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즈태량

별 내리는 밤에 울리는 정적은

아이네 유즈리하 (과거 로그)

When you wish upon a star

Makes no difference who you are

Anything your heart desires

Will come to you

ホシアイ Music Box ver.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둡고 탁했다. 저녁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각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공항에 사람이 적기는커녕, 오히려 북적북적해 소란스럽단 말이 어울렸다. 그러나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나올까 싶어 기웃거리다 옆 사람하고 부딪히는 와중에도, 한 사람이 가는 길만큼은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쌀쌀해지는 가을 날씨치곤 조금 얇아 보이는 검붉은색 카디건. 한 손에 질질 끌고 있는 커다란 여행 가방. 인파 속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화려한 붉은색의 머리카락. 흔한 갈색 눈동자에 흔하지 않은 날카로운 눈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를 피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분위기였다. 어둡지는 않지만 어쩐지 위험한, 통제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맞이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날카롭고도 서늘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을까.

사람들이 힐끔거리거나 말거나, 붉은색의 청년, 아이네 유즈리하는 그들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는 힐끔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에 시선을 주었다가 부스럭부스럭,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건 기종이 조금 오래된 스마트폰이었다.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다 문득 기억난 듯, 유즈리하는 화면을 끄고 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 맞다, 이거 아직 한국에선 안 터지겠지.”

이런 젠장. 낮게 읊조리는 욕설에 주변 사람들이 흠칫하여 돌아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유즈리하는 터벅터벅 버스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나있었기에 창구는 전부 닫혀있고 자동판매기만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없네? 아 뭐, 그럼 개이득이지. 단순하게 생각하며 모니터 화면에서 보이는 행선지 버튼을 꾹꾹 누르던 유즈리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막차가 22시 반… 지금이… 밤 10시 48분…….”

아악!! 빡쳐!!!!!

짜증 섞인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가며 유즈리하는 다시 시계를 노려봤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본다 한들 시간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아오, 진짜 이걸 어떡하지. 비행기가 연착되지 않고 제시간에만 도착했으면 버스 잡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버스는 이미 떠났으니 어찌하랴. 유즈리하는 가방 하나와 수신이 터지지 않는 전화, 그리고 상황에 한 치 도움이 안 되는 사나운 표정으로 공항 미아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수신이 안 잡힐 걸 알면서도 괜히 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켰다 껐다 하던 유즈리하의 시선 언저리에 안내데스크가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도 직원은 있었다. 더 중요한 건, 아마 전화도 있을 것이었다. 도르륵 소리를 내는 가방을 끌며 유즈리하는 빠른 걸음으로 데스크 앞에 도달해 말을 걸었다.

“전화 좀 써도 될까…요?”

자칫하면 초면의, 그것도 연상인 사람에게 엄청나게 무례하게 들릴만한 말을 간신히 무마하며 유즈리하는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가상한 노력이 별로 효과는 없었는지 직원은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유즈리하는 누가 봐도 비행기에서 막 내려 헤매고 있던 게 확실했기에 직원은 일단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번호 좀 불러주시겠어요?”

아까 자신의 폰으로 치다만 번호를 빠르게 읊으며 유즈리하는 인내심을 발휘해 기다렸다. 직원이 번호를 누르고 수신음이 들리기 시작하자 전화를 그에게로 넘겼다.

띠리링, 띠리링, 익숙하지 않은 노랫가락을 감상하던 중, ‘여보세요’ 하는 말과 함께 노래도 끊겼다.

“야야, 한새윤 맞지? 나 유즌데.”

응? 뭐?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번호 확인하나? 하긴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를 받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유즈리하는 다시 기다렸다. 몇 초 후, 새윤의 목소리가 다시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어, 어…. 한국엔 뭔 일이야? 아니 그전에 언제 들어온 거야?”

“설명하자면 좀 긴데.”

응, 좀 많이 길어질 수 있는데. 일단 도착한 건 10분 전? 그리고 이거 빌린 폰이라 통화 오래 못 해.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도와주라. 버스 끊겼는데 공항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냐?”

전화기 너머로 긴 한숨 소리만이 들려왔다.

* * *

“…그래서.”

설명을 요구하는 톤에 바닥에 가방을 끌러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유즈리하가 돌아보았다. 어, 왜? 태연히 묻는 유즈리하의 세상 근심 없는 표정에 새윤은 열이 뻗친 듯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러니까 ‘왜’가 아니라!

