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류신호 01
조슈아 레비턴스 X 멜시샤 프리스카
잔류신호
01
조슈아 레비턴스 X 멜시샤 프리스카
w. 소마
행정실은 늘 분주하면서도 묘하게 차분한 공간이었다. 가끔 칸나가 괜한 소동을 부릴 때를 제외하면 깃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종이를 넘기는 부드러운 바스락거림, 가끔 찻잔이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 정도가 소음의 전부였다. 행정관 루인은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고 가끔 멜시샤는 그도 열 오른 화를 내 본 적 있나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어떤 권위는 부풀린 풍채와 엄포에서 오지 않는 법이다. 대신 비인간적일 정도로 명확하고 모든 일에서 원활한 지시와 업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루인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멜시샤는 손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단순한 검토와 승인을 반복하는 일인지라 생각의 반쯤을 다른 곳에 낭비해도 별문제는 없었는데, 이를테면 맞은편의 찻잔을 젓는 손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애쓰는 데도 뇌의 일부를 할애했다.
카를로스 파올로 글로리어스 3세는 의외로 쓸모가 있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었던 자에게 내리기에는 너무 가차 없는 평가 아닌가 싶지만 멜시샤는 처음 로드가 그를 행정실로 보내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에게 군주로서 갖춘 능력을 기대하기는커녕, 이 느닷없는 인사 발령이 초래할 달갑지 못한 일정들을 가늠해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쟁 포로라는 꼬리표를 달고 왕성에 들어온 그는 불평불만과 거센 대거리 외에 하는 일이 없어 보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상주 인원에 가까운 멜시샤 프리스카도 모르는 사이에 행정실의 일원으로 자리 잡아 갔다. 외교적 관점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 제법 괜찮은 통찰을 제공할 때도 있었다.
멜시샤는 그것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의자에 기대어 생각에 잠긴 듯 약간 찡그리며 종이를 들여다보던 카를로스 3세는 칸나에게 장난스러운 시비가 걸려 신경질을 내고 있었는데, 아무렴, 이 광경을 보고 그를 포로로 잡혀 온 비운의 국왕으로 여길 자는 없었다. 제 몸에 비해 너무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든 채 부드러운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던 칸나가 실수인 척 와르르 문서를 쏟아 섞어 버리자, 그는 몇 번 더 짜증을 내더니 이내 체념하고 다시 차곡차곡 분류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참 이상했다.
아발론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멜시샤에게 이곳은 늘 익숙하고 당연한 고향이었다. 아발론의 궁정에서 맞이하는 아침들은 언제나 평온했고, 누구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제 몫을 받아 일하는 것에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국왕의 결정에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고, 어떤 기구에서든 중요한 일들이 결정될 때는 모두가 어우러져 논의하며 조용한 합의에 이르곤 했다. 멜시샤가 어릴 적부터 아발론의 국민으로서 보고 배운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쉽고 믿음직하고 자연스러워서, 그 친절함이 너무 완벽했다.
가끔 멜시샤는 자신이 어디까지 아발론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곤 했다. 로드의 충실한 신하이자 기사로서 궁정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이곳에 발붙이고 있으면서도.
타국에서 온 이들도 금세 익숙해지고 마는 땅이었다. 궁정에서 일하다 보면 멜시샤는 타국에서 온 기사들이 얼마나 쉽게 이곳의 생활에 적응해 가는지 종종 놀랐다. 손익을 따져 가며 체결한 조약하에 아발론에 발을 디딘 협력자들은 물론, 전장에서 서로 무기를 겨누었던 자들이나 패배 후 포로가 되어 온 기사들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발론의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고 때론 익숙하게 웃음소리까지 섞었다. 가끔은 지나칠 만큼 빠르게, 마치 어떤 힘에 의해 자연스레 이끌리듯.
