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즈태량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와 벚꽃의 낭만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AU

사람들은 보통 살면서 천사를 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아니, 헛소리하는 건 아니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천사를 본 적 있다고 한다면, 믿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웃던지, 혹은 비웃던지, 소년은 진짜로 천사를 본 적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사의 날개를 달거나 머리 위로 헤일로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몬색의 기류를 띄는 날개를 빛내며, 벚꽃처럼 하늘에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었다.

진짜로 봄에 하얗게 피어나는 벚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잠깐 머물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시간이었던지라, 꿈이라 생각할 만도 했지만.

그렇지만 소년은 그 인연에 망상이나 꿈 같은 가벼운 단어는 붙이고 싶지 않았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래. 기적.

기적 같은 마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 * *

소년은 낭만을 좋아했다. 아직 중학교에 재학 중인 10대의 소년이었던지라, 납득가지 않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실 소년을 아는 사람들이 꿈과 희망이 다 얼어 죽었냐고 기함할지라도, 적어도 소년이 생각하는 자신은,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밤거리를 배회하고, 아직은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도시의 갈라지는 콘크리트 빌딩보다도 지루한 회색빛의 일상에서 일탈하는 것도. 그렇게, 오로지 자신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계로 조금씩 빠져들던 소년은 그런 비틀어진 낭만을 사랑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습관이 가끔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그날따라 날씨도 맑고 선선한 게 기분이 꽤 좋았다. 비 오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젖은 옷 갈아입는 건 좀 귀찮으니까,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반짝.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다. 처음에는 태양인가, 소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말을 들었으면 그가 조금 짜증 내지 않을까 싶었지만.

파직. 그런데 태양이 원래 저렇게 번개 붙은 것 마냥 파직거렸었나? 그저 신기한 마음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서서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작은 점. 새인가? 아닌 것 같은데. 손가락 끝으로 가려지던 게 조금씩 커져갔다. 새는 아닌데.

…설마 사람인가?

하늘의 레몬빛은 점점 사람의 형태를 갖춰갔다. 소년의 눈은 나름 좋은 편이었으니, 집중해서 보면 자세한 특징 같은 것도 잡아낼 만한 거리였다. 파직거리는 빛의 날개. 그에 비슷한 색의 머리칼. 하늘색 바람막이.

아니 그 전에. 떨어지고 있는 건가?

소년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하늘… 까진 아니어도 떨어지는 속도는 꽤 느린 편이었다. 날개가 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떨어진다’ 보단 착륙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소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말이다.

잠시 넋을 놓고 보다가 얼떨결에 잡으려고 하듯, 소년은 두 손을 뻗어 올렸다. 두 손에 따듯한 온기가 맞닿았다. 아, 사람이 맞구나.

음, 하늘에서 떨어졌으니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가?

말했듯이, 소년은 꽤 낭만을 좋아했다. 그런 소년에게 천사와의 만남이란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아직 쌀쌀한 봄날, 꽃이 피기엔 조금 이른 계절. 떨어지는 천사를 받아낸 소년은 씩 웃으며 물었다.

“안녕, 천사님? 어디서 왔어?”

소년이 받은 ‘천사’는 정말 천사라 불린 게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신비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소년은 드물게도 인내심을 십분 발휘해 답을 기다렸다.

눈을 깜박였다.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을 받다시피, 손을 내민 소년을 빤히 응시하고. 이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나… 나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

침착하게 발끈했다. 자신이 떨어진 상황에 대한 당황인지, 뜬금없는 말을 들은 것에 대한 황당인지는 몰랐지만, 소년은 굳이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천사인데?”

소년은 쉽게 말해 배려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저 제 할 말만 밀어붙이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서 어디서 왔어? 천사님에 대해서 알려주면, 나도 여기가 어딘지 알려줄게.”

소년은 또한 영악한, 좋게 말하자면 영리한 편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빠르게 파악하고, 실행에 옮겼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랬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에게 호감이 생긴 소년은, 천사와 조금 더 길게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순간에 나타났으니,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소년이 웃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자 천사, 소녀는 어리둥절하던 기색이 점차 잦아들어 가고, 이내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 평소 모습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일단 답은 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소년은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태량… 타이마, 라는 곳에서 왔어.”

