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쿠하치] 심장의 인력 (2018)
달밤에 구장르씨피영업에 미친 폭주 적폐러의 재업
저는 언제나애니가 아니라 원작(낙란)기준으로 연성합니다. (=쿠쿠치가 여름방학때 6학년 숙제 받고 나루토성 수막새 훔치러 갔다가 화살맞고 돌아옴, 수막새의 영웅도 거기서 비롯한 동인창작 별명입니다)
네 여긴 이제 내 거야.
사부로는 헤이스케의 가슴께를 짚으며 그렇게 말했다. 건방지다고 볼 수도 있는 행동, 아니, 건방지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동. 하지만 헤이스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사부로는 그 겨울, 자신의 것이라 선언했던 그 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릴 뻔 했다.
헤이스케가 돌아왔어야 할 임무 완료 예정일이 꼬박 하루가 지났다. 때늦은 폭설에 학원 근방의 산은 온통 눈으로 뒤덮혀 있었고, 수색이나 구조를 하러 가기도 여의치 않은 날씨가 계속됐다. 시간이 점점 흘러 인술학원의 정문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있는 게 하치야 사부로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은근한 신경질이 부쩍 늘었을 때즈음, 거짓말처럼 눈이 그쳤다. 그러나 사부로는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았다.
꽤 중요한 임무였긴 했다. 물론 도서실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임무는 아니었지만, 나름 학원의 존망을 건 일이었기 때문에 선배들 몇이 헤이스케가 쥐었던 일의 행방을 찾아 학원문을 나섰다. 헤이스케를 찾는 건 아니었다.
헤이스케의 일도, 헤이스케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학원 근처 어느 지점에서 끊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흔적에 대한 보고만 돌아왔을 뿐.
헤이스케의 일은 헤이스케의 것이었기 때문에 사부로로서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장난삼아 그가 임무를 떠나기 전에 변장을 하고 무슨 일이었는지 엿들어라도 볼걸, 그런 생각은 꿈에도 안 했다. 정말로. …안 했다.
사부로의 무거운 엉덩이는 생각보다 금세 떨어졌다. 눈이 그친 지 또 꼬박 만 하루만의 일이었다. 사실 곧 최고 학년으로의 진급을 앞둔 헤이스케와 같은 학년인 학생들 전부가 슬슬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보내질 예정이었으므로 사부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헤이스케가 맡았던 일은 학원의 화약에 관한 일이었고, 봄이 오기 전에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였다. 누가 봐도 동급생과 구분되는 표정으로, 사부로는 변장 명인의 이름을 내던진 채 동급생의 흉내만 낸 얼굴로 학원 문을 나섰다.
“이쯤이야, 그 흔적이 사라진 게.”
칸에몽이 조금 쉰 목소리로 나뭇가지가 부러진 곳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사실 눈으로 온통 덮여 있어 흔적이라고 할만한 게 거의 남아 있진 않아 그것이 유일하다시피한 단서였다. 그게 어느 불쌍한 지나가던 조난자의 마지막 흔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무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닌자밖에 없다.
“적어도 인술학원에 우호적인 성 중에선 여기 닌자를 지나보낸 곳은 없대.”
“타소가레도키 포함?”
“타소가레도키 포함.”
“믿을 데가 없어서 거길 믿어.”
“안 믿을 수도 없잖아, 지금은. 그리고 여긴 학원 근처니까. 거긴 이제 여기에 굳이 닌자를 안 보내도 된다고.”
사부로의 볼멘소리를 하치자에몽이 타박했다. 여기서 서로를 탓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조용한 칸에몽은 여기서 가장 어두운 눈두덩을 하고 있었다.
“일단 흩어져서 수색해 봐? 마을에 갔던 선배는 뭐래?”
“며칠 전에 헤이스케로 보이는 사람이 산 쪽으로 가는 걸 봤다고. 오기 전에 들은 대로야.”
같은 반이라고 더 들은 거 없어. 칸에몽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땅에서 십몇 척은 떨어진 나무 위였으나, 그 누구도 그런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잡을 줄 알았다. 그들은 곧 최고학년이었다.
“역시 선배들 헤이스케는 제대로 수색 안 했구나.”
“대신 헤이스케가 남긴 일을 처리하러 갔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급하대잖냐.”
“헤이스케가 맡았던 그 일은 그래서 제대로 됐대?”
“글쎄, 역시 헤이스케가 있어야….”
헤이스케, 헤이스케, 헤이스케. 반복해 들려오는 이름에 사부로는 미간을 짚었다. 자신에게 없는 자신의 것이 쓰렸다.
“야, 사부로, 안 떨어지게 조심해라.”
“내가 몇 살인데 여기서 떨어져?”
사부로가 짚단으로 만든 겉옷을 여미며 투덜댔다. 아무튼 저 자식은 잔소리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지금은 우리한테 맡겼다는 사실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그러니까 더욱 뭐라도 찾아내야 하고.”
그 뭐라도의 뭐가 뭔지 자세히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부로는 문득 나무 아래가 무덤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아주 완만했지만, 경사가 진 그 모습이 꼭. …재수없게.
“그럼 뭐 어떡해. 땅이라도 팔까?”
그래서 그런 재수없는 농담을 한 건지도 몰랐다. 곧바로 대충 뭉친 눈덩이가 사부로를 향해 날아왔다.
