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ight-like fire

인간의 영혼이 곧잘 불씨와 비교됨은 적실히 포식자란 성격을 공유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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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불씨가 오크 장작에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겠다는 듯 잘 깎인 나무를 집어삼키며 몸집을 키우는 모양이 그야말로 화마다. 무엇도 별나지 않은 광경을 지켜보던 로한 와이엇에게 느닷없는 이해가 찾아왔다. 인간의 영혼이 곧잘 불씨와 비교됨은 적실히 포식자란 성격을 공유하기 때문이겠지. 기어코 번개 신에게서 불을 갈취한 인류는 불확실한 종말의 때까지 욕망하길 그만두지 않을 테다.

그리고 여기, 지식의 갈구와 지성의 해소를 욕망하는 굶주린 탐정이 있다.

 

그 산장은 부호의 별장답게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크고 높았다. 따라서 네 사람이 모여 있는 거실 또한 충분히 널따랬지만, 벽난로의 열기가 미치는 반경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히 그들이 앉아 있는 카우치와 의자는 옹기종기 불가로 모이게 되었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중앙의 낮은 테이블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조화가 꽂힌 화병과 산장의 모양새를 섬세하게 축소한 미니어처가 나란히 놓여 괜스레 눈길을 끌었다.

폭설이 내내 창가를 거세게 두드렸으나 누구도 불청객에게 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만 이제 색을 잃고 시커먼 껍질이 바스러지는 장작의 방성만이 귀의 지루함을 달랠 뿐이었다. 불현듯 한 중년의 음성이 고요 아닌 고요를 헤집었다.

 

“이렇게 앉아있기만 해도 되는 건가?”

 

아론은 눈을 질끈 감고 짧은 숨을 내쉬며 초조를 숨기지 않았다. 로한은 그의 떳떳함이 뒷받침하는 솔직한 태도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짓궂은 미소를 내보이며 부러 느릿하게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앉아 있지 않으면요?”

“수사를 해야지, 수사를!”

“산장의 구조는 모두 파악해두었어요. 경감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러고 있는 와중에 괴도가 숨어들었을지 어떻게 아나!”

 

로한은 대꾸 없이 검지를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경감은 따라서 시선을 돌리고, 네모진 나무창과 그 안에 담긴 지긋지긋한 설경을 마주했다.

 

“우리는 조난됐습니다.”

 

“그 말은, 반대로 누구도 이곳에 침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신문의 줄글을 읽듯 태평하기까지 한 어조가 들려왔다. 아론 경감은 처음과 달리 땅이 꺼지듯 깊은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저주받은 산장이라.”

“일대의 소유주는 그레이 남작으로, 산장 아래엔 작은 마을이 있지. 꾸준히 관광객이 방문하던 곳이네.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로는 그 수가 폭증했지.”

“특히 부호와 귀족들이?”

“원래 숙박비가 비싼 고급 별장이긴 했네만, 그래.”

 

정오의 볕이 탐정 사무소의 커튼 새로 떨어져내려 빛과 어둠을 분명히 구분했다. 로한은 그 사이 정확히 반절 정도 위치에 의자를 둔 채 걸터 앉아 눈이 부시지 않으면서도 겨울 해의 조그만 자비를 누릴 수 있었다. 오히려 시야가 따가운 건 그 옆에 선 아론이어서, 그가 눈가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한은 흠, 하고 알만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상류층에는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덕분에 내 골치만 아프지.”

 

로한이 든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산장’이라는 문장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는 검지로 앞쪽의 대문자를 톡톡 치며 농담을 섞어 말했다.

 

“정확히 어떤 저주인가요? 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니, 정말이라면 재미있긴 하겠지만.”

“이제는 범죄자에 이어 기자까지 경계해야 할 판이야.”

 

자극적인 소재에 과장을 섞어 허황되나 눈길을 끄는 문장을 써내리는 건 일간지 기자의 자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로한은 이러한 기사도 문화와 유행을 파악할 수 있어 나름대로 유용하다 여겼지만, 소문에 쉽게 휩쓸리는 시민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경감은 영 꺼려 했다.

