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쿠하치] 관짝 (2020)

달밤의 어쩌구 적폐

수춘 by 건안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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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하지만 너 혼자선 무리야.”

“괜찮다니까. 우리가 아직 5학년이긴 하지만… 너랑 나랑 같이 임무를 맡아 나온 거,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내가 널 위해서 여길 막고 끝까지 싸워줄 놈이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만, 그냥 내버려두고 가도 될 상태로도 보이지 않는데.”

“내 몸 하나는 충분히 건사할 수 있어.”

“네 머리의 상처는 몸을 건사할 수 있어서 난 상처야?”

“…시끄러워, 빨리 가! 봐, 지금도 이 정도 변장은 거뜬하게 할 수 있다고. 네 걱정 같은 건 필요없단 뜻이야.”


평소와 같은 어투로 말하며, 하지만 잘게 떨리는 손으로 바꾼 얼굴은 그를 알고 지내던 5년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고, 최후 통첩이자 단호한 거부였으며, 동시에 유언이었다. 

하치야 사부로는 그 때 이미 내 머릿속을 제 무덤으로 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가면이라는 관짝 하나 없이 라이조도, 같은 반인 하치자에몽도 아닌 그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내게 묻히기로.


그리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사부로의 무덤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멱살을 잡아 들어올린 그의 몸은 보기보다 가벼웠다. 어쩌면 위기상황이라 그렇게 느껴졌을 뿐인지도 몰랐다. 숨 한 번 고쳐 쉴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그를 둘러 업었다.


“나는 위령 같은 건 할 줄 몰라. 적어도 당분간은, 앞으로도 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죽고 싶다면 다른 애들 앞에 있을 때 해.”

“…꽉 막힌 자식.”

“…사부로, 느껴져?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사람들의 기척이 있어. 어렴풋하긴 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 아마 6학년들일거야.”

“…….”


이미 익숙한 사부로의 매도를 무시하고 포착한 기척을 간단히 전했다. 평소라면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알아챘겠으나, 지금의 사부로는 움직임도, 감각도 둔해진 상태였다. 적어도 자신의 맨얼굴보다 소중할 목숨을 그렇게 간단히 포기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뒤늦게나마 삶의 의지를 다시 잡았을 그에게 나는 나지막히 속삭였다.


“가면은 모르겠지만, 가발은 확실히 벗어야 할 거야. 머리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이사쿠 선배 앞에서 이런 문제로 괜히 버티지 마.”





지난 번 실습 과제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반성해야 할 점 같은 것은 당연히 자각하고 있지만, 평가하는 입장에서의 개선점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칠 수 있는지 아닌지는 둘째로 생각하더라도. 그러나 선생님을 찾아가기에는 지금쯤 이미 다음 시험의 준비를 하고 계실 게 뻔해서, 답안지를 훔쳐보러 갔다는 오해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대신 학급위원장인 칸에몽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동실이니만큼 마주치기도 쉬울… 터였는데, 분명 그랬는데, 오늘은 어째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실기 수업이 끝난 후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위원회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다던가, 위원회 일이 끝난 직후 방으로 가니 이번엔 칸에몽이 없었다던가. 자기 전에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이왕이면 빨리 끝내고 싶었고, 또 취침시간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죄다 한참 뒤로 미뤄지고 만다. 얼른 물어보고 단련 계획을 짜고 싶다는 마음으로 학급위원장위원회실 근처에 다다랐는데 위원회실 안에서 일학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치야 선배는 숨기고 계신 게 너무 많아서, 몇 개만 말씀해주셔도 종이를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맨얼굴이 아니라도…”

“히코시로, 그렇게 쉽게 말해주면 비밀이 아니잖아. 그리고 꼭 다 채워갈 필요도 없고.”

“하지만 숙제는 보통 할 수 있는 만큼 다 채워가는 거잖아요?”

