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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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 군

소민지는 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얼굴 모를 삼촌은 창가 자리에 앉아있다고 했다. 엄마는 잠깐 전화할 일이 있어서 조금만 이따가 들어갈게. 그 말을 듣고, 민지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 것이다. 명절 연휴의 식당은 당연하게도 만석.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아뇨...... 그 건으로 하죠. 그렇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예, 끊습니다. 연락 주세요."

치켜 올라간 두 눈, 사방으로 비죽비죽 튀어나온 더벅머리, 적당한 구김이 있는 와이셔츠. 초면의 삼촌은 전화를 끊은 후 테이블로 다가온 민지를 바라본다. 가느다란 눈이 호선을 그었다.

"네가...... 민지?"

"어, 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앉아, 앉아."

건네받은 메뉴판에는 코스요리 A니 B니 하는 메뉴들이 약간 비싼 가격으로 나열되어 있다.

"네가 중화요리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음, 좀 넘기면 짜장면이랑 짬뽕도 있어. 근데 누나라면 분명 코스를 시키지 않을까 싶다."

"그럼, 메뉴는 엄마가 오면 고를까요?"

"그러자. 맘대로 시켰다간 분명 화낼 테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호통을 듣긴 싫네......"

종업원이 다가왔다. 일행이 오면 주문하겠다고 하니, 곧 주전자와 잔을 내주었다. 물을 따르려 손을 대니 제법 따뜻하다. 아무래도 생수가 아니라 차라도 되는 모양이다.

진한 갈색을 띠는 차. 고소한 흙냄새가 났다. 무슨 차일까, 궁금해하던 와중 잔을 받은 삼촌이 보이차구나, 하기에, 민지는 연하게 미소지었다.

"엄마랑은 사이가 좋으니?"

"네...... 늘 상냥하시고, 배우는 것도 많고."

"그렇지. 이러저러해도 손에 꼽는 기사니까."

"네에."

잠깐의 침묵. 보이차는 따뜻했고, 약간의 감칠맛이 돌았고, 달았다.

"나도 어렸을 땐 바둑을 했었어. 바둑고등학교도 다녔고...... 누나가 말해줬니?"

"네, 네에. 성적이 좋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돌연 도망쳤다고도 들은 것이다. 민지는 그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가, 어쩐지 무례인 듯하여 가만히 입을 다문다.

"그럼. 좋았어. 그러다가 사건이 하나 터져서...... 바둑에 정이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어때, 무슨 사건인지 궁금하니?"

삼촌은 팔짱을 낀 두 팔을 테이블에 올려선, 상반신을 조금 앞으로 기울인다. 민지는 흘끔, 입구의 유리문을 바라본다.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엄마. 삼촌은 어쨌든 하나뿐인 조카를 상냥하게 대하고 싶은 모양이라, 민지는 작게,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말이지, 그 학교에선 아웃사이더였어. 일반 수업도 경기도 정규 시간 외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서 도화지니 캔버스니 하는 거에 그림만 그려댔거든."

"어, 그래도 되는 거예요?"

"될 리가 없지. 한 명이라도 더 연구생, 프로 리그에 올리기 위해 아등바등인 학교인걸. 하지만 나라서 다들 눈감아 준 거야. 내가 그 학교에 입학한 이래 날 이긴 학생은 없었거든."

민지는 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손을 멈춘다.

대한바둑고. 반상 위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전국의 학생들이 모이는 곳. 올해로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민지 역시 몇 년 뒤엔 바둑고에 들어가리라 생각해 마지않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제 어머니께 면목이 서기 때문에. 네가 힘들면 언제든 다른 길을 모색해도 되니까, 무리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가끔 그리 말씀하셨지만, 당치도 않은 말이라 생각했다. 이제 와서 반상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아니, 도망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왜...... 프로까지 가지 않으셨어요?"

이런 물음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눈앞의 삼촌은 느슨하게 풀어진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사건이 있었다고 했잖아. 고삼 때, 나한테 밀려서 항상 2등만 하던 친구가, 내 방에 침입해서 작품들을 죄다 찢어놨어. 찢긴 도화지가 눈처럼 쌓여있고, 캔버스는 완전히 박살 나 있고."

"세상에..."

"난 정규 수업 외엔 전혀 참여 안 했으니까, 지역 대회 출전권이든 연구생이 될 기회든 전부 그놈한테 넘겨줬거든. 그런데도 한가한 날이면 와서 대국을 두자고 덤비는 거야. 물론 날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연구생 1조까지 되어서 일개 학생한테 진 게 그렇게 분했던가 봐."

"연구생 1조요?"

"응. 2등이라 해도 무려 그 학교에서 2등이니까. 지금은 멋지게 9단까지 승급했어...... 이름은 비밀. 친구의 프라이버시."

"어, 그, 그래서 삼촌은...... 그 사건 때문에 바둑 자체를 그만두신 거예요?"

삼촌, 이라는 단어가 입에 익지 않았다. 겨우, 라는 단어를 겨우 삼켜냈다.

연구생 1단에게 안정적으로 승리할 정도의 기력을 가졌으면서, 고작 제 그림을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바둑을 그만뒀다는 것이 너무나 상식 외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부러운 소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민지도 나름의 공부를 거듭하고는 있지만, 연구생 1조라는 막강한 상대와 대국하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고 마는 탓이다.

