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22

문호 스트레이 독스 -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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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리는 게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즐거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어쩐지 영 익숙하지 않았다. 아쿠타가와와 유노는 이런 상황에서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찌푸린 인상은 펴지지 못한 채 무어라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는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밝은 빛에서 멀어지기 위해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등 뒤에서는 놀이동산의 전체 구조를 간략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이 있었다. 유노는 제 옆에 있을 아쿠타가와를 바라보았다. 짧은 한숨을 곁들이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약속 장소가 여기인 건 확실해?”

“그렇다.”

“그래… 뭐, 위에서 하는 말이니 우린 잠자코 듣기나 해야지. 그나저나 이런 임무에 너까지 올 줄은. 보나마나 다른 거 하겠다고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듯 말하는 유노의 말투가 그리 달갑지 않은 걸까. 아쿠타가와는 슬쩍 유노를 노려보았다. 매서운 눈빛은 누구나 숨을 삼킬 정도로 날카로웠으며, 심신이 약한 이라면 겁을 먹을 만했다. 문제가 있다면 유노는 이런 아쿠타가와의 눈빛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비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올 줄은 몰랐다. 오늘은 꽤 바쁘다고 들었는데?”

“다른 곳이면 모르겠지만, 여기는 아무래도 미아가 될 거 같아서 말이지. 꽤 시끄러웠다고.”

“미아라고? 소생이?”

미약하게 스쳐 지나가는 불쾌함. 아쿠타가와는 저렇게 말하는 유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찌푸린 미간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유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으며 아쿠타가와의 이마를 콕 쳤다. 무척 가벼운 손길이었다. 아쿠타가와는 그 사소한 행동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맞았다.

“이래서 어린애야.”

유노가 작게 말했다. 아쿠타가와는 유노의 손길이 거쳐 간 부위를 매만졌다. 아프지 않았다. 애초에 아프라고 때린 것도 아니다. 유노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아쿠타가와는 그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투덜거림을 속으로 삼켰다. 유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봤자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임무는 간단했다. 어느 모 비공식 이능력 단체가 있었는데, 거기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며 돈을 벌며 세력을 넓혔다. 최근에 감히 넘보아서 안 되는 것까지 탐내고 있다는 소식에 모리 오가이는 두 사람을 부르며 친히 말했다.

슬슬 싹을 잘라낼 시간이지 않겠나.

그 한마디에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직한 부하의 답변에 만족스럽다는 듯 모리가 웃었다. 이후 두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체적인 안내를 들었다. 싹을 잘라낸다. 지극히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이능력 단체를 없애버려라. 그걸 순화해서 말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런 임무에 익숙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무를 받아들였다.

설마 그 장소가 놀이동산일 줄은 누가 알았을까. 아쿠타가와와 유노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가 들었던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부하는 머뭇거리면서 제대로 놀이동산임을 언급했다. 세상에. 도대체 어떤 불법 단체가 놀이동산에 아지트를 만드는 거야. 포트 마피아도 떡하니 거대한 빌딩에 본사를 차리고 있으니 할 말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이능력은 개인이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지만, 그만큼 눈에 띄기 쉬웠다. 유노는 도무지 적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쿠타가와는 그 중얼거림에 공감했다. 미약하게나마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놀이동산이라는 장소의 특수함으로 많은 이를 끌고 갈 수 없었다. 유노는 능숙하게 히구치를 비롯해 검은 도마뱀에게 대기할 걸 권했다. 아쿠타가와는 미리 놀이동산의 구조를 파악했다.

얼추 합이 맞는 상대이니 다행이려나. 유노는 아쿠타가와가 미아가 되지 않도록 잘 챙겨야 한다며 다짐했다. 자신이야 그럭저럭 얌전한 축에 속해도, 아쿠타가와는 전혀 아니니까. 이미 복장부터 놀이동산에 어울리지 않은 행색이었지만, 이건 이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응?”

“왜 그러냐.”

“저기. 다자이 아냐?”

유노는 문득 제 시야에 들어오는 키 큰 사내를 발견했다. 비록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연갈색 코트를 입은 이는 드물었다. 하물며 코트 소매로도 가려지지 않은 붕대까지 있다. 아쿠타가와는 유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두 눈이 커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걸 본 자의 눈빛이었다. 유노는 불길함에 아쿠타가와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림자를 움직였다. 아마 3초 뒤,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벌어질 거다.

1, 2, 3.

정확히 3초 만에 아쿠타가와는 다자이를 향해 달려들 듯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노의 이능력으로 인해 저지되었다. 아쿠타가와는 유노를 향해 소리쳤다.

“이거 놔라!”

