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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라이네케 개인 로그, 사망

  • 고문, 살해 등과 관련해서 다소 잔인한 묘사가 나옵니다. 글 속에서 주인공이 자살과 유사한 행위를 시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강한 오마쥬가 들어가 있습니다.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데스타운 보세요 두 번 보세요…….)

  • 최대한 많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려고 했지만, 못 등장한 친구들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미리 사죄 말씀 드립니다. 만일 글에 캐붕이 있다면…… 그건 줄리아의 탓입니다.

  • 후반부에 나오는 그림의 출처는 크레페의 나리(https://kre.pe/JxAl)님입니다. 최고의 커미션 다시 한 번 추천합니다.


부서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마법사들에게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미스터리 부서의 괴짜들은 오늘도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연구에 매진한다. 호그와트의 유령들은 그 자체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비록 그들은 그 최후의 여행에서 중간에 되돌아온 비겁자들임에도. 많은 마법사들은 알고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우리는 모두 최후의 미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갈 것이라고. 너무도 무겁고 낡아버린 오랜 육체를 버리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리고 또 다른 진실 하나. 살인 저주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손상시킨다. 그것은 영혼을 근본적으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아바다 케다브라를 쓰기 전의 영혼과 쓴 뒤의 영혼을 같을 수 없다. 반복적으로 쓸 수록 영혼은 낡고 해어져 온전한 형상을 갖출 수조차 없다. 호크룩스는 바로 그러한 원리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 아슬아슬하게 떨어져나가기 직전인 영혼을 물체나 생명체 사이에 감춤으로써 불완전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진실 하나. 사후 세계는 존재한다. 진실 둘. 살인 저주는 영혼을 손상시킨다. 그렇다면, 줄리아는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살인 저주를 너무도 오래, 너무도 많이 쓴 나머지 너덜너덜 해어져 온전한 형상을 갖출 수조차 없는 영혼은. 단지 호크룩스에 담기지 않았기에 형체를 유지할 뿐인,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갈기갈기 찢어진 채 겨우 이어진 영혼은, 어디로 가야 할까. 갈 수 있을까.


눈을 뜬다. 캄캄한 굴이 펼쳐진다. 천장은 둥글다. 손을 뻗어보면 벽은 돌과 같이 딱딱하다. 차가운 습기가 손끝에서 작은 물방울들을 만든다. 별다른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바람이, 파도가, 사람이 바위를 오랜 세월 깎아내어 만들어낸 것 같다. 코끝에서는 짭쪼름한 바다 특유의 비린내가 풍긴다. 어딘가 먼 곳에서 파도 소리가 메아리친다. 이곳은 어둡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환한 빛 아래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 그는 자그마한 빛무리 하나 없는 이곳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이곳은 어디일까.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무엇을 했는지,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무언가 빈 부분이 있었다. 기억의 한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공동이. 찾아내야 했다. 알아내야 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자석이 철가루를 끌어당기듯이, 배고픈 짐승이 음식을 향해 손을 뻗듯이, 빈 자리가 있는 퍼즐은 맞추어야 속이 풀리듯이.

그는 먼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되짚어 보았다. 내 이름은 줄리아 라이네케다. 한때는 줄리아 캠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었다. 나에게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딸아이가 있다. 나는 스코틀랜드 북쪽 끝에 있는 작은 어촌에서 산다. 나는 마녀다. 호그와트에서는 후플푸프였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전쟁이 있었고, 우리는 편을 갈라 싸웠다. 그리고, 나는…… 나는.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이름은 율리안 라이네케. 시대에 의해 일평생 고통받아온 사람이다. 나는 그가 나와 닮았다고 여긴다. 나는 그를…… 나는, 그를…….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무언가가 떠오를 듯 하면서도, 잡힐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잡히지 않았다. 더 생각을 하려고 하면 두통이 일었다. 자신이 잊은 기억이 이것과 연관이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것을 찾을 수 있지? 그는 눈앞에 펼쳐진 어둡고 컴컴한 굴을 바라보았다. 저 굴을 따라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다시금 잃어버린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맞아요.”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곁에는 한 인영이 서 있었다. 키는 그와 비슷했고, 이 굴만큼이나 어두운 색의 로브를 쓰고 있었다. 그 안은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목소리는 쉽게 높낮이를 짐작할 수 없었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조용했다. 인영은 손가락으로 굴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저곳에 들어가게 되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궁금해하고 찾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줄리아는 대답했다. “나는 저곳에 들어가겠어.”

“너무 성급하게 굴진 마세요, 줄리아.” 수수께끼의 인영은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펼쳐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를 조용히 시키듯이.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진실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진실은 고통스럽고 아플 거예요. 지금의 무지가 그리워질지도 몰라요. 당신은 일평생 도망쳐왔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제 말을 들으세요. 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답니다. 무엇을 택하고 싶은가요, 이 순간의 안온과, 가혹한 진실 중에서? 정말로 당신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줄리아는 로브를 뒤집어 쓴 그 존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그로 하여금 대답을 막고 있었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불안이다.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저 존재의 말이 옳다. 그 진실은 가혹할 것이다. 그가 그동안 도망쳐 온 것이니까. 마주하지 않으려 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는 브리짓을 떠올렸다. 그 파도 소리가 들리던 집을 떠올렸다. 지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그 짭쪼름한 바다의 냄새를.

그는 대답한다.

“하겠어.”

“진심인가요?”

“진심이야.”

“각오는 된 것이겠죠?”

“그래.”

“좋아요.”

그렇다면, 로브를 쓴 존재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줄리아에게 내밀었다. 빨간색 꽃봉오리와 초록색 줄기.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색을 가진 한 송이의 카네이션이었다. 줄리아는 수수께끼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건……”

“절 믿으세요. 분명 당신께 필요할 테니. 이 꽃을 들고, 저 안으로 들어가면 된답니다. 길이 좀 구불구불하지만, 당신이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경계해야할 건 없어?”