다들 이 견고한 질서에 올바르게 안착한 걸까, 혹은 엉거주춤 애써 몸을 끼워 넣고 있는 걸까. 멜시샤는 시에스타 홍차가 찻잔에 그리는 선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잔을 내려놓은 조슈아 레비턴스는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일에 집중하는 듯한 모양새를 꾸며 냈으나, 눈에는 늘 보이는 무성의함이 스며 있었다. 종종 조슈아는 몸을 틀며 대놓고 나른한 기색을 보이다가도, 루인의 고개가 돌아올 때마다 불필요한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 점이 카를로스 3세와 달랐다.
“그러고 보면, 조슈아 경의 파견은 이 주쯤 남았던가요.”
루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공간의 잔잔한 소음을 가르며 행정실을 채웠다. 시선은 종이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그 말이 닿은 방향은 명백히 조슈아였다. 멜시샤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며 루인의 말에 집중했다. 조슈아의 파견 일정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단순한 확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조슈아가 펜을 내려놓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프라우와 함께라고 들었습니다.”
“예, 이번 임무는 두 분의 협력이라면 크게 문제없을 것 같군요.” 루인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이번은 변수를 감안해 일정을 넉넉히 예상해 두는 것이 좋겠지요. 갑작스러운 지시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단순한 정찰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꽤 흥미로운 조합이군.”
카를로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동시에 멜시샤는 칸나가 카를로스의 책상 위를 날아다니며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부지런히 문서를 다시 분류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고의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섞어 놓는 움직임이 카를로스의 신경을 긁을 법도 했지만, 그는 루인이 새로 꺼내 든 화두에 정신이 쏠린 듯했다.
“임무를 위한 최적의 배치일 뿐입니다. 흥미롭다기보다는 효율적이겠죠. 두 사람은 함께 임무를 맡았던 경험이 많으니.” 덤덤한 목소리로 답하며 루인이 서류의 모서리에 깔끔하게 도장을 찍었다.
“효율이라……,” 카를로스가 미소를 띠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제국 출신 둘을 같이 파견 내보내는 건 과감한 결정이야. 그 지역이 조금 까다롭다고 들었단 말이지.”
“그 점도 고려한 결정일 겁니다.” 루인은 도장을 잠시 내려놓고 카를로스의 시선을 맞받다가 멜시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이번 주의 주요 일정은 제가 일부 재조정해두었습니다. 조슈아 경의 파견에 대비해 미리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은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멜시샤 경, 필요하다면 언제든 협력 요청하세요.”
멜시샤는 잔잔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준비해 둔 서류를 루인 쪽으로 건넸다. “네, 다른 파견 인원들의 일정 조정도 완료했습니다. 공백은 최소화했어요.”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는 척 대화에서 빠졌다. 다만 멜시샤는 그의 시선이 조슈아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파견의 세부 사항은 아직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만,” 조슈아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무심한 듯했으나 손은 펜을 굴리며 미세한 움직임을 반복했다. 멜시샤는 그 손끝에서 작은 긴장이 읽히는 순간을 몇 번이고 포착한 적이 있다. “로드의 결정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카를로스의 의문에 대한 뒤늦은 답이었다. 루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주 내로 마무리하도록 하죠.”
왜 하필 조슈아 경과 프라우 경일까? 멜시샤는 행정실 벽에 걸린 대륙 지도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 아발론이 차지했거나 평화 협정을 맺은 지역은 붉은 깃이 달린 화살촉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반대는 제국이었다. 문득 새삼스레 그것을 깨달았다. 아발론이 아니면 제국이고, 제국이 아니면 아발론이라는 것을.
엔타로니아에서 제국은 과거의 상흔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학살자였다. 주민들은 제국의 철권 아래에서 숨죽이거나, 혹은 저항했다. 현재의 엔타로니아는 그들 사이를 파고드는 이방인을 꺼려 시찰이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일부 주민들은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군복을 갖추어 입은 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켰고 구호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거친 적의를 표하기도 했다. 아발론이 보낸 지원단조차 예외가 아니었으며, 종종 대치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둘은 낯선 이방인조차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떤 역사의 일부였다. 그들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단순히 제국 아래에 부역한 병사가 아니라 제국의 상징 그 자체였으며 억압의 실행자였다.
