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학문의 보전에 관하여

2020.03.29

남자는 곧은 손가락을 뻗어 펜촉으로 글씨를 가만가만 써 내려갔다. 얇은 커튼을 넘어오는 밝은 햇살 아래 잉크 방울이 반짝였다가 서서히 마르며 양피지에 글씨가 아로새겨졌다. 남자는 겨우 한 문장을 쓰고는 펜을 놓았다. 그리고 고민하며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보다가 방금의 문장을 읊조렸다.

 

“모든 학문은 공익을 위해서 연구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맞은 편에 앉아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는 여자는 힐끗 보았다가 심드렁하게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의도적인 무시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은 듯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여자는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의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

“나는 관심 없어. 애초에 난 반대했다고. 네가 주장한 일이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조언 정도는 줄 수 있지 않겠어?”

 

여자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내뱉었다. 비난조였다.

 

“거기 공익 부분. 그거 너무 애매해. 학문의 새로운 연구 하나를 승인하거나 반대할 때 걸고 넘어질 거리가 차고 넘쳐. 그것에 부합 하는지 아닌지 엄청 논쟁이 벌어질걸? 좀 더 자세하게 규정 해 두는 게 좋을걸?”

 

남자는 여자의 말을 돌이켜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 탁자를 두드렸다. 나무탁자와 손가락이 부딪히며 좋은 울림을 남겼다.

 

“그럼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

“내가 일일이 말해줘야겠어? 알아서 하라니까?”

 

여자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남자는 펜을 내려놓고 다정한 눈으로 제 사촌을 훑었다. 지금은 규칙을 정하는 것보다 사촌을 달래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았다.

 

“내 결정에 불만이 그동안 많았나보구나.”

 

그리 말하자 여자는 눈을 치떴다.

 

“처음부터 불만 많은 것을 알고서도 밀어붙였으면서 몰랐던 척 하지마. 그리고 하나 정정하자면 아직도 많아.”

“유감이구나.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언젠가는 네가 나와 같은 뜻을 가지길 바라는데.”

“일단 당장 저지른 일을 대충 넘기고 내가 물러질 때까지 버텨볼 속셈인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여자는 사납게 대꾸했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화함을 머금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서라도 네가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어. 나는 언제가 되었든 환영할게.”

 

그리고 그 태도는 여자를 더더욱 가차 없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어투의 상대를 얕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르고, 달래고. 여자는 입꼬리를 비집어 끌어올렸다. 아, 저 자식이 철없는 사람의 치기로 여긴다 이거지? 여자는 책을 집어치우고 저벅저벅 다가가 책상을 짚고 그 사람을 위압적으로 내려보았다.

 

“야. 나는 말이야. 다른 건 얼추 참겠는데 멍청한 것을 보면 화가 나서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겠더라. 그냥 싫은 줄 알아? 그 멍청함에 열불이 나서 그 짓거리에 어울릴 수 없다니까?”

“잠깐, 멍청하다고? 네가 아니고 내가?”

“뭐 이 새끼야?”

 

남자의 당혹 속에서 수습되지 못한 말이 튀어 나갔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거친 말을 뱉기는 했으나 상대를 충분히 뒤흔들어놓았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남자가 더듬더듬 변명을 이어나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나는 네가 ...... 그냥 싫어하는 줄 알았어. 너는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이 많았으니까.”

“멍청해서 싫어했다니까? 말해봐야 못 알아먹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것이고.”

“지식은 넓지만.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니......”

 

여자는 입버릇처럼 저 새끼 어쩌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뱉으면 남자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노선을 바꿨다. 속이 비틀리는 것을 누르며 여유로운 척 하품을 한다.

 

“나를 그렇게밖에 못 보다니. 그러니까 네가 멍청하다는 거야.”

 

남자는 학자였다. 그리고 여자는 학자라는 부류를 알았다. 아무거나 던지고 생각해보라고 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 혼자 파고든다. 유명 시인이 얼렁뚱땅 내뱉은 말도 숨겨진 의미를 해석해보려는 대중들처럼. 빙빙 헤매다가 속임수라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지만 잠시 입을 닫게 만드는 정도로는 충분하다.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좋아, 조용해졌어. 여자는 만족스럽게 다시 자리로 돌아가 쇼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빠르게 읽어야 한다.