“…으음~ 히코시로, 뭐든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쯤은 인생에서 힘을 빼고 살아보는 건 어떨까…”


일학년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스케도 아까 결의에 찬 표정으로 뒤를 따라다녔었던가. 이맘때쯤 일학년들이 받곤 하는, 위원회 선배들에 대해서 알아오라는 숙제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스케가 사부로지와 둘이서 '나한테 물어보라고!' '에… 하지만 저 사부로지 선배에 대해선 별로 알고싶지 않아요.' '쿠쿠치 선배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야!' 따위의 대화를 나눴던 것도 생각이 났다.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꼭 비밀을 알아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보이는 대로 써가도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처럼 받은 선배들에 대해 쓰는 숙제가 여름방학 관찰일기처럼 되어버리니까…”

“…….”


칸에몽이 폭소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는 자리에 없는 듯했다. 다른 곳에 있는 걸까. 사부로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후배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발걸음을 돌리는데, 안에서 그 사부로의 목소리가 들려 도로 멈추고 말았다.


“아, 마침 손님이 왔네. 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둘까.”

“…….”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써먹히는 입장이 되어버렸지만, 무시하고 가기에는 1학년이 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돌아서자마자 아, 네! 하고 대답하고 문을 열고 튀어나온 참이던 1학년 학급위원장인 히코시로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에 딱히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지라 이런 곳에서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조금 놀란 눈이 되어 있었다.


“미안. 방해했어?”

“아, 아뇨!”

“난 그냥 칸에몽이 여기 있나 해서 와본 것뿐인데. 여긴 없나 해서. …혹시 어디 갔는지 알아?”

“오하마 선배의 위치…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알아올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양 주먹을 쥐고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잠시 망연하게 서 있자니,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도 않았을텐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낭랑한 목소리였다.


“이로서 히코시로의 숙제도 해결이네. 방금 봤지? 저 애 너랑 닮았어. 하지만 너랑 다르게 귀엽지.”

“…널 닮은 거 아냐? 네 후배잖아.”

“그런 소리를 하면 쟤한테 실례지. 아무튼 들어와.”

“나는 칸에몽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건데.”

“칸에몽은 방금 히코시로가 찾으러 갔잖아. 기껏 찾아왔는데 네가 사라지고 없으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끌어들인 건 자신이면서 잘도 뻔뻔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부로는 원래 그런 녀석이었기 때문에, 결국 한숨을 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만쥬와 차가 올려진 다과상이 있었다.


“…벌써부터 위원회 활동을 해도 되는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안 해도 될 질문이었네.”

“요양 몰라, 요양? 원래 다친 사람은 푹 쉬어야 해.”

“이사쿠 선배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방 말고 위원회실까지 굳이 나와서 쉬라고.”

“아마도.”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저러고서 밤엔 또 동실인 라이조 몰래 단련이나 하러 나가겠지만, 보건위원장 또한 육학년이니 십중팔구 뒷산에서 마주쳐 혼쭐이나 날 게 분명했으므로 사부로가 맞을 야단과는 일절 관계가 없는 입장으로서 그냥 주인 없어 보이는 만쥬나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역시 학급위원장 위원회의 만쥬답게 맛있었다.


“야, 그거 내 거야.”

“날 이용했으면 이 정도는 줘야지. 어차피 너흰 이런 거 매일 먹잖아.”

“헤이스케 너 학급위원장을 매일 놀고 먹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나본데… …아니, 아니다. 그래서 칸에몽은 갑자기 왜? 보나마나 지난 번 과제 평가 때문이긴 할 테지만.”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럼 아니냐?”

“맞지만.”

“그거라면 넌 일단 너무 물러, 그렇게 안 생겨선. 넌 거기서 날 버리고 가야 했어. 선배들이 계셨다곤 했지만, 애매한 거리였잖아. 뒤에선 내 덕분에 있는대로 열받은 녀석들이 쫓아오고 있었고.”


대뜸 돌아온 것은 선생님이 아닌 함께 과제를 수행한 학생으로부터의 평가였다. 게다가 그건 딱히 개선점으로 여겨지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반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반박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넌 날 무덤으로 쓰려고 했잖아. 그러니 널 거기서 죽게 둘 순 없었어.”

