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30. 잠수하는 조각
드림 - 핑가x마브러드(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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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가마브] 잠수하는 조각
RE: 회선 연결에 대한 건으로 연락드립니다.
보낸 사람 gracethebest@pacific.buoy
받는 사람 mavrud2@white.br
엔지니어 ㅇㅇㅇㅇ님께.
안녕하세요, 퍼시픽부이 엔지니어 그레이스 이자 핑가다.
내 뒤쪽에 꼰대가 다른 직원 잡고 있어서 메일 꼬라지가 이런데 니가 이해해라. 걱정 마, 추적 안 되게 보내니까. 오, 방금 목소리 올라갔다. 하여튼 꼰대는 어쩔 수 없다니까.
씨발 저번 메일은 고문이야. 알아?
맨날 해저에서 먹고 자고 일하면서 임무가 있을 때에나 밖에 나가는데 해저에서 맨날 얼굴 보는 인간은 제대로 된 놈이 없어. 상사는 꼰대 동료 하나는 흥미충이고 나머지 하나는 백남충임. 맨날 보는 인간 네 명 중에 세 명이 저따위고 멀쩡한 한 명은 타겟이고.
심지어 제일 일 못하는 게 백남충인 건 아냐? 이 새끼는 기술도 고만고만한 게 일머리는 다 뒤졌어. 그레이스가 여자라고 나 빼고 그리스 루트 진행한 게 말이 되냐? 내가 주축인 파트에서? 그래, ‘빗자루가 또?’인 상황이라고. 염병, 잠입을 지시한 게 럼만 아니었으면 지시한 놈부터 쏴 죽여 버렸을 듯.
그런데 누님은 프랑크푸르트 이후로 거기서 대기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셨다고? 그것도 그 새끼와 함께? 코른 이야기는 하지 마. 걔가 인간이냐? 총 쏘는 AI지. 씨발 인간 둘이나 인간 둘 로봇 하나나 무슨 차이야?
뭐가 문젠데. 내가 그 새끼 싫어하는 거 알면서 굳이 왜 이래? 작업 막바지라서 나도 바쁘거든? 자주 못 만나는 건 당연하잖아, 근데 그새 심심해졌어? 아니면 뭐 심사 꼬인 게 있어? 난 누구랑은 달라서 아주 얌전하고 조신한데, 아, 설마 걔 이야기해서 그래? 타겟?
미치겠네. 원하면 말 해. 뭍으로 나갈 때 그레이스로 나가서 누님이랑 파자마파티 해줄 테니까. 걘 내가 남자라는 거 아직도 모른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날 밤에 한 건 타겟이랑 다른 여직원들이랑 내내 빗자루 욕하면서 잡담하다 단체로 곱게 수면을 취한 게 전부인데.
아니면 그레이스가 취향이야? 누님 여자도 돼? 아니면 파자마파티가 버킷리스트야? 젠장, 조직에 여자가 몇인데 아직도 파자마파티 안 했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키르도 있고 베르무트도 있고 키안티도 있잖아. 조직 남자들 질겅질겅 씹으면서 놀라고. 나는 빼고. 아, 나랑 파자마파티 하고 싶은 거면 말해. 왜 그딴 걸 하나 싶었는데 제법 재밌더라.
어쨌든 나랑 타겟 사이에는 타겟의 일방적인 끈끈한 여성동지의식밖에 없어. 내가 타겟이 뭐가 좋다고 아끼겠냐? 말했잖아, 정상적인 새끼가 걔뿐이라고. 말이 제대로 통하는 애가 걔뿐인데 어떡함? 퍼시픽부이에 멀쩡한 사내새끼는 멸종하고 없어. 나 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몰라. 어쨌든 그렇다고. 누님이나 잘 해. 뭘 잘하라는 거냐면 하……. 모르겠고 어쨌든 나는 아무 문제없다고.
잠입 끝나면 공적 내세워서 다음엔 꼭 누님 붙여서 프랑크푸르트 임무 보내달라고 해야지. 그 새끼가 간 데는 다 가서 호화롭게 즐길 거라고. 그런 게 내 맘대로 될 리가 없다고 생각 했냐, 지금? 근데 그럴 수도 있어, 잘 하면.
지금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거든? 아무래도 이상한 걸 하나 봐서 말이야. 지금 말하면 네가 날 돌은 놈 취급할 것 같아서 말 안 할 거고 사실 지금 나도 내가 좀 미쳤나 싶긴 하거든? 해저에 사람이 너무 오래 있으면 돌아버리는 건 당연하긴 한데, 그래도 뭔가 좀 껄끄럽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지나치기는 좀 이상하다고. 뭐 액세스도 있겠다, 눈치 봐서 몰래 한 번 이것저것 돌려봐야지.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헛일 한 번 한 거고, 진짜 잘되면 어쩌면 진에게 크게 한 방 먹여줄 수도 있거든? 진짜 미친 발상이기는 한데 난 제법 기대하고 있어. 이게 그건가? 여자의 촉? 잘 되면 너한테만 미리 힌트 줄 테니까 진을 어떻게 조롱할지 미리 고민해두라고. 그 새끼랑 다신 상종할 생각 안 들 테니까. 그래, 아무렴 그래야지.