하지만 도리어, 아마도, 그래서 그들이 선택된 걸지도 모른다. 엔타로니아의 과거에 사는 유령들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유령들을 만든 자들뿐이니까. 과거 제국에 몸담았던 그들이 남아 있는 잔재를 정리하는 것이 어쩌면 적합할지도 모른다고……
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멜시샤의 손이 잠시 한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해를 주었던 이들에게 책임을 지워 수습하도록 하는 것. 논리적으로는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공정한 일일까? 조슈아와 프라우에게, 엔타로니아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누구에게든? 어쩌면 루인의 말대로 그저 효율 때문일 수도 있다. 가장 잘 아는 자들을 보내겠다는 결정.
멜시샤는 다시 한번 조슈아를 힐끔 보았다. 여전히 무관심해 보였고, 문서 상단에 무언가를 느리게 쓰고 있었다. 어깨에 걸린 약간의 긴장감이나 살짝 굳은 턱을 보고 멜시샤는 설핏 찡그렸다. 조슈아는 항상 거리를 두었다. 아발론에서 그와 가깝다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그나마 제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프라우 정도였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치 항상 무언가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심판을, 혹은 인정받기를.
겉보기엔, 프라우 레망은 아발론에 놀라울 정도로 잘 적응한 것처럼 보였고 오히려 이곳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한 듯했다. 제국의 숨 막히는 체제를 떠올리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발론에서는 끊임없는 강자와의 투쟁에 더해 일상에서의 자율성과 혼란 또한 보장했으니까. 짙은 분홍빛 눈동자를 대면하면 그 또한 스스로 택한 제국의 8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다들 망각하기라도 하는 듯, 그런 과거쯤은 프라우가 왕성에서 활개 치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프라우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고, 쉽게 웃음을 터뜨렸고, 사람들은 그의 출신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었다. 어차피 그 프라우 레망과 진심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어울리는 유쾌함.
조슈아 레비턴스는 그렇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 내려놓지 못한 짐이나 기억 같은 것을 붙잡고 있었다. 로드의 기사 조슈아 경은 제 일을 잘 수행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투와 파견에 나섰고 행정에도 기여했다. 아발론의 제도는 전쟁의 가해자이자 세뇌의 피해자였던 자를 훌륭한 일원으로 환영했지만, 당사자는 여전히 아발론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더불어 아발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아마도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충성심일지도. 아니면, 멜시샤는 생각했다, 그저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을 정의해왔던 것을 내려놓는 것에 대한 두려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무엇이든 그것은 멜시샤에게 이번 임무에 대한 꺼림칙한 예감을 남겼다.
구 제국령은 조슈아 레비턴스가 군림했던, 그리고 무언가의 일부로서 살아갔던 곳이었다. 자기 자신보다 특임대의 지휘관으로서 임무와 충성을 더 중시하던, 그리고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지금의 조슈아는 그때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에 도달했다. 복잡해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를 생각하자면 그랬다.
깃펜에서 배어 나온 잉크가 종이를 적시며 짙은 원이 생겼다. 이제 그는 그곳에 돌아가야 한다. 집행자가 아닌 존재로. 엔타로니아의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까? 조슈아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프라우는 괜찮을 것이다. 멜시샤는 의심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프라우의 절망은 그런 곳에 있지 않을 테니까.
루인이 언급했던 변수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멜시샤는 로드가 이에 따라 발생할 감정적 대가를 진정으로 고려했는지 궁금했다. 제국의 최고 전력이었던 자 두 명을 그들이 한때 지배했던 곳에 보내면서 아무 언질도 없었나 궁금했다. 관측되지도 않은 폭발이 멜시샤의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엔타로니아의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더라도, 분명 그들 자신 안에서라도 어떤 확률로 일어날 폭발.
하지만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야, 멜시샤는 스스로 상기시켰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도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멜시샤는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너무 신경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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