“없어요. 아무것도…… 아. 당신이 가지고 계실 진실을 제외한다면.”

“행운을 빌게요.”

인영은 로브를 더 깊숙이 눌러쓰며 말했다. 줄리아는 그대로 출발하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물었다.

“네 이름은 뭐야?”

“그건 당신이 저 끝까지 내려가면 알게 될 거예요. 여기서 알려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뿐.”

“그게 뭐지?”

“제가 당신의 죄책감이라는 것.”

“…….”

“잘 가요. 줄리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줄리아는 그대로 인영을 일별했다. 그는 그 수수께끼의 존재로부터 뒤돌아서 천천히,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굴 안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보았을 때, 인영은 줄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저 존재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가 밟은 것은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바닥이었다. 그가 처음 눈을 뜬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습기 찬 바닥은 미끄러웠고 곳곳에 푹신한 녹색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벽을 붙잡고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굴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머리를 천장에 부딪치기 일수였다. 자연스레 고개는 숙여졌다. 그는 몸을 굽혔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키마저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점차 어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다, 툭. 그의 발이 무언가를 걷어찼다. 자갈이었다. 미끄럽던 돌 바닥 위로 나무와 철로 이루어진 선로가 생겨났다. 벽은 매끄러운 바위의 질감이 아니었다. 거칠고 꺼끌꺼끌한 벽은 붉은 색의 벽돌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 역시 달라졌다. 더 이상 머리를 높이 들어도 천장에 부딪히지 않았다. 공간이 한순간에 넓어졌다. 반원형으로 된 거대한 공간.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통로처럼…… 터널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건 기차가 지나다니는 터널이야.

그러나 기차는 온데간데없었다. 멀리서 경적 소리가 울리는 듯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선로는 텅 비어 있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오래도록 자갈이 발에 채이는 소리만이 터널에 울렸다. 그는 바스락거리는 자갈을 밟고 횡목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터널의 벽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눈높이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는 그림들은, 꼭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힘을 주어 그린 것만 같았다. 거기에는 설명을 하려는 것처럼 비슷하게 동글동글한 글씨로 무언가 쓰여져 있기도 했다. 줄리아는 손으로 벽을 쓸어가며 거기 적혀있는 것들을 읽었다.

“우디. 귀여운 친구다. 나에게 반짝반짝 빛난다고 해주었어. 아이작. 뭔가 어려운 아이다. 성숙해 보여. 나한테 칭찬을 해 주었어. 헨.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저 아이는 래번클로에 가겠지? 레이먼드.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어. 정말 사랑을 해도 괜찮은 걸까? 아일라. 조금 무서워. 왜 자꾸 나에게 질문하는 거야? 유진. 동화책에서 나온 것 같은 도련님처럼 생겨서 신기해.”

그래. 그랬었지.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까마득한 오래 전, 그도 친구들도 모두 어렸던 그 시절. 누군가는 여전히 그 순간 속에 살고, 누군가는 그 날의 기억들을 그리워하며, 누군가는 이제 그때로부터 너무도 멀리 와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더라. 이 터널에 빼곡하게 새겨진 그림과 글들.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나에게 이 시절은……

“멈춰, 독일인.”

상념을 끊은 것은 제복을 입은 한 어린아이였다. 빛 하나 없는 터널 속에서는 검은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 아이의 눈높이는 그와 비슷했다. 줄리아는 그제서야 자신도 어린아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루드비크.”

“여기는 지나갈 수 없어. 파시스트는 출입 금지. 보이지? 너 같은 독일인은 여기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 어서 돌아가.”

“……루드비크, 나는.”

“잘 생각해. 여기가 뭐가 나빠? 아직 아무런 문제도 없던 시절이잖아. 영원히 이 시간에 박제되어 있고 싶은 게 잘못된 거야? 시대가 우리를 앞서나갔어. 잘못된 건 역사라고. 나와 같이 여기 있어, 독일인. 율리아. 너도 이제는 이 때가 싫지 않잖아. 아니. 차라리 이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잖아.”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왜? 왜 더 앞으로 가려는 거야? 이 앞이, 미래가 네게 줄 것은 상처뿐이야. 네가 더 나아가면 후회하게 될걸. 분명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할 거야. 그날, 그때, 그 순간으로. 내가 그런 것처럼.”

루드비크는 두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았다. 잿빛 눈에서는 어떠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줄리아를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막을 것이다. 이 터널에, 그가 만들어놓은 모형 정원에 가둘 것이다. 이곳에서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도록. 아직 그 누구도 죄를 범하지 않은 시절, 모두가 깨끗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에, 영원히……. 죄? 줄리아는 생각한다. 죄라고?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데?

줄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루드비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날 해치기라도 할 셈이야, 독일인?”

“아니.”

그는 루드비크가 그러한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그 다음으로 그가 한 것은 포옹이었다. 오래 전, 그 연회장에서 그러했듯이. 그리고…… 기억이 흐릿하다. 분명 나는 너를 몇 번 더 안았는데. 그것이 왜였는지, 언제였는지가 기억 나지 않아.

“나는 과거에 머물고 싶지 않아. 그 과거가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하고, 죄 없이 깨끗했더라도……. 박제된 것은 죽은 것이야. 우리는 살아있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 나를 봐. 결국 나는 나아갔고, 그렇게 남편과 딸이 생겼는걸. 이때의 나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야. 그렇지?”

“…….”

“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아. 루드비크. 하지만 나는 항상, 그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말하고 싶었어. 루드비크. 루드비크 칼리노프스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너를 그만 미워해.”

“독일인 주제에……”

“그래. 나는 독일인이지. 그래서 말하는 거야. 이건 정답이 될 수 없어. 루드비크. 이제는…… 그래도 돼. 괜찮아.”