이 건이 진짜면 흥미충새끼는 좀 잘 대해주려고. 내가 이 건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건 그 흥미충새끼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벌렸기 때문이거든. 개똥도 쓸 데가 있다는데 그거 진짜일 수도 있겠다. 무슨 소리냐고? 한국의 속담이야.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어딘가에는 쓰임새가 있다 이거지. 타겟이 알려줄 때는 맥시멀리스트의 헛소리 같은 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제 슬슬 잠입도 끝날 것 같다. 아, 좆같은 해저도 구정물 커피와도 이제 안녕이지. 둘 다 사람 미치게 하는 데가 있어. 인어공주가 괜히 포크로 머리 빗고 다닌 게 아냐. 그거 미친 거야, 해저에 너무 오래 있어서. 커피 담당이 아르젠토가 된 것도 당연하지. 흥미충새끼가 매번 부려먹는 거 말리기는 하는데 속으론 이해해. 난 첨에 타겟이 커피 맛없다고 욕할 때 부친국가 오지게 어필한다고 생각했거든? 아니더라. 걘 그냥 정상적인 미각을 갖고 있었던 거야. 뭐, 커피 잘 내리는 건 부친국가 어필인거 맞긴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진짜 솜씨가 좋은 건지 구정물커피로 올려치기 된 건진 잘 모르겠다. 빗자루새끼는 맨날 타겟 커피 받아 마시면서 계집계집 지랄하는데 잠입 끝나고 그 새끼 구정물 커피에 익사시키는 게 내 첫 번째 버킷리스트임. 혹시 이 이야기 읽으면서 기분 안 좋아졌으면 나중에 누님이 커피 내려주라. 구정물맛이 나도 용서해줄게.
해저에 5년간 묻혀있으면서 버킷리스트 진짜 많이 늘어났는데 너무 많아서 내용이 기억 안 날 지경이다. 나중에 항목별로 프린트해서 너랑 하고 싶은 건 네 방에 붙여 놓을 거야. 왜 내 버킷리스트에 어울려줘야 하냐면 이유는 없지만, 아니 있지, 내 앞에서 진새끼 이야기 꺼내놓은 횟수가 몇인데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아, 상상되네. 니가 진짠지 가짠지 모를 표정으로 무슨 잔소리 할지 아는데. 당장 전에 만날 때도 그 잔소리 했고 다음에 만나도 또 하겠지. 근데 시발 나랑 만난 거랑 진새끼 만난 거랑 무슨 상관인데? 누님이 이 세상 누구와 얼마나 만났든, 진새끼랑은 평생에 한 번을 만나도 심각하게 많이 만난거야. 알아? 한 번도 많다고. 근데 한 번이 아니네?
아예 널 내 버킷리스트마다 끼워서 다녀야겠어. 내가 또 기억력이 좋아서 예전에 어디 가서 뭐 했는지 기억하거든. 했던 건 싹 빼고 안 한 거만 넣었는데 리스트 좆나 길다. 각오하라고. 내가 이 빌어먹을 퍼시픽부이만 나가면 밥도 못 먹고 그 짓만 하고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알프스 경치를 5분 구경하고 내려오는 일은 없단 말이다. 이제 말하는 건데 씨발 그게 구경이냐? 눈에 경치 한 번 닦은 거지. 뭐부터 할까 고민이 되기는 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건 드라이브네.
이 빌어먹을 잠입이 끝나면 제일 먼저 드라이브 가자. 사우스본 기억 나냐? 본머스에 있는 거기. 왜, 전에 놀러갔던 데 있잖아,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산책했던 거기. 이 우라질 해저 말고 해변으로 가자고. 바다는 바라볼 때에만 아름다운 거니까. 서핑도 승선도 사양한다. 드라이브하면서 아이스크림 먹고 니가 고른 식당에서 술도 하고 그러자. 왜인지 영국에선 누님이 고른 식당 아니면 죄다 예쁜 음식쓰레기를 내오더라고.
빌어먹을, 방금 지령이 왔는데 럼이 보낸 거야. 아니, 그 애새끼를 왜 내가……. 내 참, 어쩔 수 없군. 그럼 다음엔 뭍에서 보자고, 티나.
마브러드는 한 번 읽는 것으로 메일 전문을 기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브러드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을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삭제버튼을 눌렀다가 도로 경고창을 닫기를 여러 번, 그는 결국 삭제버튼을 누르는 대신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 넣었다. 말도 안 되는 어떤 만남을 상상하면서.
이후 마브러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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