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는 사랑을 연주하고
아이네 유즈리하 x 태량
후둑. 후두둑.
새카만 머리카락에 내려앉는 차가운 감각에 유즈리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매일매일 꾸준히 확인하는 성격도 아니었던지라, 놀랍지 않게 백지만 그릴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즈리하는 별생각 없었다. 사실 이렇게 몸소 날씨를 체험하고 있는 이상, 일기예보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별로 의미 없기도 했다. 이걸 어쩌나, 우산 안 가지고 나왔는데, 그저 태평하게 중얼거릴 정도로.
후두둑. 쏴아아.
잠깐 내리고 말 보슬비겠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머리를 무겁게 강타하는 빗방울을 느끼기 전까진 말이다. 재빨리 근처 가게 지붕 아래로 피신한 유즈리하는 그새 짙은 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딱 15분이면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못 기다리고 왜 굳이 지금 비가 쏟아지고 난리야?”
그러나 아무리 짜증을 낸들, 비가 마법처럼 그칠 리는 없었다. 아직 장마가 올 시기는 아니니, 지나가는 여름 소나기일까.
제 손을 감싸고 있던 붉은색 반장갑을 벗어 맨손을 지붕 밖으로 내밀자, 거친 손 위로 시원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초여름에도 불구하고 후텁지근한 날씨였던지라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였음에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우르릉. 꽈광.
아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천둥까지 치지? 조금만 기다리면 어련히 비가 그치겠지, 생각 중이었던 유즈리하는 지붕 아래에서 빼곰 고개를 내밀어 짙다 못해 비구름으로 새까매진 하늘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이크. 그 짧은 찰나에 얼굴이 젖어 드는 것을 느낀 유즈리하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하려 재빨리 다시 지붕 아래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가긴 그른 것 같았다. 마른 벽을 등지고 머리카락이 그새 머금은 물기를 털어내는 도중이었다.
띠링.
진동과 함께 경쾌한 벨 소리가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유즈리하는 빠른 속도로 옷에 젖은 손을 닦아내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신에게 문자를 보낼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 보낸 사람: 귀여운여친님 ⚡
오늘은 일찍 들어왔어. 아직 밖이지?
오후 4:45 ]
사랑해 마지않는 여친님이 보낸 문자라고. 유즈리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일찍 들어왔다는 말은 벌써 집에 들어왔단 소리인가? 유즈리하는 재빨리 짧은 문자 내용을 다시 읽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나기를 보며 유즈리하는 마음만 급해져 발을 동동 굴렀다. 띠링, 폰이 한차례 다시 울렸다.
[ 보낸 사람: 귀여운여친님 ⚡
(i m a g e)
기다리고 있을게
MMS 오후 4:46 ]
화면을 가득 채운 예쁜 얼굴을 보는 순간 유즈리하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타닥 타닥, 빠르게 답장을 치고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유즈리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젖어 든 후드의 토끼 귀가 비와 함께 등을 때렸다.
그러나 그 얼굴에 띈 미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끼이익. 쾅.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있던 태량이 고개를 들었다. 두 세계를 잇는 틈새에 자리한 이 집에 올 사람은 자신을 빼곤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벌써 왔나? 문자가 온 지 시간이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간 태량은 눈에 들어온 사람을 보자마자 멈춰 서서 눈만 깜박였다.
“나 왔어!”
그도 그럴 것이 막 현관 안으로 들어온 유즈리하는 뛰어서 왔는지 수영해서 왔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흠뻑 빗물에 젖어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자신을 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씩 웃고 있는 유즈리하를 보던 태량은 말없이 수건 하나를 가져와서 건넸다.
“비 오는데 뛰어온 거야?”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오지, 그리 말하며 얼추 물기를 닦아낸 유즈리하에게 태량은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여름이었어도 비를 맞아 그새 조금 서늘해진 손이 기쁘게 맞잡아왔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비를 싫어하진 않아. 나름 시원하기도 하고, 천둥까지 치는데 예쁜 내 여친님 생각나서 좋기도 하고 그러더라.
신나게 말을 잇는 유즈리하를 보며 잠자코 듣던 태량이 풋 하고 작게 웃음 짓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음엔 우산이라도 하나 사서 와, 작게 타박했다. 감기 걸리기 전에 따듯한 물에 씻고 옷 갈아입고.
유즈리하는 복도 모퉁이로 사라지기 전 눈을 찡긋하고 손 하트를 날렸다.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태량은 작게 한숨 쉬었지만,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였다.
유즈리하와 태량이 다시 거실에 모였을 땐 잔잔한 빗줄기가 거실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소파와 포근한 공기, 그에 더해진 시원한 빗소리에 취하지 않기는 힘들었다. 둘은 손을 살짝 겹친 채 작게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늘어진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행복하다. 손가락을 맞대고 장난치며 유즈리하는 문득 생각했다.
