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ㄴ
글터디 9주차
*소재 주의…
의외면서도 아주 당연한 사실 하나, 린은 한 번도 누군가를 ‘체벌’ 해 본 적이 없다. 당연한 말이다. 천사가 어떻게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겠는가? 비록 목적이 ‘잘못된 행동의 교정’이라고 할지라도, 린은 결코 누군가에게 육체적인 위해를 가해본 적이 없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린은 체벌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다. 천국에서 지낼 때에는 천사들밖에 만나지 못했으므로 잘 타이르는 것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그의 여동생 릴리는 어느 한 곳 나무랄 곳 없이 훌륭한 학생이었으므로. 물론 가끔 짓궂은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린이 네 악행을 모두에게 알리겠다며 끌과 망치를 꺼내들면 꼬리를 말기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 홈쉐어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031호에 입주한 입주민들은 사고를 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경하게 행동을 교정할 만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빠진 털은 알아서 치우라거나, 먹은 컵라면 잔해들을 미리미리 분리수거하라고 몇 번 잔소리를 건네면, 그들은 머쓱하게 웃으며 “죄송해요, 선생님…” 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별로 린이 신경쓰지 않아도 가끔 본인들이 생각했을 때 본인들이 심했다고 생각이 되면, 린의 눈치를 보며 린의 집안일을 은근슬쩍 돕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다음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느냐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애써 얼굴을 붉히며 극단적인 방법까지는 전혀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남자가 1031호를 드나들게 되지만 않았다면, 아마 린은 자신의 기나긴 인생에서 평생동안 ‘체벌’이라는 단어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퇴근하고 막 들어선 1031호가 난장판이었다. 처음에 린은 정말이지, 모모가 금주했던 술을 다시 입에 대고 깽판이라도 친 줄 알았다. 혹은 빈집을 틈타 강도가 들었거나. 오늘은 오랜만에 닐을 포함한 모두가 다같이 놀러나간다고 했다. 혹시나하면 곧바로 광채를 사용할 의도로 한 손으로 헤일로를 꽉 진 채 거실로 입성한 린은 눈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장면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거실 역시도 현관과 비슷하게 엉망인 모습이었다. 각종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었고,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름 영업직이라며 항상 입고 다니는 정장 재킷은 대충 벗은 양말과 함께 허물처럼 벗어던진 채로,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 위에 누워 컵라면을 먹으면서 음량을 최대한으로 키운 텔레비전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닉이 린을 발견하곤 아는 체를 했다.
“오, 왔냐?”
그 뻔뻔한 작태에 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닉이 그제서야 티비 볼륨을 줄였다.
“왔는데 아무도 없더라? 오늘 어디 다같이 나들이라도 간 거야? 왜 나한텐 연락도 않고.”
그야, 네가 1031호에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이 튀어나올 뻔한 걸 겨우 참고, 린은 간신히 물었다.
“…집 안 꼴이 왜 이래?”
“아, 그거. 이번 고객한테 회수한 물건에 악령이 봉인되어 있었는데, 그게 어쩌다가 풀려서 날뛰느라. 다행히 잘 잡아서 다시 봉인 해 놨어.”
별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하며 닉이 엄지 손가락으로 쇼파 한 구석에 던져져있는 수상한 조각상을 가리켰다.
“왜 그런 걸 들고 우리 집으로 오는데?!”
“너네 집에 먹을 게 많잖아. 호텔에서 이것저것 시키려면 귀찮고. 어쨌든 잡긴 잡았고. 그럼 된 거 아냐?”
성의없이 대답한 닉이 다시금 풀썩, 쇼파에 쓰러져 누웠다.
닉 홀트. 닐의 이복형이라는 이 남자는 지옥이나 회사에선 꽤 우수하고 싹싹한 사람인 것 같았지만, 적어도 린에게는 변변치 못한 남자였다. 분명 호주에서 중국까지 전근을 와서 호텔에 장기투숙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마치 1031호가 제집이라도 되는 마냥 집안 곳곳에 악마소환진을 그려 들락날락거리며 린의 골치를 썩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닉은 마치 제 집인 것마냥 거실을 점령해 집을 어지럽히는 건 기본에, 공용 냉장고에서 남의 음식을 훔쳐 먹거나, 린의 방이 안전하다며 이상한 것을 숨겨 놓거나, 제 여동생인 릴리와 제 이복동생은 닐을 은근히 엮어주려 난리였다. 들락날락거리는 건 막지 않을 테니, 적어도 자신이 어지른 것은 치우거나, 남의 음식을 뺏어먹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으나 닉은 들은 척 만 척 했다. 정말이지, 엘리트 악마다운 행동거지였다.
