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샘연담
주상복합 빌딩의 지하 주차장. 윤필규는,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쏟아진 일거리를 겨우 수비해낸 후 동거인을 픽업하기 위해 기다리던 참이었다. 아는 작가님들이랑 모임이 있어서───라고는 했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그 호러 작가와 SF 작가를 만나러 가신 거겠지. 동거인의 적은 인간관계라면 이미 완벽하게 파악해둔 채다.
SF 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고, 애인도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호러 작가다. 동거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내 작가인데다, 영문 모를 이혼 경력까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먼 천안에 살면서 틈만 나면 제 동거인을 불러내는 꼴이, 필규에게 있어서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진도 그 옆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영부영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데리러 온 사람이 있다며? 글쎄요, 어디에 있으려나...... 하는 희미한 목소리와 함께), 필규는 에스코트를 위해 운전석에서 나왔다.
"작가님? 그리고...... 유진 작가님."
두 '작가님'의 톤이 명백히 달랐으나, 일단 도진은 알아채지 못한 기색이다. 어딘가...... 취해 있었다. 이상하다, 라고 필규는 생각한다. 소주 서너 병도 물처럼 드시는 분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무심코 유진을 쏘아본다. 왼눈을 가린 호러 작가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할 뿐이다.
"오랜만이네요, 편집장. 출판사...... 그만 뒀다고 들었는데."
"아아, 네. 어쩌다 보니 이직을 하게 되어서. 그나저나 강 작가님은?"
"음───오자마자 한 턱 쏘시더니 가 버리셨어요. 오랜만에 한국에 오니 할 일이 많으시다면서. 뭐, 덕분에 저랑 도진이는 제법 괜찮은 스테이크를 얻어먹었고...... 와인도 마셨죠."
그리 말하며, 유진은 동업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도진도 그런 스킨십이 영 싫지는 않은 눈치다. 별안간 단전에서 무언가 불쑥 솟는 기분이 들어, 필규는 티나지 않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유진 작가님도 와인을? 대리운전 부르셔야겠네요."
"아, 아뇨. 차 끌고 나왔으니깐 안 마셨죠. 도진이만 마셨어요. 술 엄청 잘 먹네. 신기할 정도로."
"아이, 그냥...... 분위기를 타서......"
"분위기───?"
뒤집힐 뻔한 목소리의 끝을 겨우 가라앉혔다. 도진은 시시덕대는 말투로,
"유진 작가님이, 그, 신작 단편을...... 나한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다고...... 아, 엄청 재밌었어요. 나중에 어디 실으시면...... 꼭 연락......"
"하하, 그래. 당연히 연락해 줘야지. 무려 감수까지 해 줬잖아."
"감수───? 하아, 아까부터 작가님들만 아는 이야기를."
"너무 우리 이야기만 했나? 그치만 대단하고 재밌는 친구예요, 도진이는."
"그건 제가 더 잘 압니다."
"아아, 편집장 씨. 나이를 먹더니......"
유진은 입가에 손을 올리더니, 가볍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아, 오늘은 수염을 밀었구나. 필규는 문득 눈치챈다. 어쨌거나 그 말의 함의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모호한 감각이라.
"아무튼 어서들 가 봐. 편집장, 도진이 잘 챙겨요. 아직 머리가 덜 식어서 헛소리를 할지도 모르니깐."
유진은 도진을 필규의 쪽으로 밀어낸다. 힘없이 비틀대다 필규의 양 손에 어깨를 잡혀서야 멈춰선 도진은 여전히 얼굴이 발개선 어찔어찔한 채다.
스텝이 꼬여 휘청대는 동거인의 가슴께에 팔을 감아 부축했다. 평소보다 몸이 뜨겁다. 확실한 체온 측정을 위해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대니 하는 소리라는 게, "아아, 밖에선 안 돼......" 기가 막혀선 그대로 조수석에 작은 체구를 구겨넣어주었다.
"저 없었으면 어떻게 귀가하시려 했어요?"
"유진 작가님이 태워다 주신다고 했어......"
"하하. 사이 좋으시네."
"그럼~"
박박 긁히는 상대의 마음도 모르고 아주 해맑다. 시동이 걸린 차가 우르릉 하는 엔진음을 냈다.
"얼마나 마시셨길래 그렇게 떡이 되신 거예요?"
고속도로 하행선. 차가 없진 않지만 그렇게 막히는 것도 아니다. 지루한 아스팔트길을 주행하고 있으니, 꾸벅대는 도진의 모습이 차창에 반사되어 시야에 들어온다.
"아, 아니, 별로 안 마셨는데......"
"와인? 몇 병?"
"나 혼자...... 한 병."
"거짓말 치지 마세요. 와인이 무슨 40도씩 하는 것도 아닐 텐데."
"거짓말 아냐...... 아까부터 너, 너무하네."
"아까부터 너무한 건 작가님이시고요."