품 안의 어린아이는 오래도록 버둥거리다가 잠잠해졌다. 이윽고 들리는 것은 웃음소리였다. 루드비크는 말했다.

“허튼 소리…… 허튼 소리야. 네가 이 다음으로 넘어가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한 번 이곳을 벗어나면, 넌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없어. 네가 아무리 바라더라도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래도 괜찮다면, 그래도 괜찮다면…… 그래. 어디 한 번 앞으로 지나가 봐.”

포옹을 풀자 그는 줄리아의 손에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은색 메달 위로 붉은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 그래. 그가 종종 이야기하곤 하던 노동 공로 훈장이었다. 루드비크는 이어서 말했다.

“이걸 달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앞으로 네가 지나게 될 곳들에서도 마찬가지겠지. 무슨 기억이 돌아올지는 나도 몰라. 결국 나는, 너의…… 아냐. 됐어. 행운을 빌지. 앞으로 그게 아주 많이 필요할테니 말이야.”

줄리아는 루드비크를 보았다. 그는 루드비크가 그러했듯 훈장을 왼쪽 가슴에 찼다.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것은 두 번의 포옹. 그리고 한 번의 짧은 입맞춤.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서로를 문안하기 위해 거행했던 일상의 의식.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루드비크를 향해 다가가, 그를 붙잡고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날, 루드비크가 줄리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안녕, 루드비크.” 그는 말했다.

“그래, 안녕.” 루드비크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그가 겨우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중얼거렸다. “……율리아.”


선로가 끊긴다. 자갈과 나무, 철로 이루어진 길은 느닷없는 곳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횡목, 마지막 철길, 마지막 자갈 더미들, 그러고는 끝이다. 전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터널의 천장은 점차 높아지고, 또 높아지더니 어느 순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손을 있는 힘껏 뻗어도 천장에 닿지 않는다.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별들조차도 천장 아래에 있을테니.

끊긴 선로 뒤로 이어지는 것은 부드러운 흙이다. 선로의 자갈을 뒤덮던 풀들은 이제 발목에 닿을 정도로 높이 자라난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밑에서 잔디가 으스러지며 특유의 풀내음을 풍긴다. 밤의 공기는 차갑다. 그래. 줄리아는 깨닫는다. 이곳은 터널이 아니다. 그 밖이다. 해와 달이 뜨고 이지러지며, 낮과 밤이 존재하는 밖. 머리 위로는 검푸른 하늘 아래 별들이 빛나고, 눈앞에 펼쳐진 언덕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불이 켜지고 연기가 오르는 집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도 같다.

주변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돌로 이루어진 비들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는 실수로라도 누군가의 비석을 걷어차고, 누군가 평온히 잠든 곳을 짓밟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이곳은 묘지다. 그는 익숙함을 느낀다. 오래 전 발 달린 유리병을 쫓아 친구들과 함께 갔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생각한다. 이곳은…….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그가 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삽시간에 사위가 뿌옇게 물든다. 안개다. 안개는 검푸른 하늘을 가리고, 빛나는 별을 가리고, 저 멀리 보이던 불빛을 가리고, 발밑의 잔디조차 가렸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맞는 길을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안개 속에서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음산한 목소리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목소리는 속삭였다.

“아들레이드, 너는 왜 나를 여전히 그렇게 대해?”

다른 목소리가 그의 발밑을 훑고.

“윌리엄, 그 때 네 표정은 무슨 뜻이었어? 내가 안쓰러웠던 거야?”

또다른 목소리는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디스, 너는 왜 나를 그렇게 봐? 하지만 너도 결국은, 아니. 아닌가. 모르겠어. 너는 나를 이해해?”

그는 제 몸을 껴안았다. 목소리들이 하나씩 그를 스칠수록 점점 몸에 한기가 돌았다. 줄리아는 이 시기를 기억했다. 여전히 누군가는 순수함을 간직했고, 누군가는 서서히 때가 묻기 시작하던 시절. 변화의 씨앗이 뿌려지고 싹을 틔우기만을 기다리던 순간. 여러 분기점이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때가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너희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어떤 마지막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 달빛이 빛나던 밤 누군가 말한 것처럼, 그는 그가 설 자리를 일찍이 정해버렸다. 하지만, 하지만…… 왜였지? 그는 손을 뻗는다. 나는 무엇을 택했지? 왜 그 길을 갔었지? 모르겠어. 단지 후회만이 가득할 뿐이야. 후회만이 이 가슴을 가득 채워서, 아플 정도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그 순간 거대한 어둠이 그를 덮었다.

안개 속의 그림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했다. 줄리아는 그들의 형체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길었다. 다른 사람은 머리가 짧은 것 같았다.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를 스치던 음산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웠으나 알 수 없는 온기가 있었다. 그를 향해 보이는 어떠한 다정이. 아니, 그것은 다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은 아마도. 단지……

목소리는 말했다.

“줄리아. 이곳은 네게 가장 아픈 기억이 잠들어 있는 곳. 네가 너를 버린 이유가 있는 곳이야.”

“그리고 네가 한 선택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 그들은 합창한다.

“기억하겠어? 감당할 수 있겠어?”

줄리아는 대답했다.

“너희의 모습을 보여줘.”

목소리가 말했다.

“기억하겠어? 감당할 수 있겠어?”

줄리아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네 모습을 보여줘!”

툭. 발밑에 무언가가 놓였다. 그는 제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들어올렸다. 구두다. 익숙한 로고가 새겨져 있는.

목소리가 명령했다. “그걸 신어.”

구두 안에서는 금속 귀걸이가 달그락거렸다. 그는 그것을 꺼냈다. 역시나 익숙한 모양의 귀걸이였다. 길게 늘어진 물방울 모양을 한. 줄리아는 생각했다. 이 구두는, 그리고 이 귀걸이는…….