삼촌은 아랑곳 않고 개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다.

"응. 바둑은 재밌긴 하지만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진 않았으니까. 난 그림이 더 그리고 싶었어. 그걸 빌미로 그 학교를 자퇴했고, 부모님하고도 절연했고, 악으로 돈 벌면서 미대에 입학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인가? 그런 사건이라도 없었으면 평생 바둑이나 하면서 살았을 거야......"

"지금도 바둑 두세요?"

"응. 가끔 시간 죽이기로. 사람이랑도 두지만 요즘은 Ai가 엄청 세더라. 고민하는 맛이 있겠네?"

"엄마, 삼촌 있잖아요..."

"불편했니? 미안. 그래도 소개는 하고 싶었거든."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건다. 컬이 들어간 짧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민지는 잠시 할 말을 고르다가, 엄마를 따라 안전벨트를 맨다. 혼자 앉기 넓은 뒷좌석엔 조금의 한기가 감돈다.

"아니, 그, 할머니가...... 쉽게 놔 주셨어요?"

"할머니? 아하...... 고삼 때 얘기구나."

"네. 그, 삼촌이 얘기해주셔서...... 할머니라면 절대 안 놔 주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한 바둑의 거인. 지금은 프로 자리에서 은퇴하고, 전국의 기원과 협력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을 쏟고 있다. 민지의 싹을 처음 알아본 사람 역시 그녀였다.

"음, 맞아. 정말 화내셨어. 노발대발하셨지. 제정신이냐고 폭언까지 하셨으니까. 그리고는...... 누나인 나랑 엄마 당신을 이기면 순순히 놓아주겠다고 하셨어."

"엄마랑...... 할머니를요?"

"응. 그래서 어떻게 됐게?"

민지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킨다. 지금 삼촌이 멀쩡히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바둑의 거인과 지금의 여제를 이겼다는 것 아닌가. 민지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여제는 큭큭 웃으며 액셀을 밟는다. 매끈한 외제차가 식당 주차장에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걔...... 날 이겼어. 엄청 놀랐지. 그때의 나도 나름 프로 초단이었는데. 팽팽 놀기만 하던 동생한테 졌으니깐."

"할머니는......?"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바둑고 1등이라 해도 정상급 프로 판에선 놀아보지도 못한 우물 안 개구리인걸."

"아아......"

어쩐지 안도하고 말았다. 민지는 그런 자신을 자각했다.

"그래도...... 배짱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엄마는 도망을 반쯤 허락해주셨어. 물질적 지원을 최소화한 건 최대한의 벌이었으려나?"

여제는 호쾌하게 웃었다. 민지는 가만히 초면의 삼촌을 떠올리다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 진유신

[송, 나 오늘 본가 내려가니깐 당분간 알아서 챙겨먹어]

[ㅇㅋ]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명절 연휴인데도 불구하고, J로펌이 위치한 빌딩의 지하주차장은 삼 분의 이 이상이 차 있다. 정말 멋진 사람들이야. 명절에도 열심히 일하나 보지? 전문직이니깐 원래 그런가? 유신은 휘적휘적 힘없이 걸으며 동생의 차를 찾는다. 반짝이는 은색 아우디. 슬슬 퇴근 시간이니깐, 조금만 죽치면 유선이가 나타나겠지.

아우디에 기대어 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엘리베이터에서 사원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펌 직원일 수도 있고, 같은 빌딩에 입주한 다른 회사 사원일지도. 어쨌거나 그들은 유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지만...... 한 명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신에게로 다가왔다.

"저, 진 대표님 지인이십니까?"

말쑥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키는 백 팔십에, 나이는 삼십 대를 좀 넘었을까. 오대오로 넘긴 머리가 단정한 얼굴에 꼭 어울렸다. 정장 옷깃에서 변호사 배지가 반짝인다. 아하, 유선이 부하 변호사려나?

"응, 언니예요. 혹시 유선이 언제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

"유선...... 진 대표님이라면 곧 내려오실 겁니다. 퇴근 준비를 하고 계셨으니까..."

"하핫, 다행이네. 그럼 그쪽은 대표보다 일찍 퇴근하는 건가?"

"아...... 급한 일이 생겨서요. 십 분 일찍 퇴근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명절인데 급한 일? 큰일이네. 빨리 가 봐요. 바쁜데 얘기해줘서 고마워?"

네, 좋은 명절 되세요. 빠릿한 청년은 급하게 발을 옮겼다. 곧이어 평범한 국산차가 주차장을 나섰고, 유신은 제법 유선이 취향인 남자라고 생각했다. 부하 직원이라니 어쩌면 조만간 결혼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아우디 보닛에 걸터앉아 있으니, 저 멀리 엘리베이터서부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동생의 격렬한 구두 소리. 서류 가방을 한 손에 들곤 제 차를 향해 맹렬하게 걸어오는 중이었다. 유신은 히이, 웃으며 보닛에서 엉덩이를 뗀다.

"명절이잖니~ 본가 가는 김에 좀 태워달라고 할까 싶어서."

"본가는 무슨. 내일 내려갈 건데?"

"에이, 거짓말하지 마. 벌써 엄마아빠한테 전화해서 얘기 다 해놨다?"

"뭔 얘기?"

"퇴근한 유선이랑 같이 내려갈 거라구."

