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k or Taboo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지만, 피가 이어진 가족 또한 그러한가?
길 잃은 조풍이 컨테이너 사이를 맴돌았다. 화물이 빽빽이 들어앉은 모야의 터미널. 그 틈새를 거니는 자는 미로를 헤매는 탐험가라도 될 수 있었으나, 옅은 바람은 금방 힘을 잃고 길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철재 겉면에 들러붙어 항만 내음을 이루는 무리에 합류하길 택했다.
그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라파엘과 수하들은 자연스레 시원한 바닷바람이 아닌 텁텁하고 짭짜름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들이쉬었다. 일행이 내딛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디로 향하든, 수십 번을 드나든 자들은 지도 없이 목적지에 닿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항구가 결코 아나스타시아의 소유는 아니었다. 마피아가 도시 전체를 주름잡고 공권력을 지배하던 시대는 애저녁에 지나, 뉴욕항마저 빼앗긴 지금 해상 밀매 루트는 한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뉴욕 5대 패밀리는 ‘평화적인’ 협의 끝에 몇 구역을 나누어 사용했고 그중 하나가 이곳이었다. 섣불리 분쟁을 일으켰다간 다른 네 조직들을 한꺼번에 등 돌리는 셈이 되기에, 바다를 등진 미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신중해야 했다. 따라서 미카엘은 무역에 관한 일을 대부분 라파엘에게 일임했다. 수족이 목을 찌르는 일조차 빈번한 암흑가에서 그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었다.
고요하고 신속한 만남이었다. 마찬가지로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상대 조직원은 라파엘의 신후함에 화답하듯 예의를 잊지 않았다. 중요한 협상은 모두 사전에 이야기를 마쳐두어 물건을 확인하고 거래를 끝맺기만 하면 되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따윈 없었다. 그들은 필요한 말 외에 사적인 대화는 일절 시도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태도에 양측이 만족했다. 이로써 아나스타시아의 사업은 변함없이 건재할 테다.
일을 마친 라파엘은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장 자택으로 향했다. 경호를 위해 대동한 부하들 또한 터미널을 벗어난 직후에 헤어져 각자 다른 루트로 흩어졌다. 구태여 보고를 위해 본부에 들르거나 연락을 남기면 꼬리를 남기는 꼴이다. 남매는 서로의 업무 수행 능력을 믿었고 그건 사적인 감정보다도 명확하고 강직한 신뢰였다. 도리어 전자 쪽이 연이어 놀라움과 미지수를 안겨 주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일생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해도 서로의 전부를 알지는 못했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지만, 피가 이어진 가족 또한 그러한가?
제기할 가치도 없는 의혹이다. 제아무리 세차게 흐르는 피도 혈관을 뚫고 넘어설 순 없다. 미카엘의 사랑은 부친에게 보답받지 못했으며 라파엘은 캐서린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때로 부러 서로의 마음을 할퀴곤 했다. 피부 아래에 흐르는 뜨거운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품은 열기가 네게도 감추어져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방식이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단독 주택은 나설 때와 다름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혼자 있을 보니를 위해 켜두었던 주홍빛 거실 조명이 창 새로 희끄무레하게 새어 나와 간신히 어둠을 밀어 젖혔다.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언제나 반겨주던 털투성이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보니?”
보니는 라파엘이 돌아올 때면 잠들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달려 나와 반겨주었다. 이렇게 기척조차 없는 날은 매우 드물었기에, 그는 겉옷을 벗어두기 전에 먼저 보니의 모습을 찾아 나섰다.
그의 또 다른 가족은 덩치가 작지 않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테라스 앞에 서 있었다. 유리문을 긁고 꼬리를 흔드는 게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모양새였다.
“왜 그래. 거기 뭐라도 있어?”
테라스 건너편에는 조명을 켜두지 않아 보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창에 가까이 붙어야 했다. 다가가던 라파엘은 너머에서 또 다른 개의 실루엣을 보았다. 동네 들개일까, 제가 없는 새에 보니가 새로 사귄 친구일 수도 있겠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 걸음을 멈추었다.
확실히 개였다. 눈알이 흘러내려 구멍이 검고, 팔다리가 썩어 문드러져 굵직한 뼈가 드러난 개. 보니가 발톱으로 유리를 긁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고막을 두드렸다. 상식과 동떨어진 풍경 뒤로 거리에 놓인 호박과 박쥐 장식품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로소 라파엘은 오늘이 어떤 날인지 깨달았다.