목소리가 또다시 명령했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걸 네 귀에 끼워.”

“그럼 너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어?” 줄리아는 물었다.

목소리가 답했다. “그럼 네가 바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는 목소리의 명령대로 구두를 신고 귀걸이를 끼웠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

그리고 한 순간, 거대한 파도가 밀려들듯이, 눈부신 벼락이 내리치듯이, 폭풍우가 온몸을 휘감듯이. 기억이 돌아왔다. 그 날 것의 증오. 그 날 것의 고통.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려 할때마다 끝없이 약해지던 율리안 라이네케의 몸. 이대로 진창으로, 수렁으로 빠져버릴 것만 같던 나날들. 타오르던 분노. 타오르던 고통. 타오르는, 증오! 약한 것을 향한, 돌보아야 하는 것을 향한, 부모를 향한, 율리안 라이네케를 향한 증오. 그는 그 증오를 가지고 손을 잡았다. 무엇과? 악의와. 그렇게 달빛 아래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고.

줄리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헐떡였다. 온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이 진창으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감정이 너무도 강렬했다. 여기에 휩쓸리면 그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기쁜가? 아니면 슬픈가? 절망한 것인가? 분노한 것인가? 모르겠어. 그는 울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결국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부드러운 묘지의 흙 위를 뒹구는 동안, 안개가 서서히 걷혀 갔다. 그림자는 이제 명확한 형상을 갖추어 그의 앞에 드러났다. 얼굴에 가득한 백색의 반점. 짧은 흰색 머리, 흰색 정장. 길디긴 은빛 머리카락, 노란색 눈. 귀에 걸린 귀걸이. 일상적인 복장. 형상을 갖춘 그림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선에는 연민이 느껴졌다.

“나는 항상 너를 이해하지 못했어.” 짧은 머리의 여성이 말했다.

“임판데…….” 줄리아가 중얼거렸다.

“나는 결국 너를 지키지 못했지.” 은빛 머리칼의 남성이 말했다.

“핀갈…….”

줄리아는 두 사람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는 말했다.

임판데를 향해. “네가 정말 미웠어. 네가 내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핀갈을 향해. “네가 정말 미웠어. 너는 결국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날 지켜주지 못했잖아.”

결국 당신들은 과거다. 그가 극복하지 못한 과거. 그는 가족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었다. 그는 보호를 갈구했으나 받지 못했었다. 오래. 아주 오래도록. 임판데는 그가 가지지 못한 가족을 상징했다. 핀갈은 그가 받지 못한 보호를 상징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이토록 미웠구나.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그 점이, 내가 당신들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구나.

흐느낌이 멎었다. 몸의 떨림도 멎었다. 그는 붙잡은 손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먼저 놓은 것은 임판데의 손이었다.

“너를 정말 오래도록 미워했어. 가족이 내게 족쇄였던 그 세월만큼, 오래. 하지만 임판데, 나는 사실 알고 있었어. 우리 엄마가 네게도 자주, 좋은 가족은 되어주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무시했지. 그래야 네가 나의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 엄마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너에 대한 원망도 커지니까.”

임판데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너든 나든, 그 족쇄를 벗어났어. 그렇지? 마지막으로 본 너는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걸. 그리고 나도 그랬지. 아빠도, 엄마도, 그 사람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던 때는 지났어. 우리 모두 독립에 성공한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를 놓아줄게. 임판데. 우리는 결코 좋은 자매였다고 할 수 없지. 그래도 나는, 지금 와서라도, 네가 행복하길 바라.“

임판데가 답했다.

“그래. 졸업 축하해. ……줄리아 캠벨.”

하나의 형상이 사라졌다. 줄리아는 이제 다른 쪽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핀갈.”

“……줄리아.”

“너는 오래도록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그래. 내 인내는 그저 함묵이었지.”

“오랫동안, 네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원망했어.”

“알고 있어. 너는 내 가장 큰 실패였으니까.”

“……그럼에도, 너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

“네게 의지해서 수백 번의 밤을 보냈어. 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내 눈이 닿는 곳에. 그것이…… 어쩌면 네 보호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와서 생각해. 너는 결국 연회장에서 내게 달려와주었고, 나를 네 고향에 데려가 주었고, 내가 가장 절망에 빠져있을 때 나를 먹여살려 주었어. 네가 나에게 준 것은 그저 패트로누스뿐만은 아니었던 거야. 그건 돌봄이었어. 분명.”

“……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그래. 핀갈. 그러니……”

줄리아는 핀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넌 약속을 지켰어. 정말로.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는 분명 그랬으니까. 네가 너무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

핀갈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했다.

“그런다고 납득이 될 것 같냐……. 하지만 알았다. 그게 네가 내린 결론이라면, 이젠 나도 작별을 해야할 때인가보군. 잘 가. 줄리아. 많이 미안했다.”

“나는 많이 고마웠어.”

마지막 형상이 사라지자 안개가 온전히 걷혔다. 줄리아는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풀내음 사이로 바다 비린내가 섞였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제는 갈 시간이었다.


끝이 뾰족한 울타리가 바다와 땅의 경계를 가른다. 그 아래로는 북해의 검푸른 파도가 새하얀 절벽에 제 몸을 부딪쳐 포말로 산화한다. 발밑에는 거친 모래와 부드러운 흙, 짓밟힌 잔디가 있다. 코끝에서 짭쪼름한 바다 비린내가 맡아진다. 굴에 들어가기 전 맡았던 그 냄새다. 공기는 축축하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다. 어선들의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빛나는 것은 오로지 수평선 가까이에서 회전하는 등대의 불빛뿐.

절벽 위에 놓인 초록 지붕의 집. 줄리아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면 굳이 저 지붕을 초록색으로 칠한 건, 그 소설 때문이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손을 뻗어 벽에 서린 소금기를 쓸었다. 분명 그랬지. 나는, 앤 셜리가 가졌던 것과 같은 그런 가정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서.

