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바토 & 하신나르

To. Hasin

From. Einar

케이카OC by 케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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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세월 속에 제일 먼저 무뎌지는 것이 바로 시간 감각이 아닐까. 어차피 나이 차이 따위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아이나르는 늘 하신에게서 형이라 불리고 싶어 했다. 하신은 작은 아이였다. 아이나르도 작은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으나, 그때에도 하신은 그보다 더 작고 여렸다. 고작 한 살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막내라는 위치와 자그마한 몸은 아이나르에게 '형'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뒤를 따라붙는 작은 발소리는 돌아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했고, 뻗어오는 작은 손을 꼭 잡고 놓을 수가 없었다. 어리광을 부려오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고, 한 번 품에 안으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따스했다.

“그래서 정했어!”

“으응…?”

아네바시드는 갑자기 제게로 달려와 당당하게 선포하는 까맣고 어린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선행되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것들은 어디에다 버리고 온 것일까? 어린아이들이야 하는 짓이 늘 종잡을 수 없다지만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전부터 다른 드래곤들과는 비교할 수없이 누런 싹을 지닌 아이였기에 무엇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네바시드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의 물음을 기다리며 눈을 번쩍 빛내는 아이나르를 보고는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뭘 정했는데?”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물음이 나오자, 아이나르는 대단한 것을 선언하듯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나르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끝은 푸른 하늘의 정오, 그들의 머리 위에 올라선 태양을 향했다. 아네바시드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아네바시드님의 태양은 만물을 비추잖아?”

“그렇지.”

“하지만 나에겐 나만을 비춰주는 태양이 있어.”

“그렇구나.”

아이나르는 태양을 가리켰던 손으로 주먹을 꾹 쥐고는 제 가슴에 갖다 대었다. 그가 귀여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면 기사의 선서라도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법한 결연한 자세였다.

“그러니까 나는 아네바시드님보다 그 태양을 먼저 지킬 거야.”

'“하하. 불경한 내 새끼.”

“난 엄마 아빠 새끼인데.”

“…….”

“그럼 이만!”

아이나르는 천벌 받을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당사자의 코앞에서 내뱉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짧은 다리를 놀려 종종 걸어가는 뒷모습이 맹랑하고도 야무지기 그지없다. 뒤에 남겨진 아네바시드는 잠시 정신을 놓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냥 납득해버렸다. 아이나르가 신 아네바시드보다 우선시할만한 것은 떠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From. a selfish man









아이나르가 기억하기로는, 그날은 무척 불길한 날이었다. 아네바시드가 마석 습격 문제로 신전에 소집을 걸었을 때 아이나르는 하필 멀리 떠나 있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에 하늘의 바람은 거셌고, 빛은 흐렸고, 자주 오가던 길임에도 방향을 헤맸으며, 하다못해 그냥 두었던 발톱 밑의 거스러미가 오늘따라 몹시 짜증 나기까지. 그날의 모든 것이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랄 만큼 사악했다.

“노티무의 마석에 하신이를 혼자 보냈다고.”

불길함은 신전 밖으로 흘러나온 아네바시드의 목소리에 정점을 찍었다. 인간은 하찮다. 드래곤에 비할 바 못 되는 나약한 종족이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 당시까지도 생각에 변화는 없었으나 단 한 가지, 그 아이가 혼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 하루 모든 것이 목구멍에 낀 가시처럼 거슬렸다. 혹시나.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고민은 짧았고, 아이나르는 채 접지 못한 날개를 다시 펼쳐 눈 폭풍 속을 날아올랐다.

노티무의 마석에 가까워질수록 고함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인간들은 불온한 기운을 품은 마도구를 치켜들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무기였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하신을 찾으려면 위에서 맴돌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구름 위로 날던 아이나르는 고도를 낮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인간들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든 것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아이나르는 당황하지 않고 거대한 풍압을 일으켜 떨쳐내었다. 하지만 비처럼 쏟아져오는 무기들은 바람을 갉아먹고 기어코 단단한 비늘을 꿰뚫고 몸에 박혀들었다. 그물과 같은 것이 펼쳐지며 아이나르를 감쌌고, 그는 몸부림치며 바닥에 추락했다. 미지의 힘에 구속당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커다란 몸뚱이가 점점 작아져 한낱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때, 아이나르는 문득 의문을 품었다. 이곳에서 밀빛 비늘은 본 적이 있던가?

