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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커미션 23. 못해준 말들이 남아있는데

2차 - 제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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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미츠는 여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대로라면 상부에 제출했어야 할 물건을 들고 오늘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전원을 껐다. 상부에 제출하거나, 혹은 완전히 파괴해야하는 물건이었지만 아직도 그의 손에 멀쩡히 들려있었다. 아니, 부수어야 한다. 과거는 과거일 뿐, 친우를 위해서라도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건을 부수려 세게 잡고 던지려 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것이다. 친우의 목소리가.

‘너라면 분명 임무를 끝까지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라고, 들려오는 것이다.

히로미츠는 도저히, 가쁜 호흡이 섞인 그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휴대폰에 그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고받았던 메일은, 지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제법 있었지만 목소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휴대폰을 볼 때마다 히로미츠의 귀에는 그리운 친우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기억 중의 하나가 목소리라고 한다. 함께 있던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나도, 그 때 맡았던 향기도, 그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생각날 때에 목소리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히로미츠는 흉내 낼 수도 있을 만큼 정확하게 목소리를 기억했다. 마치 매일같이 그 목소리를 새로 듣는 것처럼.

‘너에게는 형도 있고 친구도 있으니까,’

그래, 이렇게 문득문득, 언제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말이 귀에다 직접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이다.

친우에 대한 것이 남들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말을 잃었을 때 되찾아준 사람이며, 가장 오래 함께한 친구였으며,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함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한 전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 죽은 친우의 목소리를 아직 기억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부모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도 잊을 만한 기간인데 말이다.

오늘도 역시 실패한 히로미츠는 잠입시절 쓰던 휴대폰을 다시 제 품 안 깊숙이 넣어두었다. 이걸 버리지 못한 걸 네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제정신이냐고 혼을 낼까, 아니면 바보 같다고 웃을까. 어느쪽도 좋으니 부디 슬퍼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은 더욱. 히로미츠는 마지막으로 옷을 가다듬고 화장실을 나섰다. 형의 걱정 어린 눈을 애써 무시하고 그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올렸다. 그저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하자 타카아키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그저 당연히 와야지, 하고 대답했다. 오늘은 친우 후루야 레이의 때 늦은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무도 없어,’

오늘따라 목소리가 자꾸 생각이 났다. 그런 말을 언제 했더라, 눈에 띄는 외모로 차별받아왔으면서도 씩씩하게 지내는 친구였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있는데 왜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던가? 히로미츠가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타카아키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아, 지금은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합동장례식이 곧 시작이었다.

그래, 늦게나마 장례식을 치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렇게 되뇌지 않으면 속이 문드러질 것 같았다. 이마저도 조직을 완전히 소탕했다는 보장이 있었기에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떻게 보장이 되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지만, 아주 드물게 세상에 그런 게 보장이 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이 검은조직 건처럼.

저기 보이는 관들은 빙하의 일각일 정도로 수없이 많은 의인의 시체를 쌓아 올리고, 숱한 희생으로 굳힌 그 위에 걸출한 천재들이 제 몸을 갈아 얹어 만들어진 업적이었다. 그 걸출한 천재 중에서도 모두와의 연계와 상호협력이 가능하도록 만든,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큰 천재가 제 눈앞에 있었다. 에도가와 코난, 아니, 쿠도 신이치려나. 제 몸을 되찾은 그는 제 친구들과 일찍도 와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조직 건의 피해자이자 가장 큰 공헌자이며 전 세계적 프로젝트를 완성한 지휘자. 그 옆에는 훌륭한 조력자인 그의 연인과 비공식적으로 지원해준 스즈키가의 후계자가 줄줄이 앉아있었다. 히로미츠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자리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으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한줌만한 그 사람들의 면면을 따지자면 세상 일부를 옮겨둔 듯한 무게감이 있었다. 세계적인 작가, 전설의 여배우, 이제 제 시간을 찾고 수갑을 찬 또 다른 여배우, 해외에서 더 인기가 많은 마술사, 세계적인 재벌기업에서 보낸 사람이며 초고속 승진을 한 CIA요원, 세계 제일의 명사수에 태합명인이며……. 그들에게 참으로 고맙고 또 미안했다. 저들 중 대부분은 후루야 레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누군지도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을 위해 후루야 레이의 장례식에 참석해주었다.