“설명을 하라고, 설명을! 갑자기 한밤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질 않나. 일본에 있어야 할 애가 한국에 왔다고 하질 않나.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와서 지낼 곳도, 뭣도 없다고 하고!”

“아니, 일단 진정하고.”

사탕 하나 줄까? 연노랑색 껍질로 싸인 사탕 하나를 내밀자 새윤은 됐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절당한 사탕을 까서 제 입에 던져넣으며 유즈리하는 고개를 갸웃 기울여 새윤을 응시했다.

하아, 내가 진짜 어쩌다가. 중얼거리고 있는 새윤은 3년 전 (아니, 마지막으로 본 게 중학교 졸업식 때였으니 이제 3년 반인가?) 유즈리하의 기억에 남아있는 새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가만히 새윤을 관찰했다. 무난하게 숏컷을 한 반곱슬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 조금은 순진해 보이는 눈매의 갈색 눈동자.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지만 후줄근해 보이지는 않는 옷차림. 10대 후반 한국 남성의 지극히 평범하다면 평범한 외모였다. 굳이 달라진 점을 따지자면 키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키는 나보다 아직 작은가? 비슷했던가? 근데 성격은 조금 더 까칠해진 것 같기도 하고? 성격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로 멍하니 중학교 동창에 대해 평가를 내리던 유즈리하의 눈앞에서 새윤이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너 딴생각하고 있지. 네가 말 안 해줘도 대충 상황이 짐작 가긴 하거든? 내가 지금 여기서 줄줄이 내 추측을 읊어줘야 할까?”

인내심이 끝에 달했는지 새윤은 유즈리하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 어디 보자. 공항에 내리자마자 한 일이 나한테 전화한 거였으니 네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나 외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혼자 온 게 확실하고. 가방 하나 덜렁 들고 왔고. 돈은 있냐? 있다고? 그래, 그 정도 개념은 챙기고 다녀서 참 다행이네. 여기 친척도 없고, 집도 없고. 너 정 안 되면 찜질방 같은 데서 대충 있을 생각이었지? 미친놈 아냐 이거. 아, 끼어들지 말고. 아무튼, 넌 지금 한국에 정착할 곳도 수단도 없어. 정황상 그냥 잠깐 놀러 온 게 90%의 확률로 맞긴 할 것 같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왠지 아닐 것 같거든. 아주 온 거지? 보나 마나 누구한테도 말 한마디 안 하고?”

숨은 쉬고 말하는 건가? 그런데 평범한 외모만큼 머리가 비상한 건 여전하네. 유즈리하는 짝짝, 박수를 쳤다.

“아 그래도 ‘나 독립한다’ 쪽지 하나는 남겨두고 오긴 했어.”

해맑은 말과 함께 동시에 새윤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이런 데서 맞고 싶지 않았다고, 이 웬수 같은 놈아. 다시 욕을 하며 새윤은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일치는 스케일도 진짜 참. 독립하고 싶었으면 그냥 일본에 있어도 되는데 왜 굳이 힘들게 한국으로 온 건데? 여기 다져놓은 기반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면서.”

유즈리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가 새윤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글쎄, 나름 이유는 있었거든.’ 상큼한 맛이 나는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답했다.

“기왕 집을 나올 거면 멀어질수록 좋았고. 어차피 좀 사고치고 다닌 게 있어서 그 부근에서 제대로 된 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을 걸.”

자랑이다. 새윤이 비꼬는 걸 무시하고 유즈리하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제 나름의 이유를 이어갔다.

“일본 다른 지역이나, 여기나, 인맥이나 그런 거 없는 건 똑같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거든? 일단 언어만 통하면 됐지 뭐.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설마 부모라는 작자가 날 찾는답시고 신고라도 하면 진짜 피곤해질 것 같았고. 설마 한국까지 와서 날 찾을 생각을 하겠어?”

새 출발이지, 새 출발. 입에 남은 사탕을 오도독 깨물어 먹으며 유즈리하도 바닥에 드러누웠다.

“야, 이불도 안 깔았는데 벌써 누우면 어떡해.”

“괜찮아, 추위 안 타니까 그냥 둬.”

뒹굴거리는 유즈리하를 보던 새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쟤가 저런 놈인 건 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유즈리하 걱정이다. 새윤은 마지막으로 제 딴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안건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쩔 생각인데?”