인간들이 아무리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해도 드래곤의 그 거대한 몸집이 숨겨질 리 없었다. 하신은 마법을 배우지도 않았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어떠한 아티팩트를 가진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나르는 방금 전의, 자신이 추락하던 때를 되새겼다. 인간들의 공격은 악착같았고,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그래, 마치 한 두 번은 경험해 본 것처럼. -이러한 생각이 끝난 후부터는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하신이 서있었고, 흩뿌려지는 피의 붉음은 눈이 시릴 만큼 강렬했다. 하신의 눈동자가 그러하기에, 늘 사랑스럽기만 하던 붉은색이 이토록 끔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떨어져 나가는 아이의 오른팔과, 그와 동시에 기울어지는 몸을 붙잡으려 했지만 굉음과 함께 갈라지고 무너지는 절벽 위에 서있던 아이나르는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


내가 아이를 지켜줘야만 하는 그래서, 지켰어?





“흡…!”

아이나르는 헛숨을 들이키며 잠에서 깼다. 흉흉한 눈을 한껏 치켜떴지만 허공을 향한 눈동자의 초점은 잡히지 않았다. 흐린 시야로 보고 있는 것은 마지막 한순간에 스쳐간 하신의 얼굴. 실망이었을까. 원망이었을까. 가늠하는 것조차 두려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이 아닌 단 한 장면이었다. 어쩌면 보지 못했을 뿐, 그마저도 현실일지도 모를.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멈췄던 숨을 길게 토해내고,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뜬다.

“…주제에.”

악몽에서 깨어나면 늘 그렇게 사나운 목소리로 짓씹었다. 아이나르는 수많은 세월을 잠자고 수많은 꿈을 꾸었으나 오직 단 하나의 꿈만을 악몽이라 칭했다. 낡고 낡아 잊힐 때도 되었건만 조금도 늘어지지도, 바래지도 않는 선명한 과거.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어린아이가 누군가를 지키겠다며 달려들던 같잖은 꼴. 오늘도 어김없이 악몽을 꾼 아이나르는 사나워진 눈에 힘을 풀었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사실 같잖은 건 그 아이가 아니지. 꿈속에서 느꼈던 분노와, 뒤섞인 여러 감정들은 잠기운이 가시며 모두 체념으로 바뀌어갔다. 벌써 수없이 지긋지긋하게 반복해 온 흐름이었다.

아이나르는 늘 그랬듯이 다시 잠들려다가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고는 일어나기로 했다.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뼈와 근육이 새로운 배열을 찾아가자, 검은 비늘로 가득 찼던 방 안이 터무니없이 크다고 느껴질 만큼 그는 작아졌다. 그와 동시에 방 안에 쌓여있던 먼지가 사방으로 정신없이 날렸던 탓에 작게 기침을 했다. 하지만 청소는 나중에 하고, 일단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쐬기로 했다.

높고 험준한 바위산 정상에 입구를 뚫어 깊이 파고 내려온 이 레어는 엘피도의 기술력을 이용한 웬만한 집의 구조를 튼실히 갖추고 있었다. 비록 이 집이 만들어진 목적은 '잠을 자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본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멋대로의 성정과 왕성한 활동량을 지닌 그가 지내기엔 여전히 심심하기 짝이 없었으나, 잠을 자기 위한 방 하나만 덜렁 놓여있는 것보다는 다양했다. 그래서 이 한정된 공간에서도 아이나르는 무언가를 할 수 있었고, 관리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제멋대로에 활동적인 그가 자신을 산 깊숙이 가두기 시작한 것은 하신에게 없었던 방랑벽이 생긴 후였다. 하신의 방랑벽에 대해서는 '갑자기 왜 그래?'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나르는 하신이 인간들의 아티팩트 무구에 휘감겨 속절없이 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자신 또한 그랬다.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쯤은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 구속감을 참을 수 없었으리라.

아이나르는 여행을 시작한 하신을 걱정했다. 아네바시드가 잠들고 전쟁이 끝났다고는 해도 인간들이 여전히 그들의 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만약 하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를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만나지 못했다'. 아이나르는 몇 번이고 하신을 찾아갔으나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하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설득할 기회는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나르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멀찍이서 하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나르는 그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이 구질거리는 기다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하신을 찾아가,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아이나르의 표현을 전적으로 빌리자면 '쪽팔려서 골백번 나가뒤져야 할' 두려움 때문이었다. 머물 곳 없이 떠도는 하신을 위한 돌아올 곳을 만들어주자. 그러한 뜻조차 그 시작의 졸렬함을 퇴색시킬 수는 없었다.

