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L

09.

AU - 한서율 짝사랑

창고 by 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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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서율은 실내를 눈으로 훑어내렸다. 짙은 감정이 베인 눈동자가 한 곳에 머물러 누군가를 덧그리는 듯도 보였다. 콜록, 작은 기침 소리와 함께 짧은 상념을 거두어낸 서율은 조용해진 까맣게 변한 휴대폰을 뒤집어 엎어 놓는다.

구둣소리와 함께 다가온 동료가 한결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서율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소 부담스러운 상대의 행동에 서율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의자에 걸어둔 얆은 코트를 들어올렸다.

“병원이라도 가게요?”

“예. 지금 가야지, 내일은 좀 나을 거 같아서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알겠어요. 동료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한서율은 사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딱한 바닥에 울리는 구둣소리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복도를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서율 씨.’

문득 어디선가 들려온 듯한 목소리에 서율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멎는다. 주변을 짧게 탐색하며 행여 그 모습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아니었지. 여기 없는 사람이지. 재차 인식한 현실에 발 밑이 다시금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 순간이겠거니. 생각했던 그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진다. 마치 저주와도 같아서 한서율은 밤마다 잠이라도 잘 자기를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빌기도 한다. 이기적이게도 관계에 종료를 최종적으로 부추긴 것은 서율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더 그립고 보고싶어져 안달내는 저 자신이 어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던 관계에 끝이 존재하는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율은 그런 끝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 그 끝이 긴 앓음과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여서-.

“-...병원이 몇 시까지 하더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떨쳐내며 서율은 고개를 내저었다. 멎었던 구둣소리가 짧은 복도를 울리며 서율의 걸음을 재촉했다.


애매모호하던 관계를 부추겼던 것은 첫 단추부터일지도 모른다. 후임으로 왔던 그를 차츰 마음에 담아둔 것도 그가 좋아한다고 이야기 했던 여성과 잘 되길 바랬던 것도 전부, 서율은 진심이었다.

서율의 마지막 연애는 다소 최악으로 끝났으며, 그 이후에 누군가를 마음에 들일 여유도 마음 한 조각도 존재할리 만무했다.

“-오늘이 첫 데이트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오늘 옷에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식당에서 슬쩍 흘린 그, 말리부의 말에 서율의 시선이 슬쩍 빗겨나갔다. 괜히 딴청을 부리는 서율의 행동에 말리부가 주저없이 손을 뻗어 뺨을 꾹 눌렀다. 마치 제 모습이 어떤지 평해달라는 것만 같아, 서율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평소보다 더 멋지시군요.”

“저번에 서율 씨랑 같이 사전 조사를 했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입 안으로 넘어가는 음식물이 오늘따라 유독 까끌까끌한 느낌이었다. 마음에 품은 이의 연애를 돕는 등신은 저밖에 없을거라는 자조는 덤이었다. 서율은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목 안에 밀어넣은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그래요. 짧은 답을 돌려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자, 말리부의 표정에 환한 웃음이 들어찼다.

짧은 수면을 깨운 것은 다급한 초인종 소리 탓이었다. 서율은 멍한 정신으로 이마에 붙였던 열시트를 떼어내며 느린 움직임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저녁으로 향해가는 시간을 확인하며 쌓인 부재중을 훑으며 서율은 의아함에 마른 침을 삼켜냈다.

이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의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낼 수 있었다. 혼몽한 와중에 보냈던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탓이었다. 낮게 신음하며 아픈 와중에도 정갈하게 쓰여진 문자를 보며 서율은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은데. 혹시 와 주실 수 있나요.] 16:33

지금이라도 잘못 보냈다고 올 사람이 있다고 연락을 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다시금 초인종이 바쁘게 울렸다. 서율은 낮은 탄식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느릿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오늘따라 짧은 거리가 유독 길게 느껴져, 서율은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피하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서율 씨.”

두꺼운 철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서율은 까닭없는 설움이 몰아쳤다. 관계를 붙들고 지지부진하게 군 것은 서율, 자신이면서도 그랬다. 한서율은 여전히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고, 붙든 문고리를 차마 내리지 못하고 쥐고만 있는 것은 비겁함이었다.

똑똑. 정중하게 저를 부르는 듯한 노크 소리에 서율이 문고리를 내렸다.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익숙한 체향에 서율의 시선이 절로 위 쪽으로 향했다. 어쩐지 미묘하게 굳어 있는 입매에 서율의 표정이 절로 딱딱해진다.

반가움, 그리움, 약간의 수치심.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보고싶었다는 두서없는 마음이 서율의 머릿 속을 휘저었다. 입을 벙긋거리며 색소가 옅은 눈동자를 시야에 담자, 그제야 눈 앞의 상대가 누군지 확실하게 인지되는 느낌이었다.

“-말리부.”

제 이름이 탄식처럼 흘러나오자, 말리부는 주저없이 서율의 양 뺨을 쥐었다. 얼굴 곳곳을 살피며 말리부, 자신이 아프다는 양 미간을 좁히기도 했다. 다채롭게 바뀌는 말리부의 낯에 서율이 입술새로 작은 웃음을 내뱉는다. 기민하게도 그 기척을 알아챈 말리부가 못마땅하다는 양, 낯을 구겼다.

“왜 웃습니까. 당신은 그런 문자나 보내고, 연락도 안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

“안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문도 늦게 열고.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을 가만히 듣던 서율이 돌연 말리부의 허리를 꽉 끌어 안았다. 돌발적인 서율의 행동에 말리부가 숨을 멎었다. 가만히 호흡을 고르던 서율이 말리부의 단단한 등을 더욱 끌어안으며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기만 하는 서율의 행동에 말리부가 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무슨. 말리부의 짧은 투덜거림에 서율의 등이 잘게 떨렸다.

“미안합니다. 그냥, 너무 반가워서.”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섬기며 서율이 등을 감았던 손을 서서히 풀어냈다.

“가만히 있으시죠.”

재차 이어진 짧은 투덜거림은 따뜻한 온기와 함께였다. 풀어내는 팔이 마뜩찮다는 양, 제 쪽에서 먼저 서율의 팔을 틀어쥐며 등에 얹어 놓는다. 그대로 마주 안아주려는 듯 제 팔조차도 서율의 등을 꽉, 휘감고는 그대로 손을 올려 부드럽게 감겨드는 머리칼을 살살 휘저으며 매만진다. 머리칼부터 목덜미로 느릿하게 이어지는 손길에 여전한 다정함에 서율이 결국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보고싶었습니다.”

작은 진심 한 조각을 내비치며 서율은 그리워하던 이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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