“대충 적당한 월세 찾고 일도 찾고?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지 않나?”

당장 내일부터 예전 통장 있던 거 살리고, 돈 집어넣고, 폰 개통하고, 부동산 뺑뺑이 돌지 뭐.

속 편해 보이는 유즈리하에게 국적은 어쩔 건데, 말하려던 새윤은 문득 유즈리하가 이중국적자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저거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나이가 언제였더라. 21살? 22살? 어쨌든 아직 한국 주민등록증이 남아있을 테니 체류 문제는 없을 거고. 너무 많은 부분이 생략되긴 했지만 유즈리하의 말대로 일단 당장 급한 의식주만 해결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정말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너 대학교 갈 생각은 아니지?”

“머리에 총 맞았냐?”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유즈리하의 말에 새윤은 ‘그럼 됐고’, 말하며 돌아누웠다. 너도 적당한 시간에 자라. 이불하고 베개 저기 옷장에 있으니까 꺼내서 쓰고. 불 끄고.

네이 네이, 성의 없이 대답하는 유즈리하에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어쨌든 신세 지는 처지인 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평소 잠드는 시간하곤 멀었지만 유즈리하는 별다른 말 없이 이불을 꺼내서 펴고, 불을 끄고 누웠다. 말똥말똥한 두 눈이 한동안 까만 천장만을 빤히 응시했다.

새벽에서야 간신히 잠든 유즈리하는 자신을 대충 발로 차는 새윤에 의해 강제로 깨워졌다.

“야, 너 오늘 할 거 많다며. 난 지금 나가니까 나중에 안 깨웠다고 뭐라 하지 마라. 집 비번은 어제 알려줬으니까 알아서 들어오고.”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유즈리하는 그제서야 비척비척 손을 뻗어 폰을 확인했다.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나가고 난리야…….”

새윤이 들었더라면 평범한 시차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사람은 보통 이 시각에 일어나고도 남는다고 일침을 가했겠지만, 유즈리하의 입장에선 꼭두새벽에 깨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할 일이 많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대충 이불을 개어 옷장 안으로 쑤셔 넣었다.

씻고 나온 유즈리하를 맞이하는 건 빈집의 정적이었다. 새윤은 아까 나갔고, 집주인도 나간 건가? 유즈리하는 어젯밤에 잠깐 인사만 하고 지나친 남성을 떠올렸다. 새윤의 사촌 형이라고 했던가? 아니, 더 먼 친척이라고 했던가? 딱히 남의 가족관계에 큰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기에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새윤도 ‘평균적인’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보호자가 부모님이 아니라 먼 친척 형이어도 그게 뭐 어떠리, 가볍게 넘겼을 뿐.

자, 그럼 어디 보자. 일단 제일 급한 통장부터 살리고. 작은 가방에 신분증이며 폰이며 제 딴에 필요할 것 같은 잡다한 무언가를 전부 쓸어 담고 후드티 하나를 걸쳤다. 빨리빨리 하면 점심쯤이면 다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유즈리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 * *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에야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은 새윤은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보고 있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서현, 자신의 친척 형이 돌아올 시간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올 사람은 어제 갑자기 굴러들어온 걔밖에 없지 뭐. 자신의 방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든 새윤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누가 시비를 걸었길래 표정이 그 모양이야?”

새윤의 말대로 유즈리하는 아침과는 정반대로 매우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빈말로도 인상이 순해 보인다고 할 수 없던 얼굴이 입을 다물고 인상을 쓰고 있을 땐 더욱 험악해 보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혹시라도 엄한 불똥이 튈까 긴장했겠지만, 새윤은 익숙한 듯 답을 재촉할 뿐이었다.

“아니. 뭐 다른 건 어찌어찌하긴 했는데.”

어, 은행에서 내가 나인 걸 증명하라고 하는 것도 안 싸우고 참아넘기고, 체크카드도 만들어 왔고, 폰도 개통 못 해준다는 거 아득바득 우겨서 만들긴 했는데.

진상이 따로 없었겠군. 유즈리하와 전쟁을 치렀을 직원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새윤은 ‘이따가 번호 내놔라’ 심드렁하게 답했다. 유즈리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씨근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데.

“부동산 인간들 다 원래 그렇게 재수가 없냐?”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할까. 현명하게 굳이 말로 꺼내진 않고 새윤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보아하니 허탕 쳤나 보네? 마음에 드는 월세가 없었어?”

