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가을 밤의 축제(1)

2020.03.29

아가야. 시월의 보름달을 조심하렴.

죽음에 너무 가까운 계절, 마력을 가득 채운 달의 빛이 세상을 물들이면 우리가 발 담근 세계가 난생처음 시야에 가득 차오르지. 희미했던 것이 선명해지니, 움츠려야만 했던 것이 부풀어 오르니 얼마나 즐겁겠니. 우리는 밤의 마력에 취하여 흥겨워지겠지만 그날은 절대 축제 날이 아니란다. 휘돌며 뛰놀다가는 자칫하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건너가 버린단다. 우리는 밤의 세계를 조금 다룰 줄 알뿐, 그것의 주인이 아니란다.

 

하지만 스승님. 행렬이 보여요.

밤을 건너가는 무리가.

......쫓아가려는 이들이 보여요.

 

 

“나와줬구나.”

 

베시가 웃으며 맞았다. 그리고 헤이즈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네가 그런 차림을 할 줄 몰랐는데.”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할로윈인데.”

 

베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헤이즈는 커다란 로브 자락을 끌어당기고 고깔모자를 푹 잡아 내렸다.

 

“너는 마법사나 마녀, 요술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잖아.”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야. 애들이 놀리는 것이 짜증날 뿐이고.”

“그런 의상을 보면 내일 더 놀릴 텐데.”

“신경 쓰지 않아.”

“너는 정말 강하구나.”

 

베시가 흐리게 웃었다. 헤이즈는 베시를 힐끗 보았다. 머리에는 덩굴나무를 엮고 꽃과 색색의 잎을 단 둥근 고리를 얹었고 마을의 성가대의 복장처럼 단정한 백색의 옷을 입었다. 그런 것을 새로 준비할 형편은 되지 않아서 기존의 옷을 수선했는지 이리저리 얼룩이 물들고 기운 자국은 어쩔 도리 없었다.

 

“너는 뭐야?”

“천사로 분장했는데, 역시 허술한가?”

“응, 별로 안 닮았어. 날개도 없고.”

“날개 같은 걸 어떻게 만들어.”

 

헤이즈는 베시가 그나마 가진 흰 천을 열심히 빨아 자국을 지우려고 했으며 열심히 서툰 솜씨로 머리 위의 관을 엮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가차 없이 말했고 베시는 상처받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헤이즈는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달래는 것에 미숙했다. 베시를 힐끗 보고 말했다.

 

“아니다. 그런 천사도 있을 수 있지. 그런데 차라리 식탁보 가지고 유령으로 분장하지 그랬어? 그게 더 간단하잖아.”

“그건......”

 

베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리고 달싹였다.

 

“유령만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아.”

 

헤이즈는 물끄러미 베시의 표정을 보았다. 순간 베시의 눈은 밤을 헤매는 이처럼 어두웠고 공허했다. 저런 눈을 가진 이는 늪에 빠진 듯 가라앉곤 하는데. 감정이나 기분에, 혹은 어느 기억에 붙잡혀 그대로 주저앉던데. 헤이즈는 그리 생각했으나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베시의 표정은 다시 활기차게 돌아왔다.

 

“자, 이제 가자.”

 

베시가 헤이즈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익살스럽거나 오싹한 분장을 한 갖은 괴물이 간식을 받거나 난장을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돌아다니는 길거리로.

 

“이번에 벌써 두 번째고 세 번째에는 봐주지 않을 거야!”

“Trick or treat!”

“안 나와? 없는 거지? 얘들아! 돌격이다!”

“안 돼, 잠시만, 기다려!”

“와아!”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온 거리에 울렸다. 이번 해의 불운한 희생양이 당첨되었다. 제인 아주머니가 깜빡 졸았는지 사탕이 떨어진 건지 그만 때를 놓쳐버리셨고 이어서 광란의 도가니가 열렸다. 계란과 토마토 따위가 창문과 벽에서 터지는지 질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아침에 보면 참으로 처참하리라.

 

베시와 헤이즈는 어린아이들의 소란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옷을 더럽히지 않게 멀리 돌아갔다. 그들은 남들에 비해서 꽤 소극적인 무리였다. 아는 집 한두 군데만 들려서 간식만 몇 가지 받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그마저도 헤이즈만 얼굴을 내밀어 간식을 받고 베시는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기나 했다. 다른 아이들이 본다면 참 재미없게 논다고 했을 것이다.