몇 번이고 발버둥 쳤음에도 아쿠타가와의 완력으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아쿠타가와는 약하게 태어난 탓에 완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유노는 고개를 저었다. 저럴 줄 알았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쿠타가와는 다자이를 향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애증인지, 아니면 인정 욕구인지. 어느 쪽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쿠타가와는 여전히 악을 쓰며 유노에게 말했다.

“저기 다자이 씨 옆에 네 놈의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가?”

“아.”

이건 좀.

유노가 아쿠타가와의 행동 범위를 쉽게 예측하듯, 아쿠타가와도 유노를 잘 알았다. 어찌 말해야 유노를 자극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유노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며, 저를 붙잡았던 그림자의 손길이 약해졌다. 그래, 이래야지. 아쿠타가와는 만족스럽다는 듯 유노를 향해 미소 지었다. 황급히 다자이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

‘어째서 다자이 씨가 여기에.’

저처럼 임무를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아쿠타가와는 잠시 여기가 놀이동산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혼자도 아니고, 유노의 언니까지 있다면 답은 하나였다. 데이트. 다자이는 예전부터 노는 걸 좋아했다. 어린애처럼 장난스럽게 굴면서도 그 내면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적어도 아쿠타가와의 눈에 그리 보였으니까.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우선 일이 먼저인 건 알지?”

“어.”

“그 후에 또 마주치면 그땐 말리지 않을게.”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말하는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다자이는 임무를 내버려 둔 채 저를 향해 달려드는 부하를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자이의 인정을 받으려면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박차고 달려갔다. 놀이동산이라는 크고 넓은 곳의 특징상 적의 위치를 확보하는 게 우선적이었다. 여러 번 팔다리를 잘라내는 것보다, 머리 한 번을 잘라내는 게 더 효과적이듯.

‘좀 이상한데.’

유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바글바글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적어졌다가, 다시 많아졌다. 유노는 혹시 적의 이능력이 발휘되는 곳이 아닐지 추측해보았다. 일정 구역에 쉬이 접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이 근처에 누군가가 있음을 짐작했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

“이런.”

한편, 다자이는 체리와 함께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임무를 위해 온 저쪽과는 달리 이쪽은 순수한 데이트였다.

다자이는 최근 들어 바빠서 체리와 어울리지 못했다. 체리는 무척 화가 난 탓에 다자이와 제대로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다자이가 여러 번 거듭 사과하며 미안하다고 놀이동산 티켓을 꺼내기 전까지는. 체리는 제 눈앞에 휘휘 움직이는 티켓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게 사르르 녹았다. 마침 체리는 놀이동산에 가고 싶었고, 다자이는 그 순간을 재빠르게 눈치챘다. 비록 티켓의 이용 기한이 촉박했지만.

놀이동산에 도착했을 때 체리는 저가 화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다자이는 그런 체리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옅게나마 올린 입꼬리에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무엇을 탈지 고민했다. 다자이는 체리의 의견을 존중하며, 원하는 걸 다 타라고 말했다. 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탈 기구를 고민해보았다. 타고 싶은 건 많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가이드 북을 펼친 채 열심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탈 놀이기구를 얼추 골랐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싶어, 무섭거나 스릴이 넘치는 건 제쳐두었다. 자연스레 선택지가 팍 줄어들었다. 얼추 이거 타고 저거 타고 마지막으로 관람차를 타면 완벽하겠지. 체리는 제가 세운 계획에 만족하며 다자이를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다자이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평소라면 모르겠으나, 놀이동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다자이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체리가 알면 당혹스러워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저들도 이미 온 것을. 순간적으로 유노와 눈치 마주쳤다. 다자이는 싱긋 웃은 뒤 회전목마가 있는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아마 아쿠타가와 군이랑 유노가 온 모양이야. 참, 빠르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왜?”

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자이를 보았다. 그가 아무리 실없는 농담을 일삼아도 때를 구별할 줄 알았다. 다자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까 유노와 눈이 마주쳤는데 곧바로 오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겠지.”

“여기에서? …하. 그래, 뭐 둘이 알아서 하겠지.”

즐겁게 놀이기구를 타며 보낼 생각이었는데. 체리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이 있는 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자이와 체리는 놀려왔으며, 저쪽은 일하러 왔다.

“부디 두 사람이 놀이기구를 망가트리지 않았음 좋겠군.”

“그러게 말야.”

체리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워낙 한 번 임무에 나갔다가 잔뜩 부수고 온 전적이 많아서 말이지. 도무지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자이는 체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제 머리를 만지는 다자이의 손길은 썩 나쁘지 않았다.

*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빨리 처리하고 가자.”

“그래.”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던가. 유노는 아쿠타가와와 다시 합류했다. 아쿠타가와는 높이 뻗은 전망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건물을 발견했다. 허름한 건물 옆에는 접근 금지 표지판과 함께 묵직한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여기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쿠타가와가 라쇼몽으로 자물쇠와 문을 동시에 부수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밑으로 내려가니 넓은 터널 같은 공간이 둘을 맞이했다. 그래. 불법적인 일과 더불어 포트 마피아 눈에 걸릴 정도라면 이정돈 아무렇지도 않겠지. 아쿠타가와는 마침 지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노는 어둠을 다룰 줄 알았다. 저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능력이었다.

