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브] 장미와 가시와 꽃잎과
"자기는... 먹을 거 말고 좋아하는 게 있긴 해?"
"... ... ...무어라고?"
산딸기를 한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키샨이 황급히 입에 든 걸 삼키고,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아스타리온이 한쪽 턱을 괴고 그야말로 '뚱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슬슬 야영 물자가 휴대용 건조 식량꾸러미밖에 남지 않아서, 모두가 근처를 돌아보고 먼저 돌아오는 사람부터 쉬기로 한 저녁이었다. 키샨은 언제나처럼 맛있는 냄새를 쫓아 약초 한 무더기와 과일 한 움큼을 짊어진 채 야영지로 돌아왔고, 아스타리온은 늘 그랬듯 캠프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언제나의 사소한 잡담-아니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보이길래 다 들고 왔지 그냥-이 지나가고, 다들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적당히 간식 삼을 만한 걸 우물거리던 차에... 난데없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키샨은 낼름 산딸기 몇 개를 입에 더 털어넣고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멀쩡히 간식 잘 먹다가... 너 내가 입 심심하면 마시라고 미리 피도 줬잖아!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삐죽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손에 든 잔은 소중히 움켜쥔 채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최근에 네가 먹을 거 봤을 때 말고 웃은 적이 있긴 해?"
"나는... 대체... 왜... 우리가 산딸기 먹다 말고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럼 이런 걸 언제 물어봐? 자기가 나 문 따라고 부를 때? 아니면 잠긴 상자 열어달라고 부를 때? 그-것-도 아니면, 다들 도약으로 멀쩡히 잘만 올라가는 길을 나 혼자만 못 올라가서 데리러 올 때?"
"미안한데 마지막 건 그냥 네가 약한 게 문제 아닌,"
"미안한데 자기는 이... 눈치라는 게 없어? 어?"
아마 레이젤이 이쯤 돌아왔다면, 위대한 기스양키 전사는 야영지를 떠나거나 두 사람의 머리를 추가 공격으로 후려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만한 설전이 지나가고도 아직 일행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불행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 때문에 키샨은 산딸기 즙으로 가득한 입가를 딱 벌리며 어이없음을 표현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삿대질을 했고, 아스타리온은 제법 쌓인 경험으로 잽싸게 자리에서 물러나 피가 든 잔을 사수했다.
"너 내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랬지. 이렇게 사람 툭툭 찔러보는 거 말고!"
그리고 그 말이 나오자마자, 유감스럽게도 아스타리온이 사수해 낸 잔은 대충 아무 상자에나 얹혀져 굳어갈 운명이 되었다. 두 사람이 족히 기백 번은 충돌했을 문제가 또 다시 이 유치한 싸움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하! 나도 매번 말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걸 그렇게 툭툭 뱉는 건 자기 말고 아무도 안 하거든? 우리가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싸웠는지 알긴 하지?"
"내가 솔직하게 말해서 적들이랑 싸운 것보다는 너랑 싸운 횟수가 더 많을 것 같거든?"
"알면 날 좀 조심스럽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내가 널 민들레 홀씨마냥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대해야겠냐고! 그럼 넌 내 근처에도 못 와!"
"그런 거 말고! ...하, 아니다. 됐어. 그냥."
언제나 그랬듯, 아스타리온이 싸움을 끊고 한숨을 푹 쉬었다. 키샨은 여전히 어이없는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상대가 가라앉았으니 그 옆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고, 역시 언제나 그랬듯 키샨이 쭈뼛거리며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진짜 뭐였어? 내가 정말로 또 서운하게 해서 그래?"
덤불이 한 번 바스락거릴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아스타리온이 있는 대로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네가 뭘 줘도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으에?"
키샨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의 얼굴로 의문을 형상화한다면 그런 모양새가 될 것이다. 키샨은 한동안 그런 표정을 짓고 아스타리온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가 할 말을 다 고른 후 고개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아스타리온은 키샨의 그런 얼굴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표정이야? 제발, 내가 자기 때문에 겪은 엉뚱한 일만 나열해도 내 지난 30년 정도는 채우고 남겠어."
"그 정도밖에 안 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난 네가 주는 거면 뭐든지 좋아해."
이번에는 덤불이 다섯 번 정도 바스락거릴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스타리온은 기껏 고른 할 말을 다 까먹은 얼굴로 굳어 있었고, 결국 참지 못한 키샨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제대로 앉아있던 게 아니라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에, 마치 도망치려는 사람을 덮쳐 누른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건 덤이었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하게 했어? 왜? 나 뭐 싫다고 하거나 안 받은 거 없잖아?"