린은 포기했다. 포기하면 편했다. 적어도 강도가 들지 않은 것만은 다행인가… 작게 한숨을 쉬며 린이 닉이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들부터 줍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청소를 해야 다른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을 수 있을 듯 했다. 광채로 이 난장판을 싹 밀어버리면 물론 편하겠으나, 저 뿌리부터 글러먹은 닉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청소를 해달라며 매달릴 것이 분명했다. 괜히 얄미운 마음이 들어 린은 괜히 들고 있던 닉의 자켓을 닉에게 던졌다.
“켁!”
갑작스럽게 제 자켓에 습격당한 닉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그때였다. 린의 눈에 낯익은 깨진 컵의 조각이 들어온 것은. 그건 제작년 린의 생일에, 릴리가 정성을 가득 담아 만들어 준 머그컵이었다. 딱히 직접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으나, 린은 그 컵을 꽤나 아꼈다. 린은 이것저것 손재주가 많은 릴리가 만들어주는 모든 걸 아꼈지만, 어쨌든 그 컵은 특히나 릴리가 자기 반죽부터 해서 만든 특별한 것이었다. 처참하게 아끼던 컵의 잔해를 보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린을 향해, 그제서야 겨우 자신의 얼굴을 덮친 자켓을 치운 닉이 묘하게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 맞다, 그 컵… 네가 아꼈던 건가? 급하게 악령 잡는다고 손에 집히는 아무거나 일단 던졌는데, 그게 어쩌다보니까 잡혀서….”
닉이 차마 말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번쩍. 어느 순간부터 린의 손에 들려있던 헤일로에서 차마 직접 바라볼 수 없는 밝은 빛이 뿜어져나왔다.
“…아니, 그러게 내가 잘못했다니까…”
닉이 기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닉의 거듭된 사과에도 린의 단호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닉은 고개를 돌리며 푹 숙이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집이 통째로 날아갈 뻔 했는데, 아끼는 컵 하나로 무사히 수습했으면 다행인 거 아닌가?
닉은 현재 완전히 무력화되어 크기가 조절된 린의 헤일로에 끼어있었다. 전보다 광채의 힘을 조절했는지 염소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나, 허리 부근에서 꽉 끼는 헤일로 덕에 차려 자세로 팔도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린은 그 상태의 그대로의 닉을 그대로 엎드리게 해 제 무릎 위에 얹었다. 닉은 대체 이게 무슨 자센가 싶었다. 이 나이 먹고 - 정말로 많이 먹었다 - 누군가의 무릎에 이렇게 엎어져 있으려니 부끄러웠고, 그 상대가 린인 것도 어색했다.
“아니, 그리고 너도 무거울 텐데 슬슬 내려놓는 게 좋지 않,”
“사실 난 체벌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야.”
갑자기 시작된 뜬금없는 말에 닉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체벌?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지?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단순히 매나 벌보단 대화로 행동의 개선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치만 대화나 회유로도 도무지 발전이 없다면… 그 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아니, 야, 잠시만. 너 그 말은…”
린이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꺼냈는지 빠르게 눈치 챈 닉이 경악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적어도 팔보다 자유로운 다리로 린의 무릎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분명 평소라면 린의 근력은 닉이 손쉽게 털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신성한 빛이 생각보다 닉의 힘을 쭉 빼놓는 데 효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사실, 린 역시도 닉을 일단 제 무릎 위에 얹어놓긴 했지만, 이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하는 중이었다. 린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체벌을 행해본 일이 없다. 따라서 체벌에 관해서 아는 지식이라곤 천국에 있을 때 읽었던 인간세계의 훈육서 뿐인데, 그 훈육서는 굉장히 오래되었을 뿐더러 무척이나 어린 아이를 교육할 때에 쓰는 책이었다. 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긴가민가한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그 책에서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는 방법으로 잘못을 교정했던 것 같은데.
이 부근인가?
철썩.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린이 손으로 닉의 볼기짝을 힘껏 내리쳤다. 은근히 얇은 소재의 정장 바지 위로 꽤나 매서운 소리가 났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평소 친하다고 생각한 천사에게 엉덩이를 맞은 충격에 닉이 순간 몸을 움찔하고 멈췄다. 성인이 되고 영업직을 시작한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수치심에 귓바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이런 미친… 진짜 이게 현실인가? 지금 내가 린은의 무릎 위에 엎어져서, 진짜로 체벌의 목적으로 엉덩이를 맞았다고?
