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L

10.

중년썰 기반 AU

창고 by 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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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있는 펍(Pub)은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 곳에 산다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꼭 방문했을 그 장소는 매일 저녁, 제일 소란스러운 장소이기도 했다. 하나뿐인 딸을 재우고 시터에게 맡긴 뒤, 종종 방문하는 것이 요즈음의 서율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어렸던 10대를 지나, 어쩌지도 못한 첫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늦었던 사춘기를 맞았더랬다. 그 쯤에는 부모님과도 연을 끊다시피한지라, 어찌 보면 서율에게 지금 남은 가족은 입양한 딸 뿐이었다. 그마저도 제 이기심으로 시작했던 선의였고, 그것을 반성하는 시간이 솔찬히 길기도 했다.

서율의 인생은 딸을 입양한 뒤에야 비로소 안정감을 되찾았다. 모든 일들이 그렇지만 지나고보면 어찌나 철이 없던지. 다시금 10대의 저를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왔다.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어느새 길어진 머리칼을 묶어내며 늘 마시던 술을 주문했다.

“오늘은 좀 늦었네. 딸은 자?”

“예. 자는 거 보고 나왔습니다.”

“식사는?”

“괜찮습니다-. 위스키나 한 잔 주세요.”

익숙하게 말을 건내는 주인장에게 답하며 서율은 멋쩍은 듯 제 목을 쓸어내렸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서조차 혼자인 것이 퍽 익숙한 모양새였다. 주인장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제 몫으로 내온 땅콩을 손가락으로 헤아렸다. 부쩍 많아진 생각은 추억을 소환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부모님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을 택해준 것이었다는 걸, 부모가 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다.

“참-, 철도 없었지.”

“뭐가 말입니까?”

혼잣말에 불쑥 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자, 추억 속의 모습에서 한층 성숙해진 사내의 얼굴이 겹쳐보인다. 서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며 숨을 들이켰다. 이 동네에서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곳이라고는 여기밖에 없는데. 만남 자체가 의외인 것은 고사하고, 그가 저를 아는 척 했다는 사실에 절로 입술이 빠끔거렸다.

사내, 말리부는 익숙하다는 듯 의자를 빼며 서율의 건너편에 앉았다. 아, 짧은 탄식감이 흘러나오며 서율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간다.

“당신과 나요.”

어느새 나온 위스키잔을 매만지며 여상한 어조로 서율이 대답했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눈 앞의 남자가 고개를 끄떡인다.

“어렸잖습니까. 그래도 저는 그 때, 진심이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리부. 그 때문에-.”

지나간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입술이 돌연 멎으며 서율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마지막 헤어짐이 썩 좋지는 않았던 탓에 한서율은 그 후로 꽤 한참을 앓았다.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를 탓하기는 저도 그도 너무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닐까. 요즘에서야 그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가 있을 수 있게 된 거라고, 서율은 문득 문득 생각한다.

“압니다. 제가, 너무-...매정했죠.”

한층 조심스레 말리부는 서율의 손을 말아쥐며 단어를 골라냈다. 어찌되었건 건너라도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때와 아닐 때는 말리부 또한 받아들이고 견디기가 버거웠던 시간이었다. 그 도피처로 결혼을 택한 것을 말리부는 때때로 후회하며 종내에는 자책하기도 했다.

어쩌면 말리부 맨더슨은 평생의 걸쳐 서율을 잊지 못한 것과 다름 없을지도 몰랐다. 서율은 제 손을 쥔 컨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장을 지켜보긴 했으나, 어쩌면 인생에서 황금기라고 흔히들 말하는 30대 40대를 함께하지 못한 사람. 서율은 그것이 때때로 너무 아쉬웠고 문득 생각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잖아요. 당신은 너무...성실했고, 책임감도 강했으니.”

지금에서야 놓았던 손을 꽉 틀어쥐고 손바닥 사이로 전이되는 온기를 느껴본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그 손이 새삼스레 사랑스럽고 벅차올라서 서율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며 말리부의 손을 틀어 쥔다.

갑작스레 가해지는 압력에 말리부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간다. 테이블 어딘가를 보던 시선의 위치가 엇비슷해지자, 비로소 서율이 눈을 휘며 약한 웃음기를 내비쳤다.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어긋났던 것이 어쩌면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려고 한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갛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시선에 담으며 말리부는 천천히 쥔 손을 바라보았다. 10대와 똑같은 열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은 또 다른 것이었다. 모든 일을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함께할 수 있는 인연이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럴수도 있겠네요. 진짜.”

“-당신이 가장 찬란했던 시간을 못 본 건, 아쉬워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함께해주면 좋겠습니다.”

지나간 시간이 새삼스레 아쉽고 그리웠다. 조금 더 빨리 만났다면 당신의 찬란했던 시간을 곁에서나마 지켜볼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말리부는 서율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기어코 쥔 손의 손가락 사이를 간지르며 말리부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 여전히 예쁜걸요. 곱게 늙었다는 말이 어울릴정도로. 그러니, 아쉬워하지 맙시다. 우리.”

작게 소근거리는 문장이 주변의 소음에 묻히지도 않고 오롯하게 서율의 귓가에 닿았다. 돌고 돌아 겨우 ‘우리’라는 단어로 묶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천천히 서율이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 볼 일이 더 많잖아요, 우리.”

완성하지 못한 문장을 끝내며 서율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들어찬다. 미소가 옮은 듯, 말리부의 입가가 절로 들썩이며 그의 입가에도 환한 웃음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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