“고작 그것 때문에?”

“그게 고작이라고 말할 일이야?”


사부로는 바로 네 그런 점이 무르다는 거야, 하고 불퉁하게 말하더니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카락, 가발 끝만 만지작거렸다. 그 사이 만쥬는 순식간에 입 안으로 전부 사라졌고, 그에 따라 빠르게 목이 메어왔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주인 없어 보이는 찻잔을 하나 집었다. 차도 꽤 고급품인지 조금 식어 있긴 했지만 맛있었다.


“…그거 내 거라니까.”

“어차피 넌 오늘 밤에 이사쿠 선배가 끓인 약차를 마시게 될 거니까 괜찮아.”

“뭔 소리야, 그건 또? …안 들킬 거거든?”

“결국 이따가 단련하러 나갈 거란 얘기잖아. 역시 혼나겠네.”

“…너만 그 선배한테 말 안 하면… …아무튼, 무덤 얘기 말인데. 대체 그게 뭐가 문제인지 난 모르겠거든.”

“난 라이조도, 하치자에몽도 아니잖아. 이왕 묻힐 거라면 그 애들한테 묻혀야지.”

“왜?”

“왜냐니, 나는 그냥 그때 우연히 네 앞에 있었을 뿐이라고. 네 무덤 자리로 써도 좋을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은퇴한 것도 아닌 닌자가 자리를 가려가며 묻히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냥 눈앞에 있었을 뿐인 게 이유라면, 나는 네 무덤이 되긴 싫어.”

“아니, 딱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넌 객관적으로 봐도 꽤 양지바른 묏자리야.”


우선 오래 살아남을 것 같잖아. 이 자리에 후배들이 없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대답은 히코시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에야 돌아갔다. 너도 바로 얼마 전에 죽을 정돈데, 내가?


“…나 아직 살아 있거든?”

“하지만 그때 죽으려고 했잖아.”


그리고 말그대로 멱살을 잡아 들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선배들이 있었지만, 적들도 충분히 가까이 있었다. 그냥 두고 갔다면 선배들을 데리고 왔을 때 시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하치야 사부로가 죽을 정도의 상황에, 쿠쿠치 헤이스케라고 해서 살아 나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생존확률은 더 낮다. 실력차라는 게 있으니까. 그 때의 상황은 그저, 운이 그렇게 작동했을 뿐이기에 일어난 일일 뿐이었다.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수막새의 영웅께 그런 소리를 듣다니 감동해야 할지, 참.”

“비꼬는 거야?”

“아니, 이거 칭찬이거든?”


가발을 덮어써 보이지 않는 그날의 상처 위를 만지작거리던 사부로가 갑자기 툭, 내뱉었다. 그래, 역시 너라면 괜찮지. 육학년의 숙제를 받아 성에 혼자 잠입해서, 화살을 맞고도 살아서 돌아왔잖아. 그의 손 아래, 가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진짜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날 사부로는 가발까지는 벗었지만 다시 덮어쓴 가면은 끝끝내 고집을 부려 벗지 않았다. 이미 맨얼굴을 본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그 때를 떠올리자 역시 이미 늦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유일’이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이런 식의 유일은, 좋게 포장해 봤자 결국은 무덤이다.


“넌 정말이지 꽉 막혀서 포기할 줄을 모르니까.”

“역시 욕 맞잖아. 그리고 나도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서는 임무를 포기할 줄 알아. 일단은 살아남는 게 닌자의 기본이니까.”

“그래, 그거라고. 넌 네 목숨을 포기할 줄 모르잖아.”

“…넌 아니야?”

“라이조나 하치자에몽이 로반에서 자주 쓰는 전략을 말해준 적이 없던가? …응, 앞으로도 모르는 게 낫겠다. 아무튼,”

“잠깐만,”

“네가 다른 녀석들한테…”


말을 끊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던 녀석의 입은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를 사람의 난입으로 멈췄다. 기척도 없이 와서 문을 벌컥 열어버린 칸에몽이 가져온 당고 접시를 슬쩍 들어올렸다.