 

“......내가 그동안 너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구나.”

 

고민이 끝난 듯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젠장. 그대로 망상에나 빠져 있을 것이지. 아니 그건 그렇고 나를 별 거지같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뭘 그리 뻔뻔하게 내뱉어? 방금 자신이 한 말은 별로 생각하지 않은 채 여자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남자는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많이 서운했겠구나.”

 

감정팔이를 시작하는 기색에 여자는 흘려들을 준비를 하였다.

 

“그렇게 긴 시간을 봤는데도 내가 너를 잘 알지 못했다니.”

“날 알든 말든 관심 없으니까 제발 닥치고 댁 할 일이나 하셔. 내가 책 읽는 거 그만 좀 방해하고.”

“하지만, 우리는 단둘뿐인 친척이잖니.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겠지만 내게 남은 혈연은 너 하나뿐일테지.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도, 나는 너와 언젠가는 화해를 하고 싶어.”

 

아, 이건.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홱 쳐다보았다. 여전히 온화한 웃음이 달려있었다.

명백한 기만이다.

 

여자는 쇼파의 팔꿈치에 손을 강하게 얹었고 날카로운 얼음이 확 치솟았다. 멍청하다는 말은 인정 못 하지만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라는 건 사실 그녀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뛰쳐나가 모험가 일을 하며 그 성향이 더 강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면 뭐 어때? 훅 치고 나가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을 저렇게 입 다물게 만들 수 있는데.

 

“내가 혈연이니 잘 지내고 싶었다라, 어지간히 나를 끌어들이고 싶었나봐? 생각에도 없는 말을 들먹이고 있네.”

 

날카로운 얼음은 책상에도 치솟아 있었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얼음을 보다가 뒤늦게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책상에 다가와 얼음을 적당히 쳐내고 그 위에 앉았다.

 

“너는 혈연 따위 생각하지 않잖아.”

 

한기가 피어오르는 책상에서 여자는 하얀 숨을 내쉬며 냉랭하게 말했다.

 

따사로운 햇살에도 얼음은 꿈쩍하지 않았다. 아닌 봄에 서리가 가득 피었으나 본디 선콜인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눈을 깜빡였으나 마법사의 능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곧 평온을 되찾았다.

 

“너도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아. 내가 혈연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야. 실제로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롤, 무척 소중하게 생각해. 다만 더 나은, 다른 것을 위해서 이제는 버릴 때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 버리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버리려고 하는 건.”

 

남자는 잠시의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가문이지. 학자들의 가문으로 위상의 높은 우리 가문, 아르다 가(家)”

 

여자는 시큰둥하게 들었다. 어조는 퍽 진실성 있었으나 여자는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의미만을 파악했다.

 

“나는 너 별로 상관 안 해. 나를 버리든 말든. 버린다는 것도 웃긴 말이긴 하네. 나는 너 없이도 이미 혼자서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세상에 의지할 수 있는 친척이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위안이 되는 일이야.”

 

남자는 애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별 동요 없이 모순만을 짚었다.

 

“이상해. 친척 같은 걸 소중히 여긴다는 사람이 가문은 버린다고 하네. 가문이라고 해봐야 귀족 나으리들처럼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배우자 만나 결혼하고, 자식 낳아서 성을 물려주고 가풍이나 재산을 죽을 때 물려주면 되는 거지. 그럼 네가 소중히 여기는 혈연도 얻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그러나 그리하면 학문은 퍼지지 못 한 채 한 가족에게만 고이겠지.”

 

남자가 빠르게 말을 받았다.

 

“내가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은 학문이야. 아르다가 가지고 있는 학문. 그 가문이 수 세기에 이르면서 쌓아온 마법기구와 기록과 연구실들. 물론 중간에 어느 정도가 날아갔지만 그래도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어. 한 가족이 연구하기는 수없이 많을 자료가. 그 외의 나머지가 박혀있게 된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잖아.

지금이 중요한 시기야. 세상이 전란에서 벗어나서 융성하기 시작했어. 학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던 때와는 다르지. 집을 재건하고 성을 복구하는 것에서부터 정치 체계를 다시 수립하는 것까지, 근간부터 바르게 세우려면 제대로 된 지식이 필요해. 학자들이 필요해. 지금 있는 이들을 끌어모으고 지원하고 활약하게 할 필요가 있어. 또한 모든 것이 안정되고 나면 그때는 연구에 눈을 돌릴 수 있을 거야. 막 학문이 발전할 수 있을 즈음에 준비된 인재들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야? 인재 양성이라는 것은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야. 지금부터, 지원이 필요해.

