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무쌍

다락방의 심복

조비와 호봉 정균 후기 if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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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 겁니까?

식어빠진 차 향기가 났다. 호봉은 무거운 눈꺼풀을 슬쩍 들었다. 침상 앞 협탁에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누군가 다가와 마시라며 차를 따라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아침이었던가. 노란 빛이 비스듬히 들이치는 걸 보아하니 아마 늦은 오후인 것 같았다. 식은땀에 젖은 몸이 무거웠다. 문을 열어젖힌 조비는 한 손으로 문을 짚고 문턱에 삐딱하게 서서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잠겨서 나오지 않았다.

근무 태만입니다. 언제까지 봐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조비는 정말로 대답을 듣고 싶은 사람처럼 따지고 들었다.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호봉은 눈을 굴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 대신 긴 한숨과 함께 천천히 몸을 늘어뜨리자 조비는 길게 늘어진 소맷단을 펄럭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옷가지나 붕대 따위를 탁상에 올려놓았다.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풀지 말라니까 또 풀어헤쳤군. 들으란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호봉은 돌아누웠다. 어차피 그런 자질구레한 일은 호봉의 일이 아니었다. 호봉의 일이란 그냥 이곳에 처박혀서 조비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의 음성은 어느 순간 멈추고, 머지 않아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어깨를 꽉 잡아 일으키는 손길은 거칠었으나 몸뚱이는 그깟 아픔에 무뎌진 지 오래였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게슴츠레 눈을 뜨면 깜빡임 한 번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비와 눈이 마주쳤다.

붕대를 풀지 말라고… 하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입을 열자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아 엉망진창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죽이고 귀기울여야 들릴 듯 말듯한 그 목소리를 조비는 용케도 잡아냈다.

답답해…….

답답해도 하고 있어야 빨리 아물죠.

상관 없어…….

상관 없는 게 아니라.

왜? 아물어야 네 속이 좀 편하니까……?

호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입을 다문 조비와 눈이 마주쳤다. 옛날에는 눈만 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비가 완전히 탈피하여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자신의 인지적 능력이 퇴화한 것뿐이었다. 조비는 왈칵 화를 내는 대신 두어 차례 심호흡하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휘둘리고 싶지 않겠지. 혹은 아무리 그라도 당장 호봉의 꼴을 보고선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으리라고… 호봉은 그렇게 어림짐작했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틀린 셈이었다. 곧장 손을 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제자신이 예전만큼 기민하지 못한 것 같았다. 모든 질문과 행위가 진실된 의미 없이 그저 무엇 하나가 걸리기를 바라면서 애먼 곳에 작살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지쳤다. 실실 웃으며 물어놓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탈력하여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조비는 방을 계속해서 치워나갔다. 허물처럼 널브러진 옷을 개어 넣고 핏자국이 남은 붕대를 모아놓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여러 번… 잠에서 덜 깬 탓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의 옷자락이 이곳저곳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무거운 수마에 빠져들려던 찰나 조비가 호봉의 뺨을 가볍게 쳤다.

호봉은 눈을 떴다. 조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방의 풍경은 한결 단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엉망이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비가 단어를 신중히 골라 입에 올렸다.

오늘은… 나와서 일을 하십시오. 당신이 필요합니다.

…….

앉아서 손만 움직이면 되는, 당신이 좋아하는…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쯔모기리만 해도 되고요.

글쎄. 몸과 정신이 너덜너덜하게 망가진 호봉이 더이상 위의 전력이 되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마 나를 자리에서 일으키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일이겠군. 그 말인즉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호봉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꺼질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간단하면 네가 대신 해줘…….

저는 그런 일에 쏟을 시간이 없습니다. 신하로서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무용한 일에 시간을 쏟는 게…….

중간에는 기침이 터져서 말을 잇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조비는 호봉의 기침이 끊어지지 않자 협탁에 놓인 잔을 집어 대뜸 내밀었다. 수면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호봉은 그것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어째서 의무냐? 싫다.

신하의 의무는 일의 경중을 따지는 게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것 아닙니까?

너는… 그러면 넌… 주군의 의무를 다하고 있나? 너는…

그 입…

그 어떤 주군이… 부하를 이렇게 다루는…….