원인은 '나 때문에 하신이 다쳤어' 따위의 자책감은 아니었다. 그날의 일은 그 누구도- 심지어 아네바시드조차도 어쩔 수 없었던 재앙이었음을 부정하진 않았다. 자책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에 대한 분노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나르의 악몽의 근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 근원은 아이나르의 것이었으나-

“오늘은 깨어있네요?”

-이 태평한 얼굴을 한 남자로부터 시작되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아이나르의 새삼스러운 시선이 동굴 입구로 들어오는 하신에게 닿았다. 바깥에서 비쳐 드는 노을에 하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아이나르의 발끝을 건드렸다. 동굴의 입구는 바깥에서는 그저 바위산의 일부와 다를 바 없이 보이도록 감춰져 있건만. 아티팩트를 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찾아 들어오는 모양새가 괘씸할 정도다. 거의 무단 침입 수준이었지만 하신이 대상이었기에 침입자 경보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일은 없었다.

“방금 일어났어.”

아이나르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뒷머리를 마구 흩뜨렸다. 산책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이나르를 보는 하신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운이 좋네요. 전에는 계속 자는 것만 보고 갔거든.”

“…언제 왔었는데.”

“2달 전쯤?”

머리를 헤집던 아이나르의 거친 손짓이 뚝 멈춘다. 2달 전이라면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잠을 시작했을 즘이었다. 그때는 정말 운이 안 좋았다. 아쉽네. 아이나르는 무심코 흘러간 생각에 흠칫 놀라며 일부러 혀를 세게 찼다. 운이 안 좋았던 건 어느 쪽일지.

“하… 오늘은 왜 왔어?”

“언제는 이유가 있어서 왔나.”

그럼 그렇지. 아이나르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하신을 쏘아보다가 몸을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나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 가요?”

“부엌.”

“뭐 만들어주려고?”

“너한테 줄 건 냉수밖에 없으니까 방에나 가 있어.”

아이나르는 매몰차게 대답했다.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쌓인 방이지만 알게 뭔가. 아이나르가 큰 보폭으로 척척 앞서 나아가자 뒤를 느긋하게 쫓아오는 듯하던 발소리는 곧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이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아이나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다. 당연하게도 하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 도착한 아이나르는 컵을 꺼내어 물을 받으려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최근 하신이 아이나르의 집에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졌고, 머무르는 시간이 늘었다. 따지고 보면 찾아오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신이 떠돌고, 아이나르가 틀어박힌 후에도 하신은 간혹 아이나르를 찾아오곤 했다. 그것이 몇 년에 한 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던 것만이 다른 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만이.

‘짜증 나게.’

하신을 퉁명스럽고 매몰차게 대한다고 해서 아이나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커가면서 넉살과 밉살이 늘어난 하신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새 그렇게 굳어진 것뿐이었다. 진심을 담은 장난 정도라고 해둘까. 남들이 보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건 좀 아니라며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이야 알 바는 아니고.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아이나르는 하신을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하신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신이 오래 머무를수록 아이나르는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결국 다시 떠나버릴 테니까. 당장의 행복에 취해 후에 돌아올 쓰디쓴 실망감을 견디기엔 아이나르는 이미 지쳤다. 처음으로 하신의 변화를 눈치챘을 때는 기뻤다. 드디어, 하신이 그날의 일에서 벗어난 걸까- 하고.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실망은 비단 하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절반은 자기 자신에게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하신이 떠나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같이 떠날 용기도, 그를 붙잡을 용기도 내지 못했다. 하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과거를 떨쳐내어 나가는 것이 옳은 일임을 알고 있는데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누구인가.

아이나르는 이기적이다. 아이나르는 그것을 뼈저리게 잘 알았다.

“냉수 준다더니 한 드럼통을 챙기고 있나 봅니다.”

하신이 부엌에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나르가 상념에 잠겨있던 탓에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하신은 물기 하나 묻지 않은 빈 컵을 보더니 표정이 묘해졌다.

“뭐 하고 있었어요?”

“…물 트는 법을 잠깐 까먹었어.”

누구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지만 아이나르는 뻔뻔하게 컵에 물을 담곤 하신에게 내밀었다. 하신은 떨떠름하게 컵을 받아들었다. 하신이 무어라 말하려는 기색이 엿보이자 아이나르는 사납게 미간을 찌푸리곤 부엌을 나섰다. 하신은 잠시 컵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반 모금 정도만을 홀짝이곤 컵을 내려놓았다.