"아, 진짜......"

J로펌의 전 대표변호사─유신과 유선의 아버지는, 건강 악화를 구실로 얼마 전 대표 자리를 완전히 유선에게 일임했다. 그렇게 건강이 나쁘신 것도 아닌데 무슨 엄살이세요 라는 유선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채, 이젠 지방 어드매의 단독주택에서 진 자매의 어머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보 같은 아빠 때문에 할 일이 무지막지하게 늘었는데, 명절이니까 좀 내려오라고? 이, 이 무책임한 인간이!"

아우디에 올라타선 핸들을 쾅쾅 내려치다가, 실수로 크락션을 때려 성대한 경적을 뿜어내고 나서야 유선의 화는 조금 풀린 듯 보였다.

"히히히, 부하들 시키면 안 돼? 그런 거 시키려고 직원들 뽑는 거 아냐?"

"대표가 할 일을 부하한테 시키면 어떡해?"

슬쩍 조수석을 훔쳐 탄 유신은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맨다. 유선은 그 꼴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쉰다. 달궈진 엔진이 작게 그르렁댔다.

"요즘 몸은 좀 어떻고?"

"몸~? 괜찮아, 괜찮아. 꾸준히 약 먹구 있구. 검진도 정기적으로 받구."

"그래? 그럼 됐어."

그리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유신은 멍하니 앞 유리에 흘러가는 도시 풍경을 구경하다가, 어딘가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운전하는 동생의 옆얼굴을 슬쩍 흘겨보다가, 이젠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구경할 거리도 없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가로등. 매연에 물들어 더러운 얼룩이 묻은 가드레일. 그런 교통용 인공물을 괜히 관찰하는 사이, 유신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하얀 병실에 갇힌 나. 정기적으로 면회를 오는 동생. 하루는 동생 혼자서 나를 보러 왔다가, 엄청나게 큰 병원 안에서 길을 잃었다. 알고 있는 건 언니가 있는 건물의 내부 모양 정도. 엉엉 울고 있던 동생을 도와준 사람은 간호사도 직원도 아닌 환자인 학생. 복도를 따라가면 혼자 쓰는 병실이 몇 개 있구요, 정수기가 있구요, 의사 선생님들도 있구요...... 고작 그 정도의 조각난 진술을 듣고, 학생은 동생의 손을 잡은 채 내 병실까지 도달했다.

축 처진 선한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꿈속의 유신은 떠올린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유선이는 마악 울면서 제 침대를 향해 달려왔다. 남자는 문가에 서선 싱글싱글 웃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유신은 그런 하잘 것 없는 추억을 무의식 속에서 되새기면서, 동시에 현재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면서, 순식간에 파멸적인 인생 계획을 고민하면서...... 얇은 시트를 수없이 레이어드하는 케이크 같은 꿈을.

목적지에 도착한 유선이 자비 없이 어깨를 흔들어댈 때까지 만끽했다.

3 윤필규

"추석이라서...... 잠깐 본가에 다녀오려고. 형이 가는 길에 데리러 올 거래."

도진이 그런 말을 한 건 추석 하루 전의 일. 필규는 예에, 하며 대강 대답했지만, 역시 이번 추석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윤씨 일가는 전멸했다.

필규의 친조부모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사망했다. 아버지의 형제는 남동생 하나뿐으로, 그녀는 아내와 함께 사고사했다. 그리고 최근, 부모 역시 비행기 사고에 휘말려 명을 달리했다.

그러니 필규와 서천이 윤씨 집안의 마지막 후손인 셈이다.

이상하게 명이 짧은 집안인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큰 화를 사서, 저주라도 받은 걸까. 필규는 문득 허황된 생각을 한다.

사실 고민의 주체는 필규 자신이 아니었다. 멀쩡히 살던 집을 나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담당 교수와 함께 살고 있는 대학원생 동생을 위한 고민이었다. 부모의 죽음도 다가온 명절도 가족과 연을 끊은 필규에게는 (약간의 감정적 소모는 있겠으나) 그다지 고민거리가 되지 않으므로.

하지만 동생은 부모의 죽음으로 극명하게 달라졌다. 그 정도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동생은 부모가 사라진 첫 명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떻게 해야 버텨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최소한의 보호막을 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 운 좋게도 외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희 엄마는 이제 없지만, 그래도 명절이니 한번 얼굴이라도 비추지 않을래? 하는 권유.

서천은 전화를 받지 않았으므로 (메시지 정도는 가끔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남겼다. 이모가 부르신다고. 같이 외가에 가지 않겠느냐고. 잠자기 전까지도 서천은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필규는 가만히 답장 없는 메시지 방을 바라보다가,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 추석 당일. 클라이언트 미팅은 쉬지만 그 외의 잡다한 업무는 쉬지 않는다. J로펌의 대표변호사 진유선은 출근하자마자 상당히 의외인 발언을 했는데, 오늘은 추석 당일이니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해라 라는 것이었다.

사원의 휴일을 챙겨주는 것은 고맙지만 필규는 가볍게 낙담해 있었다. 동생에게서의 답장이 없었던 탓이다. 분명 메시지는 읽었지만 답장은 없다. 그렇다면 이건 거절 의사로 보아도 좋겠지, 하고. 필규는 독립 후 명절을 챙긴 기억이 없다. 그런 제가 홀로 외가에 간다면 다들 불편해하지 않을까. 이모께 연락을 언제쯤 해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시간은 어느덧 오전 11시 반.

