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Dear. beginner

1967.03

아무래도 저의 ‘서랍’과 당신의 ‘쓰레기통’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 같네요. 3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당신과는 다르게 저는 당신의 편지를 목빠지게 기다렸었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사는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해야겠죠. 운좋게도 이번에 당신의 편지가 이전만큼 늦어지진 않았어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날이 맨해튼에 출장을 다녀온 첫날이거든요. 아, 멘헤튼은 뉴욕 안에 있는 구역의 이름이에요. 거리상으로는 전혀 멀지않지만…. 저희 본사가 위치한 곳과 출장이 결정된 곳은 분위기가 좀 다르거든요. 이번에 출장가기로 한 곳은 북동부쪽이에요. 멘헤튼의 북동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내가 쓸데없는 사족을 많이 붙일수록 당신이 당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당신 말대로 침착함정도는 내가 맡을게요. 전 총알비 속에서도 펜을 들 수 있는 기자니까! —물론 농담이에요.—

이야기로 돌아와보면 1890년도부터 고층 빌딩 이 숲을 이루고, 제 직장은 물론 여러 시설들이 모여있는 대도시가 멘헤튼이에요. 제가 이곳에 살아서 그냥 뉴욕이라고 부르긴하는데, 뉴욕에는 멘헤튼 말고도 퀸스나 브루클린 등 다른 자치구들도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인 멘헤튼에서도 아직 덜 발전된, 조금 낙후됐다고도 말하는 지역이 있는데 그게 이번에 출장이 잡힌 북동부에요. 사실 평소라면 출장지가 어디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최근에 그쪽 지역 사람들은 더욱 낯선 사람들—특히 백인—을 좋은 시선으로 보진 않거든요. 이전 편지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최근 인권과 자유에 대한 시위가 더욱 거세지고 있어요. 가까운 명문대인 콜롬비아 대학교나 뉴욕대에서도 이에 관한 시위를 시작하면서 거리가 산만한 분위기고요. 물론 그런 시위가 더욱 활발히 일어나는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며, 저 또한 몇 번 힘을 보탠적이 있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기득권이라서 그런건지 저를 향한 이유없는 적대적 시선을 받는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잖아요. … 오, 방금 진짜 머리 텅텅 빈 기득권같았네요. 제 행동에 대한 변명은 여기까지 할게요, 더이상 해봤자 제가 그들보다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확실하게 깨달을 뿐이네요.

그래서 소문으로만 듣고 처음으로 갔던 북동부가 어땠냐면, 거리의 분위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평범했어요. 공사구역으로 확정된 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어요. 일단 신문사에 제보한 당사자와 공사장 인부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땄죠. 그런데 귀신이 나온다는 증언이 다 제각각인거에요. 어떤 이는 히스패닉의 건장한 20대 성인 남성이 자신을 쫓아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동양인 여성이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고도 했죠. 뒤죽박죽인 증언 사이에 공통점은 저 건물안에서 누군가를 봤다는 것 밖엔 없었어요. 그 뒤엔 귀신을 보고 소문에 겁먹은 인부들이 더이상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담당자의 푸념을 1시간정도 더 들었나…. 내일은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따봐야겠어요. 상주하는 인원들이니 이들보다는 더 아는게 많아 소문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지 않겠어요?

당신이 동봉해준 금화를 내내 집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는데,—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아쉽지만, 소중한 것이라 팔지는 못하고 힘든 날에 당신의 편지와 함께 다시 본답니다.— 내일은 지갑에 넣어서 다닐거에요. ‘특별’한 당신과 연관이 있는 물건이라면 지루한 취재도 특별한 일로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특별한 일도 당신이 겪는 것과 같진 않네요. 솜털로 사람 코를 간지럽히는걸 좋아하는 마물부터 어떤 용도인지 모를 모래시계, 사람들 머리 위 숫자도요. 정말 상상속에서나 일어날 일들이잖아요. 당신이 가진 숫자는 50에서 어떻게 바뀌었나요? 신탁에서 말했던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이 떠오르는데 시계와 관련이라도 있을까요? 음, 아직까진 모래시계가 의미하는 바도, 규칙을 알만한 반복적인 일들도 생기지 않았으니 저도 섣부르게 추측하긴 어렵네요. 망가진 땅이라는 곳으로 가보면 그 진상을 알 수 있을까요? …물음표가 대체 몇개인지,직업병이에요. 어쩐지 조사단이라는게 기자와 비슷한 것 같이 느껴져서요. 물론 한 세계의 존속이 걸린 중대한 일이고,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같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요. 그래도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금방 잠든 당신을 보면 비슷한 것도 같고요. …조금 놀렸다고 삐지진 말아요.

같이 지내게 된 사람들은 어떤가요? 세명의 영웅들 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으니 조사단으로 선발됐을거잖아요. 대부분 귀족들이라서 함께 어울리기 힘들다던가…. 아니면 조사단과 마물이라는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으니 수줍은 성격의 당신도 사람들과 빨리 친해졌을까요? 이상한 숫자가 사람들의 머리위에 생겨서 각자 다르게 바뀌었다고 하니 바뀐 사람들마다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조사단에 대한 당신의 감상이 궁금하니, 짧게라도 적어줘요. 아, 너무 친해졌다고 날 잊으면 그건 그것대로 섭섭할 것 같으니까 조심해주고. :)

우리 두사람 모두 사건의 시작에 있는 것 같아서 편지의 수신인을 ‘beginner’ 라고 명명해봤는데, 어때요? 매번 똑같이 시작하면 어떤 편지를 먼저 받았는지 헷갈리잖아요. 당신이 기분나쁘지 않다면 다음에도 당신의 답장을 읽어보고 별명을 붙여 보낼게요.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선에서 너무 겁먹지도, 조심성없이 굴지도 않게 서로 문제를 잘 해결해봐요. 고민이 있다면 이렇게 서로에게 털어놓으면서요.

조만간 다시 편지할게요.

From. beginner

1. 여러 층으로 높게 지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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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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