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냄새
철의 심장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흐렸고…
좀처럼 잠이 깨지 않는 불길한 날이었다.
낙양에서 밀려난 조조와 그의 군사들은 하염없이 북으로 유배당했다. 기실 유비가 유배형을 내리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갈 곳은 북방밖에 없었다. 추후에 좋은 전초지가 되어주리라고 생각했던 장성은 이제 등 뒤의 강이 되어 검게 넘실거리고 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인가? 아니면 복권을 꾀할 텐가? 조조의 속은 알 길이 없었고… 호봉은 아직은 떠나지 않았다.
추운 곳이었다. 그러나 몸의 절반이 쇳덩이인 군사들에게 추위는 별문제가 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이른 아침 일어나 몸을 한 번 떨 뿐. 중앙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유주에서는 할 일이 많았다. 위의 군사들은 황량한 마을을 순찰하거나 방치되어 있던 폐가를 철거하거나 내년을 위해 농민들의 밭을 갈아엎는 일을 도왔다. 가끔은 흉노의 잠입을 막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죄인의 신세라 한들 모든 것을 갖고 있었던 이를 한순간에 빈털터리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조조의 명성을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그가 이곳에 머무르고 힘을 베푼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감화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소문만큼 잔인한 냉혈한이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유주 한 구석 군사들이 머무르는 그곳에 한한 이야기였고… 여태 조조의 처분에 대해 연통 하나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릇 몇 병사들은 불길한 예감에서 그저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것이 없어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낮에는 일을 했다. 분을 못 이기던 조비나 눈치를 살피던 하후돈이 잠깐이나마 각자의 감정을 잊고 일에 몰두하면 호봉은 굳이 그들의 낙담을 모르는 척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호봉도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조의 독채 앞에 서서 불침번을 설 때면 호봉은 유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단호한 촉왕이 지금쯤 황궁에서 조조를 두고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지 가늠해 보려고 했다. 그가 인정을 베풀 것인가? 혹은 가혹할 것인가? 그 또한 알 길이 없으나 지금 이 순간 결정권이 조조가 아닌 유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조조는 제 장기 말을 손안에 가득 쥔 채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조조가 장수들을 전부 접경지로 보낸다 했을 때 다들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한적한 시골이라 한들 마땅한 장수 한 명 없이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단호히 가라 명했고 장수들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호봉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멍청한 놈들. 면전에 대고 불복하면 그 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하겠는가?
구름이 해를 가려서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습하고 어두운 날이었다. 이렇게 추우니 차라리 비가 아니라 눈이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호봉은 날씨를 핑계로 임무지에서 예정보다 일찍 발을 돌렸고, 돌아오는 길에 뺨에 스치는 찬바람을 맞으며 불현듯 옛 생각을 떠올렸다. 청주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바닷가에 휘날리던 싸락눈… 비와 섞여 추적추적 내리던 눈은 호봉이 고생 끝에 간신히 위에 다다랐을 때에야 멎었고, 호봉은 발목을 붙잡는 질척질척한 눈이 겨우 그쳤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꼈었다.
어떻게 변명하는 게 좋을까. 그러다가도 피차 인재 하나하나가 아까운 시기에 고작 조금 일찍 돌아왔다 하여 목을 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면서 호봉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답이 없어서 한 번 더 두드렸다. 여전히 문 너머가 조용했기에 호봉은 멋대로 문을 열었다. 그늘지고 고요한 방… 어언 밤이 되어 달빛이 가느다랗게 들어온다. 나무로 된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마치 이곳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고 말하는 양 의자만이 마주 보도록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호봉이 찾던 이가 침상에 누워 요를 덮고 잠들어 있다. 조조는 몸 위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호봉은 그에게로 다가간다. 아마 그의 인생 통틀어 가장 무방비할 순간에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그를 내려다본다.
뺨조차 서늘한 남자,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정교한 전기 신호에 의해 이루어지는 기술의 집합체이자 탈인간의 초상… 그러나 심장이 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호봉은 그의 몸에 손을 얹어 보았고, 눈꺼풀을 들춰보았고, 얼굴 가까이 귀를 가져가 보았다. 심장박동은커녕 가느다란 숨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철의 냄새가 났다. 그 안에 피가 고여 있었다. 그의 고개를 기울이면 입가로 묽은 피가 흘러내렸다. 맨손에 묻어나는 피가 아직 미지근했다. 입가에는 누군가 정성스레 닦았으나 채 완전히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호봉이 그것을 손으로 문지르면 그 흔적이 손끝에서 바스러져 사라진다.
호봉은 생각한다. 제 죽음을 예감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를 내보냈나? 가까이 머무르도록 했다면 적어도 며칠은 더 유예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처음부터 이곳을 떠나 도망치자고 말했더라면… 다 함께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호봉은 문득 조조의 발끝을 보았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 군주는 죽고 군사만이 그 자리에 서서 뒤늦게 몰려오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골몰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의 운이 다할 때까지만 곁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우두머리가 죽었다고 성이 곧장 허물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렇다 한들 호봉이 바라는 것은 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을 테니까. 목숨에 크게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개죽음을 자처하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그의 흐트러진 고개를 고쳐주고 겹쳐 있는 손을 바로 해준다. 기계 부품으로 조립된 손은 무척 유연하다. 기계는 사후경직을 겪지 않기 때문에 늘 무언가 움켜쥐기를 갈망하던 조조의 손은 이제 지푸라기 하나도 움켜쥐지 못할 만큼 맥없다. 그가 소유하고 지배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이제야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 나가듯 빠져나갈 것이다.
완전한 자유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호봉은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자각한다. 그리고 제 입으로 모든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내키지 않는 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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