천사의 이름을 알게 된 소년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려 웃었다.

“난 유즈, 유즈리하. 여긴 지구, 한국이라는 곳이야.”

* * *

“…집에 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둘 사이의 작은 소란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난 후 천사, 아니 태량이 하늘을 바라보며 꺼낸 말이었다. 옆에서 태량을 관찰하던 유즈리하도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사람이 떨어졌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누가 봐도 평범한 하늘이었다.

어디서 떨어졌을까. 하늘에 세계와 세계를 잇는 통로라도 있는 건가? 좀 터무니없는 생각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미 하늘에서 태량이 떨어진 이상, 저 구름 사이로 숨겨진 문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다시 날아서 올라가도 그 문이 남아있을까?”

“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게 된 거야? 걸어가다 구름이라도 잘못 밟았어?”

“애초에 천사가 아니라니까…. 그냥 평범하게 문을 열었을 뿐인데, 정신 차려 보니 떨어지고 있더라고.”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태량이 당장 집으로 돌아갈 길은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장 헤어지게 된다면 정말로 아쉬웠을 테니 유즈리하에게는 어쩌면 기꺼운 소식이었다. 태량이 곤란해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유즈리하는 다시 흘끔 태량을 쳐다보았다. 금발이라고 하기엔 연두색이 섞인, 레몬색에 가까운 머리칼은 확실히 흔한 색은 아니었다. 유즈리하의 시선을 느껴서였을까, 태량의 시선이 마주해왔다.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저도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 같았지만, 얼굴에서 드러나는 차분함과 진중함이 어쩐지 어리다는 느낌을 주진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 멀뚱히 하늘만 다시 올려다보는 태량에게 유즈리하는 질문 세례를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대신 단 하나만 물었다.

“아무래도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진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있을 곳이나 아는 사람은 없겠지?”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럼 내 집에서 며칠 지낼래? 어차피 부모님도 지금 집을 비운 상태라 너 한 명쯤 와서 잔다고 해도 모를걸?”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고,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계속 밖에서 노숙할 순 없잖아, 유즈리하가 빠르게 덧붙였다. 망설이는 태량을 열심히 설득한 끝에 유즈리하는 그럼, 며칠만, 이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소년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임시로 유즈리하와 같이 지내게 된 태량은 때아닌 질문 세례에 시달리게 되었다. 태량에 대한 것부터 그가 살던 세계까지, 물어볼 거리는 차고 넘쳤다. 태량의 나이, 그가 떨어지며 보여준 능력, 태량이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왔냐, 거기는 여기 지구와 많이 다른가. 하나에 답하기 바쁘게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지만 태량은 침착하게 하나씩 답해주다 마지막 질문에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여기랑 많이 다른가는… 글쎄. 아직 여기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니까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쉽게 해결해 줄 수 있지, 유즈리하는 반색했다. 어떻게? 태량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내가 여기 구경시켜줄게. 이 동네만큼은 여기저기 잘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돌아가는 방법 찾는 김에, 겸사겸사.”

“나야 고맙지만, 유즈리하는 학교 안 다녀?”

“유즈리하 말고, 유즈. 그쪽이 더 편하거든. 그리고 다니긴 하지! 네가 다니던 아카데미에 비해선 엄청 지루한 것만 배우지만.”

“그럼, 유즈. 지금은 학교 안 나가는 거야?”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여차하면 학교는 며칠 땡땡이나 치지 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유즈리하는 금방 엄해지는 태량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학교를 빼먹으면 안 돼. 짧은 생을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져주지 않았던 유즈리하지만, 어쩐지 태량에게 져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방과 후에 같이 다니자, 그렇게 둘은 타협을 봤다.