손에 묻은 소금기를 털며, 그는 중얼거렸다.

“비록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것 같지만.”

별 하나 빛나지 않는 하늘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새벽녘에 풀잎에 맺히는 이슬처럼, 무덤을 감싸던 안개처럼 보드랍기 그지없는 비였다. 빗방울은 그의 머리를 타고, 어깨를 스치고, 손에 묻은 소금기를 녹이고,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내렸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머리는 이미 눅눅해진지 오래였다. 그는 비를 손으로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 어떤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시린 겨울 바람이 그의 몸을 떨게 하던, 2월의 어느 날의…….

그는 검푸른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낀 탓인지 하늘과 바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내리는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한 순간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더니, 이내 우르릉거리는 천둥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먼 곳을 보았다.

“폭풍우가 오고 있어요.”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바다만큼이나 검고 푸른 머리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담은 듯한 시린 눈동자. 그와 비슷한 키를 가진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옷차림은, 그래. 줄리아는 생각했다. 그날과 똑같군. 그는 입을 열었다.

“……레아.”

“설마 다른 누구를 기대한 건 아니죠? 감히, 이곳에서 말이에요. 여기서 당신을 기다릴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어요?”

“그래. 언제나 너였지.”

“당신은 여길 못 지나가요. 조금 전 그 기억을 맛보았잖아요? 가족에 대한 증오. 악과도 손을 잡게 만드는 그 감정을. 나는 그 다음이에요. 당신이 그 다음에 저지른 짓이죠. 나는 당신의 죄악이고, 당신의 재앙이에요. 정말로 이걸 보고 싶어요? 나를 지나가려면 그 기억을 받아야 할텐데.”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래요. 당신이 잊어버린 그 기억이에요. 당신의 삶 속 거대하게 자리한 공동을 채울 마지막 조각. 감당할 수 있겠어요? 여기서 주저앉아도 좋아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에게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모르죠.”

“…….”

“한 번 받으면, 돌이킬 수 없어요. 그때 칼리노프스키 부위원장이 말한 것처럼. 다시 가져가달라고 아무리 울며 빌어도 안 돼요.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해요. 시간을 드릴게요.”

줄리아는 망설였다. 그는 조금 전 그가 느꼈던 감정을 기억했다. 온몸을 불태우고, 깊은 구덩이 속으로 파묻게 만들며,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사물을 본래의 사물로 보지 못하고, 친구를 버리고, 악과 손을 잡고,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벌벌 떨기를 바라게 만드는 그 감정. 그것은 증오였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경멸이었다. 그것은 탈력이었다. 눈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분명 이보다 더 강렬한 기억일 터였다. 견딜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수수께끼의 인영이 한 말을 생각한다.

진실은 고통스럽고 아플 거예요. 지금의 무지가 그리워질지도 몰라요.
당신은 일평생 도망쳐왔으니까.

루드비크의 말을 생각한다.

허튼 소리…… 허튼 소리야.
네가 이 다음으로 넘어가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그 진실일까? 문득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불안이 몸을 엄습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나는 지금의 무지를 그리워하게 될까? 하지만, 그는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면 안될 것 같아. 이대로 무지 속에, 안온 속에 머무르면 안될 것 같아. 무언가 중요한 것을 나는 잊고 있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뒤에 두고 왔어. 이걸 찾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나’로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줄리아는 레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 기억을 줘.”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나는 분명 이야기했어요. 돌이킬 수 없다고.”

“알고 있어.”

“그런데도 받아가려는 거예요?”

“알아야 해. 이대로는 살 수 없어.”

“후회하게 될거라고 말했어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알아야겠어.”

“…….”

“고집 하고는, 알았어요.”

레아는 머리를 묶은 푸른색 리본을 풀어 줄리아의 손에 올려놓았다. 자수가 수놓인 리본이었다.

“이건…….”

“이걸로 머리를 묶어요. 그러면 기억이 돌아올 거예요. 내가 묶어줄 필요는 없죠?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그래. 괜찮아.”

줄리아는 레아의 말을 따랐다.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다시금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쓰게 웃었다. 그는 말했다.

“후회해도 나는 몰라요.”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시작은 하나의 초록빛 섬광이었다. 갈색 머리와 그에게 물려준 헤이즐넛 빛깔의 눈동자. 그는 자신이 아는 사람을 향해 처음으로 그 주문을 외웠다. 그를 향해 독일어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을 향해서.

그는 말했다.

“아바다 케다브라.”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라고 했던가. 그것은 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7학년 시절 사람을 고문하는 법을 익혔다. 단지 용서받지 못할 저주만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화상 저주와 쏘기 주문, 사람의 내장을 헤집는 어둠의 마법까지 이미 써 본 몸이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랐다. 누군가를 온전히 죽이겠다는 마음을 담아 저주를 쏘아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쓰러진 시체 앞에서 그는 울었다. 그리고 미친듯이 웃었다. 그 날이었다. 그의 마음 속 어딘가가 비틀어진 날은. 뻥 뚫린 해방감은 단지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베고, 찢고, 살을 가르고, 끓는 기름을 붓고, 사지를 절단내고, 비명소리를 듣고, 시체를 피범벅으로 만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고, 그럼에도 죽이지 않고,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자비를 베푼다는 듯 살인 저주를 날리고. 그리고 웃었다.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웃었다. 즐겼다. 오로지 그 순간에만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 오로지 그 순간에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어서. 오로지 그 순간에만, 그는……

줄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 모든 피. 그 모든 죽음. 그 모든 비명. 그 모든 애원. 그 모든 고문. 그 모든 사람들.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들……. 그들의 이름이 메아리친다. 그들의 얼굴이 소용돌이친다. 목록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이 죽을 때 느꼈던 감정을 느낀다. 손끝의 지팡이가 떨리던 감각을 떠올린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흥분이었다. 토악질이 난다. 치가 떨린다.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자신이 너무나도 밉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나야. 오래 전 누군가 속으로 했던 생각이 지금 그의 마음속에서 울려퍼진다. 두 손이 덜덜 떨려온다. 그래. 그래. 결국,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내가 가장 혐오하던 것은……

“나야.” 그는 중얼거렸다.