 

“사탕이나 초콜릿 정말 받지 않을 거야?”

 

헤이즈의 바구니에만 간식 몇 개가 짤랑거렸고 베시는 텅 빈 바구니를 들고 털래털래 걷고 있었다.

 

“그게, 이 나이에 간식 주세요, 하고 돌아 다니는게 조금 유치하잖아.”

“네가 그걸 유치하게 여기면 나는 뭐냐?”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꼬맹이 헤이즈인거지.”

“아, 진짜.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유치한 놀이 거리인 것이 오히려 나아. 할로윈의 기원을 생각해봐.”

“알겠어요, 꼬마 헤이즈. 단것은 한꺼번에 먹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 나눠서 먹어요. 자기 전에 이 꼭 닦고요.”

“죽을래?”

“사양할게.”

 

베시는 뻔뻔하게 윙크를 했고 몇 발자국 달아났다. 헤이즈는 뛰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기 때문에 그냥 인상을 찌푸리고 천천히 따라갔다. 베시는 태연하게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헤이즈는 로브를 질질 끌고 걸어와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럼 넌 이 유치한데 왜 굳이 나까지 끌고 나왔냐?”

 

헤이즈는 턱을 괴며 물었다. 베시는 쓸쓸하게 웃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둘 다 한참을 앉아 말없이 거리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촛불로 빚어낸 노란 불빛이 거리를 수놓고 가지각색 분장의 인파들이 스쳤고 활기찬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한참만에 헤이즈가 툭 뱉었다.

 

“베시, 할로윈 말이야. 네 말대로 그냥 어린애들이나 즐기는 게 아니거든.”

“그럼?”

“그러니까 ......”

 

헤이즈의 눈이 인파 사이를 떠돌았다. 한참이나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쪽을 가리켰다.

 

“어른. 저기처럼. 어른들도 분장하고 돌아다니곤 하더라.”

“어디? 안 보이는데?”

“저기, 뱀파이어 분장. 안 보여?”

“진짜 안 보이는데?”

“뭐, 지나갔나 봐. 어쨌든 있었어.”

 

헤이즈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저 말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으니까 별로 유치하게 여기지 말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네가 돌아다니고 싶다고 하면 나도 같이 나가 줄게.”

 

헤이즈가 베시를 보았다. 노란 불빛에 물든 눈은 베시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베시는 목이 턱 메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할로윈에 떠돌 수밖에 없는 이유를 헤이즈는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성가시다고 안 어울려 주면서.”

“뭐,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할로윈은 나도 좋아하거든.”

 

일부로 장난스럽게, 그러나 도리없이 물기가 어린 베시의 말에 태연하게 헤이즈가 답했다.

 

“그렇지만 오래 걸었더니 피곤하다. 좀 쉬자.”

“그래. 그러려고 앉았으니까.”

 

둘은 다시 한참 인파를 보았다. 베시는 눈을 바로 떴다. 베시는 사실 할로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광경을 감상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넋을 놓고 보는 게 아니라 한명 한명 살피는 것이었다.

몇 년 전 할로윈에 실종된 베시의 어린 동생, 앤디가 꼭 저 사이에 있을 것만 같아서. 혹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베시.”

 

그러나 영영 나타나지 않은 채로,

 

“밤이 깊었어. 사람도 이제 싹 빠졌고.”

 

할로윈은 매번 끝이 나버리는 것이다.

 

“이만 돌아가자.”

 

밤 공기가 차가웠다. 헤이즈는 베시를 끌었다. 베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걷다가 눈물이 툭 터졌다.

 

“어? 어? 야? 베시? 너 울어?”

“헤이즈.”

“어어, 어.”

“나 다음 할로윈부터는 나오지 않을거야.”

“......같이 와준다니까.”

“그래도 유치해.”

“......어른들도 나온다고 이야기했잖아.”

“그냥 내가 오기 싫어서 그래, 그냥.”

 

베시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는데 공기에 닿자 순식간에 식어버리면서 뺨이 차가웠다. 그것이 너무 시려서 베시는 쉼 없이 닦아냈다. 너무 시리고 아팠다. 더는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할로윈이 너무 싫었다.