말을 잇기가 지쳐 호봉은 큰 날숨과 함께 말을 멈췄다.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조비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갇혀 있는 방은 구색만 간신히 갖춰놓은 방일 뿐 사실상 독방과도 같아서… 조비의 어금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답지 않게 참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마치 돌담으로 홍수를 막으려는 셈이라 단 한 번의 자극만 있어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예전에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 보가 와르르 무너지는 게 즐거워 자꾸만 그를 찌르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그를 내버려두었고… 조비는 다름 아닌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이유가 무엇인들 이제와 참는다고 얼마나 참을 수 있겠는가. 그 노력만은 가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조비가 호봉의 뺨을 내리쳤다. 살과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서 호봉은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허억, 숨을 들이쉬기가 무섭게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도 못한 머리를 손바닥이 한 번 더 후려친다. 옆으로 고꾸라져 침상에 엎어지려는 호봉의 멱살을 조비가 틀어쥐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호봉은 눈을 빠르게 끔뻑거리며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맞을 때마다 머리가 울렸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면 얼굴을 제대로 겨눌 수가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웅크리는 몸을 자리로 돌려놓으려 잡아당기고 휘두르는 손아귀 또한 피멍이 남을 만큼 우악스럽다. 끝까지 말해보라고. 내 얼굴을 보고. 이를 악물고 음산하게 읊조리지만 실은 목소리가 너무 컸다. 조금 전 따귀를 때린 조비의 손에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아니면 일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귀를 찌르는 듯 공격적인 목소리에 호봉은 얼굴을 찌푸렸다. 비명을 지를 힘이 남아 있던 시절에도, 입을 벙긋거리는 것조차 힘든 지금에도 호봉은 단 한 번도 맞으면서 소리를 낸 적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소리를 내라니… 그로서도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다시 한 번 말해서 속을 뒤집어놓을 수 있으면 실로 즐거울 테니까.

아니, 사실은 썩 좋지도 않은가.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별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피 끓는 기침이 터지는 순간 호봉은 속을 게워낼 것처럼 쿨럭거리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왜 웃는 거야! 웃지 마! 그 입 닥치라고!

조비가 일말의 평정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도 호봉은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억센 손이 옷깃을 쥐고 제멋대로 흔들 때마다 고개가 꺾여 숨을 제대로 쉬는 게 어려웠다. 웃음의 마디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였다.

하하하, 하, 아…

아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얼굴을 맞아도 옆구리가 아플 만큼 만신창이지만… 이 감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서… 호봉은 고통만은 반가웠다. 조비는 때리는 것으로는 호봉의 웃음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실은 그 웃음이 조금은 달가운지… 더 이상 구타를 이어나가지도, 호봉을 놓지도 못한 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돌연 혼자 질색하여 호봉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몸을 붙드는 힘이 사라지자마자 호봉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가와 광대가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혔다. 그게 아니어도 분명 멍이 들었겠지만. 제 팔다리를 가눌 수 없으니 뒤척거릴 수도 없다. 그저 미동 없이 바닥에 처박혀 있는 호봉을 내려다보던 조비는 곧 허리를 숙여 그의 머리를 거칠게 움켜 쥐었다. 고개가 꺾이자 호봉은 경련하는 눈꺼풀을 들어 조비와 눈을 마주친다. 입 안으로 짭짤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핥는다. 숨을 잘못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색색거렸다. 조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머리를 놓고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쓸데없이 길고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다리에 스쳐 펄럭거렸다. 바닥에 뺨을 박은 채 눈만 치켜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호봉은 눈을 감았다. 입 안쪽이 제 이에 긁혀 너덜너덜하게 찢어졌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피비린내가 났다. 요즘은 도저히 이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따끔거리던 통증도 금세 익숙해져 의식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라앉으면 조금은 아쉬웠다. 조비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머지 않아 하인들이 들어올 것이다. 들어와서 호봉의 옷을 벗기고 맞은 곳을 닦아주고 찢어진 곳에 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를 감아줄 것이다… 그들은 저들의 목숨이 귀하기 때문에 그냥 죽여달라는 호봉의 속삭임을 무시할 것이다… 사실은 그래도 아무 상관 없었다. 사는 데에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 만큼 죽지 못하는 데에 절망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호봉은 뜬금없는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조비는 차라리 낯짝을 뜯어고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매사 무표정할 수 있도록.

그게 아니라면 그는 평생 인간의 탈을 벗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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