그가 설명한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산의 절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떡하니 올라선 산장이 있는데, 그곳은 매년 겨울에 방문객이 한 명씩 실종되어 몇 달 후에 산 어드메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산중의 실종이야 어디서나 일어나는 사건이어서 처음에는 주목받지 않았지만, 작년이 6년 째였다. 같은 사건이 반복되니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타 어느새 저주라는 말머리가 붙었고, 놀랍게도 이번 해의 방문 예약은 세 달 전에 연락한 사람이 겨우 성공했을 정도로 미어터졌다는 이야기다.

 

말을 마친 아론 경감이 그제야 양지에서 한 걸음 물러나 눈을 깜빡였다.

 

“다들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건지, 원.”

 

로한은 대답 없이 가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땅을 지배했다 여기는 인간은 바다로 뛰어내리고, 하늘로 뛰어오른다. 이렇듯 개척에 대한 욕구는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기에 기꺼이 위험에 뛰어들어 끝내 생존하는 카타르시스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을 테다. 이성이 아닌 본능의 이끌림이기에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장광설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내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신문을 책상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그 산장을 훔치겠다는 괴도의 예고장이 도착했다는 거군요.”

“제아무리 괴도라고 해도 집을 훔친다니 터무니없지. 게다가 특이한 건, 초대장이 산장의 주인이 아닌 경찰에게 도착했단 점일세.”

 

신문을 내려둔 로한의 검지가 그대로 지면을 세 번 두드렸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저와 같이 산장에 가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어라, 혹시 저 혼자 보낼 생각이셨나요?”

 

 

“살인마나 예티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설산에?” 신문에 기재되어 있던 온갖 추측 중 몇 가지를 꺼내어 입에 담자 아론 경감이 질색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 저주의 실체가 무엇이든, 아무런 단서도 없이 뛰어들면 당할 수도 있어.”

“아뇨, 단서는 있어요.”

“뭐라고?”

 

대경한 경감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제 막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을 뿐인데, 벌써 무언갈 알아냈다니?

 

“많은 인력은 안 됩니다. 오로지 우리 둘이면 돼요.”

 

로한 와이엇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쳐두었던 회색 코트를 집어 팔을 꿰었다. 옷자락이 크게 펄럭이며 일광이 품 안에 가득 안기고, 벽록의 눈 한 쌍에도 흘러넘쳤다. 기이하게 찬란한 인영을 마주한 경감은 저도 모르게 재차 손으로 눈꺼풀을 가리고 말았다.

 

“탐정의 감입니다.”

 

이어서 지금.

아론 경감이 공권력을 이용해 산사태를 핑계로 산의 출입을 금지했으나 경찰이 놓친 사실이 있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산장에서 묵고 있던 두 명의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소문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이전부터 산장의 경치를 즐기던 부류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총 넷이었다. 탐정, 경찰, 관리인, 방문객. 로한이 일행을 둘러보곤 물었다.

 

“다른 분은 감기에 걸려 누워 계신다고 하셨나요.”

 

그러자 여지껏 묵묵히 상황을 관망하던 산장 관리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오늘은 유독 폭설이 심하니까요. 전부터 몸이 안 좋다며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이 적으셨습니다.”

“혹시 그분의 생김새가?”

“긴 금발에 창백한 피부, 키가 큰 여성분입니다.”

“과연. 그리고 이쪽은….”

 

로한이 관리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 자리의 유일한 관광객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갈색 더벅머리에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녹안과 희미한 주근깨를 가진 청년이었다. 소심한 성격인지 목소리가 작고 대화에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소설가인 앨런 마이어 씨라고 하셨죠.”

“네.”

 

이름을 불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면 옆 사람에게 닿지도 않을 나직한 대꾸였지만, 다행히 저주받은 산장 속의 모두는 숨을 죽인 채였다.

 

“당신도 그분을 본 적이 있나요?”