유즈리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으적으적 씹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짜증이 났다는 신호였다.

“뭘 보여주기라도 했어야 마음에 드네 마네도 할 거 아냐.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못 보여준다. 아주 개무시만 당하고 왔다.”

사람 패지는 않았지? 진지하게 물어보는 새윤에 유즈리하는 발끈했다. ‘나도 그렇게 분별력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의 말에 긍정하는 대신 새윤은 유즈리하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옷은 뭐,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럭저럭 패스. 나이는 신뢰가 안 가도 어쩔 수 없고. 인상 더러워 보이는 건, 글쎄, 저건 좀 개선의 여지가 있나? 아, 일단은.

“사실 어제 따지고 싶은 게 하도 많아서 말하지는 못했는데 말이야. 너 머리 대체 뭐냐?”

내 머리가 뭐가 어때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오는 유즈리하에 주눅 들지 않고 새윤은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빨간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아무리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두발 자유라지만 그런 현란한 색을 하고 다니면 안 좋은 쪽으로 관심 사는 건 당연한 일이거든? 한국에선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 외모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인간들 많다는 거 모르냐? 지나가던 비둘기도 너 보고 날라리 아니냐고 피해 다니겠다.”

가뜩이나 너 인상도 좋지 않은데, 당연히 그런 사람한테 집을 보여주고 싶진 않겠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넌 보증해줄 사람도 없잖아. 신랄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게 뼈아팠다.

아 그럼 어쩌라고, 심통을 내는 유즈리하에게 새윤은 친구 된 도리로 마지막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좀 얌전한 색으로 다시 염색하고. 욕하지 말고. 인상 쓰지 말고. 정 안 되겠으면 방긋방긋 웃기라도 해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잖아? 다짜고짜 집 보여달라고 하지 말고, 좀 사근사근하게 설명을 하라고. 이 근처 학원 다니는데 학원에서 가까운 월세방을 찾으려고 한다든가.”

“학원 같은 거 문턱도 밟아본 적 없는데.”

“예시가 그렇다는 거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니까 닥치고 새겨들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듯 새윤은 유즈리하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시 책을 펼쳤다. 나 이제 과제 해야 하니까 건드리지 마라. 전공책으로 후드려 맞는 수가 있다.

웃기고 있네, 싸움으론 내가 너보다 위거든. 투덜거리면서도 유즈리하는 그에게 더 말 걸지 않고 폰게임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무리 내가 새겨들으라고 했다지만 이렇게 빨리 바꿔올 줄은.”

“뭐 이 새끼야. 지금 아까워 죽겠는 마당에 도로 염색하라고 말한 장본인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라는 건데?”

새윤은 흥미 가득한 눈길로 유즈리하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뜯어봤다. 유즈리하의 성격을 알았기에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거나, 듣는다고 해도 최소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바로 다음 날에 색을 바꿔올 줄이야.

“근데 그 한 가닥 빨간색 냅둔 건 또 무슨 스타일이야?”

“너무 아까워서 이거라도 남기기로 했다. 왜, 꼽냐?”

쏘아붙인 유즈리하는 빈말이 아니었는지 미련이 남은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나 이거 뿌리 염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런 유즈리하의 징징거림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새윤은 질문했다.

“그래서, 오늘 소득은 있었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유즈리하를 보며 새윤은 딱히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겨우 이틀째에 괜찮은 월세를 찾았으면 그게 더 기적이지. 그럼 앞으로도 잘해봐라. 화이팅.

진심도 성의도 한 톨 담기지 않은 응원에 유즈리하는 새윤에게 베개를 던지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아야 했다.

* * *

“…진짜 뭐가 문제지?”

몇 번의 실패와 보다못해 새윤이 실시한 ‘유즈리하 전용 눈높이 예절 교육’ 끝에 간신히 그에게 집을 보여주는 부동산을 여러 차례 돌았지만 시작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유즈리하는 아직도 새윤의 객식구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윤이나 그의 보호자나 눈치를 주지는 않았고, 유즈리하도 딱히 남의 눈치를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 게 모든 사람에게 편할 테니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보증금과 몇 달 치 월세로 빼둔 돈을 제외하고 잔액이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알바라도 찾아야 할 텐데 당장은 살 집이 급했고, 이력서 주소란에 새윤의 주소를 적어넣는 건 마지막 보루로 두기로 했으니.