“히코시로한테 헤이스케가 찾는다는 말을 들어서 왔는데. 어째 내가 방해한 분위기네. 다시 갈까?”

“웃기지 마, 그러고서 그거 다 너 혼자 먹을 속셈이잖아. 이리 내놔.”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건지 사부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칸에몽의 당고 접시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쪽도 그 하치야 사부로를 햇수로 오 년은 봐 왔다. 그가 원하는대로 어물쩍 넘어가 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당고에 정신이 팔린 척 하는 인술학원 닌타마 오학년생의 뒤통수에다 대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네…”

“너 이것도 하나 먹어라.”


그러나 사부로 또한 예상했던지 대뜸 입안에 당고 막대를 꽂아 넣는다. 하마터면 목구멍을 막대 끝에 찔릴 뻔 해서, 인상을 찡그리고 우물거리며 항의했다. 위험하잖아. 물론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까 내 만쥬도 집어먹길래 이것도 먹으려나 했지. 그나저나 히코시로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고 있었지만, 위원회의 선배로서 후배를 찾는 건 아주 타당한 태도였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사부로를 보는 눈에 한심함을 잔뜩 담은 칸에몽이 숙제로 쓸 만한 것을 쥐여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대답했다.


“숙제? 히코시로는 날 취재하고 있었는데, 아까까지.”

“응. 그래서 나도 네 비밀 한두 개쯤 털어 줬지.”

“내 친구라는 것들이 다 이 모양이다. 아냐, 생각해 보니 이반 놈들이 문제야.”

“이반의 학급위원장으로서 의견을 말해보자면, 제일 문제는 로반의 학급위원장이야. 헤이스케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니 사부로는 그럴 줄 알았다며 칸에몽에게서 당고 꼬치를 세 개나 빼앗아 위원회실을 나가 버렸다. 


“어차피 너희 둘이 서로 볼일 있었던 거잖아. 난 가련다.”

“야, 그걸 그렇게 많이 들고 가면 어떡하냐? 너 혼자 다 먹게?”

“히코시로랑 쇼자에몽 줄 거거든?”


뒷말은 복도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봐도 내빼 버린 것이지만, 칸에몽과 할 말이 있었던 것도 맞고, 사부로에게 뒷말을 캐낼 방법이 없는것도 아닌지라 그냥 보내주었다. 칸에몽도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그대로 보내도 된다 생각했는지 문들 닫고 자리에 앉았다. 학급위원장 위원회실은 잠시 동안 오학년 이반의 회의실이 되었다.

그가 말하길 저번 과제의 결과는 바로 다음 실습 과제로 나올 테니 그냥 기다리면 된다 했다. 그 과제가 나오는 것은 늦어도 며칠 후일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그런데 사부로랑은 무슨 얘기 했었어? 딱 보니 사부로가 켕길 만한 이야기긴 했겠지만.”

“그게… 칸에몽, 사부로랑 학급별 실습 전략 이야기 한 적 있었어?”

“…아~”


제대로 대답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되물었을 뿐인데 칸에몽은 대충 알았다는 듯 찻잔을 집어들었다. 사부로의 것은 아까 다 마셨으니까 저것은 원래 칸에몽의 몫일 잔이었다.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하며 찻물을 들이켜던 칸에몽이 입을 열었다.


“말해두지만, 그래도 걔가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애야.”

“그야 그렇겠지.”

“문제라면, 다른 사람 목숨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거지. 평소엔 그렇게 치사한 자식인 주제에 그럴 때만 공평하게 굴어. 그래서 하치자에몽이랑 라이조도 걔랑 엄청 싸웠어. 걔네도 나한테 너랑 비슷한 질문 했었거든.”