“금발의 여성분 말이죠. 대화는 해본 적 없지만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로한은 관리인에게 그 말을 거듭 확인했다. “당신도 두 분이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까?” 관리인이 금세 끄덕이고는 희끗한 머리를 단정히 쓸어넘겼다. “두 분 모두 활동적인 성향은 아니셔서, 저도 이렇게 일부러 모이기 전까지는 그다지 마주친 적도 없습니다.” 로한이 가볍게 동의했다. “하긴, 사교적인 사람들이 험지의 산장까지 찾아와 고독을 즐기지는 않겠지요.” 그들의 어미에 온점이 찍힐 때까지, 아론 경감은 일련의 대화를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뜻 모를 댓거리가 끝나자 로한이 가볍게 손바닥을 부딪혔다.

 

“일단 남은 한 분의 용태를 확인하러 갑시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다 같이요.”

 

그 말에는 누구도 이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혹은 누군가는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파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객실의 문고리는 부서져 있었고, 안에는 짐가방만이 덜렁 남은 채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실종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론 경감은 길길이 날뛰었고, 관리인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앨런은 겁을 집어먹어 아론의 만류를 무시한 채 곧장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로한은 그저 제자리에 서서 한바탕 야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막한 산장에 어울리지 않은 소란이 스친 후에는 또다시 숨 막히는 정적이 밤의 어둠과 손을 잡고 산장 구석구석을 메워 나갔다. 궂은 날씨 탓에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은 경감의 지시에 따라 모두 방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수사는 날이 밝으면 지속하기로 했다.

 

결국 탐정과 경찰만이 오도카니 복도에 남았다. 벽걸이 촛대에 걸린 양초만이 희미한 광원으로 두 사람의 표정을 간신히 구분케 했다. 그들은 얼마간 대화를 나누었고, 마지막에는 아론이 그답지 않은 불분명함을 담아 가느다랗게 물었다.

 

“잘 될 것 같나?”

 

순간 맑은 심록이 우거진 로한의 눈동자에 양촛불의 색이 스며들더니 금빛으로 반짝였다. 동시에 그의 입매가 그늘에 숨죽인 고양이마냥 장난스레 말려 올라갔다.

 

“탐정의 감을 믿으세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점두했다.

 

수 시간 후, 심야.

한 인영이 발소리를 죽인 채 복도를 거닐고 있다. 등불조차 들지 않고 온몸에 암흑을 두른 채였지만 나아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어떤 문 앞에 서서 잠긴 문고리를 덜걱이더니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감촉으로 어림해 맞는 열쇠를 찾아 꽂아 넣던 그때.

 

“경감님, 지금입니다.”

 

돌연 달려든 거구가 그를 덮쳐 넘어트렸다. 인영은 저항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제압당했다. 뒤늦게 팔다리를 버둥댔지만 경감의 능숙한 체술에 그마저도 곧 저지되었다. 몇 걸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자는 그제야 들고 있던 등불을 켜고 다가왔다. 부러 둥글게 접어 웃는 눈꼬리와 샛노란 빛을 받아도 더 검어지는 머리칼. 로한 와이엇의 가뿐한 음성이 간단히도 묵직한 어둠을 뚫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관리인.”

 

인영의 정체, 산장 관리인은 낭패를 보았단 기색을 차마 숨기지 못한 채 숨을 들이켰다. 단지 전신에 힘을 주어 상황을 벗어나려 했으나, 아론 경감은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보이며 미간을 거칠게 좁혔다.

 

”괜찮아요. 답해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해설은 탐정의 역할이니까.” 로한이 소리 내어 웃자 아론 경감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어서 설명을 좀 해보게. 하라는 대로 하긴 했다만 이게 대체 옳은 일인지를 모르겠군.” 로한은 그대로 힘을 풀지 말라며 손짓하고는 밤이 깊어 꺼진 벽의 촛대에 불을 옮겨 붙이기 시작했다. 빛이 하나씩 늘어가며 무대 위로 조명이 떨어지듯 각자의 표정이 차례로 밝혀졌다. 로한의 여유, 아론의 의문, 관리인의 분노.