살만한 집은 월세가 유즈리하 형편엔 너무 비쌌고, 월세가 싼 쪽으로 찾으면 진정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 의문이 들었고, 적당한 곳을 찾았다 싶으면 아직 일자리도 없는 유즈리하에게 보증금을 배로 요구했다. 돈도 부족하고 인맥도 없는 유즈리하는 이제 짜증을 넘어서 아주 서러워질 지경이었다.

유즈리하는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다가 멈칫했다. 어? 사탕 벌써 다 먹었나? 언제 다 먹었지? 스트레스를 받거나 짜증이 북받칠 때 사탕을 씹어먹는 버릇이 있다 보니 최근 들어 사탕을 배로 빠르게 해치우고 있는 유즈리하였다.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어가던 유즈리하의 시선 끝에 반짝이는 게 들어왔다. 저게 뭐지? 호기심에 돌아본 유즈리하의 눈에 가게 유리창에 진열된 스노우볼이 들어왔다. 늦가을에 접어들었다지만 눈 올 시기는 멀었는데 웬 스노우볼?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즈리하는 기웃기웃 가까이서 창을 들여다봤다.

작고 투명한 플라스틱 원형 틀에 나무로 만들어진 밑동. 그 안에 들어 있는 하얀 소나무와 눈사람 장식 근처에는 반짝이가 잔뜩 쌓여있었다. 고급 퀄리티라고 하기엔 뭣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조잡한 싸구려 장식품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근처에 가격표가 붙어있나 눈을 굴려보던 유즈리하는 고개를 설렁설렁 젓고 발걸음을 옮겼다.

“돈도 없는데 살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도 그다음 날도, 다음 날도 유즈리하는 하루에 한 번은 가게를 지나치며 스노우볼을 구경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집착할 만큼 예쁜 물건이 아니었기에, 무언가 홀린 듯 계속 찾아가 구경하는 이유는 유즈리하도 몰랐다. 그저 문득문득 그런 스노우볼이 있었지, 한 번쯤 흔들어보고 싶다, 생각이 나면 일부러 길을 빙 돌아서라도 가게를 찾아가기를 며칠째.

“새윤의 친구 아니야?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익숙한 이름이 들려 반사적으로 돌아본 유즈리하의 시야에 장신의 남성이 들어왔다. 본래 별다른 일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유즈리하였지만, 이 사람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안녕, 하세요?”

어색한 인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종종 얼굴은 봤다지만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눠보지 않았으니. 그게 특히 자신이 신세 지고 있는 집주인인 이서현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양심은 없다지만 어쨌거나 최소한의 염치는 남아있는 유즈리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모난 안경테 너머로 비치는 서현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먼 친척이라 할지라도 분위기 하나만큼은 새윤과 다르다 못해 정반대였다. 새윤 쪽이 평범했다면 서현 쪽은 지나치게 차갑고 날카로웠다. 같은 색의 갈색 눈이어도 온도 차가 이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자유분방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 유즈리하도 약간은 압도될 정도로.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해 눈과 머리를 굴리던 유즈리하는 그제야 서현의 질문을 기억해내고 대충 진열대 쪽으로 손짓했다. 서현은 진열대에 있는 스노우볼에 잠깐 눈길을 줬다가 의문을 모르겠다는 어투로 말했다.

“스노우볼?”

“그런데, 요.”

“누가 봐도 존댓말이 익숙해 보이진 않으니까 그냥 하지 마. 끝에 의미도 없는 ‘요’ 붙이는 게 더 불편해.”

“…그렇다면야.”

배려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단 철저한 무관심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유즈리하는 개의치 않았다. 서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스노우볼을 쳐다보곤 물었다.

“그런데 저건 왜. 사려고?”

“글쎄. 딱히 살 생각은 없었지만?”

“별로 탐낼만한 물건 같지는 않은데. 스노우볼 치곤 눈이랍시고 만들어놓은 게 눈보단 문방구에서 파는 천 원짜리 반짝이 같기도 하고.”

이 사람, 새윤하고 피가 이어져 있는 친척 맞긴 하구나. 신랄하게 말하는 게 아주 닮은 꼴이네. 유즈리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반짝이는 게 눈 같지 않다면, 별하고 조금 더 비슷하지 않아?”