“야, 사부로! 너 진짜.”
“아니, 나는 그냥, 저 아래가 좀 불룩해서….”
왜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주워섬기는 것을 듣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사부로 본인마저도. …잠깐만, 진짜 뭔가 조금 이상한데. 저기가 원래 저렇게 솟아오를 만한 게 있는 곳이었나? 아무리 눈이라도?
“……!”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마치 아래에 있는 뭔가가 사부로를 잡아당긴 듯이. 사부로는 속절없이 떨어져내렸다. 인술학원의 5학년이란 위치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의 남은 세 명은 일단 사부로의 걱정부터 했다.
“사부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내린 동급생들이 대자로 뻗은 사부로에게 뛰어내려 다가왔다. 얼떨결에 추락한 입장인 사부로와는 달리 가볍게 착지한 셋은 누워있는 친구의 곁을 둘러싸고 섰다. 바닥에 쌓인 눈 덕택에 무사한 걸 알자 나오는 건 역시 잔소리였다.
“이럴 때 너까지 왜 이러냐.”
“시끄러.”
무사했다고는 해도 얼얼한 충격을 받긴 한 사부로는 인상과 함께 뒷통수를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로서 이번 시험은 내가 일등이군.”
“나 멀쩡하거든?”
짜증을 담아 답하고선 아무도 서지 않은 방향의, 그가 추락하기 직전 보고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엇비슷한 높이에서 보자 역시 이상했다. 여기, 원래 이렇게 솟아오를 만한 게 있었나? 어쩌다 저기만 눈이 많이 쌓였을 리는 없고. …….
“…우악! 뭐야, 갑자기!”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옆의 눈무더기를 맨손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사부로의 모습을 본 세 친우의 공통된 감상은 이러했다. 떨어진 충격으로 사부로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난 보건실에 가볼게. 젠포우지 선배는 안 계시겠지만 다른 애들이 있을 거야.”
“이 자식은 또 하필 이럴 때…. …아, 란타로나 사콘 말고 다른 애가 당번이면 좋겠네. 이런 겨울에 여기까지 데려오긴 너무 어리잖아.”
“어려도 닌타마인걸.”
“그런데 젠포우지 선배랑 란타로랑 사콘 말고 다른 보건위원이 있긴 해?”
“있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칸에몽이 가버리고 남은 자리에서 하치자에몽과 라이조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치자에몽은 그렇다 치고, 라이조도 가끔은 친구와 얼빠진 대화를 해버릴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칸에몽이 말없이 맡긴, 친구를 수습할 의무를 내팽개치고 어떤 후배가 들었다면 슬퍼했을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부로는 익숙한 것을 눈더미 속에서 찾아냈다. 동시에 나온 것은 비명도 못 된 새된 숨소리였다. 어쨌든 숨소리도 다른 두 명에게는 비명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하치자에몽과 라이조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사부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사부로뿐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다리 한 짝이었다. 몸통에 제대로 붙어 있는지는 쌓인 눈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뭐 해! 파내질 않고!”
하치자에몽과 라이조가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숨도 쉬지 못하고 달려가 사부로의 맨손 삽질에 동참했다. 다행인지 뭔지, 쌓인 눈은 그다지 단단하지 않아 생각보다는 금방 파낼 수 있었다. …눈더미 속에서 나온 그들의 친구는 굉장히 찼다.
“숨은… 쉬어.”
손목의 맥을 짚고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사부로에게 그나마의 희소식을 전해준 건 하치자에몽이었다. 체온이 낮아 그런지 맥은 잘 잡히지 않았다. 가슴팍에 귀를 대보기엔 이틀 전 이 겨울길을 다녔을 헤이스케도 꽤 두텁게 입고 있었기에 여의치가 않았다. 살아있는지 확인하겠답시고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날씨에 맨몸이 드러나게 하는 건 본말전도를 넘어선 살인시도였다.
“의무실! 의무실에 데려가야 해!”
“칸에몽이 벌써 갔어. 이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겠지만. 그… 조치는 하고 가야지.”
그렇게 답한 하치자에몽이 거친 손길에 당겨져 헤이스케의 위로 엎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다만 그가 헤이스케의 발치에 서있었던 게 아닌 관계로 엇갈린 젓가락처럼 엎어진 바람에, 하치자에몽은 눈밭에 얼굴을 박아야만 했다.
“풉, 퉤…. 야, 무슨 짓이야!”
“덥혀!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하란 말이야!”
입 안에 들어온 눈을 뱉으며 항의하던 하치자에몽은 사부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눈에 핏발이 선 채 하얗게 질린 헤이스케의 손을 주무르며 악쓰듯 소리치는 사부로를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엉거주춤 헤이스케의 몸에 부담이 덜 가게 자세나 고칠 수밖에 없었다. 라이조는 평소의 망설임은 내던지고 냉큼 사부로가 미처 잡지 못한 헤이스케의 반대편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칸에몽이 후배와 함께 돌아오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배 손에 쓸모없는 옆 반 학급위원장놈을 쥐여 보낼 작정이었던 칸에몽의 얼굴이 조금 전까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던 사람만큼이나 새하얗게 변하는데도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원래부터 혈색 좋은 편이던 후배도 칸에몽만큼은 아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살아있어?!”