[내 집으로 갈게]

메시지의 발신인을 보고 필규는 두 눈을 의심했다. 서천이었다.

[오전 근무지? 지금 출발할 테니까 끝나면 와]

오전 근무인 건 또 어떻게 안 건가.

어쨌거나 낭보인 것은 틀림없다. 필규는 유선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좀 일찍 가 봐도 괜찮을까요 하고 물었다가, 실실 웃는 걸 보니깐 좋은 일인가 봐? 라는 말을 듣고(미량의 비즈니스용 미소는 있었을지언정 실실 웃지는 않았지만), 겨우 10분 이른 퇴근을 허가받았다.

"여보세요? 방금 토껴놓고 전화는 왜 해?"

"언니분이 진변 차 옆에서 기다리고 계신 걸 봤어."

"언니가?"

"안경 안 쓰시고, 긴 곱슬머리시지? 눈매가 조금 날카롭고......"

"아, 맞네...... 하여간 경우 없는 인간. 고맙다, 끊는다."

전화를 끊고,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필규와 도진이 사는 수도권의 신도시는 서울로의 통근이 용이한 위치였다. 그 덕에 많은 직장인의 베드타운이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린벨트를 잔뜩 낀 탓에 발전이 더뎠고, 결과적으로 인구 분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은 소량의 직장인들에게 단어 뜻 그대로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강남에 위치한 로펌에서 집까지 귀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막히지 않으면 40분 정도. 주 고속도로의 정체를 잠깐만 참고 옆길로 빠지면 유령 도시로의 쾌적한 통로가 기다리고 있는 형태다.

아파트 주차장은 평소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독신자용 아파트인 것이다. 검은색 모닝, 회색 스파크, 그리고 방금 들어온 필규의 국산차. 시선을 조금 돌려 서천의 지정 주차장소를 바라본다. 잘 빠진 검은 스팅어가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테이블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 앞에 앉아 전자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동생. 다크서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두 배 정도 진해졌다. 맞은 편에 앉은 필규는 물티슈를 찾으려 주변을 슬쩍 둘러봤지만, 물티슈는커녕 휴지도 보이지 않았다.

"가는 데 40분. 천천히 나가지?"

희끄무레한 연기가 입을 열 때마다 길게 퍼져나갔다. 미묘한 커피 향이 나는 연기다.

"그래...... 잘 있었어?"

"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묻는 건가?"

테이블을 짚은 팔꿈치에 먼지가 묻었다. 서천은 제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아무런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그게 네 최선의 수였다고 생각하고 묻고 있는 거다."

"아...... 교수랑 동거하는 게?"

말려 올라간 눈꼬리를 살짝 휘어 웃는다.

"그럼, 당연하지. 빨리 칭찬해 봐. 유일한 혈육이잖아?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몇 년 전이었다면 충분히 넘어갔을 법한 유치한 도발.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이런 어린애 같은 싸움을 걸고 있는 동생을 보자니, 역시 안쓰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서천은 대답이 없었다. 궐련형 전자담배를 짓이기듯 힘주어 물어선, 깊게 빨아들인다. 이윽고 짙은 연기가 얼굴을 가렸다.

"병신 같은 꼴이 됐네."

연기가 걷혔다. 침잠한 눈의 서천이 가만히 테이블의 먼지를 쳐다보고 있다.

"병신 같이 살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런 말 하지 마."

"뭘 위해서 이렇게 살아온 건지......"

"네가 작가님한테 준 전자담배 있잖아."

의도적으로 말의 흐름을 잘랐다. 단순한 작전이 효과가 있었는지, 서천은 무심코 고개를 든다. 반쯤 감은 눈으로 필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그게...... 망가졌다. 담배 피우다가 아파트 사람이랑 부딪히는 바람에, 그대로 담배를 떨어뜨리셨어."

서천의 눈이 순간 커졌다. 몇 초간 동그래진 눈을 몇 번 껌뻑, 껌뻑, 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천천히 눈가의 힘을 푼다.

"아...... 뒷조사는 그 배상이었나?"

"응?"

생각지도 못한 지점을 찔렸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와, 필규는 급하게 입을 닫는다.

"작가님 담배를 망가뜨린 녀석한테 배상으로 내 뒷조사를 부탁했군?"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 닥쳐!"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이 유리에 부닥치는 소리. 궐련이 테이블에 나뒹굴었다. 필규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운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건가, 지금?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있다고, 윤서천이......

"내가 어떻게 사는지 그렇게 궁금했어? 이상한 놈 집에 얹혀살고 있을까 봐 전전긍긍한 거야? 이 멍청한 게......"

"그런 게 아냐!"

목소리를 높였다. 텅 빈 집에 작은 메아리가 울렸다. 직후 필규는 후회했다. 소리를 지른 게 너무나 오래전의 일이라,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호통은 아버지의 것을 몹시 닮았다는 사실을.

서천은 입을 막은 채 대단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고정하려 연신 애를 쓰며, 슬랙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급하게 꺼내 들었다. 아주 익숙한 모양의 약이 담긴 작은 통.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한 알을 꺼내어선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련의 행동에, 필규는 잠시 할 말을 잊는다.