그래서 기존에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기록과 학계에서의 아르다의 위명을 빌려 학자 협회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지. 애초에 학자의 가문이야. 학자를 지원하는 것에 쓰는 것이 가문의 뜻을 그리 거스르는 것을 아니리라 생각하는데.”

“그래서 네가 멍청하다는 거야.”

 

여자는 냉소를 품은 채 치고 들어왔다.

 

“전란이 막 끝났다고? 그것참 희망적이네.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어떤 지역에 몬스터 군대가 이동한다는 정보가 민감하게 돌고 있어. 이런 때가 일이 터지기 가장 좋은 때고 방심해서는 안 되니까. 네 말 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전쟁이 또 나면? 들였던 재산과 자료들은 공중 분해되는거야.

그리고 네 말대로 그 자료들, 가문이 수백 년 동안 쌓였던 것이지. 어떻게 쌓일 수 있었겠어? 가문이기에 쌓일 수 있었던 거야. 단체를 만들어서 푼다? 이리저리 퍼져서 얼마 안 가서 내에 슬쩍 어딘가로 사라진다에 내 모험가 경력을 전부 걸지. 학자들은 어디 고결한 줄 알아? 그들도 사람인지라 좋은 거 있으면 빼돌리고 싶어 할걸?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지! 아니면 그 수많은 자료를 배포하면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야? 그걸 전문적으로 하는 도서관도 그게 안 되는데. 그게 안 되면 처박아 두는 게 나아. 소실되지는 않겠지.

그리고 단체 말인데,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 단체가 10년이 넘으면 축배를 들지. 한 70년 넘어간다? 그럼 명패에 크게 써서 붙이고 전통이니 어쩌니 자랑하겠지. 왜냐하면 다들 그렇게 오래가질 못하니까. 반면에 70년, 가정으로 계산해보자. 갓난아이 하나가 조부모 될 시간이면 되겠네.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흔하잖아. 이 편이 좀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데 네가 왜 그러는질 이해가 안 돼.”

 

남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네 태도는 소극적이고, 주장은 이기적이야. 독점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기는구나. 꽁꽁 싸매면 존속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 하지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학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리고 너는 너무 안일하지. 왜 존속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여겨? 학문은 일단 오래 잡고 있어야 뭐라도 되는 거야. 화려하게 피며 향을 흩뿌렸다가 한 해 만에 지는 꽃이 되고 싶어? 그리고 모르나 본데 학문에 의미가 꼭 필요하면 지금 파고 있는 학문의 반은 접어야 해.”

“가문 유지가 단체 유지보다 잘 될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어? 기간은, 좋아.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사례가 많아. 하지만 학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 무엇을 원할지 모르는 아이에게 학자의 길을 강요하는 것은 다르잖아.”

 

남자는 마치 마지막 질문처럼 물었고, 여자는 세상 순진한 사람을 보았다는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가문의 고유 특성 있잖아, 그런게 정말 선조의 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유전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오로지 그것 때문은 아니야. 그냥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둘러쌓여 자라면 비슷한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거야. 책을 읽고 자란 아이는 책을 쓰고 저녁마다 기도를 드리며 자란 아이는 신을 믿듯이. 다들 그리 자라잖아.”

 

대장장이의 자손은 대장장이가 되고 서기의 자손은 서기가 된다.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남자는 뭔가 납득 하지 못 하는 듯 침묵을 유지했다. 여자는 그간 품었던 말을 뱉었지만 후련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날 떠들어 봐야 남자가 고집을 꺾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안다. 손을 휘둘러 얼음을 싹 걷어내고 여자는 탁자에서 내려왔다. 더 말해봐야 입이나 아프다.

 

“그래, 너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어서 화가 났구나.”

 

아, 저게 진짜. 언제까지 궁상을 떨 거야? 여자는 대화의 시작을 떠올리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그래. 알게 되었으니까, 입 닥쳐.”

“나도 내 의견을 접을 생각 없고 너도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구나.”