“…아직까지는. 이제부턴… …쟤한테 물어 봐.”
후배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대충 둘러댄 비교적 건강한 선배는 카즈마의 현재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곧바로 환자인지 시체인지의 기로에 누워있는 헤이스케에게 달려든 카즈마는 곧바로 맥을 짚더니, 맥은 아까 짚어봤다는 사부로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발견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이 각쯤…”
“너희가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일 각정도밖에 안 됐었겠지만.”
카즈마가 오자 엉거주춤 물러난 하치자에몽의 말에 사부로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사실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긴 했다.
“…보건실에 니이노 선생님이 계세요. 화로도 있고요.”
그 말은 이제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뜻했다. 5학년 넷 중 체온이 가장 높은 하치자에몽이 헤이스케를 업었고, 칸에몽과 사부로는 헤이스케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조가 앞서 가서 교의인 니이노 선생님에게 상황설명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라이조가 출발하기 전 카즈마가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라이조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눈더미 속에서 나온 사람은 그때까지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헤이스케를 업고 오는 내내 칸에몽과 사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치자에몽은 괜히 압박감이 느껴져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등에 닿은 사람의 온도가 말도 안 되게 차가운 것도 한 몫 했다.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방 안에 헤이스케를 눕혀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일행 중 앞만 보고 걷고 있는 사람은 하치자에몽 단 한 명 뿐이었다. 괜찮을까, 하고 보건위원인 카즈마에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괜찮을 거예요, 이외의 답이 돌아올까 무서워서.
아래도, 위도, 양 옆도 온통 하얀색으로 젖어 마치 저승길처럼 느껴지던 산길은 두 사람의 인내심이 아슬아슬하게 끊어지기 직전에야 끝을 보였다. 물론 그 끝에 있는 것은 저승 따위가 아니라 인술학원이었다. 그러나 헤이스케가 정말로 본 적도 없건만 벌써부터 지긋지긋한 그 길에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만 했다.
이번에야말로 보건위원회에 속해있지 않은 오학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업혀온 헤이스케는 곧장 화로 옆에 눕혀졌다. 미리 따뜻하게 데워두었던 물이 얼었던 손발을 녹였다. 치료에 방해될까 자의 반 타의 반 보건실에서 쫓겨나온 네 사람은 불안한 걸음으로 보건실 건물 앞 눈밭을 서성거렸다. 급하게 불려 온 사콘과 란타로가 보건실로 달려들어갈 때도, 조수로도 쓰이지 못한 인간 넷은 하다못해 헤이스케가 조난당한 동안 느꼈을 추위를 넘겨받기라도 하겠단 듯이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곳에 더 이상 새 발자국을 남길 자리가 없어졌을 즈음, 가장 먼저 자리를 뜬 것은 하치자에몽이었다. 그는 생물위원회 위원장 대리였기 때문에 겨울에 특히 할 일이 많았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꼭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저 밖으로 이어진 발자국은 평소보다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다음으로 자리를 뜬 건 라이조였다. 이러다 남은 사람들도 동상에 걸리겠다며, 모두가 돌아올 방에 미리 불을 때 두겠다는 그는 하치자에몽이 먼저 남긴 것보다는 짧고 단호한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발자국의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 아님은 칸에몽도, 사부로도 잘 알고 있었다.
난잡한 발자국들만큼이나 어지러운 생각들로 가득찬 머릿속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심장마저 내리눌렀다. 곤두세워진 신경은 모두 보건실의 장지문 안으로 집중되어 있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소식이 들려 오진 않았다. 어느샌가 눈밭을 돌아다니는 것도, 숨쉬는 것마저도 잊고 그것이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장지문만 노려보던 두 사람은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 서슬퍼런 기색에 기겁한 후배의 정수리 너머로 여전히 창백하지만 아까에 비하면 조금이나마 산 사람의 혈색으로 돌아온 헤이스케가 보였다.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얼굴을 확인한 사부로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았고, 칸에몽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서서 헤이스케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행여나 밖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또 해를 끼칠까, 문턱에 주저앉은 사부로를 발로 밀어낸 후 문을 도로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의 자비는 있어 마루가 아닌 방 안쪽으로 밀어놓았기에 사부로는 여전히 헤이스케를 볼 수 있었다.
“선배들이 일찍 발견해 주신 덕분에 고비는 넘겼어요. 쿠쿠치 선배 위로 쌓인 눈이 오히려 단열막 역할을 해 주기도 했고요. 의식은 아직 없으시지만… 이건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단 지금은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는 말을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병문안을 하기에 모두에게 좋은 때가 아니라는 니이노 선생님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그러나 아직 남은 두 학급위원장 입장에서도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안했기에, 괜히 멀쩡한 척을 하며 남아 있겠다는 뜻을 표했다.
“전 저랑 헤이스케밖에 없는 이반의 학급위원장이라고요, 선생님. 적어도 저라도 남아있게 해 주세요. 사부로는 돌봐야 할 로반 애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보내고요.”
“뭐? 날 왜 보내? 라이조는 고민에만 안 빠지면 나 없어도 알아서 잘 하거든?”
“하치자에몽은!”
“걔는… 걔는 뭐냐, 로반이 아니고 하반이야. 하치자에몽이잖아.”