 

“상황이 급하니 결론부터 말하죠. 지금껏 일어난 실종 및 살해 사건의 범인은, 바로 이 사람입니다.”

 

급작스레 관리인을 짓누른 경감의 팔에 힘이 더해져 아래에서 낮고 거친 통성이 새어 나왔다.

 

“뭘 증거로! 당신들, 남작님께 아뢰어 고소할 겁니다!”

“뭐어, 들어보세요.”

 

탐정이 중지와 엄지를 경쾌하게 튕겼다. 그가 뇌리에 정렬된 진실을 소리로써 풀이하자, 배우가 잘 쓰인 대본을 외는 행위로도 보였다. 발음은 틈 없이 정확하며 단어 사이에 숨을 쉬는 구간마저 세밀하게 짜인 구연이었다.

 

저주받은 산장의 이름이 널리 퍼지기 시작할 때쯤 로한은 이미 소문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평온해야 할 외딴 별장의 이름이 저주로 수식되니 괴도 몽블랑의 손길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 경찰보다 한 발 먼저 개인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토지의 주인, 그레이 남작은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인사는 아니었다. 돈은 많지만 모두 물려받은 유산이며 본인이 시도하는 사업은 빈번히 실패해 오히려 점차 주머니가 비어가는 실정이었다. 도박이나 뒷세계 사업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으나 되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래서 남작은 더욱 자극적인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겠죠. 발단은 우연이었을 거예요.”

 

역시나 산에서 조난자가 발생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어리석은 몰락 귀족이 곤경에 처했던 수년 전 겨울, 그 산에서 한 유명 배우가 조난으로 실종됐다. 불행한 배우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하여 구조 인력에 더해 발 벗고 나서는 추종자들이 여럿 찾아왔다. 응당 그 해 겨울에는 마을의 경제가 몇 배로 활성화되어 관광 수익이 높아졌다. 무도한 욕망의 시작이었다. 로한이 자못 연극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목숨 값에 눈이 멀다니.”

 

“비열한 자본가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절대로 자신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수족을 이용했죠.”

“그게 바로 이 자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당신, 전에는 오래간 남작가를 보필한 집사였죠?”

“저는….”

 

관리인은 반항을 멈추더니 몸에 힘을 뺀 채 마루에 이마를 박았다. 바닥이 작게 울리는 소리에 경감이 눈을 번뜩이더니, 뒤늦게 수갑을 꺼내 그의 손목에 채웠다.

 

“발뺌할 생각은 마세요. 주민들에게 증언을 확보했으니까.”

“요즘 같은 시대에 집사라니. 그것도 주인을 위해 살인을 했다고?”

“시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집사는 필요 없는 존재이기에. 주인님과 가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안타깝게 됐습니다.”

 

넉살 좋게 살인자의 한풀이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로한은 여섯 명의 죽음과 한 가문의 파멸에 대한 감상을 단 두 마디로 축약하고는 화두를 가로챘다.

 

“슬슬 눈이 그칠 겁니다. 경감님, 지원 요청은 미리 해두셨겠죠?”

 

아론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전, 로한은 단둘이서 산장으로 향하는 대신 하루가 지나면 추가 인력이 도착하도록 부탁했었다. 그는 그제야 탐정의 진의를 깨닫고 감탄했다. 처음부터 경찰들이 몰려왔다면 범인은 일찍이 몸을 숨기고 도피했을 테였다. 먼저 퇴로를 막고 극소수로, 또 돌발적으로 진입해야 적절하게 몰아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걸리는 것이 있다.

 

“실종자는? 설마 이미 살해한 건가!”

“아닙니다! 저는 아무도…!”

 

경감과 관리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로한이 부드럽게 두 고성을 중재했다.

 

“설마요. 아무리 둘이라지만 경찰과 탐정이 있는데 섣부른 짓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사라졌지 않나!”

“실종자는 없어요.”