“어떤 이유든, 마술적인 원인임은 분명합니다.”
“덕분에 거리가 말도 아니야. 조직 항쟁보다 훨씬 더한 아수라장이라고.”
“누님은 괜찮으십니까? 그것들에게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느려 터진 시체들에게 당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지.”
두 사람은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서로에게 연락했다. 조직이 소유한 안전 가옥으로 모인 그들은 주차하고 내리지 않은 채 대책을 강구했다. 라파엘은 금방이라도 이동할 수 있도록 운전대를 잡고 미카엘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현재 위치한 곳은 인적이 드물어 아직까진 소란이 없었으나, 언제까지나 그러리란 희망을 갖는 우행을 범할 수는 없었다.
“할로윈에 죽은 자들이 돌아오다. 웬만한 B급 영화 클리셰도 이렇게 나오지는 않겠군요.”
“퇴근하고 눈 좀 붙이려 했더니 좀비 사태가 웬 말이야?”
“어쨌든 해결해야 합니다. 이 도시의 안전은 저희의 관할이니까요.”
“명령만 내리시죠, 보스.”
라파엘이 장난스런 투로 받았으나 그 말을 지탱하는 각오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그는 설령 목숨을 걸고 좀비 무리 사이로 뛰어들라는 명을 받는대도 기꺼이 그렇게 할 테였다.
미카엘은 장갑을 낀 손으로 입가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짧은 생각에 빠졌다. 그들에게 이러한 오컬트적 재앙은 결코 낯설지 않아 비교적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정보와 경험 어느 면으로 보나 남들보다 앞서나간 상황이란 뜻이었다. 갈고닦은 지성이 교활하게 번뜩였다.
“이렇게 합시다.”
곧 엔진음이 무겁게 울리며 바퀴가 거세게 돌았다. 두 사람은 기꺼이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사지로 뛰어들었다. 상사의 결정은 지나치게 빠르고 부하의 납득 또한 그러해 볕 좋은 바닷가로 휴양이라도 가는 모양새였으나, 사소한 모순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로등의 창백한 손길을 뿌리친 검은 차량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뒤엉켜 춤을 추고 발을 밟고 넘어져 물어뜯는 기이한 밤이 느리게 흘러갔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문을 걸어 잠갔지만 누군가는 각종 매체에서 본 좀비-아포칼립스-생존 지식을 활용하겠답시고 마트로 달려가 물건을 훔치려다 봉변을 당했다.
범죄 조직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항만에서도 예외 없이 비명이 메아리쳤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이 살지 않고 구역을 지키는 검은 손들만이 지키고 선 터미널에 좀비 무리가 들이닥쳤다. 5대 패밀리의 조직원들은 영문을 모르고 산 채로 뜯겨 시신의 한 끼 식사로 거듭났다. 그들이 자랑하는 총탄은 고통을 모르는 존재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싸구려 연극 같은 아수라장의 암막 뒤, 철재 미로에 몸을 숨기고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부 유도했습니다.”
“확실히 처리되고 있나?”
통화 너머에서 얇고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들보다 한참 젊은 음성이었으나 모두 상대가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네.”
“일이 끝나면 조용히 빠져나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알겠습니다, 보스.”
보스라 불린 자, 미카엘 아나스타시아는 그 시각 도심의 폐건물 옥상에 있었다. 그는 예상한 대로 전개되는 시나리오에 흡족해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서 있지만 말고 이것 좀 도와.”
“누님이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대로 그리고 있는 건지 영 헷갈린다. 혹시 알아, 내가 선 하나 잘못 그어서 뭐라도 소환될지.”
“그러면 그냥은 안 넘어갈 겁니다.”
“물론 ‘그냥’ 넘어갈 순 없겠지.”
라파엘은 한 손엔 낡았으나 어째서인지 전혀 훼손되지는 않은 고서, 다른 손에는 피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콘크리트 바닥에 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막 테두리가 되는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을 뿐인데도 선이 깔끔하지 못해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자아내게 했다.
“주세요. 제가 하죠.”
“오, 고맙다.”
라파엘은 기다렸다는 듯 냅다 양동이를 미카엘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든 그는 조심스레 핏물을 부어가며 나머지 도형을 완성시켰다. 도중에 몇 방울이 그의 바짓단에 튈 뻔 했으나, 그때마다 옆에 서서 고서를 보여주던 라파엘이 먼저 발을 내밀어 가로막았다. 미카엘은 그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고 당연하게 내버려두었다. 다 끝났을 때 즈음엔 라파엘의 바짓단만이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됐어요.”