"별거 아냐. 안정제야."

삼십 초의 침묵 후에야 서천은 그런 말을 했다. 손바닥 자국이 남은 입가를 억지로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그런 게 아니야? 그 뒷조사꾼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었는데?"

몸의 떨림은 아직 완전히 멎지를 않아서, 문장 중간중간 목소리가 뒤집혔다. 필규는 최대한 듣지 못한 척한다.

"아냐...... 나랑 작가님이랑 그 사람이랑, 담배 사건 이후로 친해져서 술을 마셨어."

서천은 가만히 입을 막은 채 형의 자백을 듣는다.

"과음을 한 거야. 셋 다. 이 아파트엔 내 동생도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을 나갔다. 담당 교수랑 살고 있다는데 소식을 모르겠어서 걱정된다. 그런 말을 한 것 같아. 나는."

"그걸 들은 그 인간이 멋대로 날 뒷조사했다, 그건가?"

"담배 부숴 먹은 값은 해 주겠다고...... 그랬었어. 가물가물하지만."

"하!"

아니,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하나의 요인은 부러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걸 들으면 이 아이는 현재의 동거인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분명 좋은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않겠지. 서천의 사고와 성격을 다각도로 고려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내가 멀쩡하다고 들었어?"

"행복해 보인다고 들었다. 그래서 안심했어. 좋은 사람이랑 살고 있구나 해서."

좋은 사람, 좋은 사람. 서천은 입안에서 조용히 중얼거린다. 둘밖에 없는 텅 빈 집이라, 필규에게도 들리고야 말았지만. 어쨌거나 필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당장 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자신은 없으니. 동생이 행복을 느끼는 상대와 함께라면 그것으로 좋다.

"그래. 좋은 사람이랑 살고 있어. 그러니까 외가에 갔다가 다시 그 사람 집으로 갈 거야."

어린애가 떼쓰는 듯한 말투였다. 필규는 무심코 그렇게 느끼고 만다.

"맘대로 해라. 내킬 때 돌아와. 연락은...... 했으면 좋겠지만 강요하진 않을게."

"......응."

두 사람은 각자의 차를 타고 외가로 이동했다. 십여 년 만에 본 외가 친척들의 얼굴은 상당히 변해 있었지만(순전히 필규만의 감상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윤 씨 가의 마지막 자손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사촌 동생인 유준만이 약간 두 사람을 꺼려하는 듯했다. 필규는 영문을 알 수 없었고, 그것은 서천도 같았으므로 미묘한 거리감이 좁혀지는 일은 없었다.

명절이 끝나고.

서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필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파트로의 외길을 지나치던 와중 서점 2층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쪽 역시 명절을 마치고 돌아온 듯했다. 서점은 어제와 오늘 이틀을 쉬었다.

도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잘 다녀오셨어요?"

"음...... 그냥저냥."

가지각색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썩 괜찮은 명절을 보내신 모양이다.

냉장고 정리를 해야겠다. 필규는 생각했다.

4 한 현

"어, 벌써 가는 거야?"

가게의 셔터를 내리던 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른 낮부터 도진이 편의점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내용물은 잡다한 인스턴트로, 그의 동거인이 본다면 치를 떨며 싫어할 제품들이다.

"네. 오늘이랑 내일 쉬니깐요. 가서 전 부치는 것도 좀 돕고 해야죠. 작가님은?"

"아아...... 우리는 전부 사서 하거든. 그래서 난 내일 가."

"그거 효율적이고 좋은데요. 저흰 엄마가 전통을 고수하셔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명절 잘 보내, 하며, 도진은 아파트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챙겨갈 건 선물세트밖에 없겠지? 장은 엄마랑 동생이 봤을 테니까. 그럼 현은 몸만 가서 일을 도우면 될 일이다. 귀가 때에는 수많은 전리품으로 차가 무겁겠지만.

차에 막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 하던 참에 전화가 왔다. 동생이었다.

"어, 지금 출발한다. 무리하지 말고 귀찮은 건 미뤄두고 있어."

"점심 먹고 오는 거야? 안 먹을 생각하지 말고 먹고 와. 지금 집구석이 난리도 아니니깐."

"알았어, 알았어. 대충 먹고 갈게."

엄마와 동생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 현의 가족은 본래 이곳 토박이였지만(신도시 계획 이전에는 정말이지 깡촌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고. 이러저러한 사정이 겹친 탓에 아빠의 일을 직접 물려받은 현만이 이 도시에 남게 되었다.

엄마는 집 근처 반찬가게에서 주방 일을, 동생은 아마 이 년 전에 수학과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근데 수학을 박사까지 하면 뭐가 될 수 있냐 라는 물음에 안 팔리는 문창보단 사정이 좀 낫지 않을까 라는 장난기 어린 폭언을 들은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아무튼 점심을 먹고 들어오라니 근처에서 대충 때우는 수밖에 없나. 만차인 고속도로를 피해 최대한 사잇길로 돌아가며 고민한다.

거치대의 스마트폰에선 인터넷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조용한 차 안에서 운전하다 보면 어쩐지 졸음이 와서, 일부러 틀어둔 것이다. 스트리머 치고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핑크색 고양이 귀 헤드폰을 쓰고 있다.