‘아무도, 좋아하던 사람도 싫어하던 사람도 모두 없어서,’

목소리가, 또 들린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히로미츠는 제가 환청을 듣는 것인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다음 상담 시간에는 이걸 이야기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니, 우울할 때 말했던 게 맞나? 하지만 좋아하던 사람도 싫어하던 사람도 없다니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였다. 제로에게는 히로미츠가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제 눈앞에 보이는 두 명이 있었다. 예민하게 경계했던 쪽과, 특히나 싫어했던 쪽.

경계했던 쪽인 CIA요원과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게 제법 있었다. 그야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동료’이지 않은가. 검은조직의 동료이기도 하고 언더커버 동료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제로가 보면 기겁했을 거야, 라고 말하면 미즈나시 레나는 불퉁한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누군 뭐 알고 있었나? 모르고 서로 총질할 뻔한 건 피차일반이잖아. 그건 그렇지, 하고 웃으면 이번에는 웃는 게 조금 덜 힘들었다.

미즈나시 레나는 수완이 좋고 유능했으며 사회조직 안에서 영향력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초고속 승진을 할 만한 인재였다. 지금 직급만으로 따지면 모로후시 형제가 똑같이 위를 쳐다보아야 할 처지다. 제로가 살아있을 때는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상당히 경계했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어서’

무언가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히로미츠는 그와 눈이 마주치면서 방금 들은 말을 잊어버렸다. 제 눈앞엔 능력은 미즈나시 레나 못지않게 좋지만 제 의지로 승진을 말아먹은 사내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과묵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했다. 그는 미즈나시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제로의 양면을 아는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미즈나시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이 자리에 오기를 거부했던 사람이었다.

웃기지, 제로. 어떻게 라이가 버본의 장례식에 오지 않을 수가 있어? 조직시절 세 명이서 얼마나 자주 다녔는데 말이야. 그러나 히로미츠는 아카이 슈이치가 제로의 죽음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신이 아니었고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가 한 것은 아주 작은 실수였을 뿐이다. 결과가 너무 커서 그렇지, 그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죄책감을 홀로 안고 걸었다.

며칠 전에야 그가 장례식에 오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라는 것을 알았고, 히로미츠로서는 드물게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오지 않는 거야말로 제로에 대한 모욕이야! 온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고 전화를 끊어버린 탓에 과연 올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마지막 말이 먹힌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를 살리기로 선택했어.’

선택? 아니, 제로가 히로를 살린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선택이라니, 대체 언제 이야기인가? 물론 그들은 친우의 목숨과 임무의 성패를 저울질해야 하는 인생을 살기는 했지만 당연히도 그런 것을 입에 올린 적 없었다. 아니, 혼잣말하는 걸 들었던가. 그 녀석 알고 보면 제법 혼잣말 많으니까. 곰곰 생각하던 히로미츠는 형이 제 어깨에 손을 올리자 형을 돌아보았다. 아, 이제 식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히로미츠에게는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로.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제게 와야 할 영광을 안은 친구를 위해 히로미츠는 묵념했다. 죽었기에 의미 없는 특진과 수훈이 줄줄이 늘어졌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을 위해 죽은 자에게 찬사를 보낸 다음, 관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개별적인 장례방식이 결정될 것이다. 후루야 레이의 상주는 모로후시 히로미츠였고 장례 또한 자신의 집에서 진행될 것이다. 정확하게는 모로후시 히로미츠가 가명을 쓰고 살던 집에서.

그래, 상주는 모로후시 히로미츠였다. 식이 마지막으로 접어들수록 그 사실이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하다못해 조부모나 친척도 아니라 자신이 상주였다. 그를 기리는 자리에는 분명 온갖 명성을 다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 자리엔 부모도 친척도 연인도 친구도 없었다.

‘……할 수 있을 테니까. 보이거든, 이제야 그런 미래가.’

무어라 말하는 제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히로는 그를 듣지 못하고 결국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 등을 천천히 쓸어주는 형의 손에 눈물이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히로는 알았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그가 바라는 대로일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에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을 수 있다. 기꺼이 사명을 위해 제 한 몸 불사를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어쩌면 네가 바란 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제로, 네 장례식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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