* * *

유즈리하는 평소에 관광지 같은 곳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명한 음식점이나 카페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인터넷 검색창을 열심히 돌려가며 온갖 블로그를 뒤지기 시작한 것은, 태량의 관심을 끌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가 학교에 가 있는 오전에 태량은 혼자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 또는 문을 찾아다녔다. 유즈리하의 학교가 끝날 무렵 다시 집에서 만나, 저녁 늦게까지 둘은 같이 돌아다녔다. 물론 태량을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를 너무 빨리 보내주는 건 아쉬웠던지라, 태량의 흥미를 끌어 조금 더 오래 붙들어보려는 사심이 더 컸다.

입소문을 탄 맛집, 디저트가 예쁘다고 알려진 카페, 영화관, 심지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꼽히는 공원까지. 한국에서 살아오던 몇 년보다 며칠간 태량과 같이 돌아본 장소가 많으니 말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태량도 처음에만 조금 어색해했지,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던지라 더욱 유즈리하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있지, 여기. 그러니까 여기 세계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맛있는 것도 많고, 신기한 것도 많고.”

이거 녹차라떼라고 하는데, 말하며 녹색의 따듯한 음료를 태량의 손에 쥐여주며 유즈리하는 생긋 웃었다. 은근슬쩍 이라고 하기엔 속마음이 많이 비쳤지만 유즈리하는 가볍게, 별생각 없다는 어투로 말을 건넸다. 손을 뜨듯하게 데우는 종이컵을 받아들며 태량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즈리하가 라떼를 몇 번 홀짝인 이후에 태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유즈 말대로, 처음 보는 것도 많고, 이 라떼도 괜찮고, 그래.”

그렇지만, 태량은 유즈리하를 따라서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눈에 담았다. 탐색하는 듯한 푸른색 눈동자에 구름이 환하게 비쳤다. 무엇을 찾는지는 뻔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걱정할 테니까… 역시 빨리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 물론 유즈네 세계도 좋지만.”

어쩔 수 없나, 약간 쌉쌀한 녹차의 맛이 남아 유즈리하는 입맛을 다셨다. 태량과 지내던 며칠 사이, 그의 성격은 어느 정도 파악했기에 예상 못 했던 답은 아니었다. 아쉽긴 하지만, 그게 태량이 원하는 것이라면, 유즈리하는 그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미련을 가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아쉬울지언정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유즈리하는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그가 자라온 가족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학생 신분에도 불구하고 뒷골목 이곳저곳을 호기심 담아 쏘다니고 다녔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태량이 어제부터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전까지 태량은 유즈리하에게 무언가를 숨긴 적이 없었으니 변화를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질릴 만큼 많은 질문에 성실하게 꼬박꼬박 답해주지 않았던가.

나한테 숨길만 한 게 뭐지? 학교 수업은 빠지기 일쑤에, 출석한다 하더라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기에 성적은 중하위권을 달리고 있었지만, 두뇌 회전이 나쁘지 않았던 유즈리하는 이내 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돌아가는 방법을 찾았구나.

전날, 아직 꽃보단 꽃봉오리가 송송히 달린 나무의 위로, 공간의 일그러짐을 목격하고 표정이 밝아진 태량을 보지 못했지만, 유즈리하는 충분히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돌아가는 길을 열심히 찾아다닌 만큼,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왜 바로 돌아가지 않은 거지?”

자신은 부모님하고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지라 태량이 가족에게 가지는 애착에 공감할 순 없었지만, 보편적으로 가족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였음에도, 태량이 가족에 대해 얘기할 때 묻어나오는 애정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즈리하는 태량이 돌아가는 방법을 찾으면, 바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었다. 그의 예측과 달리, 태량은 오늘도 그의 앞에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든 채로 빤히 응시해오고 있었지만.

“응? 방금 뭐라고 말했어?”

“어, 아니. 별거 아니야.”

아직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긴 했지만, 유즈리하는 결국 태량이 이 세계에 계속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즈리하는 희망을 하나 더 조심스레 적립했다. 나도 어쩌면, 태량이 조금은 미련 가질만한, 소중한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오롯이 나만을 위해 이 세계에 남을 만큼은 아니어도, 본래 세계에 돌아가더라도 계속 나를 기억해주지는 않을까.