별로 생각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곱씹어보니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건 유즈리하만의 생각이었는지 서현은 별 헛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 눈썹을 모을 뿐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든지.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간다.”

유즈리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지만, 어차피 둘이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관계는 아니었기에 유즈리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골똘히 고민에 잠긴 듯 유즈리하는 스노우볼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가게로 뛰쳐들어갔다.

몇 분 후 다시 나온 유즈리하의 손에는 반짝이는 스노우볼이 들려있었다.

* * *

스노우볼을 충동구매해 온 유즈리하에게 새윤이 보인 반응은 서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노우볼? 그런 건 갑자기 왜?”

와, 진짜 누가 친척 아니랄까 봐, 투덜대며 유즈리하는 스노우볼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힘으로 반짝이 수십 개가 날아오르고, 다시 하늘하늘, 중력에 의해 스노우볼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새윤은 그 광경을 흥미 없는 눈길로 바라보다 건조한 감상을 내뱉었다.

“딱히 눈처럼 보이지는 않네.”

“혹시 둘이 짜고 치냐?”

황당 반, 진심 반이 담긴 유즈리하의 목소리에 새윤은 아마 서현도 그에게 비슷한 말을 했구나, 생각했다. 하긴 누가 봐도 감성이랍시곤 똘똘 뭉쳐 옛날 옛적에 갖다버렸을 것 같은 서현에게 그 이상의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와 반대로 유즈리하는 그렇게 생기지 않아서 감성이나 낭만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아마도 그런 비슷한 이유로 이 충동구매를 했을 거라 새윤은 제법 정확하게 추측했다.

다시 한번 보란 듯이 스노우볼을 뒤집어서 흔든 유즈리하는 스노우볼을 든 손을 새윤 쪽으로 들이밀었다. 밝은 갈색의 눈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반짝이는 게 별 같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 스노우볼이 아니라 스타볼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법도하고.”

네가 언제부터 영어를 그렇게 열심히 했냐?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러 참고, 어쨌거나 저 자식은 (아마도 웬수가 아니라) 친구가 맞았기에 유즈리하가 말하고자 하는 감성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생각보다 이런 면도 서현을 닮아서 장렬하게 실패하긴 했지만,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니까 새윤은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근데 별이 왜 다 떨어지고 있는데. 별똥별이냐?”

“그거 마음에 든다. 너치곤 정말 괜찮은 생각이었어.”

“그거 무슨 뜻이야.”

새윤의 눈이 세모꼴로 변해 유즈리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즈리하는 스노우볼을 감상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800 페이지짜리 하드커버 교과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걸로 저 (친구는 아닌듯한) 웬수를 한 대 칠까 말까 고민하던 새윤에게 유즈리하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왜, 그 별똥별 떨어지는 걸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잖아? 그럼 여기에도 소원 빌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을까?”

“양심과 인성을 다 팔아먹고 동심하고 맞바꾼 소리 하네. 왜,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어?”

유즈리하는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쟤 왜 저래, 정신줄까지 같이 팔아먹었나? 새윤이 이마를 찡그리자 유즈리하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람인데 왜 없겠어. 소원 같은 거야 당연히 많지?

“적당한 월세 찾는 거라든가, 시급 좋은 알바 자리 구하는 거라든가, 다시는 부모 얼굴 안 보고 사는 거라든가, 사탕 신제품 좀 빨리빨리 들여왔으면 하는 거라든가.”

소소하다면 소소한, 원대하다면 원대한 소원들을 줄줄 읊는 유즈리하의 말투는 가볍고 경쾌했다. 뭐, 그 밖에 기타 등등? 솔직한 진심이 담긴 말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다시 스노우볼을 흔들며 놀기 시작한 유즈리하의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별. 사전에 실려있는 명사의 뜻은 지구와 달, 다른 행성을 제외한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우주상의 천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유성, 즉 별똥별은 지구의 대기권에 돌입한 그 별이 빠르게 낙하하며 가열되어 빛을 발하는 것을 의미했다. 별이 모이면 별자리가 되고, 더 크게 보자면 은하수가 되고.

사전적 의미는 그랬지만, 유즈리하에게 별이란 단순하게 그저 밤하늘에 작게 반짝이는 빛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 더 첨언하자면, 전에 살던 도쿄나, 지금 살러 온 서울이나, 보기 더럽게 어려운 빛무리 정도였을까.