나도 걔랑 본인 목숨도 다른 사람 목숨이랑 똑같이 장기말 하나짜리 값어치 취급하는, 다수의 생존을 위해 자기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해버리는 전략 이야기 한 적 있냐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론 모두가 말하는 ‘다른 사람’과 ‘다수’는 아군만을 뜻했다. 그들 모두 적의 목숨까지 챙기다간 제 목이 제일 먼저 달아날 거란 사실을 받아들일 정도의 경험은 있었다.


“…그래서 칸에몽은 뭐라고 대답했는데?”

“물론, 나는 내 목숨이 아까운 줄 안다고 했지.”

“사부로도 그렇다며.”

“내 목숨이 더 아까워.”

“그럼, 사부로랑 같은 상황에서도 죽으려고 들지 않을 거야?”

“으음~ 생각해 보고.”

“그럴 땐 하지 않겠다고 해야지, 칸에몽.”

“우리 사부로 이야기로 돌아갈까?


…누가 같은 학급위원장 아니랄까봐, 말을 돌리는 솜씨가 사부로와 똑 닮았다. 그러나 칸에몽은 사부로가 아니었으므로 그를 질책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그보다 먼저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추궁을 피해 줄행랑을 쳐버린 사부로도 걱정할 일은 아닌게, 결국은…




“…야, 헤이스케.”


…이렇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먼저 말을 걸어오게 될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말을 건 것은 막 위원회 활동이 끝난 직후여서 후배들이 각자 자기 학년의 기숙사로 돌아갈 때였고, 여기까지라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그는 위원회 후배들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카마루 씨는?”

“지금쯤 5학년 기숙사에 있을 거야. 하치자에몽을 팔아넘겼지.”

“…….”


하치자에몽의 그 머리카락을 어떻게든 해버릴 수 있게 해줄 테니 대신 잠시 자리를 바꾸자는 선배의 제안은 여러가지 의미로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연상의 후배를 탓하는 대신 모든 책임을 눈앞의 불량 학급위원장이자 동급생에게 묻기로 했다.


“위원회 활동 방해하지 마.”

“어차피 하는 일도 별로 없던데. …어쨌든, 뭐, 고맙다고. 내 눈이 틀리진 않았단 걸 증명해줘서.”

“방금 위원회를 잠깐 같이 한 것만으로?”

“뭘 물어, 어제 같이 밥을 먹은 하치자에몽이 사실은 나였다거나, 오늘 수업시간의 칸에몽은 학원장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들어온 나였다거나, 그런 거지.”


알고 있었다. 그야 하치자에몽으로 변장했었던 건 몰랐지만 칸에몽에게는 심부름에 대해 진작에 귀뜸받았었고, 미리 듣지 않았어도 이 의심 많은 변장의 달인이 제 가장 큰 비밀을 유일하게 쥐고 있는 사람을 그냥 놓아두지는 않을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물론 말해봤자 불신만 퍼뜨릴 말은 안 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비밀을 퍼뜨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야,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네가 좋은 묏자리라는 거야.”

“…나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

“치사하게 남의 약점 갖고 그러기 있냐?”

“그 약점을 멋대로 내 손에 욱여 넣은 건 너야.”


그보다 그는, 자신의 맨얼굴을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딱히 기억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남아버린 그 얼굴을 떠올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난 네 무덤이 될 생각은 없어.”

“이미 늦었어. 이제 내가 언제 어디서 죽든 난 너한테 묻히게 될 거야. 사실 이미 반쯤은 그렇기도 하고, 아무튼 일단 무덤 하나 장만하고 나니 개운하네.”


어느새 평소 하고 다니던 라이조의 얼굴로 돌아온 사부로의 표정은 정말로 산뜻 그자체였다. 그가 방금 뱉은 말들만 아니었다면 진짜 라이조로 착각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순간, 그 가면 아래의 얼굴이 어떨지 조금 상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고.


“…하치자에몽이랑 라이조는?”

“걔네가 왜?”

“네가 죽으려고 들었던 게, 나랑 있었던 그 날이 처음은 아니잖아.”