“연락은?”

“들어오기 전에 했어.”

“언제나 믿음직하군.”

서로 안 맞는 거 같으면서도 이럴 땐 죽이 척척 맞았다. 아쿠타가와는 몇 번 기침을 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부터 라쇼몽과 빛에 버림받은 아이가 힘을 발휘할 때였다.

*

어느덧 제 차례가 돌아왔다. 다자이는 마치 공주님을 에스코트하듯 체리를 말 위에 태웠다. 체리는. 체리는 익숙하다는 듯 다자이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아마 태연한 겉과 달리 속은 무척 당혹스러워 하겠지. 체리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얼굴의 열이 오르지 않도록 주의했다. 다자이는 그런 체리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잡고 있었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뒤 유유자적 체리의 뒤에 있는 기구를 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체리는 제 뒤에 있을 다자이를 힐끗 노려보았다.

‘또 나 몰래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거야?’

다자이는 종종 체리에게 잘못할 때마다 달콤한 행동을 곁들었다. 가히 유혹이라고 불려도 좋았다. 유혹은 단단했던 체리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아마 저에게 잘 먹힌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하겠지. 체리는 새삼 저를 잡았던 다자이의 손을 떠올렸다. 남자답게 뼈대가 굵으면서도, 궂은일 한 번 해본 적이 없다는 듯 부드러웠다. 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 놀려왔는데, 다자이 생각만 하고 있다. 이게 뭐람. 체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체리가 일희일비 할 동안 다자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체리를 의도적으로 놀릴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저를 향해 숨겨지지 않는 애정을 볼 때마다 속이 간질간질했다.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의 유일무이한 빛. 아마 체리는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다자이는 나름대로 그를 아끼고 있었다. 그만큼 특별했기에.

기구가 천천히 움직였다. 회전목마는 지극히 단순했다. 말이나 마차에 탄 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 뿐이다.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회전목마를 타냐고 묻겠지만. 딱히 재미를 추구하지 않거나, 조금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는 최고였다. 두 사람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필요할 때였다.

말에서 내려올 때도 다자이는 체리를 부드럽게 안으며 내려주었다. 발이 땅에 닿았다. 회전목마를 탈 때마다 생각했지만, 오늘 다자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다자이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속이 답답한 적은 많았지만. 아마 오늘이 최고치에 달할 거다. 다자이는 체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아주 어릴 적에 이렇게 공주님 손을 붙잡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꿈꿔왔지. 이제야 이뤄져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되는지 몰라.”

“놀이동산에서? 그럼….”

“물론 농이라네.”

체리는 순간적인 분노를 참아내지 못했다. 다자이는 제 허리 부근에서 강렬히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자세가 무너졌다. 허리를 매만지며 체리를 보았다. 체리는 기껏 다자이가 깊이 묻어두었던 옛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기에,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때릴 수 있었다. 다자이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내 삶이 거짓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겠지. 목표를 정해놓고 달려가는 이들과 비교하면, 나는 시작부터 잘못된 셈이니까.”

“다자이는 이래서 싫어.”

체리의 말에 다자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밝은 대낮임에도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주변 소음에 묻혀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투정임에도, 다자이는 똑똑히 들었다.

“나는 다자이의 모든 걸 알고 싶은데, 넌 항상 날 밀어내. 그게 싫어.”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난 지금이 아니면 의미 없어.”

평행선 같은 대화가 오갔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저 움직인 건 다자이 쪽이었다. 다자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체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언젠간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나?”

“약속해.”

“그래, 약속하지.”

의미 없는 약속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단순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아도, 체리는 차마 다자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질척했던 감정이 수면 위에 드러났다가 다시 숨었다. 다자이는 그런 체리가 진정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다독여줄 뿐이다. 제가 잘못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지만, 그래도 섣불리 과거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저조차 제 과거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체리는 가능하기나 할까. 무척 가까운 사이여도 말 한마디에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다자이는 체리가 저에게서 멀어지는 걸 두려워했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상태가 쭉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약한 소리는 못 하겠지.’

체리에게 보이지 않았던 씁쓸한 미소가 다자이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

그 뒤 두 사람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놀이동산을 돌아다녔다. 이따금 땅 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마 이 밑에서 잘하나 보네. 다자이는 그리 생각하며 체리를 보았다. 다행히 체리는 울지 않았다. 단지 속상하다는 듯 잠깐 투덜거렸다가 다시 놀이기구에 집중했다.