“이제 주문만 외우면 돼.”
“지하에 기거하는 자들을 송환하는 주문. 확실합니까?”
“적어도 이 책이 진짜라면 말이야.”
당초부터 미카엘은 사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늘 해왔던 일과 별 다를 바도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회로도 여겼다. 이미 벌어진 사고를 유리한 조건으로 이끄는 건 지도자의 역량이었고, 마침 그는 훌륭한 리더였다.
타 조직의 세력에 직접 손을 대면 선전포고와 매한가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재앙이 불운하게도 그들만을 덮친다면? 미카엘은 조직원들에게 좀비 무리와 결코 접촉하지 않되, 거리를 둔 채 그것들을 다른 조직이 포진한 곳으로 유인하라 명했다. 초유의 사태에도 기민하게 내려진 명령에 부하들은 침착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날이 밝으면 간밤의 무도회는 악몽으로 치부되고 그들의 손아귀엔 뜯어먹힌 시체만이 굴러다닐 테다.
적의 인력이 급감하면 남아도는 공백의 지분은 자연히 아나스타시아의 몫이 된다. 한시적이지만 두둑한 돈벌이다.
라파엘이 진 위에 선 채 미카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력을 나누어 지불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연결되어야 했다. 미카엘은 입꼬리를 밀어 올리곤 텅 빈 양동이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다 잦아들었다. 크고 두터운 손과 상대적으로 얇고 뼈마디가 드러나는 손이 이어졌다. 차오른 만월이 비치는 피투성이 육망성과 후각을 찌르는 비린내. 누군가 목격하면 새된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을 광경이었으나 이상스런 남매는 별반 심각해 보이지도 않았다.
만성절 전야, 죽은 자가 돌아오는 밤. 두 아나스타시아에게 죽음이란 생애에 걸쳐 인연을 맺은 오랜 악우였다. 벗이 문간을 두드린다 해서 질겁하는 이가 없듯, 그들 또한 한 번뿐인 축제에 광분하는 골칫거리와 의연히 어울렸다. 발재간을 맞추지만 결코 손을 맞잡는 일은 없이.
“아, 참.”
주문을 읊으려던 라파엘이 문득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트릭 오어 트릿.”
“사탕 없습니다. 장난으로 참으시죠.”
미카엘은 구두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여상히 미소했다. 라파엘이 짓궂은 아이처럼 이를 드러내며 마주 웃었다.
작가의 말
두 사람은 모두 사회적인 금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국제적인 범죄 조직을 이끌며 가담하고, 배다른 남매이지만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입맞춤을 나누며, 보스와 오른팔이라는 명확한 계급 차이에도 서로를 허물 없이 대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도 겪기 힘든 오컬틱한 사건들을 일상과도 같이 마주합니다.
이렇듯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통념으로 터부시되는 많은 요소들을 가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미카엘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제 뜻대로 통제하려 하고, 라파엘은 스스로의 가치관과 하나뿐인 가족을 위해 다른 모든 걸 2순위로 밀어버리죠. 누군가 그들의 속을 들여다본다면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그리 쉽게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자신의 속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정상성에 반하는 것을 약점으로 여겨서가 아닙니다. 그들만이 공유하는 아나스타시아의 기억과 감성이 높은 성벽이 되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죠.
이렇듯 가족이란 스스로를 지탱하는 울타리이자, 또 남과 우리를 분리하는 구분선이 되기도 합니다. 라파엘에겐 전자의 성격이 강해 보이고, 미카엘에겐 후자의 성격이 강해 보입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많이 다투고, 어긋나고, 서로를 상처 입혔지만 결국은 다시 서로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같은 터부를 공유할 수 있는 하나뿐인 사람에게. 당장 죽은 자가 무덤에서 일어난대도 태연히 등을 맞대고 흙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이에게로요.
그런 의미에서 할로윈을 기념하는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조직범죄와 크투룰적 요소, 두 사람의 일상을 모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해피 할로윈. 죽은 자가 저승으로 돌아간대도 두 사람은 기어코 살아남아 여전히 서로의 곁에 서 있을 겁니다.
- 카테고리
- #2차창작
A light-like fire
인간의 영혼이 곧잘 불씨와 비교됨은 적실히 포식자란 성격을 공유하기 때문이겠지.
겨우살이
다름에 어긋나도 재차 손을 잡는다. 그리하면 여전히 곁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놓지 않겠다 약속하면 순간은 무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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