“그렇게 치면 너도 하치야 사부로니까 하반이겠네!”
“그럼 너도 오하마 칸에몽이니까 하반이야!”
“…….”
당연한 수순으로,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나란히 보건실에서 내쫓겼다. 덧붙여 한숨 자고 나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하치자에몽에게 사과하라는 소리도 함께 들었다. 둘은 하릴없이 기숙사로 돌아가며 쫓겨난 것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는 우애깊은 시간을 나눴다.
막 5학년의 방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사부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칸에몽이 동실 없이 혼자서 잠드는 것은 좋을 것 하나 없다는 판단 하에 아직 씻지도 않은 그를 하치자에몽의 방에 밀어넣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하치자에몽의 의사 따위는 묻지 않았으므로, 로반의 학급위원장으로서 그야말로 훌륭한 작태라 봐줄 만했다. 칸에몽은 내심 사부로의 판단이 옳다 여겼기 때문에 씻지도 않은 몸으로 하치자에몽의 이불 위에 벌렁 누웠다. 막 생물위원회의 축사를 둘러보고 온 참이던 하치자에몽은 오학년 이반과 로반의 학급위원장을 다른 사람들로 바꿔야겠다는 평을 남기고 제 이불을 차지하고 있는 칸에몽을 끌어내 욕탕으로 갔다. 어쨌든, 오늘 하루 정도는 칸에몽을 방에서 재워 주기는 할 모양이었다. 하치자에몽은 잔소리는 많아도 어쨌거나 좋은 녀석이긴 했기 때문에 모두가 이렇게 될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치자에몽 자신마저도, 자신의 친구들이 씻지도 않고 남의 방에 들어와 이불 위에 드러누울 정도로 양심이 없는 녀석들이었다는 것 빼고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조는 이미 씻었을 테니 너도 씻고 가라며 사부로도 함께 끌고 갔다. 들어가기 전 하치자에몽은 바깥의 아궁이에 사무원인 코마츠다 씨 몰래 장작을 몇 개 더 던졌다.
극도로 예민하고 피로한 상황에서도 친구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친구에 대한 배려는 조금 부족한 이인조와 그에 휘말린 사람 좋은 한 명은 목욕을 끝내자마자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지 않으면 보건실 지붕에서 자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하치자에몽은 나머지 둘보다는 초조함이 아주 조금 덜했지만, 그건 곧 나머지 두 사람의 돌발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 그리고 라이조뿐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로 침착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둘은 고분고분하게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는 내일 아침 서로 자기가 제일 먼저 일어나 보건실로 달려가겠다는듯이 이불 속에 처박혔다.
칸에몽이야 마지막으로 남은 동급생인 것도 있고 하니 당연하다 볼 수 있었지만, 사부로까지 저럴 줄이야. …하기야, 눈 속에서 헤이스케를 처음 발견해 파낸 것이 그였으므로 제아무리 하치야 사부로라도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헤이스케가 얼른 일어나 걱정 끼쳐 미안했다고 사과하며 웃어주면 좋을 텐데.
아닌 척 해도 실은 굉장히 피곤했던 두 사람은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리자마자 곧바로 골아떨어졌다. 그제야 인위적인 수선스러움이 잦아들었다.
“…….”
제 앞에 놓인 식기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는 하치야 사부로는 인술학원 식당의 명물로 세우기엔 후배들의 교육에 다소 악영향을 끼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가 그러고 있을 때엔 보통 칸에몽이 고기 반찬을 빼앗아 먹거나 헤이스케가 멋대로 두부를 놓거나 해서 주의를 분산시키곤 했는데, 지금 그 둘은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되었기 때문에 죄없는 식기는 계속해서 살기를 담은 시선에 대한 내구도를 시험받아야만 했다. 결국 먼저 말을 건 것은 식당에 들어오려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헤이타를 발견한 하치자에몽이었다.
“야, 아까 보건실 가봤을 때 헤이스케 어제보다 훨씬 나아졌다며.”
“이상해.”
“…뭐가?”
“걔가 나무에서 떨어질 놈이냐?”
“너도 떨어졌잖아. 어제.”
“나는… 미끄러진 거잖아.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어.”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이럴 때에 스스로에게 상당히 관대한 친구를 보는 하치자에몽의 표정은 꽤 장관이었다. 얘가 이럴 놈이 아닌데. 진짜 충격이 컸나. 조금 있다가 보건실에 갈 때에 얘도 다시 데려가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부로는 다시 한 번 이상해, 하고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거기, 다시 갔다와야겠어.
“사부로, 식사는 하고 가야지.”
“미안, 라이조. 다녀와서 먹을게. 아주머니께 남긴 거 아니라고….”
“…사부로, 지금 보건실에 누워있는 건 우리 중 한 명으로 충분해.”
“…….”
사부로는 도로 앉아 최대한 죽상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 안에 음식을 구겨 넣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끝낸 후 이번에야말로 벌떡 일어나 날듯이 뛰쳐나간 사부로는 우선 보건실에부터 들렀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식당에도 오지 않고 중환자의 곁을 지키고 앉은 칸에몽에게 헤이스케의 소지품에 대해 물었다. 육학년이 임무를 받아 나가고 없는 식사시간의 보건실에는 니이노 선생님밖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꺼리낄 것도 없었다.