유즈리하는 피식 웃었다. 태량을 만나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할 때까지 끈질기게 밀어붙였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 좋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왔었으니까.

사랑이 사람을 바뀌게 한다는 말은 과장이 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즈리하는 멍하니 태량을 바라보며 곱씹었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붙들어두고 싶고, 그리고 그만큼 슬프지 않았으면 하고, 그런 그를 위해 배려하게 된다는 감정이.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그 사랑스러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유즈? 아까부터 빤히 쳐다보는데…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얼마나 오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을까. 태량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물어왔다. 호기심과 걱정이 반반 섞인 태량의 눈을 쳐다보며 유즈리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활짝 웃었다.

“심각한 건 아닌데. 아직 여기서 벚꽃 본 적 없지? 보통 이맘때쯤 해서 한꺼번에 확 피어나는데, 그게 정말 절경이거든. 우리 내일 벚꽃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한순간의 충동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좋은 제안이었다고 유즈리하는 생각했다. 태량을 언젠가 떠나보내야 한다면, 같이 할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구경할 수 있는 것, 다 해보고 싶었다. 미련은 남을지언정, 후회는 남기지 않도록.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태량은 눈을 크게 떴지만,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꽃 구경이라면.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작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덤덤하게 웃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 *

공원은 학교를 마친 학생들로 북적북적했다. 태량의 머리칼만 제외한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유즈리하나 태량이나 그리 크게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정작 따로 있었으니까.

어제 몇 송이 띄엄띄엄 피었던 것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공원의 벚꽃 나무들은 만개해있었다. 어느새 포근해진 봄 날씨만 아니었다면 눈송이가 소복이 쌓여있다고 착각할 만도 했다.

하늘하늘. 빙글빙글.

부드럽게 불어오는 순풍에 꽃 몇 송이가 유즈리하와 태량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태량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 그랬듯이, 유즈리하는 손을 뻗었다. 하얀색 꽃송이가 그의 손안으로 안착했다. 유즈리하가 제 손을 태량에게 내밀자, 태량은 자세히 살펴보려는 듯 고개를 숙여 떨어져 내린 꽃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쁘네.”

“그치. 절경일 거라 내가 장담했잖아?”

태량의 세계에도 꽃은 있겠지만, 기왕이면 여기서 같이 본 벚꽃은 특별하게 기억에 남았으면, 유즈리하는 그리 소망했다. 한순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빠르게 져버리는 벚꽃처럼, 비록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만큼 눈부셨으니. 하얀 꽃을 볼 때마다 자신도 같이 떠올려줬으면, 그리 생각했다.

가볍게 자신의 손에 있던 벚꽃을 털어내고, 유즈리하는 태량의 손을 잡았다. 놀란 듯 잠시 펄쩍 뛴 태량이었지만, 유즈리하가 뻔뻔스레 웃으며 맞잡은 손을 보란 듯이 흔들자 태량은 이내 피식 웃으며 손에 작게 힘을 주었다.

그 온기가 마치 그들이 함께라는 증거라도 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공원을 천천히 돌면서도 유즈리하는 태량의 손을 놓지 않았다.

파랗던 하늘에 붉은 노을이 물들고, 이윽고 검은 장막이 드리우듯 밤이 올 때까지, 빛을 흡수한 듯 벚꽃 나무는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딱히 정해진 목적지 없이 걸음을 옮기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한 나무 앞에 멈춰 섰다.

공원에서 가장 커다랗고 화려하게 피어난 벚꽃 나무. 그 위로 하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유즈리하의 시선이 아직 잡고 있는 태량의 손으로, 하얀색 벚꽃으로, 그리고 일렁이는 하늘로 천천히 움직였다.

“나도 그냥 너 따라서 같이 가면 안 될까?”

뜬금없이 뱉는 말이 아니었다. 태량이 돌아갈 거라고 확신한 그 순간부터 무의식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던 생각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태량의 옆에 있고 싶었다.