“이걸 외면하고 싶어서, 그동안 도망쳐온 거야. 이걸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숨었던 거야. 내가 마주보아야 할 죽음이 너무나도 많아서. 내가 마주보아야 할 죄악이 너무나도 커다래서……. 그 피가, 강을 붉게 물들 정도로 흘러서, 그 시체가, 언덕을 이룰 정도로 쌓여서, 그 비명이, 내 귓속에서 끝없이 메아리쳐서……”

줄리아는 레아를 붙잡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는 애원했다.

“다시 가져가 줘! 이건 싫어. 나는 견딜 수 없어.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견딜 수 없어. 나는 이런 내가, 너무나도……”

“가져갈 수 없어요.” 레아가 말했다. “말했잖아요. 후회할 거라고. 하지만 규칙은 규칙이에요.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줄리아는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흙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잔디를 잡아뜯고 땅바닥을 긁었다. 몸을 뒹굴었다. 머리가 진흙으로 범벅이 되고, 옷이 흙바닥과 구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그는 그대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울었다. 온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생각해보니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레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줄리아의 울음이 멎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눈물어린 눈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 그게 뭔데?”

레아는 손을 들어 울타리 너머 절벽을 가리켰다.

“뛰어내려요. 그럼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요. 당신은 다시 처음 눈을 떴던 장소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다시 선택할 수 있어요.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도 방법이죠.”

줄리아는 일어났다. 그 사이 북해는 더욱 어두워졌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절벽에 부딪쳐 흩어지는 파도 소리가 괴물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아주 깊이, 낮게 으르렁대는 괴물. 줄리아는 울타리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눈앞에서 파도가 포말이 되어 사라졌다. 그 새하얀 절벽은 꼭 괴물의 이빨처럼 느껴졌다. 바다가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울타리에 한 발을 걸쳤다. 바람에 푸른 리본이 풀려 날아갔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몸을 기울인다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다시금 그 안온한 무지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게 당신이 내리고 싶었던 결말인가요?”

그는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로브를 쓴 사람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 인영이었다. 수수께끼의 존재. 처음 그에게 굴을 알려준……. 인영은 한 손에 푸른 리본을 쥐었다. 조금 전 바람에 날아가던 그 리본이었다.

줄리아는 말했다. “너는…….”

“두 번의 기회는 없어요. 이곳에서 몸을 던지면, 당신은 영원히 온전해질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기억은 너무 괴롭단 말이야.”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진실은 괴로울 것이라고.”

“왜 나를 말리는 거야? 너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 아니야?”

“아니오, 줄리아.”

인영은 로브를 벗었다. 그와 같은 새까만 머리는 그와 달리 길었다. 두 눈은 어둠 속에서 검게 보였다. 피부는 짙었다. 목에 두른 것은, 체크무늬와 비슷하지만 다른 검은색 무늬가 하얀 천 위에 그물처럼 얽힌 저것은…….

쿠피예. 줄리아는 혼란 속에서 그 이름을 기억해낸다.

그와 동시에, 인영은 에스마일은 대답한다.

“이건 그 무엇보다 저와 상관 있는 이야기예요.”


에스마일은 줄리아와 레아 사이에 있었다. 하늘은 이제 이 절벽을, 그 위에 놓인 줄리아의 집을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혀 버리겠다는 듯이 거센 비를 퍼부었다. 사위가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마땅할 정도의 비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는 에스마일을 볼 수 있었다. 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스마일의 말은 그 거친 빗소리를 뚫고서 줄리아의 귀에 닿았다.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줄리아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빗소리가 없었던 것처럼. 이것 역시 그 굴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신비인 걸까? 줄리아는 생각했다.

에스마일이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이제는 많은 것이 기억나셨으니, 저와의 일도 기억나겠죠. 안 그런가요?”

“에스마일.” 줄리아는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래서 네가. 네가, 나의…….”

“당신의 죄책감이죠. 네, 맞아요.”

“그렇다면 여기는 왜 왔어? 나를 괴롭게 하려고?”

“아니오. 저는 당신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무엇을?”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줄리아.”

“브리짓을 말하는 거야?”

“아니에요. 물론 브리짓 역시 당신을 기다리겠지만…… 달라요. 브리짓에게는 루가, 힐데가, 리드 부부가,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에겐 오직 당신뿐이에요. 당신이, 가야해요.”

“왜 내가 가야해? 그냥 내버려두면 안 돼?” 그는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이대로 모든 기억을 잊고 싶어. 다시 돌아가게 해줘……”

“줄리아.” 에스마일이 나직히 말했다.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나요?”

“그래.” 줄리아가 울먹였다. “내가 용서가 되지 않아. 그래서 다시 도망쳐버리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그러나 어디로? 그의 내면이 속삭였다. 네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데?) 루드비크가 옳았어. 전부 허튼 소리였어. 레아가 옳았어. 나는 이걸 감당 못해. (그리고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어느 마녀의 이름.) …… 웬디가 옳았어. 나는 영원히 어린아이이고 싶어. 아니, 아니 모르겠어. 나는…….”

“하지만 이게 당신이에요, 줄리아. 나약하고, 사악하고, 모두를 미워했고, 그러면서도 미움을 견디지 못했고,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랐고, 그래서 과시하듯 사람을 죽였고, 고문했고, 그러면서도 슬퍼했고,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이 족쇄가 아니길 바랐고, 그저 살고 싶었던…… 그런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언제나 그랬어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이제 와서 모두 사과하라는 거야? 난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텐데. 다시는 사랑받을 수 없을 텐데.”