“…그건 왜?”
“헤이스케를 이렇게 만든 놈 죽여놔야 할 것 아냐.”
“…나도 갈래.”
후배가 없어 최소한의 거름망도 없이 나온 말에 칸에몽은 곧장 동조하며 일어났다. 사부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너 밥은 먹었냐? …….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쨌든 아침식사를 끝마치긴 했으므로 당당한 입장인 사부로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 하치자에몽이랑 라이조 올 거야. 넌 식당 가서 밥이나 먹고, 그전에 얘가 갖고있던 거나 내놔봐. 칸에몽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거 없었어.
다녀와서 체해 배나 잡고 구르라는 악담을 뒤로하고 가벼운 짐을 챙겨 학원을 나선 사부로는 몇 번이고 조금씩 다른 자세로 나뭇가지를 밟고 도약했다. 그것은 실험이었다. ‘그런 모양으로’ 부러지려면 오학년 중에서도 우수하다고 일컬어지는 닌타마의 발에 도대체 어떻게 밟혀야 하는지에 대한.
눈이 그친지는 이제 꽤 되었건만 쌓였던 눈은 아직 채 사라지지 않고 두껍게 남아 있었다. 헤이스케도 없는 눈밭에 미련하게 맨손삽질을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용구창고에서 대여해 온 삽으로 조금씩 눈을 파냈다. 힘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혹시나, 혹시나 모를 흔적이 아직 하나라도 더 남아있다면….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자식이야.”
“그래서, 뭐 찾은 건 있어?
만약 없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듯 말하는 컨애몽에게 사부로는 아무 감흥도 없어보이는 어조로 대꾸했다.
“좀 떨어진 큰 마을에 적당히 소문을 풀어 뒀지. 곧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울 거야.”
“그걸로 끝?”
“그럼 뭐, 내 단독 행동으로 학원이랑 다른 성이랑 전쟁이라도 일으키라고? 닌자는 원래 자기 손 안 대고 코 푸는 사람들인거 아직도 모르냐?”
“…그 정도로 큰일이었어?”
“화약 문제가 얽혔는데 그 정도로 큰 건수가 안 엮여서야 섭하지. 됐고, 걘 좀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의 장래희망의 직업 가치를 땅에 처박고 동종 업계 종사 예정인 친구에게 지금 여기서 무사히 살아난다면, 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같은 장래를 희망하는 연인의 안부를 묻는 사부로의 표정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덤덤했다. 하지만 가면을 한 꺼풀만 벗겨내도 전혀 그렇지 않은 상태일 것임을 아는 칸에몽은 원한을 잠시 접어두고 재빨리 대답했다.
“상태 많이 좋아졌대.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닌자를 아예 그만두지는 않아도 된다더라. 정말 다행이지.”
“…그래.”
“그래도 아직 의식은 안 돌아왔어. 그래서 우리들이 돌아가면서 계속 말 걸고 있는 중이야. 도움이 될지도 모른대.”
“…그럼 나도 가서 빨리 일어나서 임무 전에 빌려간 수리검 내놓으라고 해야지.”
“그것보단 헤이스케가 일어나면 두부 요리 백 접시 정도 먹어 주겠다고 하는 게 더 효과 있을걸.”
“그딴 건 너나 해.”
“했어.”
“…….”
사부로는 그러니까 너도 해, 하는 원한이 진득하게 녹아 있는 칸에몽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학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학원장에게의 보고였다. 그가 지금까지 학원 밖에서 하고 온 일들은 결국 독단적인 판단에 의한 단독행동이긴 해서, 최대한 빨리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헤이스케가 남긴 일을 처리하기 위해 떠난 선배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이건 절대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암, 그렇고말고.
보고를 마치고 학원장 선생님 옆에서 함께 보고를 듣던 도이 선생님께 설교까지 듣고 나온 후 사부로의 발걸음은 당연하다는 듯 보건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헤이스케는 일어나지 않아 칸에몽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옆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이사쿠도 있어 사부로는 칸에몽에게 넌 왜 여기도 있냐, 하고 공연한 타박을 주는 대신 얌전히 환자의 옆에 정좌하고 앉았다.
“…일찍 오셨네요.”
“헤이스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거든. 다른 애들도 오긴 할 거지만, 나는 헤이스케 상태를 보러 먼저 온 거고.”
“그것 참 다행이네요….”
“응?”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배가 보시기엔 이 녀석 좀 어때요?”
“니이노 선생님이랑 같은 생각이야.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정말 큰일날 뻔했어.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사부로 너라며? 네가 헤이스케를 구한 거나 마찬가지야.”
“…….”
정작 학원까지 데려와서는 적어도 헤이스케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는 사부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헤이스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꾹 감긴 채 속눈썹만 내리깐 눈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사부로가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한참만에야 입밖에 낸 것은.
“…글쎄요. 어쩌면 얘가 절 불러서 끌어당긴걸지도 모르죠.”
사부로는 괜히 심장 한쪽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우선 스스로를 돌보는 게 중요하다며 또 보건실에서 쫓겨난 칸에몽이 손깍지베개를 낀 채 기숙사로 터덜터덜 돌아가며 말했다. 그는 어제부터 보건실에서 내쫓기는 일에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뭐가.”
“아까 그거 말야. 나는 네가 충격요법이라도 쓰려는 줄 알았어.”