고개를 젖혀 한참 어둑해진 밤하늘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유즈리하는 한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혹시나 싶어 아파트 옥상까지 나와봤건만, 역시나 새까만 장막에 반짝이는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유즈리하는 난간에 아슬하게 기대 밑을 내려다보았다. 하늘과 달리 무수한 빛이 발광하고 있었다. 어째 낮보다 밤이 화려한 나라란 말이지. 유즈리하는 무심하게 가로등과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응시했다. 인공불빛도 빛이라고 하면 빛이 맞았지만, 유즈리하가 보고 싶어 하는 종류의 빛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하긴, 언젠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긴 했던가. 유즈리하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너만큼 세상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며 핀잔을 줬겠지만, 제 딴에는 진지한 고민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유즈리하는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도 그랬고, 그가 처한 상황은 유즈리하가 뭘 오래 고민한다 해서 해결될만한 종류가 아니었던 것도 한몫했다. 가령 가족의 불화라든가, 공부에 관심이 아예 없었단 점이라든가, 비교적 어린 그가 밤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아니꼽게 여기던 사람들이 많았던 현실이라든가.

그때그때 유즈리하는 고민하기보다는 행동하기를 택했다. 가족과 마주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밖으로 쏘다니고, 적당히 졸업할 수 있을 만큼만 학교 공부에 손을 대고, 쓸데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하고 붙어서 싸우고, 패고, 이기고.

어찌 보면 한국으로 갑자기 온 것도 그 습관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했겠다, 이제 집을 나가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나이였겠다. 그럼 이제는? 이제부터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무언가를 깊게 고민해본 적은 적었고, 유즈리하가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을 후회했던 적은 더 적었다. 하지만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유즈리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새윤의 말대로 믿을 구석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한국으로 날아온 것이 미친 짓이라는 건 유즈리하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딱히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 작은 목소리가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진짜로? 한국으로 왔다고 해서 뭔가 달라진 게 있을까? 그냥 일본에서, 늘 살던 대로 사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 좋아한 그 거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이곳으로 온 가치가 있었을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정적 속에서 유즈리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진짜로 별똥별에 빌고 싶었던 소원은. 역시……… 아니었을까.

* * *

떨어지는 유성우에 기적을 빌거나, 생일 케이크의 불붙인 초에 소원을 빌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신에게 기도를 올리거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갈구하는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바람이 당장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낭만을 좇는 면모를 가지고 있던 유즈리하도 그 점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

유즈리하는 눈을 깜빡였다, 다시 집안을 둘러봤다가, 다시 깜빡이기를 반복했다. 이번에 소개받은 곳은 투룸 빌라에다, 조금 낡았지만 크게 고쳐야 하는 곳도 없었고, 동네가 나쁘지도 않았고, 교통도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집주인이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급매로 내놔서 가격도 합리적이었고, 빨리 들어올수록 좋다고 전달받은 터였다.

날이 갈수록 유즈리하의 기대치도 조금씩 떨어져 이젠 비좁은 원룸도 괜찮으니 잠만 잘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환호하고 싶은 마음보다 얼떨떨한 마음이 더 컸다.

“솔직히 이것보다 좋은 조건은 다시는 안 올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바로 계약하는 걸 추천드리고 싶네요.”

옆에 같이 온 부동산 직원이 등을 떠밀지 않아도 유즈리하 역시 이 같은 기회를 잡는 건 힘들 거라 직감하고 있었다. 고민은 짧았고, 유즈리하는 활짝 웃었다.

“바로 돌아가서 계약하면 되죠?”

그날 저녁, 계약서를 팔랑거리며 들이대는 유즈리하에게 새윤이 한 첫마디는, ‘너 사기당한 거 아니지?’ 였다.

이게 진짜? 유즈리하가 억울함에 자신을 째려보든 말든 새윤은 매의 눈으로 계약서를 훑어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멀쩡한 계약서를 들고 왔는데?”

“아, 그렇게 의심되면 직접 가서 보던지!”

새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안 믿는 건 둘째치고 궁금하긴 하니까 내일 가서 봐야겠다. 마침 주말이니 잘됐네. 길 안내해.

이제 더 눈치 볼 일도 없겠다, 유즈리하는 베개를 집어 들고 새윤에게 힘껏 던졌다.

