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모래, 마을 -중앙에 선 첨탑
그 위의 이방인(1)
청년은 자주 책을 읽었다. 역사서를 적어나가기도 했다. 태양이 떨어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활자와 문화의 향유는 여전히 사치였으나 그는 그것이 제 소임이라도 된다는 것 마냥 굴었다. 실제로 그것이 직업이기도 했다. 한때 지녔던 이름이 언어의 전달자였으니 말은 다 했겠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직업이 이름인 풍조는 여전했으나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그는 전달자의 이름을 박탈당했고 시대에서 뒤처진 인물이 되기를 택했다. 전지전능한 타자기를 입 안에 욱여 넣어 삼킨 뒤 체화한 존재가 되어 모래 위를 거닐었다.
이방인이 된 그는 자주 첨탑에 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나무 판자 위에서 도르르 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조개를 주워온 제 어린 존재가 이것 보라면서 동그란 조약돌과 거대한 소라껍질을 탁자 위에 내려두었을 때엔 신명나기까지 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형태를 잡아가고, 목탄을 들어 거대한 도화지에 슥슥 따라 그리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티가 나질 않는다는게 흠이라고 해야하나. 늘상 무뚝뚝한 낯이나 무덤덤한 시선은 어디에 흥미가 꽂히는 건지 알기가 어려웠다. 꼬박 삼 년을 알고 지낸 호위꾼에게도 마찬가지였을까. 모르겠다.
전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들과 잘 나누지 않았다. 앎이란 것은 위험하고 신중한 것인지라, 남들과 함부로 속살거리기가 어려웠다. 위태로웠다. 동시에 은밀한 것이었다. 언어란 것의 속성을 다 짊어진 전달자는 아샤라는 이름으로 도피한 뒤에야 겨우 권태와 회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청년은 어느 날, 길라잡이가 되기로 택했다. 인근 마을로 내려갔다. 헤진 망토를 뒤집어쓴 그는 비밀스러운 투로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직업을 이름으로 짊어지지 않아도 괜찮으니, 내가 몰래 저 멀리 어딘가의 인명사전에서 주워온 단어들을 알려줄게. 가느다란 손가락을 지닌 예언가는 흰 눈으로 아이의 본성을 마주치며 답했다. 네 이름은 마야란다. 맑은 구슬이 되어라. 네 이름은 에하랴르란다. 용맹한 존재가 되거라. 아니, 실은 수식어 같은 거 모조리 의미 없이 너만의 삶들을 살아가거라. 더는 태양과 궁핍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와 활공을 누리며 숨을 쉬거라. 불티에 바람을 불어넣던 이방인은 그리 노래를 불렀다. 모닥불 인근에 앉아 수많은 이야기 또한 전해주었다.
처음엔 아이들과 미치광이만 앉아 듣던 것이, 밤이 됐을 즈음 이방인에게 건조한 빵과 따뜻한 물 한 모금을 건네며 더 해달라고 재촉할 정도였다.
이야기는 이와 같았다.
바다를 가르며 일어선 거인, 타르타토에 대한 설화였다.
한때 자연이 광활하고 무한했을 적에 있었던 거인은 뺨의 점이 별만큼 있었고, 보조개는 인간의 형태와 비슷하게 박혀 있었다. 그 웃음을 좋아하던 태양은 하늘과 가까운 타르타토의 정수리가 너무 따갑지 않도록 언제나 반 접은 채였고, 달은 밤이 어둡지 않도록 언제나 반 뜨인 채였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타르타토 또한 멸종이 예정된 존재인지라,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연이 소멸함과 동시에 따라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나 허무했던지 태양은 다시 눈을 부릅 떠 그 흔적을 찾고자 마음 먹었고, 달은 항상 눈 깜빡이며 건조하지 않게끔 시야를 청명하게 관리하게 됐다고. 그런 식으로 태양은 늘상 아침에 뜨고, 달은 밤에 고스란히 남아 세상을 굽어 살펴보게 됐다고. 그러다 인조 태양이 뜨며 많은 것들이 망가져, 실은 타르타토가 그 인공적인 뜨거움에 녹아버렸음을 자각할 적이면 세상이 온통 눈물을 흘려 추적추적 비가 뭉쳐서 내리는 거라고…….
이야기를 마친 이방인은 자리에 선다. 음유시인이 된 자는 리라나 하프 대신 검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존재한다.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려 인사하는 대신, 비어버린 그릇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밤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 소모품으로 사용해버린다. 화르륵, 타오르는 것들 너머로 새하얀 눈이 아른아른거린다. 아이들이 천 자락을 잡아당기며 더 이야기 해달라고 보챈다. 어른들은 은근슬쩍 아이들 말리는 척 하며 행동을 종용한다.
천이 벗겨지기 전에 음유시인은 벗어난다. 비밀은 아샤의 속성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희망하는 이방인은 미지의 속성이었던 탓이다.
첨탑으로 돌아온 청년은 다시 책을 읽었다. 소설을 적어내렸다. 타르타토가 살아있었다면 어찌 됐을까 홀로 즐거운 공상을 펼쳐내기도 했다. 하지만 타르타토는 태양과 달에게만 사랑을 받았을 뿐, 그 큰 키와 몸집으로 인해 여러 자연에 피해를 끼쳤다. 그런고로 사라지는 것이 마음 안 다치기엔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르타토는 아샤가 아니다. 아샤는 타르타토가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자에게 사랑받는 마음 따위는 이해를 할 수도 없거니와, 전지자에게 애정받는 심정 따윈 받아들일 수도 없다. 애초에 필부도 아닌데 뭣하러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내려간다.