“시끄러.”
“그런데 진짜 뭐라도 느낀거야?”
그것까지 말하기엔 우선 이야기해야 할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었고, 또 말해봤자 그때 나무 위에서 떨어진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밖에 안 될 것 같아 사부로는 다시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러고도 계속된 독촉에 겨우 나온 대답은 이랬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그러나 칸에몽은 보기보다 더 끈질겼다.
“그야 난 헤이스케의 동실이자 학급위원장이니까! 헤이스케를 제일 잘 아는 건 나라고!”
“네 그딴 질투 알까보냐.”
헤이스케가 깨어나자마자 찾을 게 칸에몽이라는 데에 가장 아끼는 가발도 걸 수 있는 사부로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랑의 힘이다. 됐냐? 성가신 옆 반 학급위원장놈을 떼놓기 위해 던진 말은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저기, 그런 충격 요법을 나한테 써 봤자 소용 없거든? …그리고 헤이스케를 제일 사랑하는 건 나야!”
“미안한데 저리 좀 가주라. 안 그래도 아프던 머리가 너 때문에 더 아파, 지금.”
“…너희 무슨 얘기중이야?”
“아, 하치자에몽, 사부로가, 자기가 헤이스케를 찾은 게 사랑의 힘이래!”
“…….”
하치자에몽은 우선 사부로의 이마에 손을 대어 열부터 재어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은 체온이 높으니 이런 방식으로는 다른 사람의 체온을 재기에 힘들다며 칸에몽에게 대신 사부로의 체온을 재어 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보건실로 다시 들어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는 칸에몽은 그보다는 보건실에 먼저 데려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다 똑같은 놈들이구만. 바로 얼마 전의 스스로에 대한 자아성찰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을 하고서 기숙사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원래라면 옳다구나 하고 다시 보건실로 달려들어갔겠으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제가 방금 보건실에서 뱉고 나온 발언 때문이기도 했고,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이사쿠 때문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나 저녁 먹고 잘 거야. 혹시 선배들이 나 찾으시면 없다고 해.”
“응, 네 방에서 자고 있다고 할게.”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나 너한테 무슨 못할 짓이라도 했냐? 대충 그런 표정을 드러내는 사부로에게 칸에몽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하치자에몽은 마음 같아선 사부로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의 학급위원장은 여기저기 원수를 많이 사고 다닐만한 성격이긴 했다. 아무리 동급생에 친구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일단 지금은 자게 내버려 두자. 쟤가 평생 선배들 피해 다닐 것도 아닐 거고, 쟤한테 무슨 일 생기면 헤이스케도 나중에 슬퍼할 거 아냐.”
칸에몽을 상대로 헤이스케를 들먹이는 것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칸에몽은 어쩔 수 없이 사부로를 보내고 자신은 학급위원장실로 향했다. 어쨌든, 스스로의 말마따나 헤이스케의 학급위원장인 그는 지금 할 일이 꽤 많았다. 실종된 헤이스케가 발견되고 적어도 죽지 않을 것은 확실해진 이 때에는 더욱 더.
“하… 헤이스케 입에 죽 넣어주는 건 하고 왔어야 했는데. 선배가 잘 해 주실까? 헤이스케 지금 배고파하고 있으면 어쩌지?”
“일단 네 밥부터 잘 먹어. 오늘 몇 끼 먹었어?”
“…….”
“…니이노 선생님 지금 보건실에 계신가?”
“…아앗, 안 돼! 지금 가서 제대로 일 할 거니까!”
“밥을 먹으라고….”
칸에몽과 마찬가지로 식욕이 없다 못해 키하치로가 파놓은 함정만큼 바닥을 깊게 뚫고 들어갔으면서도 사부로가 꾸역꾸역 식사를 챙기는 이유는 단지 라이조가 그러길 원해서라는 것뿐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배가 고프면 부정적인 잡생각이 많아진다. 그 사실을 이번에야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짜증나게도.
“…아무튼 손이 많이 가는 자식이야.”
마치 말버릇이라도 되는 것처럼 뇌까린 사부로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피곤했다.
“…헤이스케, 어쩌면 사고에 잘 휘말리는 체질인 걸지도.”
“왜.”
“여름 방학때도 다쳐서 왔었잖아. 그때 흉터도 아직 다 안 나았는데.”
“…….”
그 때의 일은 6학년의 숙제를 잘못 받아 일어난 사고였고, 지금은 화약위원회로서의 임무를 수행 중 화약을 노린 다른 성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적어도 운은 충분히 나쁜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때도 무사히 돌아왔었잖냐. 수막새의 영웅께서 이런 일 정도에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으려고.”
“누가 뭐래? 네가 그런 소리 안 해도 헤이스케는 곧 일어날 거거든?”
헤이스케의 몸상태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신경이 날카로운 것은 마찬가지인 칸에몽이 톡 쏘아붙였다. 그는 아직도 혼자만 남은 오학년 이반의 방은 반쯤 버려두고 하치자에몽과 함께 자고 있었다. 그리고 사부로는 그런 칸에몽의 태도를 대충 흘려넘길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예민한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인 입장에서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던 덕이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일어날지 모르겠어. 아무튼 귀찮은 자식이야.”