아이나르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에, 방으로 가려다 말고 바깥으로 향했다. 노을 진 하늘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들었다. 지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은하수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감상할 새는 없었다. 아이나르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머리를 식혀줄 차가운 밤공기뿐이었다. 그런 아이나르의 옆으로 하신이 다가섰다.

“화났어?”

“누가 그래?”

“원래부터 워낙 험악한 인상이라. 착각할 수도 있죠.”

하여간 저 능글맞은 말투하고는. 많이 변하기도 했다. 아이나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지켜줘야 할 작은 꼬맹이 같았는데, 모르는 새에 훌쩍 커서는 제 앞을 가로막기까지 했으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말대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했다. 오직 아이나르만을 빼고.

“이번엔 언제 갈 거냐?”

“글쎄요.”

아이나르가 툭 뱉은 말에 하신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하신을 보며, 아이나르는 간절히도 원하는- 가지 말라는 단 한마디를 내뱉지 못했다. 늘 그랬듯이 기다릴 뿐이었다. 아이나르는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하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까 봐,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까 봐. 혹시라도, 하신을 붙잡은 순간 꿈이 현실이 될까 봐 무서웠다. 하신은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누군가를 미워할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자그마한 불확실, 그 하나가 아이나르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미치도록 두려웠다.




무너져내리던 것은 절벽 아닌 희망. 

추락하던 높이는 절망의 깊이.

눈앞에서 잘려나가던 것은 너의 팔이었나

우리의 관계였나.




설령 남았다 한들 그마저도 제 손으로 끊어버렸다.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하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신은 영원히 떠돌 것이고, 아이나르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한 달쯤?”

…라고, 아이나르는 착각했다.

“뭐?”

“왜 그렇게 놀라요? 전에 왔을 때도 그랬는데. 아, 그때는 자고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으니 이번엔 자면 안 돼. 나랑 놀아요.”

전에 왔을 때라면 자신이 자고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일 터다. 말 한마디 나눌 수 없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으니 하신은 분명 지루했겠지. 그럼에도 그는 한 달 동안이나 곁에 머물러 있었다. 자는 것을 깨우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머물러있었다.

그 하신이?

“…….”

아이나르는 멍하니 하신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에도 달빛 아래 꺼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그래,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했다. 아이나르가 그저 고여있는 동안, 하신은 시간 속에서 계속 변하고 있었다. 작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고작 한 시간도 안 되는 머무름은 하루로, 일주일로, 그리고 한 달로.

아니, 그것은 고작 머무름이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아이나르는 자신이 하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줄곧 그렇게만 생각해왔지만 꾸준히 흘러온 하신은 어느샌가 저만치 앞서나가 아이나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어요?”

하신의 목소리에 아이나르는 덜컥 몸을 떨었다. 그럴 리 없었다. 아이나르는 언제나 하신이 제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랐다. 이것은 기회다. 하신은 이제 서서히 돌아오고자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기적인 아이나르는 제멋대로 그렇게 단정 지었다. 하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옛적에 놓쳐버렸던 기회가 다시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하신을 붙잡을 기회. 기회를 붙잡을 순간. 그래서 아이나르는 말 했다.

“그래.”

아이나르는 하신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럴 자격을 가지지 못했다. 지금까지 두려워서 외면해 온 것이 누구였던가. 하신을 지키겠다고 자만하고, 결국 지키지 못했던 것이 누구였던가. 그런 주제에 하신의 구속을 자처하는 꼴은 자기 자신이 두고 볼 수 없었다. 한심하고 끔찍해서.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어.”

하신이 더 이상 그저 작고 어리기만 한 동생이 아닌 것처럼, 아이나르 또한 더 이상 나약한 형일 수만은 없었다. 아이나르는 하신과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동생을 지키기 위한 형의 것이 아니었다. 하신의 팔이 잘려나가던 때, 그들의 관계는 끝났다. 그러니 이제 새로 시작할 때다. 변해야 할 때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랑해. 아이나르는 하신을 보았던 기억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이제 알아볼 수조차 없을 테지만, 그를 향한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 한다면 오직 사랑뿐이다. 하지만 아이나르는 그 한 단어만으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함을 느꼈다. 하신에게. 아이나르에게. 좀 더 어울리는 것을 찾고 싶었다.




저 은하수보다도 아름다운 말로.

이 산맥보다도 광대한 목소리로.

함께 걸어온 모든 시간을 담아서.




굳이 언어의 형태로 내뱉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나르는 말 해야만 했다. 들려주어야만 했다. 이기적인 남자는 그랬다. 하지만 그 이기심을 만족시키기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To. my be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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