태량은 멈칫, 침묵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돌아갈 것을 확신했던 만큼, 이 질문에 대한 태량의 대답 또한 예상했었기에, 유즈리하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느새 이렇게 잘 알게 되었을까, 어느새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나도 유즈가 정말 좋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의 세계까지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 합쳐도, 너 하나만큼 소중하진 않다고, 그리 생각했지만 유즈리하는 그런다고 해서 태량의 대답이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태량의 목소리에 유즈리하는 하늘에서 눈을 떼고 그를 응시했다. 푸른색 눈동자에 결의가 비치고 있었다.

“꼭 다시 만날 거라고. 꼭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유즈리하는 밝게 웃었다. 맞잡지 않은 손을 올려 약속을 요구하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걸려오는 태량의, 조금 작은 새끼손가락을 꼭 쥐였다.

“좋아, 약속. 꼭 다시 만날 거라고.”

처음 만났던 날처럼, 태량은 빛나는 날개를 펼쳤다. 천천히 손을 놓아준 유즈리하는 태량이 일그러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일렁이는 공간을 향해 손을 뻗기 직전, 태량은 고개를 돌려 유즈리하와 눈을 마주쳐왔다. 여전히 웃음을 띠며, 유즈리하는 손을 흔들었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태량은 그의 입술에서 어렵지 않게 단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잠시, 안녕. 내 천사님. 다시 만날 때까지.

마주 손을 흔들어 인사를 끝마친 태량은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유즈리하의 시야에서 태량의 형상이 흐릿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레몬빛이 사라지고, 일렁이던 공간도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유즈리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태량이 사라진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유즈리하는 홀로 남았다. 둘이 약속을 나눈 하얀 벚꽃 나무 아래.

* * *

세상은 넓고, 우주는 그것보다 더 넓다. 수많은 차원이, 세계가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상한 가게.*

평범하디 평범한 날이었고, 평범하디 평범한 문이었다. 그 문을 연 순간 처음 보는 카페가 눈에 들어와, 상황을 파악하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유즈리하가 나름 쉽게 상황에 수긍한 이유에는, 아마도 어렸을 때의 그 추억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천사, 아니 소녀와의 추억.

어쩌면, 정말 어쩌면 미약한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벌써 수년이 지난 옛날의 일이었지만. 약속을 마음 한쪽에 소중히 품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작은 희망을 남몰래 키우고 있었는지도.

사람들 틈에 섞여서, 화려하게 장발을 늘어뜨린 이국적인 미인의 안내를 거의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유즈리하는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눈길로 카페를 둘러보았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카페 같기도 했지만, 마법 같은 분위기가 덧씌워지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다. 그때의 태량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조금 잦아들자 그제야 유즈리하는 자신과 같이 카페에 들어온 사람들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색의 머리카락은 예사고, 슬쩍 봐도 인간이 아닌 외형을 가진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낯설지만 그리운, 레몬색이 동공에 가득 들어찼다. 순간, 꿈속으로 들어온 건가 싶었다.

잊었을 리가,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 소중한 날들이었는데.

못 알아볼 리가, 그날들의 추억이 얼마나 눈에 밟혔었는지.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바라보는 커다랗게 뜬 푸른색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할 수 있었으니까.

홀린 듯, 둘은 한 발짝, 한 발짝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랐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사르륵, 손가락을 부드럽게 스치는 레몬색, 붉은색 머리카락이 손에 확신을 쥐여주었다.

아, 꿈이 아니구나.

정말, 내 앞에, 그날의 벚꽃을 같이 본 사람이, 지금 존재하는구나.

“나 보고 싶었어?”

유즈리하는 눈을 접으며 물었다. 그런 그를 비추듯, 태량의 미소 역시 환해졌다.

“…그럼, 당연히.”

오래 헤어져 있던 사이건만, 어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유즈리하를 가득 채웠다.

벚꽃 아래 꿈꿨던 소년의 낭만은, 재회를 소망해 온 청년의 기적 같은 인연으로 다시 그를 찾아왔다.

*L양님 자캐커뮤 ‘기적의 마법: 에스프레소’ 발췌


Written 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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