"'형 추석인데 본가 안 가?' 공지 안 읽었냐? 어제 방송 쉬고 다녀왔잖아."

약간 궁금했던 지점을 잘 긁어주었다.

이 스트리머는 얼마 전 현이 사는 동네의 독신자용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열성적인 팬은 아니지만 심심할 때 자주 보곤 했으므로, 제법 반가웠다. 도진과도 교류가 생긴 모양이니 어쩌면 자신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시시하고 조그마한 소망을 남몰래 품고 말았다.

'형 세뱃돈줘'

'떡국 안먹음??떡국 안먹음??떡국 안먹음??떡국 안먹음??떡국 안먹음??떡국 안먹음??'

'영도언제틀어형'

'오늘 뭔겜함'

휴일이라 그런지, 명절이라 그런지. 시청자 수가 평일의 두 배가량은 되었다. 그치고는 꽤나 이른 시간에 방송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인산인해로 붐비는 채팅창이 고속으로 움직였다. 어그로용 저가 후원은 멈출 줄을 모른다.

"AltF4는 얼마 전에 했잖아. 유튜브 가서 보고 와라. 항아리 게임? 좀 유행하는 걸 가져오고. 롤 안 해요. 배그는 생각해 볼게요. 도돈파치...... 엑박 연결하기 귀찮은데. 남편 시킬까? 동방 신작 했냐고? 어. 생각보다 너무 쉬워서 조회수가 안 나오더라."

남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땐 놀랐다. 언제부터 인터넷 방송계가 이렇게 개방적이었지? 하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남자 편집자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재미없는 농담에 재미없는 오해가 겹친 사달이었다.

스트리머는 송편을 가져와서 먹기 시작했다. 간식을 먹으면서 오늘 할 게임을 찾을 모양이었다. 그의 주 장르는 STG, 그리고 FPS. 무시무시한 컨트롤을 토대로, 점수 갱신과 압도적 승리를 컨텐츠로 삼는 실력파 스트리머다. 올해로 마흔 줄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피지컬도 뇌지컬도 대부분의 게이머를 압살할 정도.

마흔. 저 나이 먹고도 재밌게 살 수 있구나. 현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다.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하면 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항상 비슷한 일만 하는 하루하루. 더 이상의 성장은 없는데도 시간은 차근차근 계절을 지나쳐 가고. 늦봄이 바로 어제인 듯한데 눈을 뜨니 추석. 잠시 명절의 들뜬 기분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겠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점을 물려받은 것에 후회는 없다. 충분히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호재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약간의 걱정이 앞서는 터라.

"시참 배그 하자고? 이놈들아. 추석인데 게임만 하지 말고 가족들이랑 놀아야지. 오늘은 싱글겜 할 거야. 남편 불러서 2인겜 하라고? 방금 생각났는데, 걔 오늘 본가 내려갔다."

결국 스트리머는 현이 본가에 도착할 때까지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청자 수는 딱히 줄어들지 않았는데, 분명 어른의 노련한 입담이 큰 역할을 한 거겠지. 현은 거치대에서 스마트폰을 뺐다. 점심은 편의점 김밥 두 줄로 대충 때웠다. 트렁크에서 잡다한 선물세트를 꺼내 양손에 들고는, 겨우 1층 현관의 인터폰을 눌렀다.

벌써부터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5 서도진

서가의 명절은 생각보다 단출하다. 명절 당일, 직계 삼 대가 모여 반찬 전문점에서 구매한 제사상을 차리고,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제삿밥을 먹으며 몇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진다. 길게 있어 봤자 오후 다섯 시 이전에는 끝나는 경량 명절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가문 나름의 풍습인 모양이다.

때문에 도진은 명절에 대한 감흥이 없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단순히 잠깐 친척들을 만나 선물세트를 교환하고 식사를 하는 날이라는 인상이다. 병환이 깊었던 시기에는 명절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직계 삼 대. 즉 조부모와 손주까지의, 작다면 작은 바운더리. 도진의 부모님은 정정하게 살아계시고, 하나뿐인 형은 십 년 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러니 이번에 모이는 사람은 총 일곱 명. 명절에 모이는 것치곤 그리 많다고 인식되지 않는 수다.

"삼촌이다!"

"삼춘!"

앞 좌석에 앉은 형 부부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조카들이 달려들었다. 삼촌이야, 삼촌이야. 하여간 형을 닮아(분명 형수도 닮았을 터였다) 활발한 아이들이라, 자리를 옮겨 도진을 가운데에 앉히곤 자꾸만 말을 거는 것이다.

"널 보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삼촌이 그렇게 좋을까?"

"당신도 참. 도진 씨가 애들이랑 얼마나 잘 놀아주시는데."

"삼촌 말랑이 알아요? 아빠가 사줬다요?"

"마, 말랑이?"

"말랑이! 삼촌한테도 하나 줄게!"

"저거 내 거였는데 누나가 뺏어갔다요?"

"내가 언제 뺏어갔어!"

'말랑이' 라는 정체불명의 고무 인형을 손에 쥐고, 말랑말랑 쫀득쫀득한 촉감을 즐기다가, 말랑이 거래니 뭐니 하는 수상한 교환 놀이를 한 시간 정도 하고 나서야 다섯 가족은 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는 부모님께 가볍게 인사를 했다. 지난 설날에도 뵈었으니 꼭 여덟 달 만에 얼굴을 뵌 것이 된다. 도진은 어쩐지 부끄러움과 감사함과 멋쩍음이 황금비로 섞인 감정이 되어, 애매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곤 제사상 차리기를 돕는다.