"내가 뭘───했는데......"
"정신적 불륜───?"
"너 진짜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 술 마셨어?"
"나이를 먹어서 그래요."
"유치해졌구나. 변호사야......"
필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었으므로.
흐린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단순히 멍을 때리는 것에 가깝다) 도진은 슬쩍, 시선을 백미러로 향한다. 무표정한 필규의 얼굴이 보였고, 왜인지 조금은 술이 깬 기분이 드는 듯도 해서.
"동서남북 놀이를 했어."
"동서남북?"
"응. 그, 색종이로 접는 거 있잖아."
"손가락 네 개 넣고 접었다 폈다 하는 거 말이죠."
"내가 동쪽, 유진 작가님이 서쪽."
"방위랑 횟수를 정하는 거 아니에요?"
"동이랑 서는 맞은편이니깐, 횟수는 한번만 정해도 돼."
"아직 취하신 거죠? 역시."
"아마도......"
"얼추 다 왔어요. 네비게이션 보이세요? 3km만 더 가서 나가면 되니까."
"강 작가님이 있었으면 내가 취할 일은 없었는데......"
"강 작가님은 또 왜요?"
"똑똑하신 분이잖아? 물리학, 박사, 대기업."
"이제 2km 남았어요."
"아닌데, 1.87이라고 써 있는데."
"술 냄새 나니까 몸 앞으로 빼지 마세요."
지하주차장에서 상승하던 엘리베이터는 돌연 1층에서 멈추었다. 도진은 아직도 얼굴이 발개선 아찔대는 채라, 어쩔 수 없이 필규에게 반쯤 매달려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자마자 휙 몸을 물리다가 반대편 벽에 머리를 찧었다. 문이 열린 건 그와 동시였다.
"이야, 뭐야. 술을 많이 자시고 오셨나봐."
"아, 아아,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새로 이사 온 남자였다. 대충 기른 머리칼은 목덜미를 넘어 어깨까지 닿는 정도. 나이는 도진과 비슷할까. 날카로운 눈꼬리 탓인지, 마른 몸 탓인지, 제법 까탈스러운 인상을 주는 중년 남성.
"옆엣분은...... 누구?"
엘리베이터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뜯어보는 그 눈길에, 필규는 미묘한 불쾌감을 느낀다.
"아는 동생이요. 이 사람, 집에 데려다 주려고."
"아하항. 시간이 늦었는데 고생하네?"
"그럼요."
"자고 가는 거야?"
"주말이니까 그럴 수도 있고."
"하하하항."
경박한 웃음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거슬리는 일이 많네.
피로하긴......
엘리베이터가 첫 번째 목적지에 정차했다. 9층, 두 사람이 사는 곳. 신원 불명의 중년은 아무래도, 두 층 위에 사는 모양이었다. 11층 버튼이 붉게 점등하고 있었으므로.
"거짓말을 정말 못 치는구나, 청년."
짜증 섞인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내가 얘기 안 했었나? 전에, 저 사람 집에 가 본 적이......"
"네, 얘기 안 하셨죠!"
"아하하하하, 그랬어? 미안해라......"
침실─겸 옷방. 필규는 도진의 환복을 돕고 있었다. 도운다기보단 마구잡이로 옷을 벗겨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얇은 티셔츠 한 장조차 벗지 못하고 휘청대는 꼴을 도저히 가만 둘 수 없었던 탓이다. 상의를 벗기고, 조금 짧은 기장의 바지를 벗기고, 이런 계절에는 겨우 두 꺼풀만 벗겨도 오롯한 맨몸이 드러난다.
"추워, 그렇게 막 벗기면."
"그럼 옷을 입으세요. 집에서 입는 옷을."
"아하하하하, 입히려고 벗겼던 거야?"
도진이 길게 팔을 뻗었다. 포옹은 빨랐다. 제법 키 차이가 있어 겨우 상반신을 끌어안는 모습이 되었지만,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체중이 실리니 역시 필규마저 휘청대고 마는 것이라.
"아...... 다음부턴 밖에서 술 먹지 마세요."
몸이 얽힌 채 침대에 쓰러졌다. 도진은 몇 번을 더 아하, 하고 웃다가, 느리게 상반신을 세워 셔츠의 단추를 끌러낸다. 얌전히 묶어내린, 길고 곱슬대는 머리칼이 필규의 볼을 간지럽힌다.
"아냐, 아냐. 오늘만 머리를 좀 써서 그런 거야."
"동서남북 놀이에───?"
"맞아. 똑똑해. 맥락을 잘 읽어, 필규."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데, 우리 대화에 맥락이라는 게 있었어요?"
"숨 좀 천천히 쉬어. 단추 푸는 데 방해 돼......"
"전 혼자 갈아입을 수 있으니까. 가서 씻으세요."
"나는 그냥 벗기고 있는 건데."
"하아......"
"와, 오늘은 오른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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