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21

문호 스트레이 독스 - 다자이 오사무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동반자살을 하지 않겠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옅은 갈색 코트. 팔과 목을 꽁꽁 둘러싸고 있는 붕대. 목소리의 출처로 추정되는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여자에게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부탁하고 있었다. 여자는 대뜸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기에 곤란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혹여 자신을 여기서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미약한 기대를 품고 최대한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행히 여자의 기다림은 가치가 있었다. 체리가 천천히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낮은 굽임에도 구두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체리는 여자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가보셔도 됩니다.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여자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재빠르게 갔다. 남자는 다소 아쉬운 눈빛으로 멀리 떠나는 여인을 눈에 담았다. 그런 뒤.

“체리 양?”

눈앞에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체리를 깨달았다.

*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어느 한 카페였다.

주인이 내킬 때마다 잠깐 문 여는 곳이었다. 음료를 비롯해 과자나 분위기가 모두 좋아, 여기에 오는 손님들은 계속해서 열어주면 반쯤 투덜거리는 그런 곳. 그날 체리는 울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카페에 방문했다. 익숙하다는 듯 제 음료와 과자를 주문했다. 오색빛깔의 달콤한 음료수 한 잔과 거기에 잘 어울리는 짭짤한 과자 한 접시. 완벽했다. 조금씩 음료로 목을 축이고 과자를 먹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한 남자가 체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체리는 의아하게 여기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어도 이렇게 이른 시간대에 손님이 한가득 있을 리 없다. 당장 제 주변만 해도 텅 빈 자리가 몇 군데 있었다. 체리는 남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좋은 밤이지 않나? 이렇게 쓸쓸히 마시는 것보다 둘이 낫지 않나 싶어 권하러 왔네만. 혹여 불필요한 배려였는가?”

다정하고 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임에도 그의 미소는 가려지지 않았다. 신기하네. 체리는 제가 무어라 말해도 남자가 곁에 있을 걸 알았다. 한두 번 도망쳐도 남자는 끈질기게 찾아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슬그머니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잠깐 상대해주는 거라면. 체리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의미를 받자마자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제가 마실 음료와, 둘이서 같이 먹을 과자 한 접시를 주문했다.

“내 이름은 다자이 오사무라네. 편히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좋겠다만, 자네의 이름은 어떤지 내 물어봐도 되나.”

“하나사키 츠보미가 본명이지만, 기왕이면 체리라고 불러주세요.”

“애칭?”

“비슷하다고 해둘게요.”

체리는 텅 빈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척 수상하면서도 동시에 넉살도 좋은 사람이라는 게 생각났다. 다자이 오사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이내 직원이 음료 두 잔과 과자 한 접시를 가져 왔다. 체리는 무심결에 음료를 받으면서 생각했다. 어라. 나 주문하지 않았는데.

“그 음료는 내가 사주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주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둘게요.”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인연을 운운하며 음료까지 사준다니. 수상했지만, 그 특유의 잘생긴 외모와 목소리가 괜히 사람을 들여놓았다. 체리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검붉은 음료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음료려나. 마셔본 적이 없는 미지의 맛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금 머금어서 음미하니 그렇게 썩 달콤하지 않았다. 적절한 단맛이 식욕을 돋구는 수준이었다. 남자는 한쪽 턱을 괸 채 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맛있나?”

“맛있네요. 여기 와서 처음 마셔봐요.”

“여기 음료는 모두 제 특유의 개성을 나타내지. 마냥 달콤하지 않아도, 맛있다고 주장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고.”

“신기하게 말씀하시네요.”

다자이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넘겼다. 이윽고 다자이 또한 음료를 마시며, 서로 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손이 닿았다가 멀어졌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카페에서 곧잘 자주 만났다. 주로 체리가 자리를 잡고 홀로 마시고 있으면 다자이가 오는 식이었다. 카페 내에서 할 수 있는 건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전부였다. 체리는 주로 다자이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듣고 있었다. 힘들겠네요 체리는 무덤덤하게 맞장구치며 다자이의 뒷말을 기다렸다. 다자이는 체리가 제 말을 반응할 때마다 기쁘다는 듯 과장스러운 몸짓을 보여주었다.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여기서 다자이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체리는 바보같이 다자이를 그리워했겠지.

*

“다자이.”

섬뜩한 목소리가 다자이를 향해 파고들었다. 다자이는 천천히 체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는 체리의 시선에 거스를 수 없었다. 무엇을 했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자이는 뻔뻔스레 체리에게 말을 붙였다. 마치 여기에서 전혀 만날 줄 몰랐던 오랜 친우를 대하듯이.