"다... 받아주면 뭐 해? 매일 네 텐트 한 구석에 쌓아 두기만 하잖아."
"어? 소중한 건 원래 그렇게 두는 거잖아. 땅굴을 팔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둔 건데... 가방 속에 넣으면 실수로 팔아버릴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서툰 연인 간의 싸움은 원래 이렇기 마련이다. 사소한 부끄럼이 쌓이고, 오해를 부르고, 그러다 조명과 온도와 습도가 맞는 날 우연히 해소되는 것. 아스타리온의 표정은 어이없음에서, 헛웃음을 지나, 마침내 허탈함과 안도가 섞인 표정으로 바뀌었고, 키샨의 표정은 그런 그를 따라 의문에서 안도, 약간의 토라짐과 기쁨으로 번져갔다. 아스타리온이 지나치게 가까운 키샨의 팔을 한 번 툭 건드렸고, 그가 순순히 물러나자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좋아, 그동안의 내 모든 고민을 바보같은 걸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이건 네 그 보물 더미 맨 위에 올려놔 줘."
아스타리온이 건네는 것은 너무 붉고 약해 보였기 때문에, 키샨은 따라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건 평범한 장미였다. 서툰 솜씨로 가시가 떼어진, 다발도 없는 한 송이의 붉은 꽃. 키샨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그 꽃을 내려다 보았고, 잠시 후 그를 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아스타리온, 손 줘 봐."
"뭐? 손은 왜?"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손을 키샨의 손 위에 올렸다. 키샨은 언제나처럼 하얗고 곧은 손가락을 꼼꼼히 살폈고, 이내 자신이 찾던 것이 없다는 걸 안 다음에야 안도가 섞인 얼굴로 밝게 웃었다.
"다친 줄 알았네. 이거 들장미지? 맨손으로 가시를 다 뗐어? 언제 한 거야?"
아스타리온은 그제야, 키샨이 손질된 장미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그의 손에 혹시 남았을 상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이 잠깐 갈 곳을 잃고 굴러갔지만, 결국 그는 그냥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샨은 한동안 그가 들려 준 장미를 보고 있었고, 다 져 가던 저녁놀이 사라지고 완연한 밤이 된 후에야 텐트로 돌아가 장미를 올려 놓았다.
그 때쯤에는 카를라크와 윌이 게일을 데리고 돌아왔고, 모닥불에 장작을 쪼개 넣고 불을 피우자 얼마 후 섀도하트와 레이젤도 돌아왔다. 할신은 조금 더 돌아오지 않다가, 동물 한 마리를 통째로 이고 돌아와 카를라크의 환호를 받았다. 모닥불에서 타닥거리며 불티가 튀는 소리가 음악처럼 퍼졌고, 야영지는 언제나 그렇듯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키샨은 온 야영지를 쏘다니다가-키샨 그거 아직 안 익은 거니까 먹지 마-숲과의 경계를 기웃거리는 중이었는데, 문득 익숙한 피 냄새를 맡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막 다른 사람들 쪽으로 가려던 듯한 아스타리온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스타리온? 왜 그러고 서 있어?"
"아무것도 아니-아냐, 그래. 할 말이 있어서."
그는 약간 어색한 태도로 키샨의 곁에 섰다. 불빛을 등지고 달빛이 비춘 그의 얼굴은 무언가 어색한 것을 참는 듯 했고, 키샨은 궁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다 불쑥 선수를 쳤다.
"그러고보니 인사를 안 했네. 꽃, 줘서 고마워. 잘 올려 뒀어."
"...다행이네. 그리고 자기가 아까 솔직하게 말하래서, 그냥 얘기하는 건데."
실바람 한 줄기가 가볍게 불었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소리도 약간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건 기쁘지만, 그럴 때는 그냥... 좋아해 줘. 내가 최고는 아니어도, 괜찮은 선택을 했다고 믿고 싶거든."
키샨은 잠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무엇을 주더라도 기뻐하지 않을 것 같다고 믿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오래, 혹은 깊이 고민했을까? 아스타리온이 그동안 골랐던 것은 죄 쓸모없었을 것이고, 그의 미적 감각이 야영 물자를 냅다 쥐여주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한 고민이 지나고서야 겨우 선택한 게 그, 손으로 가시를 뗀 장미 한 송이였다. 키샨은 그런 마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냥 그가 제일 잘 하는 일을 했다. 솔직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는 뜻이다.
"응, 그럴게!"
아스타리온은 그때서야 조금 웃었다. 키샨이 늘상 예쁘다고 말하는 달빛 같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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