸던 위장에 뜨끈한 국이 들어가자 좀 속이 편해졌다. 재희가 연거푸 국물을 떠먹자 무현이 물컵을 건넸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재희가 눈치를 보며 무현에게 물었다.

“저 혹시…제가 취해서 뭔가…잘못한 게 있나요?”

“음. 어떤 걸 말하는 거죠?”

“…토…했다거나?”

“안 했어요.”

가장 큰 실수는 안 한 모양이다. 재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는 일렀다. 무현이 ‘없다’고 대답한 게 아니라 ‘어떤 걸 말하는 거냐’고 물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선배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침대가 좁던데.”

“아, 과방 가서 잤어요.”

“…네?”

“원래 수위가 학생관 문을 다 잠그는데, 다행히 어제 밤에 과방에서 밤 새던 놈들이 있었더라구요. 몰래 열고 들어가서 잤어요.”

“죄송합니다…….”

젠장. 재희는 돌을 씹는 기분이었다. 국밥은 절반 넘게 남겼다. 무현의 성의를 봐서라도 다 먹어보려고 했지만 원래 입이 짧은 데다 아침은 잘 안 먹었고, 거기다 신경 쓰이는 상대의 자취방이라는 점이 자꾸 입맛을 떨어트렸다. 재희가 의미 없는 숟가락질을 몇 번 하는 것을 본 무현은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남은 음식물을 정리했다.

밥을 다 먹자마자 집을 나가려는 재희에게 무현이 씻고 가라며 붙잡았다. 재희는 무현의 말을 듣고서야 세수도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무현의 집에서 재빠르게 꺼지는 대신 세수도 안 하고 밖에 나가는 애로 찍히는 편이 나을지, 이왕 신세진거 아주 대차게 신세지고 나가는 편이 나을지 선택의 기로에 섰던 재희는 고민도 하지 않고 후자를 골랐다. 어차피 술에 취해서 잠도 자고 밥도 먹었는데 이제 와서 더러운 애로 찍히는 건 사양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재희는 제 몰골에 기겁했다. 술 때문인지 얼굴은 땡땡 부어 있었고 눈도 부어서 쌍커풀이 붕어입술마냥 튀어나왔다. 얼마나 몸부림치고 잔 건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의 일부는 피어싱에 걸려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다. 세수를 안 했으니 눈꼽이 있는건 당연했다. 재희는 거울에 비친 제 꼬라지에 절망했다. 이딴 모습으로 무현 선배랑 마주 앉아서 밥을 처먹어? 미쳤구나 김재희!

세수를 꼼꼼히 하고 났더니 떡진 머리가 보였다. 하…. 머리까지 감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이제 보니 어제 샤워도 못하고 자서 몸에서 냄새가 날까 걱정됐다. 재희는 최대한 제 모습을 무현에게 보이지 않고 나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화장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응. 밥은 먹었어? 그래. 나? 나야 뭐,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맙다.”

살짝 벌어진 문 틈새로 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는 무현과 자신 뿐이었으니 아마 통화하는 소리 같았다. 재희는 재빠르게 빠져나갈 기회다 싶어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뭐? 갑자기 뭐야. 하하. 그래. 나도 사랑해.”

…재희의 발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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