다음날, 방을 보기 전까지도 반신반의하던 표정이었던 새윤은 돌아오는 길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괜찮네. 난 또 네가 바로 잔금 치르고 계약했대서 아주 생각도 겁대가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목돈 걸린 일은 그렇게 처리하는 거 아니다? 집 재점검도 안 해보고 며칠 뒤로 이사 날짜 잡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난 가끔 네가 나랑 동갑인지 위로 띠동갑인지 모르겠더라. 잔소리가 왜 그렇게 많아? 하도 이것저것 확인할 게 많대서 벌써 해가 다 졌잖아.”

유즈리하가 투덜댔다. 새윤은 한심하게 유즈리하를 쳐다봤다. 이게 정상이라고 인마.

“그런데 너 혹시 진짜 그 스노우볼에다가 소원 빌기라도 했어? 이 정도로 좋은 조건의 월세를 찾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너 그런 거 안 믿는다며?”

“믿을 리가 있냐. 그런데 진짜 소원이 이루어진 것 마냥 일이 잘 풀리니까 해본 소리지.”

으음. 말끝을 흐리던 유즈리하는 대답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었던 노을은 짙은 남색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구름 한 점 없네, 감상하던 유즈리하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눈치채지 못하고 앞서나가던 새윤이 돌아보고 ‘안 오고 뭐 해?’ 묻기까지 유즈리하는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 듯, 뒤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너 먼저 들어가! 난 이따 들어갈게!”

“이따 언제, 야!”

새윤이 황당해하건 말건, 유즈리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주말 밤의 공원은 의외로 한적하고 조용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근처에 가게도 편의점도 없는 외진 장소여서 그런지는 몰랐지만. 그러나 유즈리하는 오히려 이편이 마음에 들었다. 때론 소란스러운 곳도 불만 없이 곧잘 다니긴 했지만, 이곳이 한적한 만큼 시비를 털릴 확률은 낮았을 테니까.

덕분에 유즈리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공원의 산책길을 활보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멀리, 계속 어딘가로 가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길이 귀찮아질 것을 알았기에 현재 있는 곳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유즈리하는 인정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유즈리하는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가 진짜로 빌고 싶던 소원은, 역시 나한테 제일 익숙한 그 거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무의식적으로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이었다. 제멋대로 살고, 규율에 얽매이지 않던 과거에 비해, 이제 유즈리하는 진정으로 홀로 서야 했고, 그만큼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그 즐거움과 자유를 포기할 만큼, 자신이 손에 쥐기로 택한 것은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나? 아직도 확실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후회할만한 선택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싫었기에, 마음 깊숙이 다시 밀어 넣어 버리던 의문이었다.

지금에서야 유즈리하는 그 결과를 마주할 수 있었다.

파란만장하고 화려했던 과거만큼은 아닐지라도, 지금의 현재도 나름 좋아할 만하다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미래도 기대해볼 만하지 않겠냐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유즈리하는 그대로 서서 밤하늘을 관찰했다. 아무리 외딴 공원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별의 작은 반짝임을 보기엔 공원의 가로등이 너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별이 그 이상으로 반짝여 눈동자에 비치지 않을까.

이제 슬슬 돌아갈까, 유즈리하가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미세하게 치직거리던 가로등의 소음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 그리고 암흑이었다.

갑자기 뭐지? 정전인가? 갑작스러운 어둠에 익숙해지려 빠르게 눈을 깜빡이고 있던 유즈리하의 눈에 줄곧 찾던 빛이 들어왔다.

하나, 둘. 다섯. 열? 어쩌면 더 많이. 밤 본연의 색채에 물들어 깨어나듯, 별빛이 하나씩 광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즈리하가 숨 쉬는 것도 잊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와중,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하늘 아래로 사라졌다.

어라?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언제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했냐는 듯, 다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흔하디흔한 도시의 밤하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더라도, 이미 본 게 안 본 것이 되는 건 아니잖아? 유즈리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별에 경배하듯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진짜 소원을 빌어볼까.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별이 무수히 박힌 저 하늘 아래, 이 별 내리는 밤에 울리는 정적 속에서.

* * *

그럼 이제 안녕, 사랑했던 그 밤의 거리여.

불안정하고, 때로는 위험했지만

동시에 별처럼 찬란하고 자유로웠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만큼 즐거운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저 별에, 그렇게, 소원을 빌어보자.

When you wish upon a star

Your dreams come true


Written 19-11-14

16954자 (12766)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