“꼭 네가 뭐라고 하면 바로 일어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네.”
“…….”
사부로는 대꾸하는 대신 턱을 괸 채 헤이스케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건실 안은 충분히 따뜻했고, 헤이스케는 가슴에 귀를 대어 심장 소리를 듣기에 무리 없을 정도로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사부로는 아직도 그의 맥박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들어볼 엄두도 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더 옳았다. 지금은 손이나 귀를 갖다 대기만 해도 느낄 수 있을 텐데. 사부로는 스스로가 품은 공포를 인정하는 대신 엉뚱한 말이나 내뱉었다.
“…쟨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러게… 만약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 헤이스케는 바로 일어날 텐데.”
헤이스케의 동실이 하는 말을 듣다 턱을 괴던 손을 삐끗해버린 사부로가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자세를 바로잡고 퉁명스레 타박을 주었다. 그거 결국 지금 우리가 말하는 거 쟤는 못 듣고 있단 거 아냐.
“…그건 싫어. 그냥 지금은 좀 자고 싶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자. 그래도 난 용서해줄 수 있어.”
“……그래.”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는데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대답 없는 본인을 두고 자신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둘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생각엔, 사부로 네가 두부를 먹겠다고 하지 않아서 아직 안 일어나는 거야.”
“웃기지 마. 그냥 네가 혼자 두부로 배 터지기 싫은 거잖아.”
“만약 네가 그 말 하자마자 바로 일어나면 어쩔래?”
“…저 자식 사실 벌써 정신 차렸지? 너희끼리 짜고 내 앞에서만 못 일어난 척 하는 거지?”
친구들에 대한 신뢰가 이런 쪽으로는 바닥인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칸에몽과 헤이스케를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번갈아 노려보던 사부로는 그러면서도 헤이스케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런데 너, 사실 헤이스케한테 말을 걸어주긴커녕 손도 안 잡고 있잖아.”
“따뜻한 방에 있는 동상환자 손을 밖에 있던 내가 잡아서 뭐 하냐.”
“시간 남을 때마다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뭐. 네 손도 지금쯤 다 데워지고도 남았겠다.”
“…그래도 계속 여기 있는 놈이랑 같냐.”
“너 지금 무서워하는 거지.”
“…….”
평소엔 그냥 설렁설렁 지나쳐버렸을 부분을 굳이 찔러오는 칸에몽을 사부로는 말없이 노려보았다. 평소같지 않은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누워만 있는 헤이스케부터, 아무래도 좋다며 넘겨 버렸을 것을 굳이 콕 집어 파헤치는 칸에몽까지. …생각해 보면, 칸에몽은 사부로와 함께 상대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상대에 대한 배려는 조금 부족한 이인조를 결성하고 있었다. 하여간 이반 놈들은 다 망할 자식들이야. 그것이 스스로의 얼굴에도 침을 뱉는 말이라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며 애꿎은 벽만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밥이나 먹으러 가라고 쫓겨날 때가 또 다 되었다. 그도 쫓겨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은 이제 마찬가지였다.
사부로가 일어날 때까지도 칸에몽은 헤이스케 심장 제대로 뛰고 있어, 라는 말은 절대 해주지 않았다. 또 이럴 때만 방임주의였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은 오로지 사부로 혼자 나아가야만 하는 일이었으므로 옳은 판단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헤이스케는 그저 싸고도는 그였으므로 지금 사부로의 입장에서는 고깝게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난 방에 가련다. 너도 슬슬 돌아가. 란타로가 그러는데 너 보건위에서 요주의 인물로 지정됐댄다.”
마치 자기는 아닌 것처럼 말한 사부로는 그대로 보건실을 나섰다. 변명할 여지 없이, 꽁무니를 뺀 것이었다. 하치야 사부로라는 인간에게도 자존심이야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꺼내들곤 하는 물건은 아닌지라 이번에도 부담없이 찝찝한 마음만 가득 안은 채 내뺄 수 있었다. 보건실 안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도 좀 들긴 했으나, 그것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을 터다.
“어쨌든 난 할 만큼 했잖아.”
“…….”
타케야 하치자에몽은 헤이스케를 발견할 당시의 사부로를 보았던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변장에 들이는 정성의 반의 반이라도 헤이스케한테 좀 쏟아봐라, 내지는 이 겁쟁이 자식, 같은 비난을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되지 않는 막연한 공포를 품고 변명이나 내세우는 눈앞의 비겁자에게 던지는 대신 말을 고르는 시간을 잠시 가졌을 따름이었다.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금 걔 손을 잡아 마땅한 사람은 우리 중에선 칸에몽이랑 너 아냐.”
“너까지 칸에몽 편을 들어?”
“…누가 지금 편가르기를 하쟤냐. 내가 말하는 건, 의무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라고. 너도 걔 손을 안 잡는데 그럼 내가 잡냐, 라이조가 잡냐?”
“…환자 손이야 보건위원회나 잡고 체온이랑 맥 같은 거 확인하면 그만 아냐.”
“사부로.”
“…….”
“다 좋은데, 헤이스케 깨고 난 후에 괜히 창피해서 온 사방에 성질부릴 짓은 하지 마. 그거 결국 민폐다.”