 

로한의 시선 아래에 있는 두 사람이 벙찐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관리인이 새벽을 틈타 움직인 겁니다.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사라졌으니까요. 이전과 달리 밖이 아닌 안에서. 이대로라면 형사 사건으로 송치될 게 분명합니다. 지금껏 해 온 짓이 있으니 미리 이 뒷문으로 도망쳐 몸을 숨기려 한 것이겠죠.”

 

관리인은 파렴치하게도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고개를 주억댔다. 그 또한 영문을 모르는 낌새였다.

 

“적어도 이번에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관리인, 숙박객들이 함께 있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하셨죠?”

“그, 그랬었죠.”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론 경감의 뇌중에 깨달음의 불티가 튀었다.

 

“괴도 몽블랑!”

 

그 이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날이 밝자마자 경찰대가 도착해 관리인을 체포했고, 잠긴 객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숙맥 같던 앨런 마이어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탐정은 숙박객 명단에 적힌 두 이름도 모두 가명일 것이라는 추리를 제시했다.

문제는 괴도가 왜 그런 일을 했는가였다. 당연하게도 산장은 ‘훔쳐지지’않은 채 여전히 봉우리를 딛고 소소리 서 있었으며 몇 없는 관리인의 귀중품도 온전했다. 그러나 경찰에게 당장 손실이 증명되지 않은 미스터리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그들은 눈발이 잦아들자마자 범인을 데리고 산을 내려갔고, 로한은 경치를 즐기겠다는 한가한 말을 건넨 채 홀로 산장에 남았다.

 

탐정이 고즈넉한 복도를 돌아 걸었다. 텅 빈 나무집 속 규칙적인 발울림이 으스스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도달한 곳은 추리를 논설하던 뒷문 앞이었다. 관리인이 잠금을 풀었으나 아직까지 열리지는 않은 문. 그는 이 문 너머에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존재하리란 확신을 품고, 지체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아침결의 옅은 눈안개가 들이닥쳤다. 녹아 사라질 줄도 모르고 온기를 갈망하며 남실대는 그들을 헤치고 로한이 걸음을 떼었다. 너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숲으로 이어지는 입구에서 설경과 하나 된 백의가 앙상한 나무 새로 펄럭였다. 로한은 자신의 추리가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쾌감을 기꺼이 만끽했다.

 

“기다렸나요? 아가사 씨.”

“또 만났군요, 탐정.”

 

아가사 A. 몽블랑은 언제나와 같은 차림새임에도 추위를 모르는지 미동이 없었다. 그는 감탄과 환호성,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가 없어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음산한 화사함을 지니고 있었다.

 

“제가 이곳에 올 걸 알고 있었죠?”

“당신 또한 저를 알아보았고요.”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앨런 마이어라는 이름의 머리글자, 저와 같은 눈 색, 소설가, 그리고….”

 

“소매 끝의 커피 자국.” 오로지 로한만이 알아볼 수 있는 명명백백한 단서들. 괴도는 그를 유인했고, 탐정은 흔쾌히 역할극에 어울려주었다. 어떠한 신호나 대화도 없었으나 그들은 검고 흰 구두 끝에 진실을 매달고 춤추었다. 빠른 탱고 스텝을 밟다가도 한 바퀴를 돌면 음악은 왈츠로 바뀌어 손을 맞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줄곧 합을 맞춰 온 파트너, 혹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심정을 들여다보는 연인과도 같이.

 

“당신은 경찰에게 초대장을 보낸 게 아닙니다. 저에게 보낸 것이죠.”

“연쇄 살인 사건의 진실은 입에 맞았습니까.”

“충분히. 경감님의 눈치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당신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죠.”

 

그는 괴도를 체포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두뇌에 따라올 수 있는 자가 여전히 아가사뿐이라는 사실에 탄식했다. 아가사는 설한 속에서도 생동하게 움트는 눈빛에 질려하면서도 동시에 안심했다. 그는 자신이 로한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또는 품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기에 이따금 망설임이 빈틈으로 벌어졌다. 틈새를 메우기 위해 모자를 고쳐 쓰고 등을 돌렸다. 그늘에 드리워진 음울한 눈매와 고집스레 다물린 입가가 여전했다.