“아니오. 줄리아.” 에스마일은 두 눈을 감았다. “당신은 그날 제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죠. 그러니 전할게요. 제가 그날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그게 뭔데?”

“당신을 용서해요.”

줄리아는 에스마일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뭐라고 했어?”

“당신을 용서한다고요.”

에스마일은 줄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했다.

“당신을 용서해요, 줄리아.”

“나는 너를 고문했어.”

“알아요.”

“나는 네게 살인 저주도 쐈어.”

“실패했죠.”

“나는 내 일평생 너를 싫어했는데.”

“기억해요.”

“그런데 나를 용서한다고?”

“네.”

“……왜?”

“왜냐하면,” 에스마일은 웃었다. 줄리아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어쩌면 처음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언제나 사랑했으니까요.”

줄리아 델피니 라이네케. 실은 저는 대단한 도덕이나 이상 같은 것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늘 그저 약한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아.

그는 무슨 생각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것은 언젠가 힐데가르트가 외쳤던 울부짖음이다. 어쩌면 좋을까⋯… 전부 다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노력하는 데도⋯… 자꾸만 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응, 율리아⋯…? 돌이켜보면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다정한 자신이 싫었고, 나약한 자신이 싫었으며, 사악한 자신이 싫었고, 증오에 찬 자신이 싫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만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꿈꾸었다. 무언가 다른 삶을, 무언가 다른 자신을, 무언가 다른 순간을……. 그런데, 죄악과 업에 짓눌려가며 그가 초래한 피와 죽음을 마주한 지금. 스스로를 그의 죄책감이라 소개한 이가 말하고 있었다. 그를 용서한다고, 그를 언제나 사랑해왔다고. 그렇다면, 그는 생각한다. 어쩌면, 나 또한, 나 자신을…….

줄리아는 에스마일이 건넨 푸른 리본을 받아들었다. 그것으로 다시 머리를 묶었다.

“아쉽네요.” 레아가 말했다. “이대로 당신이 절벽에 뛰어들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꽤 좋은 구경거리였을 거라고요. 당신.”

줄리아는 레아를 보았다. 리본 없이 풀어헤쳐진 머리는 비바람에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전설 속에 나오는 반시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면 사람을 물로 끌어들여 죽여버리는 켈피라거나. 그는 레아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레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용서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요? 구원받는 게 옳다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요.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이 내 족쇄를 부술 기회를 빼앗아갔잖아요. 당신은 악마예요. 사악한 동화 속 마녀라고요. 모든 선한 사람들이 죽는 건 다 당신 같은 인간 때문이야.”

레아는 계속해서 소리쳤다. 줄리아가 레아의 앞에 설 때까지.

“뭘 봐요. 내 말이 틀렸어요? 나는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용서 못해……”

줄리아는 레아를 보았다. 그 충혈진 하늘색 눈을 보았다. 그를 향해 저주를 내뱉는 입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레아를 끌어안았다.

“…… 레아.” 줄리아는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내 죄악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에스마일이 나를 용서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살아있기 때문이지. 이미 죽은 사람들은 살려낼 수 없어.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한, 나 역시 용서받지 못하겠지.”

그는 두 눈을 감는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이 순간, 프러드가 한 말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글쎄. 너만은 네 고통까지 이해해야지. 브리짓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브리짓이 너를 다른 사람 보듯 했다고 해서 너까지 네 일면을 모르는 이로 취급해서는 안 돼. 고립되고 버려진 인간의 영혼은 반드시 곪아 몸부림치고, 그러나 죽지 않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 법이니까. 그렇다. 결국 그가 한 인간으로 온전히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 자기 자신의 일부를 없는 것 취급하지 않는 것. 그것마저 받아들이고 나임을 인정하는 것.

“그래, 레아. 나만은 나를 이해하기로 했어. 프러드가 그랬거든. 남들이 하지 않는다면 내가 옆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게 이해라고. 그러니 나는 내 곁에 있으려고 해. 나를 사랑할 순 없더라도, 적어도, 그 동기를 이해하고, 행동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함께할래. 결국 그 또한 나니까. 내가 나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니……”

그는 포옹을 풀고 레아의 눈을 마주했다. 꿰뚫려도 괜찮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네가 내 진심을 보길 바라.

“너도 그만 너를 이해해 줘. 네가 하고 있는 모든 말이 나를 향한 투사라는 걸 알아. 하지만 레아.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도 너밖에는 없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이제 그만 우리를 미워하자.”

이제 그만 우리를 미워하자. 줄리아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상을 잠겨버릴 듯이 쏟아내리던 빗줄기가 멎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먹구름이 흩어지고 있었다. 무지개가 수평선과 절벽을 가로질렀다. 뭍과 바다를 연결하는 다리처럼. 줄리아는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보았다. 맑게 개인 하늘과 저 끝까지 뻗은 검푸른 바다를, 새하얀 절벽에 부서지는 포말을. 멀리 보이는 등대와, 출항을 준비하는 어선을.

그가 사랑하고 속에서 행복했던 그 모든 것을.


줄리아는 레아와 에스마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증오를 닮은 이와 그의 나약함을 닮은 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의 죄악이자 그의 죄책이었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운 이들이었다. 그의 최후마저도 함께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레아가 말한다. “저 문을 열어요. 당신이 항상 열어왔던 그 문을.”

에스마일이 말한다. “이제 당신은 알아요.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레아.” 그는 레아를 보았다.

“에스마일.” 그리고 다시 에스마일을 보았다.

오래도록 증오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끝끝내 미워할 수 없었던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당신들은, 그는, 우리는. 너무도 닮아있어서.