반면, 아까부터 끊임없이 잠깐만 멈춰보라며 꿈틀거리던 닉이 이야기도, 움직임도 멈춘 걸 본 린은 이 ‘체벌’이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간만에 보는 닉이 말려드는 모습에, 린은 꽤나 기쁜 기색을 겨우 숨겼다. 물론 닉은 그런 린의 기색을 눈치챌 만큼의 정신도 없었지만.
“적어도 남의 집에 방문할 때에는 집 주인에게 민폐는 되지 말아야지. 사람 간의 예의도 모르는 건가, 넌?”
평온하게 흘러나오는 잔소리며, 말 사이사이에 매섭게 엉덩이에 내려앉는 매에 닉의 정신이 쏙 빠졌다. 이 천사는 수치심도 없는 건가? 다 큰 성인 악마를 제 무릎 위에 얹혀놓고 스팽킹이라니, 이게 무슨 매니악한 플레이냐고!
닉이 더 미치겠는 점은, 린은 정말로 그 어떤 사심도 없이 ‘교정’의 목적으로 이 짓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은 둘인데, 혼자만 이 일에 창피를 느끼고 있으려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 것뿐만이 아니야. 아무리 악마라지만 정도가 있어. 남의 음식을 훔쳐먹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거나, 더럽게 자리를 쓰는 행동은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전혀 고쳐질 기색도 없고.”
게다가 처음은 고통보다 수치심이 더 했지만, 계속해서 같은 부위를 엉덩이로 맞고 있으려니 고통이 중첩됐다. 가장 마지막 매가 떨어졌을 때, 닉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잔뜩 오므리며 악, 소리가 나는 걸 참아야했다.
이 고지식한 천사는 매를 때릴 때에도 요령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만큼 같은 부위를 떄렸으면 다른 부위를 때려서 그동안은 열을 식혀줘야 하는데, 그 정도를 몰랐다. 어느새 귓바퀴는 물론 얼굴 전체에 홍조가 퍼진 닉은 고통을 참으며 저도 모르게 전신에 힘을 주고 있느라 제 꼬리의 뿌리 부근이 뻣뻣해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무 이유 없이 팔에 비해 자유로운 다리가 배배 꼬였다. 머릿속에 뇌까지 수치심으로 전부 익어 제대로 된 사고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리고 또…”
“아, 알았어… 알았다고….”
린이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자,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던 닉이 싹둑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약간 코가 맹맹해진 닉의 목소리에 린이 조금 당황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겨우 고개를 돌려 린의 눈치를 살피는 닉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얼굴 전체에 홍조가 띄었고, 고통을 참느라 전신에 힘을 주던 탓인지 아직 울지는 않았으나 눈꼬리가 발개졌고 눈에 물기가 흥건했다. 린의 팔에 닉의 꼬리가 감겼다. 주인도 알아채지 못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인 듯 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매가 멈추자 그나마 안심했는지, 훌쩍 하는 코 먹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닉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떨어졌다. 다 큰 성인이 추하다면 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린은…
덜컥, 하고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선생님 같이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닐과 릴리, 그리고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1031호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엉망진창인 집 안의 꼴을 보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강도라도 든 게 아니냐며 아이러가 휴대폰으로 경찰 직통 번호를 찍고, 따마오와 아부가 경계하며 거실로 진입하는 순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현관과 비슷한 상황의 거실과 그 쇼파 위에 넋이 빠진 듯한 린이 덩그라니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린이 다급하게 헤일로를 해제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이젠 장가따윈 다 갔다며 엉엉 소리내어 울며 거실 액자 뒤에 있는 악마소환진으로 닉이 쌩하고 도망가버리자, 닉을 붙잡으려고 뻗었던 린의 손이 간발의 차로 허공을 갈랐다. 화를 내거나 진심으로 잘못을 빌면 빌었지 닉이 이렇게까지 어린 아이처럼 오열하며 도망가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린은 그대로 쇼파에 털썩 앉았다. 이것저것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체벌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었나? 당연히 아니었지만, 린은 그 사실을 몰랐다. 체벌과 거리가 멀었던 천사였던 탓이었다.
이 일로 이제 한동안은 1031호에 오지 않겠지… 이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 난제에 린이 입가를 가리고 끙, 앓았다. 아까부터 자꾸 엉엉 우는 닉의 얼굴이며 목소리가 머리에서 찐득하게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닉을 어떻게 보면 좋지….”
하고,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쉬며 한탄하듯 내뱉은 린의 이 한마디에, 1031호의 입주민들과 릴리의 오해만 깊어져간 건 이후의 이야기였다.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