마치 컵처럼 꾸며진 기구에 탔다. 두 사람이 족히 앉고도 넉넉한 컵 안에는 동그란 핸들이 있었다. 체리가 핸들을 돌리자, 컵이 제자리를 돌았다. 회전 컵에서 내렸을 때 둘은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잠시 휘청거렸다.

“너무 돌렸나?”

“그런 거 같네. 다음에는… 저거 어떤가?”

다자이는 회전 컵 근처에 다른 기구를 가리켰다. 딱 두 사람이 앉으면 적당한 크기의 기구였다. 놀이동산에 기구는 대부분 회전했으며, 생김새만 조금 다를 뿐이었다. 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던 도중,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전망대가 보였다. 전망대. 나중에 가기 전에 여기 광경을 눈에 담아보고 싶었다. 체리가 전망대를 빤히 바라보자, 다자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 쉬어갈 겸 저걸 탄 후에 전망대에 가는 건 어떤가.”

“그럴까?”

“그럼.”

다자이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체리가 웃었다. 서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 순간이 좋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놀이기구까지 탄 후, 전망대를 올라갔다. 전망대에서는 놀이동산이 한꺼번에 보였다.

“다자이 씨.”

“이런. 벌써 와 있었나?”

어느새 아쿠타가와가 유노가 전망대 안에 있었다. 몇 번 놀이기구를 타고 오니 임무를 다 끝낸 모양이었다. 체리는 제 동생을 빤히 보았다. 살짝 엉망이 된 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해주었다. 유노의 얼굴에서 미세한 기쁨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체리는 피가 안 섞인 제 동생이 이럴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비록 놀이동산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도 다른 방식의 추억이니까.

어느덧 화창했던 낮이 저물었다. 차츰 주황색으로 물들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넷은 약속했다는 듯 관람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 사람이라면 관람차도 충분했다. 다자이의 옆에는 체리가, 아쿠타가와의 옆에는 유노가 앉았다. 유노는 두 눈을 빛내며 바깥을 보았다. 아쿠타가와는 팔짱을 낀 채 다자이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저리 하는 건지. 이따금 두 사람을 보면 꼭 제 자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집만 잔뜩 큰 아이 같은 행동을 보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관람차가 위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놀이동산을 넘어, 저 멀리 뻗어진 요코하마시의 건물까지 보였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별과 함께 타이밍 좋게 터지는 불꽃놀이. 요란한 소리를 시작으로 여러 색과 모양으로 꾸며진 불꽃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아름다움을 넘어 쉽사리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거다.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네 사람은 그리 생각했다. 어느덧 가장 높은 곳까지 도달했다가 관람차가 천천히 내려갔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밤하늘과 불꽃놀이를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아, 즐거웠다.”

체리가 두 손을 위로 뻗으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관람차 안에서 앉아있느라 뻐근했던 몸이 한결 나아졌다. 낮에 울적함은 어느새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다지 많이 즐기지 못했지만, 아쿠타가와랑 유노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에는 제대로 넷이서 오자고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노는 어느새 아쿠타가와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아쿠타가와는 그런 유노에게 으르렁거리면서도 섣불리 라쇼몽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 서로의 이능력을 다루는 실력이 막상막하라서 그런 거겠지. 아마 여기가 아니라, 포트 마피아로 돌아가면 한바탕 싸우겠네.

“츠보미.”

“응?”

티격태격하는 아쿠타가와랑 유노를 내버려 두고, 다자이가 말을 걸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체리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다자이를 보았다. 음흉해 보이는 속내에 무엇을 생각했던 걸까. 다자이는 성큼 체리에게 다가갔다. 그의 귓가에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다음에는 우리 둘이서만 제대로 오는 게 어떻겠는가? 그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그러면서 제 몸을 더듬는 손길에 체리는 숨을 멈추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데서 이러다니. 체리는 다자이의 뻔뻔함에 말이 턱하고 막혔다. 대답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손이 조금씩 허리에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었던 체리는 다자이에게서 멀어지고자 뒷걸음쳤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미 허리를 잡혔다는 건, 의미 없는 행동과 같았다.

다자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체리는 재빨리 다자이의 발을 밟았다. 다자이가 잠시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멈출 동안 체리는 그대로 다자이를 때렸다. 큰 소리와 함께 다자이가 정통으로 맞았다. 서로 싸우고 있었던 아쿠타가와랑 유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지나가는 일반인들의 시선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진짜 못 살아! 대체 그런 말을 왜 그렇게 해! 때와 장소에 가려서 하라고 내가 말을 했어, 안 했어?”

“아야, 아야. 체리 양. 그만하게.”

“내가 그만 안 하게 생겼어? 네가 지금 매를 벌고 있잖아! 매를!”

몇 번이고 때렸는지 모르겠다. 화목하게 끝날 수 있었던 놀이동산의 추억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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