"삼춘, 아이스크림 가게 가자요."

제기를 옮기는 제 다리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올해로 여섯 살이 되는 장남은 형수를 닮아 눈이 순하게 처져있다.

"아이스크림 가게?"

"그 가게 앞에 말랑이 뽑기 기계 있어요! 아까 오면서 봤어! 창문 밖으로!"

아홉 살 장녀는 벌써 안경을 썼다. 빨간 테 안경 너머에서 뾰족한 눈꼬리가 슬슬 요동쳤다. 아무래도 이미 동생을 꾀어낸 모양이다. 도진은 옆에서 사과를 씻던 형수에게 슬쩍 묻는다.

"저, 그, 애들이 말랑이......? 를, 뽑으러 가고 싶다는데...... 이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 잠깐 데리고 다녀와도...... 될까요?"

"아이스크림 가게?"

형수는 눈동자를 굴려 고민하는 표정을 잠깐 짓다가.

"아아, 무인판매점 말이구나. 응, 괜찮아요. 어차피 안된다고 하면 집에 갈 때까지 투정 부릴 테니깐."

깔깔 웃으며 형수는 핸드백을 뒤적였다. 일순 뭘 찾는 건가, 의아해하던 도진은 형수의 붉은 지갑을 보고서야 손사래를 친다.

"아니, 아뇨. 괜찮아요...... 애들 뽑기가 얼마나 한다고. 오백 원, 그 정도 안 하나?"

"에이, 요즘은 물가가 올라서 애들 뽑기도 비싸."

"에?"

"한 이천 원 정도."

"......다녀올게요..."

양손으로 만류의 제스처를 만들며, 도진은 조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삼춘 아이스크림 먹어요?"

"응, 그럴까......"

"나는 빠삐코 먹을래!"

조카들은 천 원짜리 말랑이 뽑기를 두 번씩 했다. 탱탱볼 같이 생긴 고무 인형을 양손에 쥐곤 이젠 아이스크림에 눈독을 들인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을 보기엔 아직 키가 작아서,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를 하던 일곱 살 장남을 들어 올려 주었다. 보기보다 무겁다. 으윽, 하는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응~ 나는 빵빠레. 초코가 좋다요."

"으, 으응, 빵빠레, 그래......"

장남을 내려주었다. 초코 빵빠레를 쥐여주니, 바로 옆에서 빠삐코를 든 장녀가 눈을 반짝이고 있다. 도진은 슬쩍 냉장고 안을 둘러보다가, 대충 눈에 띄는 하드 아이스크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유명한 빙수 브랜드의 이름이 쓰여 있다.

저마다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돌아가는 길. 도진은 이 거리가 익숙하지 않다. 두 형제가 독립한 후 부모님은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셨다. 둘만 살기엔 너무 넓은 집이니, 차라리 평수를 줄이고 좀 더 번화한 곳으로 이사하자, 라는 게 두 분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확실히 번화한 동네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마트와, 각종 병원과, 다양한 편의시설과...... 있는 것이라곤 편의점과 약간의 노후한 식당뿐인 도진의 생활 반경과는 차원이 다른 곳.

하지만 별로 살고 싶지 않은 곳이다. 사람들의 행복이 너무 노골적으로 흘러넘치고, 거주자도 많고. 시끄럽기도 하고. 이런 곳에서 살다간 뜨거운 양기 탓에 한 달도 가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녹아내리겠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얼마 가지 않아 아파트의 정문이 보여왔다. 무수한 차의 장벽 너머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왜인지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응? 아빠 목소리다요."

"어? 진짜다~! 아빠가 있나 봐."

"아빠?"

"아빠 목소리! 누구랑 전화하구 있나 봐요."

그렇다기엔 전화 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

양손으로 조카들의 손을 잡고 있던 도진이 오히려 끌려가는 모습이 되었다. 반 정도 먹은 하드 아이스크림을 연신 우물대며, 애들이랑 형 먼저 올려보내고 담배 잠깐 피워야지, 그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던 도진이었다.

마지막 차벽을 지났다. 형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금 화난 표정과 목소리. 조카들은 아랑곳 않고 제 아빠를 향해 총총 달려갔고, 형은 제 아이들을 보고 표정을 억지로 누그러뜨렸고, 언쟁을 벌이던 상대는 제 쪽을 바라본다. 혀를 깨물 뻔했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도천영이 차에 기댄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까르르 웃던 조카들도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모양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제 아빠의 소매를 꼬옥 잡은 채다. 형은, 얘들아, 먼저 올라가 있을래? 할머니 할아버지 집 어딘지 알지? 하며 아이들을 올려보낸다. 애꿎은 말랑이만 꾹꾹 주물러대던 조카들은 얌전히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모가 김치를 담그셨대. 우리한테 주고 싶어서 얘를 보냈다네."

대답한 사람은 형이었다. 천영은 마른세수를 몇 번 하다가, 조금은 느슨해진 표정으로 도진을 쳐다본다.

"우리 부모님도 이 근처에 사셔서. 본가 온 김에 심부름 좀 했다."