너도, 나만큼 행복할까? 마주쳐오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자동적으로 빙긋이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만큼, 나보다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한때는 생소했지만, 이제는 더없이 익숙해진 감정이었다.
가랑비에 젖어들 듯이 자신의 일상에 물들어온 태량이란 존재를, 유즈리하는 강렬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그를 사랑했다. 결단코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닌, 한평생 그 사랑에만 젖어있기를 소원했다.
이것이 사랑이란 걸까. 가만히 서로 얽힌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유즈리하는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우리 밖에 나갔다 올까?”
“아직 밖에 비가 오는데?”
태량의 말대로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 없이 내리고 있었다. 유즈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득 웃었다.
“그러니까. 비 좋아하지 않아? 가끔 나가서 비 맞는 느낌도, 기분 좋지 않을까.”
잠시 유즈리하의 눈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태량은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우비 하나씩 입고 나가자.”
가볍게 스치는 손을 꼭 잡으며 둘은 일어섰다. 우비를 찾아,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맞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 * *
공간의 틈새라고 했던가. 세계의 틈새라고 했던가.
그런 틈새에도 이렇게 비가 올 수 있던가? 유즈리하는 멍하니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이라는 게 맞는 명칭이었다면 말이다.
뭐, 별로 상관없으려나. 하늘이든 아니든, 유즈리하가 보기엔 충분히 하늘처럼 보였고, 그 하늘처럼 보이는 것에서 비같이 보이는 것이 내리고 있었다.
경쾌한 빗소리도, 풀잎에 스며드는 비 내음도, 피부에 하나 둘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방울의 감촉도, 한 치 의심 없이 비 같았으니까.
찰박, 찰박.
비 내리는 정원을 둘은 손잡고 걸었다. 어느새 꽃이 지고 파릇한 이파리가 돋아난 것이, 여름의 색채를 알리고 있었다. 이 초록색의 향연이 한 폭의 여름 그림이라면, 계속 이어지는 이 빗소리는 여름의 오케스트라인 걸까.
드넓은 정원의 벤치에 다다른 둘은 젖은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았다. 우비를 입기도 했고, 어차피 젖을 것을 각오하고 나왔는데 조금 더 젖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스며드는 빗방울은 시원했고, 잡고 있는 손은 따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다른 이도 아닌 태량의 목소리였던지라 유즈리하의 귀에는 그 무엇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옛날 생각? 유즈리하가 되물었다.
“어렸을 적 이야긴데. 비 오는 날에 이렇게 우비 입고 나가서 물놀이도 하고 그랬거든. 비 올 땐 내 능력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혼자 놀곤 했지만.”
그러고 제 손을 잡고 있는 유즈리하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 유즈리하는 태량의 시선을 눈치채고 빙긋 웃으며 손을 조금 더 꼬옥 쥐었다. 어쨌거나 놓을 생각 없다는 뜻은 전해졌다. 태량은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다가 물어왔다. 유즈도 어렸을 때 그랬으려나?
내가 어렸을 때? 글쎄, 어땠더라…. 유즈리하는 잠시 고민하듯 침묵했다가, 그다운 쾌활한 톤으로 답했다.
“비슷하지 않았을까? 원래도 혼자서 싸돌아다니긴 했으니까 그건 비 올 때도 마찬가지였고. 어렸을 때도 비에 젖는 건 그다지 싫어하진 않았어. 말리는 게 조금 귀찮았을 뿐이지. 그리고 비가 오고 난 후에 기대하는 것도 있었거든.”
“비가 온 다음에 기대하는 거?”
“무지개 말이야.”
의외로 동심 가득한 얘기를 하며 유즈리하는 눈을 휘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태량은 유즈를 따라 픽 웃고 물었다.
“무지개는 왜? 색이 예뻐서?”
“그런 것도 있고. 내 세계에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거든, 무지개의 아래에는 큰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엄청 모험심 들게 하는 이야기 아냐? 훌쩍 떠나서 찾으러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기분 좋아지곤 했거든.”
“그렇구나. 그럼 지금도 비 올 때 무지개를 기대하고 있어?”
“지금은 딱히?”
“왜?”
“이미 나만의 보물을 찾았으니까?”
그리 말하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유즈리하는 붉게 물든 태량의 볼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또 괜히 그러지, 작게 웅얼거리는 태량의 레몬색 머리카락을 손을 뻗어 만지작거렸다. 계속 내릴 것만 같던 비도 조금씩 멎어가고 있었다. 태량은 회색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무지개가 안 뜰 것 같네.”
“그럼 이만 들어갈까? 무지개도 좋지만 다음 기회도 있을 거고, 같이 소나기를 보는 것도 꽤 좋았으니까.”
유즈리하가 가볍게 제안하자 태량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다시 집 안으로 향하는 둘을 등진 하늘에는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옅게 개는 회색 구름 사이로 찬란한 노을의 빛이 스며들었다.
소나기가 내린 후 기적같이 무지개가 뜨지 않을지라도, 둘이 함께라면 일상 같은 소나기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Written 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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