결국 다소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는 했으나 하루뿐만아니라 며칠 내내 홀로 남은 옆 반 친구를 쭉 제 방에서 재워주는 배포를 가진 생물위원회의 위원장 대리답게 그 내용은 꽤나 어른스럽고 점잖았다. 일단은 헤이스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말한 것부터가 그랬다.
“너 지금 이미 떳떳한 입장이라고. 왜 스스로 고개를 못 들고 다니려고 하는데.”
“…알았어, 잔소리 그만 해.”
다시 말하지만 하치자에몽은 사부로의 필사적인 순간들을 보았고, 더해서 사람이 꽤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친구에게 ‘너 벌써부터 성질 부리냐?’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만 쯧쯧 찼다. 어쨌든, 이렇게 구질거려 귀찮을 때가 있긴 해도 영 못 쓸 자식은 아니었으므로 조언은 이 정도로만 하고 내버려 두어도 좋았다. 그래도 얄미우니 결국 한마디 정도는 더 하게 되고 말았다.
“헤이스케가 일어나면 너 지금 이러고 있었던 거 다 말해버릴 거다.”
“아, 알았다고, 이 잔소리꾼아. 너네 위원회 1학년 애들 왜 아직도 안 도망갔대냐?”
아직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역시 괜찮은 거 맞네. 신뢰인지 포기인지 모를 평을 남긴 하치자에몽은 이내 라이조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하러 갔다. 사부로도, 현재 로반의 식사자리에 얹혀 먹는 칸에몽도 지금은 제 상태가 아닌 덕에 지금은 비교적 침착한 두 사람이 식사 준비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식재가 남는 게 없던 것 같던데. 식용 유충을 좀 가져올까.
하치자에몽의 그 사려깊은 식사 준비의 결과로 저녁을 거르게 된 사부로는 지금 헤이스케가 업혀 온 그 다음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물론 임무 중에는 식사를 거르거나 닌자식으로 겨우 때우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식사를 거르게 된 이유가 문제였다. 배가 부른 거라며 비난을 받더라도 먹기 싫은 것은 분명히 있다. 그것의 생전 상태를 본 적이 있다면 더더욱.
최고조는 아니지만 어쨌든 적당을 다소 넘을만큼 예민해진 머릿속은 자꾸만 그날 헤이스케의 모습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것도 실제보다 더 파리하고 창백한, 동사체에 가까운 왜곡된 기억. …이런 건 자신답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잠자리에 누운 그대로, 호롱불이 꺼져 어두운 방 안을 가로지르는 칸막이 아래로 괜히 손을 뻗었다. 뭔가 잡힐 거란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내밀어 본 건데, 생각 외로 부드럽지만 단단한 것이 잡혔다. 따뜻한 그것은 물론, 라이조의 손이었다. 마치 사부로와 마찬가지로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던 것처럼, 종이 냄새와 굳은살과 수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함께 밴 손은 이번엔 사부로의 고민을 야무지게 감아 쥐었다.
“괜찮아.”
“…….”
“잘 자.”
딱 그 손바닥만큼의 온기가 담긴 목소리가 아직 사그러들지 못하고 있던 불안의 잔재를 내리눌렀다. 사부로는 아주 잠시동안 아무 가면이나 덮어쓰고 라이조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곧 그만두고 그저 칸막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돌아눕고 말았다.
“…잘 자, 라이조.”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동실은 그제야 잠들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방 안, 그보다 조금 더 따뜻한 손이 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손목도 아니고, 그 손바닥을 향해, 그의 맥동하는 심장의 움직임이 드디어 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나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교의인 니이노 선생님의 익숙한 얼굴이었다. …걱정을 드러내기엔 최적의 얼굴.
“몸은 좀 괜찮니?”
“…응. 나 많이 잤어?”
“…하여간 걱정을 못하게 해. 그럴 거면 애초에 걱정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사부로 네가 좀 더 솔직해지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해.”
“네 몸을 사리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닌자인걸.”
이럴 땐 무슨 한 마디를 안 져. 어느새 더 익숙한 얼굴로 바꾼 사부로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투덜댔다. 쿠쿠치는 자신이 맡았던 임무에 대해 물어보려던 것을 관두고 상체를 일으켜 가면 너머의 눈을 마주보고 지금 당장 우선순위가 더 높은 보고부터 했다. 목이 잠겨 있었지만, 이 말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 무사히 가지고 왔어.”
“무사히는 아니지. 네가 지금 어디 누워 있는지 좀 봐라.”
“그럼, 제대로 갖고 왔어.”
“네가 갖고 온 것도 아냐. 내가 찾아서 가지고 온 거지.”
일일히 딴지를 거는 것이 창피함을 무마하는 방법의 하나임을 안다. 사실, 선생님으로 변장한 것이 곧바로 들통난 것이 가장 창피할 것이긴 했다. 헤이스케가 아는 사부로라면.
“…역시 사부로 네가 찾아 준 거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잡히지 않은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눈을 내리 깐 헤이스케를 보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여즉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다닥 던져버린 사부로는 제가 가지겠다 선언한 것이 오히려 그를 얽매고, 간파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까. 헤이스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부로가 화내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설명하기에는, 그는 말솜씨가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칸에몽은?”
“네가 그걸 왜 안 묻나 했다. 좀 전에 이사쿠 선배한테 뒷덜미 잡혀서 밥 먹으러 갔다. 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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