“체리 아닌가? 여기는 카페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데 어쩐 일로.”

“왜 나한테는 안 그래?”

“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한마디. 머리가 좋은 다자이도 체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체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다자이를 향해 쏘아붙였다. 제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왜 나한테는 같이 죽자거나 그런 말을 전혀 안 하냐고! 나는, 나는 안 되는 거야?”

“내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건가, 체리 양?”

“그래! 다른 사람에게는 뻔뻔하게 잘 말했으면서, 왜 나는… 나는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건데! 나랑은 죽기 싫어? 내가 안 예뻐서? 이렇게, 막 화를 내고 그래서?”

체리는 어째서 자신이 지금껏 숨겼던 감정을 토해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자이의 행동을 보자마자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선이 툭하고 끊겼다. 선은 더 이상 체리의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다자이는 점차 자신께로 몰려드는 시선을 눈치챘다. 마치 흥미로운 동물을 발견했다는 것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체리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홧김에 내뱉은 말이어도 나중에 후회하겠지. 다자이는 다정한 모습으로 달래기 시작했다. 천천히 체리 곁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체리가 상처받지 않도록.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졌다. 이제 다자이가 체리를 한껏 끌어안아 달래주면 그만이었다. 상처받은 여자를 달래주는 건 자신 있었다.

다자이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한쪽 볼이 얼얼함과 동시에 균형이 잡지 못했다. 다자이는 휘청거리더니 이내 뒤로 풀썩 쓰러졌다. 체리가 오른손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바람을 불러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다자이는 욱신거리는 볼의 통증과 볼품없는 자세에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체리가 지금 나를 때렸구나.

웃음이 나왔다. 포트마피아 시절에 있었을 때도 자신을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탐정사무소에서도 마찬가지. 체리는 아무리 봐도 이능력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일반인들은 제 나름대로 몸을 사리며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순간의 분노에 몸을 맡겨 자신을 때리고도 아직 분이 덜 풀렸다는 표정이라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자이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끽해야 체리와의 만남은 한 때의 유흥. 우연히 카페에 앉아 대화하는 게 전부였다. 그 흔한 선물을 사준 적도, 달콤한 말을 속삭인 적도 없다. 그런데 이토록 화내다니. 체리가 성큼 다자이 곁으로 다가갔다. 다자이는 조금씩 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주변 구경꾼의 시선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체리 양.”

“왜? 할 말 있어?”

“적어도 모두 앞에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래… 기왕이면 단 둘이서. 그 누구도 듣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속삭여 보는 게 어떻겠는가?”

죽고 싶었지만, 아픈 건 싫었다. 체리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한 채 다자이의 뺨을 한 대 더 때린 뒤 등을 돌렸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다자이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저 체리의 뒤를 따라갔다.

*

지금껏 멋지게 가꾸어진 모습만 보아서 그런가. 체리는 확실하게 감정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다자이는 이런 면모도 마음에 들었다. 얌전히 순종하며 제 말에 기꺼이 따르는 쪽보다는 낫지. 함께 말동무가 되어주며 같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다니.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하지만 다자이는 체리에게 섣불리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자이가 마음만 먹으면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듯 동반자살을 권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그 말을 들으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도망갔다. 어쩔 수 없이. 그 여인들과 자신이 운명이 아닌 것을. 하지만 체리는 달랐다. 체리라면 어쩌면. 어쩌면 자신과 진정으로 같이 죽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여러 대화를 나누며 체리 또한 죽음에 깊은 갈망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 다자이가 몇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 모든 삶을 포기하고, 기꺼이 죽음의 늪을 향해 몸을 던질 것이다. 그 정도로 체리 안에 어둠은 깊고 질척거렸다. 다자이는 체리가 저를 따라 죽는다면 무척이나 슬플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태껏 만났어도 소소한 잡담만을 했을 뿐인데.

과연 어디서 이렇게 꼬인 거려나. 과연 제 해명을 체리가 잘 들어줄 수 있으려나. 다자이는 복잡한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체리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자신이 걱정해주었다는 건 알아주었으면 했다. 자신과 달리 체리는 밝은 빛이 있는 세계에서 모두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짙은 피비린내가 있는 곳으로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사 오더라도 체리의 의지가 담긴 게 아니라면. 다자이는 속으로 무수히 많은 변명을 하며 체리를 따라갔다. 체리는 조금씩 화가 풀린 듯 아까보다 숨을 고르는 게 일정해졌다.

다행이네. 다자이는 어느 정도 두었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체리가 당황하며 다자이를 바라보는 것에 놀랐다. 다자이는 한 손으로 체리의 두 손을 결박했다.

“지금껏, 혼자 두어서 미안하다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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