헤이즈는 베시를 보았다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알았어, 다음 해부터는 나랑 집이나 지키자.”

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던 베시는 눈물을 말리고선 다시 장난을 좋아하는 베시로 돌아왔다. 헤이즈는 아까와 결이 다른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시는 머리에 얹은 고리를 헤이즈에게 넘겼다. 헤이즈는 질색을 했다.

 

“야, 난 이거 싫다니까? 애당초 고깔모자에 추가로 화관을 얹는 게 어울리기나 하냐?”

“그냥 받아. 들고 가기 귀찮아.”

“나는 안 귀찮은 줄 알아?”

“버리기는 아깝잖아. 정성 들여서 만들어 놓았거든.”

“그럼 가져가서 내년에 써.”

“다음부터는 할로윈 참여 안 한다니까.”

 

실랑이가 몇 번 이어지다가 갈림길에 선 순간 고리는 헤이즈에 있었다. 헤이즈는 고리를 들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일단을 가져갈게. 그런데 어디 처박아두게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나보고 뭐라고 탓하지 마라.”

“그래, 그래. 아니면 네 스승님이라는 분에게 선물해드리던가.”

“나도 남에게 받은 걸 다시 선물로 삼지 않을 염치는 있다.”

“어머, 헤이즈가 웬일이래?”

“베시 너 진짜.”

 

베시는 휙 돌아섰다. 손에 들린 것은 텅 빈 바구니 하나뿐인 베시는 차림도 걸음도 새처럼 가벼워 보였다. 헤이즈는 그 모습에 안도했고 긴장이 풀어졌다.

 

“잘 가, 내일 보자.”

“너도 잘 가라.”

 

베시는 총총 제 집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까 울던 모습이 마음에 남아서 헤이즈는 미진한 느낌에 베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인정하자. 동생을 찾는 일은 의미 없다. 너무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할로윈마다 길거리를 헤메고 분장 하나하나 돌아보며 동생을 찾아 헤매는 일은 그만두자. 마음 속에 묻어두자. 베시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로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 할로윈부터는 얌전히 집에 있자. 매해 슬픈 날이겠지만 더 괴로워하지는 말아야지. 포기해야지.

 

“누나.”

 

포기하기로 했는데......

 

“앤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베시는 휙 돌아보았다. 앤디가 그곳에서 웃고 있었다.

 

“앤디, 앤디 정말 너야?”

 

4년 전 실종되었던 앤디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앤디의 분장을 도와줬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으니까.

 

두꺼운 이불보나 식탁보를 뒤집어쓰는 분장은 촌스럽다며 싫다고 했었지. 어찌나 떼를 썼는지 집안 식구들이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지. 그래서 희고 가늘고 하늘하늘한 천들을 전부 찾아 모아보았는데. 무려 부모님이 결혼하실 때 사용하셨던 베일까지 꺼냈잖아. 너는 그것을 머리에 얹고 희고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유령이 되었다고 신난다며 빙글 돌았잖아. 흰 천들이 떠올랐고 그 안의 너는 반투명했고 파리했었어. 귀한 천이니 더럽히지 마라, 찢어먹지 마라, 늘어지게 잡아당기지 마라, 라고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기는 했지만 분장이 기막히게 잘 되어서 나도 좋아했었어. 너는 어서 나가자고 재촉했었지.

 

앤디가 팔을 내밀었다. 손짓에 따라 흰 천이 휙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누나, 우리 놀러 가자. 어서.”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빨리 안 오면 나 먼저 가버린다?”

 

너는 못 참고 결국 먼저 나가버렸잖아. 그리고 그렇게 사라졌잖아.

 

“안 돼, 앤디.”

 

베시는 창백하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앤디는 꺄르르 웃으며 달아났다. 베시는 허겁지겁 쫓았다. 어딜 가는 거야, 앤디. 돌아가야지. 그간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후회했는데. 네가 먼저 갔던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갔어야 했다고, 혼자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참을 울었는데. 지금은 또 어딜 가? 같이 가. 다시 잃어버릴 순 없어.

 

앤디의 달음박질은 달빛을 밟고 어둠을 딛고 바람에 미끄러지며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갔고 베시도 뒤를 따랐으나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못할 만큼 절박함에 가득 차 있었다. 뻐꾹. 부엉이가 울었고 베시는 길에서 사라졌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62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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