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山歸還

만고불멸(萬古不滅)

화산귀환 검존검협

回憶沉寂 by 율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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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이라는 건 매화밖에 없는 줄 알았던 청명의 손을 쥐고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붉은 것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준 사람. 대화산파 십삼대제자, 청문. 어린 청명은 그에게 다양한 세상을 보여준 보답으로 자신이 직접 나무를 타고 올라가 따온 곱게 물들고 벌레에게 패이지 않은 어여쁜 단풍잎 하나를 소중히 손에쥐고 내려와 그를 찾았지만 청문은 더이상 청명이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장문 사형⋯."

청명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그 예쁜 잎을 하나 따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리고 내려온 시간. 그 짧지만 긴 시간. 청명의 손에 쥐고 있던 단풍잎이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하며 핏물에 물들어 가라앉았다. 어느덧 청명의 손에는 그 아무것도 쥐어져 있는 것이 없었다. 단풍도, 매화도, 화산의 사형제들도, 사질들도. 청명의 전부라 생각한 화산의 모든 것이 피로 물들었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화산이.

─ 아니.

나는 어쩌면 지키려고 했던 것이 맞았는가?

그 시절의 나는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지지리 못난 등신 새끼가 아니었던가?

'이제와서 화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 얼마나 역겹게 들리는 줄 아느냐, 한심한 새끼야.'

언제부터 내가 화산을 지킨다는 거대한 명분을 내세워 움직였던가. 그저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나이를 이만큼 처먹었어도 나는 끝내 이 나이의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청명은 자신의 반대편에 거울처럼 서있는 제 옛 시절 매화검존을 노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피바다가 되어 멀쩡하게 살아있는 이조차 없는. 이제 더는 술을 먹으며 노닥거릴 사형제조차, 등을 맡기며 싸울 전우조차 없이 멍청하게 홀로 서있는 저 꼴도 보기 싫은 한심한 낯짝을 보라. 청명은 핏물을 밟으며 한걸음 한걸음, 매화검존이라 서있는 제 옛 과오(過誤)의 형상을 띤 놈을 아래서 위로 훑고 읊조렸다.

"보이냐?"

"⋯ ⋯."

"이기적인 놈의 말로(末路)가 다 그래. 후회해봤자 늦었어. 다시 돌아가? 돌아가서 뭐 어쩔 건데. 장문 사형이 백번 말해 고쳐보려고 해도 겨우 스며들어버린 정도로 끝난 게 넌데. 장문 사형에게 죄송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잘 고쳐지지 않거든. 내가 워낙 독종이라 그랬나, 별난 놈이라 그랬나. 우리 장문 사형이 나 때문에 참⋯."

"⋯ ⋯."

"고생이 많았지. 안 그러냐. 썩을 술주정뱅이 망둥이 새끼야. ⋯ 아, 나도 지금은 술주정뱅이 망둥이 새끼라 할 말은 없네. 에라, 뭐⋯ 앓느니 죽지. 말해 뭐해."

매화검존은 피로 물든 제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보더니 누구의 피로 번진 것일지도 모를 제 매화검을 내려놓으려다 가까이 다가온 저를 닮은 어린 아해의 목을 향해 순식간에 검날을 들이댔다. 그럼에도 청명은 당황하기는 커녕 제 위로 바위마냥 서있는 사내에게 움츠러드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비웃음을 내비쳤다.

"죽이고 싶냐? 나를? 날 죽이면 다 해결될 것 같아? 하긴, 그 단순무식한 머리가 어디가겠냐만. 받아들여. 그리고 뼛속 깊이 새겨. 뼈가 분질러져서 가루가 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분질러진 뼛가루에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을 새기라고."

차가운 바닥. 차가운 당신이 바닥을 집어삼키는지. 바닥이 그런 당신을 집어삼키는지도 모르는 채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길가에 떨어진 단풍잎은 생기를 잃어가고 시들어간다. 고요하게 영면한 자들 가운데 바보같이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미 한번 예견되어 있었던 일처럼. 마치 모두가 다 아는데 나 혼자 몰라 반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아니면 한번 죽여보시든가. 그렇게 해서라도 네 놈의 낯짝이 편해진다면 넌 거기까지인 새끼고."

제 앞에서 저를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입을 놀려대는 저 아해를 죽이는 것이 편할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빌어먹을 불쾌감을 뼛속 깊이 새기는 것이 편할까. 어느쪽이 편한 것인지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아니던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을 뒤덮는다.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이 무섭지도 않은지 오히려 목에 들이댄 칼날이 손에 다 들어오게끔 잡더니 그것을 힘있게 쥐었다. 저보다 작은 아이의 손에서 핏방울이 맺히더니 굳은 피들 사이로 더운 핏물이 날을 타고 흘러내려와 바닥을 적신다. 매화검존이라는 자가 당황한 것은 저를 닮은 작은 아해의 발언과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있게 말한 사람치고 우는 모습이 볼만하군."

"⋯ ⋯."

그는 울고 있었다. 어느덧 노기(怒氣)에 잔뜩 차오른 붉은 낯빛에 원통한듯 어린 아이가 무릎을 꿇고 피바다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왜. 왜 그랬을까. 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을까. 매화검존은 청명을 향해 겨누었던 칼을 제 검집으로 다시 회수하여 집어넣고 정리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청명의 통곡이 잦아들어갔지만 매화검존의 입은 다물줄 몰랐다

"결국엔 너도 나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래. 이제 만족하냐? 직접 그 눈으로 네 과거를 다시 이렇게 돌이켜보니 어떠한지 감상이나 듣고 싶군."

"⋯ ⋯."

"맨입과 맨정신으로 안 되겠다면 내 술이라도 내와주겠다. 이 공간은 어차피 죄다 네가 만들어낸 허상인 것을. 그런 공간에서 내가 네게 하지 못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이냐."

"⋯ ⋯."

"이참에 하고 싶었던 말들은 죄다 쏟아내지 그러냐. 죽이고 싶다? 내가 너를? 웃기는 군. 너야말로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지 않느냐? 그 주먹에 물든 피를 봐라."

"⋯ ⋯."

"내가 너의 살아있는 과오(過誤)라면 네 손에 물든 그 피들은 죽은 채 너를 쫓아다니는 업과(業果)겠지."

아.

아, 아아─ 그렇구나.

이 새끼는 스스로 죽기 전까지는 끝까지 이딴 모습이겠구나.

주먹에 맺힌 핏방울은 한 차례 청명의 주변을 적셔가듯 어지러이 퍼졌다. 더는 그의 손에 어린 제 머리만큼의 큰 단풍을 쥐어주던 청문도, 뭐 이런 사형이 다있냐며 핀잔만 주었지만 때때로 제 옆에서 기나긴 의지가 되어주었던 청진도 없었다. 하지만 없기에 할 수 있는 것. 피로 물든 엉망인 손으로 제 얼굴에 마른 세수를 하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매화검존이라고 하는 작자를 노시했다.

위로 치켜든 턱, 아래로 떨궈진 손가락 끄트머리에서는 핏물들이 사이좋게 한두 방울씩. 이 살벌한 대치의 속내도 모른 채 퐁당, 퐁당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새하얀 얼굴이 삽시간에 피로 번진 청명의 얼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검귀(劍鬼), 그 자체였다.

"이런 곳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줄게.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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