“알겠으면 조용히나 있지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까?”

 

여자는 그 멍청함에 말이 안 나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 사이에 감정이 상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저렇게 풀어야 한다는, 그리고 그러면 풀릴 거란 확신이라니. 사회생활을 책으로 배운거야, 순진한 거야 뭐야? 아니면 내가 못 이기도록 순진한 체하는 거야? 여자가 그간 봐온 남자로 판단했을 때 세 번째 일것 같았다.

 

그때 꽤 괜찮은 방법이 스쳐갔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면 그 문제를 더 이상 걸고 넘어지지 않을게.”

“정말? 뭔데?”

“가문의 장서의 소유권을 내게 넘겨줘.”

 

화색으로 물들었던 남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그 표정이 꽤 보기 좋아서 여자는 신나게 말했다.

 

“책을 달라는 것이 아니야. 따라 관리할 공간도 없고 뭐. 전처럼 여기에 꽃아둬. 그러나 책의 권리는 내게 넘겨줘. 나는 네가 책들을 말아 먹을까봐 걱정이 되거든. 자료나 연구기구들은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책만은 내가 관리할래. 대여 시 내 허가가 있어야 하고 무단 연체하면 지팡이 들고 찾아가도 별말 없도록. 넌 못 할 것 같으니까.”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화해할 유일한 기회인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은 학문적으로 정말 귀중한 것이어서 섣불리 응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너는 분명히 가문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아르다의 이름을 잇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않겠다면서.”

“설마 멍청한 사촌이 모든 것을 망칠 길을 택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을 망칠거라는 단정은......”

“싫어? 싫다면 거절하던가.”

 

여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남자는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단체에서 전혀 건드리지도 못하게 만들지는 않겠지?”

“설마 내 인격을 그 정도로 본 거야?”

“아니. ...... 알겠어. 그러도록 할게.”

 

남자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는 만족스럽게 쇼파에서 읽던 책을 품에 움켜쥐었다. 더이상,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쫓겨 읽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화가 가라앉았다.

 

“이제는 나를 도와줄 수 있겠어?”

 

남자는 다시 물어왔다.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답하며 씩 웃었다.

 

“규율 정하던 종이 말이야. 얼음 녹은 물에 다 젖어서 번진 것 같은데 새 종이를 준비하는 게 먼저 아니겠어?”

 

*

 

(...) 라는 이름의 학자 협회가 출범하였다. 처음에는 학자들의 학술교류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점 커지며 다른 학자들을 지원하는 일까지 병행하였다. 수많은 학생들이 그 단체의 도움을 받고 학자가 되었다. 단체 자체는 대중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출신의 학자들이 사회에 여러 가지 지대한 공헌을 바쳤다고 한다. 몇십여 년 동안 유지되다가 와해 되었다. 와해된 이유는 (...) 와해 직후 협회의 소유물들에 관한 법적인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러니까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종이 쪼가리에 의하면 옛날에 어느 유명한 협회가 관리하던 책이라던데. 우린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남긴 것으로만 알고 있었잖아.”

“글쎄, 얼추 살펴보았는데 대부분 협회 설립연도 이전의 장서들이야.”

“그럼 책을 쓰고 협회가 보관하지 책을 쓰기도 전에 보관했겠어? 언니답지 않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보네.”

“협회가 몇십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 시기에 출간되어 들어간 책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 하나 보구나. 학자 협회라면 가장 최근의 연구 서적들을 소장했어야지.”

“짜증나, 정말. 그럼 조상 것으로 하지.”

“내가 봐도 그쪽이 가까워 보여. 사적인 기록이 섞여 있어. 한때 위탁했다,는 가설이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인다.”

“뭐, 솔직히 어느 쪽이든 크게 알 바인가? 누가 이걸 찾으러 오겠어.”

“내가 찾으러 오니까 함부로 다루지 마라.”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굉장한 사람들이었나 보네.”

“그래, 능력이 좋기는 한 모양이네. 이런 고서들이 그 긴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아니 책을 모았다는 것. 나는 보기만 해도 질려. 안 그래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드러기 돋을 것 같아.”

“종종 잊는 모양인데, 네 부모님이 서점을 운영했다.”

“아, 언니. 부모님이 서점을 운영했다고 나까지 책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있어?”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61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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