"아, 그래...... 몰랐네."

시선을 떨어뜨린다. 네모나고, 무거워 보이는 김치통이 두 개.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천영은 우물쭈물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서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실래?"

"아니."

남은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순간 기침이 나올 뻔했지만, 멋지게 참아냈다.

"올라가서 제사 준비 해야지."

"아, 아직 안 지냈구나."

"형한테 못 들었어?"

"방금 왔으니까...... 제사면 금방 끝나지? 기다릴 수 있는데."

"기다리지 마. 바쁜 사람 아냐? 교수면......"

"아니, 휴일이니까."

"가."

일갈하는 말투에, 천영은 흠칫 놀라선 말을 잃는다. 갈피를 잡지 못한 시선이 어영부영 배회하다가, 아스팔트를 향해 떨어진다.

최고로 마음에 드는 표정이다. 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꼴을 바라본다.

"저기...... 사죄라면 나 말고 다른 애한테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걔한테나 하지."

"뭐?"

"기분 나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징그럽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그걸 따질 때야?"

"서도진!"

제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자각했다. 형은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도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벌벌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는, 천영과 시선을 마주한다. 당황과 분노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내세우는 채다.

"말하자면 긴데, 별로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말해."

"싫어."

"말하라고. 너 뭐야? 내 뒤 캐고 다녔어?"

"우연이야. 나도 딱히 알고 싶지 않았어."

"우연은 무슨 놈의 우연!"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주먹을 꽉 쥔 천영의 손. 분을 참지 못하고 바르르, 떨리고 있다.

"정말 우연이고, 남한테 얘기할 생각도 없어."

"지금 얘기했잖아."

"세세한 것까지 다 얘기할까, 지금?"

천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를 꽉 깨물었다. 볼 근육이 흉하게 경직된다.

그러나 일순 길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화를 억누를 생각인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몇 번을 더 쌕쌕거리다가, 흐린 실핏줄이 보이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본다.

"화내서 미안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나중에......?"

말끝을 올리는 비난조의 물음. 천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네가 대화할 생각이 들었을 때 말이다."

도진이 말을 않고 있으니, 천영은 메마른 입술을 몇 번 핥다가 말을 잇는다.

"나는 언제나 너한테 미안하고,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지금은 좀 안정되어 보여서, 얘기를 해 보려고 했던 거야."

도진의 눈꼬리가 움찔댔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긴 편이다.

"미안하다. 아직은 시기가 아닌데 멋대로 찾아와서. 사죄 운운한 네 말도 맞다. 그동안 너한테 멀쩡하게 사과할 기회가 없었어. 그래서, 확실히, 대체할 녀석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만."

잠깐 숨을 골랐다. 제 뺨에 손을 올려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는,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본다.

"그게 너에게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이유 하나로 그 애랑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천영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들었다. 기대어 있었던 차의 헤드라이트가 일순간 번쩍였다. 검은색 아반떼다.

"그러니까...... 나랑 얘기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가볍게 손을 들어 앞 유리 너머로 무언의 작별 인사를 남기고는, 천영은 그대로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갔다.

명절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말 많던 조카들은 종일 노느라 지쳤는지 귀경길 10분 만에 잠들어버렸다. 도진은 뒷좌석 바닥에 떨어진 말랑이들을 주워 도어트림에 넣어둔다. 형 부부는 많은 대화가 없었고, 도진을 향한 대화 역시도 없었다.

도진이 사는 독신자용 아파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도진의 짐을 트렁크에서 내린다. 형수와 조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형은 도진을 따라 내렸다. 집 앞까지 짐을 같이 옮겨줄 모양이다.

"도진아."

"응?"

"아직도...... 싫지? 천영이."

잠깐의 침묵. 도진은 입안에서 말을 고른다.

"좋진 않지."

"그렇겠지?"

"그래도 가끔 이런 생각은 해."

"응?"

"형 때문이 아니었어도, 난 분명히 멀쩡하게 살진 못했을 거라고."

"그건......"

"나라는 대형 지뢰에 운 나쁘게 형이 걸려든 거라고......"

도진은 흐리게 미소지었다. 형은 가만히 그런 도진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껴안는다.

익숙한 체온, 익숙한 체취, 익숙한 포근함.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네가 무슨 지뢰니."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가. 엘리베이터 다 왔으니깐."

"잘 다녀오셨어요?"

"음...... 그냥저냥."

도진은 끙끙대며 보따리를 부엌으로 옮겼다. 필규가 옆에 앉아 내용물을 꺼냈고, 이 많은 명절 음식들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석...... 어땠어? 특선 영화 본 거야?"

"아뇨. 아까 외가에 다녀왔어요."

"외가...... 으응."

"윤서천이 잠깐 왔었거든요. 같이 갔다 왔어요."

"어, 걔가?"

"네. 다시 서울로 돌아갔지만."

"서울로, 그래......"

도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냉장고 정리에 여념인 필규가 제 표정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추석은 끝났다.

당분간 가족을 볼 일은 없다.

주머니에서 고양이 모양 말랑이를 꺼냈고, 필규는 그게 무엇이냐 물었고, 도진은 말랑이라고 대답했다.

"엄청나게 단순한 작명이네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엄청나게 단순한 잘못은 슬슬 용서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도진은 말랑이를 양손으로 주욱 늘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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