줄리아는 말했다. 이 말이 정말 당신들에게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부디 행복해야 해.”

그리고 그렇게, 그는 그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문을 열자 펼쳐진 것은 한 거리였다. 양 옆으로 온갖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이 길의 보이지 않는 저 끝까지 뻗어 있었다. 거리는 한낮인데도 어딘지 어둡고 눅눅했다. 거리 전체가 응달 속에 가리워져 있었다. 마치 대낮의 햇빛 아래로 나오면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듯이. 끓고 있는 양동이 안의 액체는 구역질나는 냄새를 풍겼다. 지나가는 마녀가 파는 풀떼기는 한눈에 봐도 약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저 멀리서 덩치 큰 마법생물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문을 쏘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수상쩍고, 음침하고, 기괴하고, 뒤틀린 거리.

줄리아는 이곳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녹턴 앨리. 한동안 그의 집이자 일터였던 공간.

쥘은 이곳의 가장 으슥한 곳에서 남몰래 집회를 열었다. 그 역시 몇차례 그런 집회에 고개를 들이민 적이 있었다. 시시하다고 생각해서 금방 빠져나왔지만. 고개를 돌리면 나오는 고서점은 프러드의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프러드의 묵인과 방관 아래 정말 많은 짓을 저질렀다. 정말 많은 짓을. 조금 더 가면 그의 일터와 그가 살던 집이 나온다. 사장은 여전히 그가 저지른 짓에 이를 갈며 그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나 그가 가야하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는 거리를 뒤로 하고 앞으로 걸었다. 응달에서 양달로, 녹턴 앨리에서 다이애건 앨리로. 그곳의 입구, 또는 출구. 거기에 그가 찾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래 전, 힐데가르트에게 크루시아투스 저주를 날렸던 그 거리.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새겼던 바로 그 담장 아래. 그곳에 그가 찾는 사람이 있었다.

줄리아는 품안에서 에스마일이 건네준 카네이션을 꺼내들었다. 이제 그는 이것을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알고 있다.

이것을 줄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줄리아 델피니 라이네케. 죽음을 먹는자의 표식을 왼쪽 팔에 새기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마녀. 모두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산 죄인. 피로 물들인 손을 결코 닦지 못했던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항상 이유모를 불안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없었으며, 그 자신조차도 이유를 온전히 알 수 없었던……)

줄리아는 바로 그 앞에 섰다.

“줄리아.” 그는 말했다.

“줄리아.” 또다른 그가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나를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둔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를 찾았지? 또 죽일 사람이 생겼어? 나의 증오가 필요해졌어?”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왔어.”

“무슨 선물? 나는 선물 따위에 관심 없―”

그는 또 다른 자신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카네이션 한 송이가 담장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도 붉게 빛났다. 꽃은 새빨갰고 줄기는 푸르렀다. 그는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줄리아가 말했다.

“오래 전, 아빠에게 꽃을 선물하려고 한겨울에 화단에서 수국을 피워냈던 거, 기억 나?”

“기억이 안 날 리가. 그 한심한 짓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줄리아는 이야기했다. “그건 한심한 짓이 아니었어. 슬픈 행동이었지. 왜냐면 아무도, 아무도 내게는 그 꽃을 주지 않았으니까. 사실 나는 오래도록 꽃을 받고 싶어했는데.”

“…….”

“그러니 받아, 줄리아. 너를 위해 내가 가져왔어. 오직 너를 위한 꽃이야.”

“받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전해 주고 싶었어. 있지, 줄리아. 나는 너를……”

“듣고 싶지 않아.”

“그래도 들어야 해.”

줄리아는 또 다른 자신의 손에 붉은 카네이션을 쥐었다. 그리고 그 손을 그대로 당겨, 자신을 꼭 안았다. 그는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화해하자. 화해하자, 줄리아.”

Even when the dark comes crashin' through
비록 어둠이 강하게 밀려오더라도
When you need someone to carry you
당신을 일으켜줄 친구가 필요할 때도
When you're broken on the ground
당신이 바닥에 넘어지더라도
You will be found!
당신을 찾아낼게요.

“나는 너를 이해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네 곁에 있을게. 길 잃은 네 곁에 함께할게.

나는 너를 찾아낼 거야. 네가 혼자가 되지 않게 할 거야.”

쥘과의 대화를 기억한다.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에게 그것은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도피할 핑계였다.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외면할 근거였다. 그러나, 줄리아는 생각한다. 나마저 그 나무를 외면한다면 누가 그 곁에 있어주지? 누가 그 아픔을 위로하고 보듬어주지? 결국 그 또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는 오래도록 자신을 안는다. 자신의 죄악을, 자신의 어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웠을 그의 조각을 안는다.

“사랑해. 줄리아 델피니 라이네케.”

내 홀로된 자신아.


호크룩스에 쪼개진 영혼이 다시 하나가 되는 조건은 영혼의 후회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후회하고, 자신이 벌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할 때 영혼은 다시금 온전해진다. 그러나 줄리아 라이네케에겐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부정과 혐오를 그만두는 것. 그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그의 삶에서 가장 어둠 속에 갇혀있던 조각을 끌어안았을 때. 살인 저주로 망가진 영혼은 마침내 온전해졌다.

세계가 부서져내렸다. 그를 하나로 잇기 위한 여정이 끝이 난 탓이다. 벽이 무너져내리자 무언가 새하얀 빛이 그 너머로 일렁였다. 그제서야 줄리아 라이네케는 자신이 떠날 준비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는 걸음을 옮겨야 했다. 최후의 여정을 향해. 유령들이 겁을 먹고 돌아온 바로 그 길을 떠나기 위해.

그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딛었다. 빛은 그를 감싸안았다. 그는 눈부신 빛무리 아래서 두 눈을 감았다.

바야흐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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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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