“헤이스케, 몇 번이나 말했지 않아? 넌 꽤 좋은 묏자리라고.”

“…너처럼 사간(死間)이 되려고 혈안이 된 녀석이 왜 이제 와서야 묻힐 곳을 찾으려는지 모르겠어.”

“나 죽고싶어서 환장한 놈은 아닌데. …그냥, 익숙해져서 그래.”

“그래서 앞으로도 더 익숙하게 목숨을 내버리려 들 거고?”


위원회 활동이 끝나 아무도 없는 화약 창고 앞, 서늘한 바람이 죽음의 예고처럼 옷자락을 훑고 떠나갔다. 사부로는 몇 번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는 세상에서 가장 신뢰도가 바닥인 말을 입에 담았다.


“…안 그래.”

“넌 방금 이미 반쯤 나한테 묻혔다고 했어.”

“무슨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그렇게 크게 말하냐.”

“…….”

“…농담이야, 표정 좀 풀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평소 그의 성정이나 언동을 생각하면 정말로 표정이나 분위기를 풀려고 한 말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냥 말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언제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드는 그에게 늘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직접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돌려말하는 것으로는 이 인간을 붙들어 맬 수 없기도 했고, 애초에 그건 익숙한 화법도 아니었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네 무덤이라 치자.”

“그렇다 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다니까.”

“그런데, 그게 쓰레기장이라는 뜻은 아니야.”

“…….”

“네 목숨을, 존재를 나한테 내버리지 마.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런 식으로 쓰레기장이 되어버리는 것도 싫었지만, 그가 그렇게 자신을 내버리려 드는 것도 싫었다. 그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면 무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찝찝한 기분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너무 비겁했다.


“…헤이스케, 다음 번 과제, 이야기 들었어?”

“…….”

“너랑 나 또 한 조야. 선생님들이 너나 나 둘 중 한 명이랑은 의견이 같으셨나 보지.”

“말해두지만, 이번에도 난 너를 버리고 가지 않을 거야. 애초에 나보다 네가 먼저 상처를 입은 게 더 이상해. 아무리 실전을 겸한 실습이라고 해도.”

“선생님들이 어느 쪽 편인지는 이번 과제의 평과 결과로 알 수 있겠네.”

“…이게 편가르기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뻔뻔한 채였다. 어쩌면, 그 표정을 포함해 그의 가면이 통째로 그의 관(棺)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때까지 묻힐 땅 하나 없이 관짝 하나에 담겨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고, 이제는 관짝 하나 없이 날것의 시체 그대로 무덤에 묻히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비상식적이었다. 닌자로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꺼림칙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럼, 네 무덤조차 되지 못한 너희 반 애들은 뭐야? 그냥 조문객? ……


“…생각이 지나쳐, 헤이스케.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화약의 냄새는 죽음의 악취와 맞닿아 있다. 사부로의 말을 듣자마자 그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화약 창고의 문을 흘끗 보고 오학년 기숙사 쪽으로 돌아섰다. 이런 이야기는 어쨌든 이런 창고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중에 이야기 해.”

“잊고 있는 모양인데, 헤이스케. 다음 과제 출발이 바로 내일이야.”

“…….”

“할 말 있으면 지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좋아. 이렇게 하자. 나를 네 무덤으로 삼을 거라면, 사부로.”

“ …계속 말해 봐.”

“그러면 너도, 내 무덤이 될 각오 정도는 해.”


반쯤은 충동적으로 던진 말에, 사부로는 인상을 약간 찡그렸다. 그리고 조금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묻히려고?”


물론 이런 대답을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고, 대답할 말 또한 있었다. 나는 최대한 의연하게 보이려 애쓰며 대꾸했다.


“인정할 생각이 없나본데, 나는 사부로 네가 나를 묻을 무덤이 될지 말지를 선택하라는 게 아니야. 너랑은 달리. 나는 그냥, 각오를 하라고 말하는 것뿐이지. …네가 그랬잖아? 좀더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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