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22. 사랑을 담아 꽃다발을
드림 - 와카x유미(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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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아직 초기라 그런지 아무도, 심지어 감독님마저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우시지마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컨디션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눈에 띄게 나빠지지는 않지만 스스로는 알 수 있고, 미세하지만 경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 그러나 우시지마는 모든 것을 납득했고 일단 숨기기로 했으며 그 어떤 방안도 찾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병에는 명확한 치료법이 있고 자신은 그 치료법을 쓸 수 없었을 것이므로.
3학년 봄고 미야기 대표결정 결승전 바로 전날 밤, 우시지마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현관에 대고 진한 분홍빛 꽃을 토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시지마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짝사랑을 시작한 모든 자가 꽃을 토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내심 억울하기도 했다. 짝사랑은 괜찮다. 아니, 괜찮지 않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짝사랑이 배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키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하나하키병의 치료법은 아주 명확했다. 상대에게 고백 받거나, 상대에게 고백할 것. 그러나 우시지마는 애석하게도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게 누구일지는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 누구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애가 내일 갑자기 자신에게 고백할 리는 없었다. 심지어 그 애 또한 하나하키병에 걸려있었다. 여간해선 누군가가 보는데서 꽃을 토하지 않았기에 우시지마는 그가 토하는 꽃을 딱 한 번 보았다. 붉은 빛을 띈 하얗고 앙증맞은 꽃이 한 줄기에 우르르 달려있었다. 제법 토하기 괴로운 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우시지마는 그 꽃이 자신을 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야, 어느 구석을 보아도 그 손톱만한 꽃무더기와 저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토한 꽃을 직접 만지지 않는 한 전염될 일은 없는데다 고등학생의 연애란 죽어도 고백 못할 만큼 심각하게 꼬이기도 힘들었기에 그 애는 여전히 배구부에 들락날락거렸다. 당연히 감독에게 알렸고, 감독도 그저 부원들에게 꽃을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줄 뿐이었다. 고백하고 싶은 여자애가 있는데 어떻게 고백할지 고민된다면 만지던가, 하는 농담 아닌 농담과 함께.
우시지마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는 사랑을 알리는 분홍 꽃을 들고 더없이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류의 인간이었다. 그래,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분명 경기를 보러 올 그 애에게 냅다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것, 아니면 초반이라 숨길 수 있을 테니 철저히 숨길 것. 보통이었다면 당연히 전자를 고르리라. 그러나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경기 당일 하나하키병 초기인 것과 경기 당일 차여서 친구자리마저 잃어버리는 것. 혹은 미안한 마음에 그 애가 경기를 보지 않고 돌아가 버리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제 컨디션에 큰 영향을 미칠까?
답은 더없이 명료하게 나왔다. 초기에는 하루에 한두 번 밖에 토하지 않는다. 게다가 경기 중에는 경기에만 집중하니 그 애를 떠올릴 일도, 꽃을 토할 일도 없다. 그러나 명백히 거절을 당하게 된다면 그 때의 자신은 단시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도 본인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우시지마는 제 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마음이니 충격은 크리라.
답은 나왔다. 마인드컨트롤만 잘 하자고 다짐하며 우시지마는 꽃을 제 머리맡에 내려두었다. 분홍 머리에 보랏빛 눈을 한 유미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무섭게 성장하는 카라스노의 실력은 분석한 전력과도 차이가 났고 자신의 컨디션은 어쨌든 정상에서 살짝 아래로 내려가 있었으며 어쩐지 오늘따라 유미에게 정신이 팔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울기 시작한 유미를 달래며 우시지마는 제 결정이 옳았음을 오히려 확신했다. 이런 애에게 거절당했다면 오늘 경기를 뛰기는커녕 벤치를 벗어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최선을 다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했으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째서 그는 자신보다도 더 분해하는 것일까.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고 부글부글 끓는 동시에 텅 비어 허망한 마음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제 앞에서 이렇게 울어버리니 신기하게도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졌다. 분해서 울어버릴 만큼 속상했을까. 지금 패배했다고 해서 영원히 패배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 우시지마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분하고 슬프고 허무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나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히나타 쇼요 또한 분명 고등학교에서 멈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 ‘다음’이 있었다.
제가 달래고 나서야 유미는 조금씩 진정했다. 우시지마는 문득,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유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얼굴 전체가 제 손에 감싸일 것만 같은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우는 얼굴까지 귀여웠지만 이왕이면 웃는 게 더 좋았으니까. 뒤늦게야 함부로 만진 게 실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일은 저지른 다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았는가, 카와사키 유미가. 역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부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이미 대학 진학이 확실시된 그는 매일 출석해 훈련을 하고 후배를 도왔지만 아무래도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후배들만큼 필사적일 필요는 없었다. 진학반인 그를 볼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물론 변함없이 그는 좋은 친구였지만.
우시지마는 오랜 고민 끝에 고백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결말이 어떻게 나든 유미의 하나하키병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고백할 셈이었다. 물론 대학에 가고도 유미의 병이 낫지 않으면 그 때엔 과연 고백해야겠지만, 우시지마는 조금 더 이 병을 안고 가고 싶었다. 괴롭고 힘든 병인 건 맞았지만 가능하다면 오래 이 병을 가지고 가고 싶었다. 어쩐지 제가 토해내는 꽃과 이별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전히 바보 같은 생각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마음 부풀기 좋은 나이였다. 혹시나, 유미가 차인다면 자신도 은백합을 토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기 좋은 나이 말이다.
그는 저가 토한 꽃 끝부분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평생 꽃에 관심 따위 없던 자신이 처음 찾아본 꽃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름이 뭔지도 몰라서 찾아내는 데에 한참이 걸렸다. 꽃 이름은 영산홍, 꽃말은 첫사랑. 참으로 그 애와 닮은 꽃이어서 우시지마는 피식 웃고야말았다. 마치 꽃잎 같은 머리카락, 환하게 웃는 얼굴. 과연 그 애는 쓰고 달기 짝이 없는 우시지마의 첫사랑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은백합을 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불어, 카와사키 유미가 뱉은 꽃이 마로니에꽃이라는 걸 안 것은 은백합을 토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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