끼익거리는 소리 없이 허공에 고정된 채로 안정적인 발판을 제공하는 나무 판자를 지나쳐 지하에 1층에 도착하면, 뚫린 곳 없이 꽉 막힌 돌벽이 모래 한 가운데에 지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특이한 구조로 구축된 첨탑은 아래로 갈수록 서늘하고 위로 갈수록 따뜻했다. 타르타토의 몸 구조와도 마찬가지였다. 위는 뜨거워서 해가 늘 반절 접혀야만 했고, 아래는 늘 그늘져있어 밤에 실수로 열 두 개의 발가락 꼬이지 않도록 달이 늘 반절 떠있어야만 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 좋았을까. 그런 애정을 받으면 좋았을까. 타르타토의 주근깨. 제 뺨에 널린 주근깨. 스스로의 뺨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모래더미에 푹 빠진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저 옥상의 꼭대기에서 새로운 이방인의 소리가 난다. 날개가 천천히 펄럭이는 음.
아. 네가 왔구나. 일어나서 반겨야만 하는데 도통 그럴 의지가 샘솟지 않는다. 그래서 아샤는 그저 누운 채로 자신의 이방인을 기다린다. 집에 주인이 있는 흔적은 있는데 그 주인이 도통 보이질 않자, 기어코 꼭대기 층에서 맨 아래 층까지 내려온 갈매기 한 마리가 아샤를 보고 환히 웃는다. 아샤 또한 희미하게- 웃었나? 글쎄다. 그건 갈매기만이 알 일이다.
"메베. 기다리고 있었어."
아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더미 속에서 입을 연다. 몸을 찜질하고 있는 게 같아요, 아샤. 뺨에 차가운 손길이 닿는다. 몸집보다 더 큰 날개가 모래에 닿아도 개의치 않다는 듯이 구는 갈매기는 인간의 손길에 제 뺨을 붙인다. 부빗거리기까지 한다. 그러면 인간은 상체를 휙 일으킨 뒤, 고개를 좌우로 저어 모래를 털어버린다. 말간 뺨을 엄지로 문질러준 뒤에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기상을 표명한다. 갈매기는 약간 박수를 친다.
"이번 여정은 어땠어, 메베."
"편지는 여기 있어요. 이번에는 종이 대신 얇은 돌이지만요. 폐허를 발견했거든요, 거기서 못과 망치를 구한 김에 석공 흉내를 좀 내봤어요. 음... 어떨지 모르겠네요."
"말 그대로 정형적인 활자네. 이건 탁자에 올려두자. 조금이라도 기스가 난다면 글자가 달라질테니까..."
"잠깐, 아샤. 읽으면서 올라갈 생각은 아니죠?"
"으음."
"아샤, 그렇다고 해서 계단에 앉으란 말은 아니었어요."
"흠."
"누우란 소리도 아니었는데."
"…….“
"이제 제 목소리도 안 닿는군요. 좋아요. 저도 여기 있을게요. 당신이 다 읽을 적까지요…….“
해가 저문다. 타르타토가 무덤에서 올라오는 시간이 된 뒤에야 식사 할 시간이 찾아왔음을 깨달은 아샤는 고개를 든다. 거대한 날개 아래에 등불을 든 자가 아지랑이처럼 빛낸다. 청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반대로 갈매기의 시야에서의 청년 또한 아른아른거리며 반짝거렸다.
"식사는 해야죠, 아샤."
"알겠어. 일어날게. 마침 다 읽은 참이야."
"좋아요. ...음, 그런데, 아샤, 이따 밤에 또 읽겠다고 등불을 켜고 새벽을 쫒을 생각은 아니지요?"
"있지."
"아샤."
"파란 열매에 빨간 열매를 으깬 뒤, 설탕을 약간 뿌려서 먹으면 간식으로 적당할 거야."
"벌써부터 밤에 먹을 요깃거리를 생각하는군요. ...뭐어, 나쁘지않겠어요."
얼마만의 귀환이었더라. 아마, 네 달 반 만큼의 여정이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날짜의 헤아림은 유의미하지 않다. 청년과 갈매기에겐 더욱 그랬다. 신체는 더이상 늙지 않을 것이고, 정신줄은 천천히 자라는 나무의 뿌리가 되어 얽매일 것이다. 청년은 그렇게 시간축을 비틀어두었다. 이방인이 된다면 철저하게 논외의 존재가 되도록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애틋하게' 여기는 존재를 위해 이 길고 기나긴 시간을 짊어지고자 마음을 먹는다. 갈매기는 언젠가 빠지지 않는 깃털과 생기지 않는 주름에 의아함을 여길까. 타르타토가 그랬던 것처럼 전지자의 사랑을 받는 기분을 느껴, 태양으로 날아가 녹아버릴까. 달 아래로 떠나 얼어버릴까. 유해가 쌓인 인공 태양 앞으로 가서 잊혀진 파도 너머의 사람들을 쫓을까.
답을 알고 있다.
갈매기는 언제나 첨탑으로 돌아오고, 청년은 그런 첨탑을 관리하는 길라잡이가 된다.
아주 간단한 수식의 완성이다.
식사를 마친 뒤, 청년은 갈매기의 뺨에 입술을 눌러주었다. 벙 찐 갈매기를 뒤로 하고, 청년은 편지 뭉치를 품에 안은 채 둥지로 올라갔다. 10분이 지난 뒤에야 갈매기가 급히 따라 올라오며 천장에 매달린 초에 불을 켰다. 그런 마중과 마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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