 

“오페라글라스는 여전히 제게 있어요.”

 

괴도는 돌아보지 않고, 품속에서 무언갈 꺼내더니 손만 들어 로한에게 보였다. 한 뼘 위에 산장이 놓여 있었다. 거실의 테이블에 놓여 있던 미니어처. 괴도는 결코 허황을 고하지 않는다.

 

“승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괴도가 날아올랐다. 나무 기둥에 미리 와이어를 설치해놓았는지 빽빽한 나뭇가지를 딛고 나아가는 데에 주저가 없었다. 로한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종국에는 새하얀 뒷모습과 설산의 전경이 구분되지 않아, 어쩌면 그보다도 오래 붙박여 있었다.

 

“저주와 함께 산장을 훔쳤다, 라.”

 

삭풍에 할퀴어진 뺨과 손끝은 한기가 아닌 열기로 달아올랐다. 지식의 갈구, 지성의 해소. 로한 와이엇은 인간이기에 욕망한다. 단정한 불길이 향하는 끝에 아가사가 있었다.

작가의 말

 

좋은 호적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로한은 천재적인 탐정으로서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 서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 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괴도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치밀하게 두뇌전을 벌이면서도 조심스레 서로의 사적인 영역에 발을 내딛고 있고, 그 변수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르겠죠. 아무리 명석한 두 사람이어도 미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예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대를 의식하고, 경계하고, 반대로 반갑게 맞이합니다. 이렇듯 두 사람의 승부에는 언제나 양가감정이 맞부딪힙니다. 마치 불꽃처럼.

언뜻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두 사람이지만 그 내면에는 어떠한 열정이 숨어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게 탐정과 괴도라니,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직업이니까요. (농담) 그래서 이 글은 얼어붙는 겨울을 업고선 불로 시작해 불로 끝납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로한과 아가사가 거의 동시에 산장의 진실을 훔치고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완전 범죄, 완전한 풀이를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타인에게 긴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아가사는 자칫 발생할 희생자를 방지하기 위해 긴밀하게 경찰에게만 예고장을 보냅니다. 자연히 괴도 몽블랑의 사건은 탐정 로한 와이엇에게 전해지고, 산장과 그 주인의 배경, 역사를 미리 조사해 둔 로한은 괴도의 초대장을 마주하는 순간에 모든 정황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응하기로 결정하죠. 심심풀이였을까요, 사회 정의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욕망을 위해서? 어떤 이유로든 네 사람은 산장에 모입니다.

미리 투숙하던 두 사람은 모두 변장한 아가사입니다. 범인이 예상치 못한 실종자를 발생시켜 그에게 혼란을 주고 실수를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입니다. 로한은 앨런 마이어를 마주하는 순간 모든 걸 이해합니다.

그래서 실종자가 발생하자 경찰인 아론의 위치를 이용해 ‘모두 날이 밝을 때까지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 상황에서 목숨이 아깝다면 일반인은 결코 움직이지 않겠죠. 그러나 관리인은 제 발에 저려 뒷문으로 향하고 맙니다.

그곳에는 미리 대기하던 로한과 아론이 있었고, 범인은 무사히 체포됩니다. 그때에 아가사는 산장 미니어처를 훔쳐내어 도주하고요.

누군가 한 명이라도 행동이 어긋나면 완성될 수 없었던 그림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렵잖게 해내어 다시 한번 서로의 존재감을 영혼에 새기게 되죠.

 

실은 마지막에 두 사람이 만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탐정은 범인을 체포했고, 괴도는 무사히 목표를 훔쳐내었으니까요. 하지만 구태여 설원의 만남을 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았던 연유는?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대 괴도 아가사 몽블랑과 그에게서 틈을 이끌어내는 무이한 사람, 20세기 최고의 탐정 로한 와이엇이 곧 움직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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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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