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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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채 골목으로 뛰어 들어왔다.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바빠 너는 깊은숨을 몇 번이고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너를 쫓던 발걸음들이 골목 앞에서 멈춘다. 어디로 간 거야? 저쪽에서 찾아봐! 코앞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그치고 발걸음들이 멀어진다. 그제야 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눌러썼던 로브를 잠시 내려 차가운 바람을 잠시
눈을 감는다.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서. 졸업식, 다른 이들이 혼란 속에 남겨져 있을 때. 너는 가문의 입김으로 안전히 빠져나왔었다. 어떤 예술 활동도 하지 못했던 너는 요양 목적으로 한참을 친가에서 보냈다. 여유를 되찾은 뒤 너를 돌아보고 처음부터 시작했었다. 샤덴의 이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불사조 기사단의 표적이 되어 테러의 대상이 되기 전까지. 그
그는 초조하게 원을 그리듯 빠른 걸음으로 실내를 걷는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이 그의 점차 빨라지는 걸음걸이 탓에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왜 안 와. 입으로는 차분하자며 수십 번 되뇌고 있지만 심장은 생각만큼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본다. 통조림이 가득 찬 선반이 하나, 물이 가득 들어있는 물통이 여러 개, 복도로 갈 수 있는 문 하나,
자취를 감춘 지 꽤 되어서 저도 정보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당신이 아는 것 전부가 필요해서. 너는 의뢰인을 본다. 섬뜩한 초록빛 눈동자를, 그 안의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를,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눈빛을. 정반대로 완벽한 미소를 그려내고 입는 의뢰인의 입꼬리를. 너는 어떤 착각─의뢰인이 네 생각을 전부 읽어내고 있다는─에 빠진다. 아, 너무 어
하하, 괜찮아요. 문밖에서 이아의 구구절절 설명이 뒤따른다. 너는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네, 하고 대답한다. 이아가 방을 나가고, 손님─이하 의뢰인으로 칭한다─에게 설명하고 데려오기 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누가 방문하기로 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본다. 그러나 소용없다. 애초에 정체를 밝힌 적 없나? 너는 불현듯 찾아드는 불안감에 잘 묶인 머리를
다시 벽난로. 아까와 다른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너는 흩날리는 재와 함께 벽난로 안쪽에서 나타났다. 그 앞을 초조하게 돌아다니던 이아가 네 소리를 듣고 멈춘다. 고개가 네게로 향하고, 곧이어 성큼성큼 다가와 너와 시선을 온전히 마주한다. 엘.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다고요. 지금 손님이 오셔서 기다린 지 오
R은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끌어 올려 입을 가린다. 비로소 그는 완전한 가면을 쓴 셈이다. 플라스틱 카드 뒤의 입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J는 알 수가 없다. 손을 뻗는다. 손끝에 눈이라도 달려있는지 검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카드의 뒤편을 쓸어본다. R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이제는 표정도 잘 감추는구나. 이 정도는 돼야지. 이어지지 않은
어둑한 공간에 금빛 조명이 내려앉는다. 누군가 근처에서 막 뿌려댔는지 코가 아릴 정도로 강한 향수 냄새가 얄팍한 칸막이를 넘나든다. R이 표정을 구긴다. 짙은 녹색 테이블에 들고 있던 카드를 거칠게 내려놓는다. 화내지 마, 맞은편에 앉아 있던 J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를 달랜다. 하던 게임은 마무리해야지. R은 습관적으로 손을 올려 가면을 만지작거린다.
내 힘을 빌려줄게, 그러니 세상을 지켜줘. 네 젊음을 대가로, 지금의 세계를 지켜줘. D는 나에게 3일을 주었다. 다시 찾아왔을 때는 고민해 볼게요, 따위의 어중간한 말이 아닌 정확한 대답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 아니냐면서, 이 세계를 지키는 데에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며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거절할 거라는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이제 그만둘까. 이어지는 말은 없다. 하나의 방 안에 두 명의 사람이 존재함에도 왜, 라는 흔한 질문은 돌아오지 않는다. 선연한 녹색의 시선이 가닿을 뿐이다. 그는 손에서 펜을 내려둔 지 한참이다. 그저 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박자 맞추어 톡, 톡. 제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두드릴 따름이었다. 너는 손에 힘을 주어 쥐고 있는 악보를 구긴다. 악보에 그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