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가뜩이나 냉담한데 암향은 무슨 일인고
2020 06 Pradisus 세계관 매유화 엔딩 아주 이후의 이야기
* Paradisus 세계관속 매유화
* 의사>입대>PMC>Paradisus
나를 사랑하지 말았어야지, 붙잡지 말았어야지.
가뜩이나 냉담한데 암향은 무슨일인고
" 선생님! "
" 어, 왔니? "
런던의 거리는 대부분 암울하다. 분명 햇빛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잘 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날씨였다. 하늘이 쨍하도록 맑은 날은 손에 꼽았다. 그렇게 맑은 날이면 매유화는 카페에서 하루가 다 지나도록 차를 마시곤 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차의 수면을 울리는 두드림 외에는 그의 주위를 떠도는 울림이 없었다.
오늘은 그런 맑은 날 중 하나였다. 유난히 화창하고 유별나게 따스한 날. 고아하고 단정한 카페의 창가자리로 드문 햇살이 쏟아졌다. 유리 한 장만을 경계로 두고, 유화는 붉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은색의 빛바랜 반지가 햇살을 닮은 체온을 담아 따뜻했다.
두 외국인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두 사람분의 올곧고 규칙적인, 유쾌하게 변칙적인 발디딤이 일정하게 카페바닥을 두드리자, 익숙지 않은 얼굴들에 흥미로운 시선이 오갔다. 그중 단정한 쪽이 의자를 끌어내며 살갑게 웃었다. 선생님, 청년은 카페 안쪽으로 손짓했다. 금방 갈게! 음료를 주문하던 청년이 그들을 향해 손을 왁왁 흔들었다.
“ 혜연이도 왔니? “
유화는 책장을 넘겼다.
" 연이는 휴가 냈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 그럼 잘 못지냈을까. "
" 하하, 여전하시네요. “
청년은 여상히 웃어 보였다. 변함없는 그를 보니 수고스럽게 타국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여전히 차갑고 무뚝뚝했으며, 여전히 다정했다. 그 점이 가장 달가우면서도 참 반가웠다. 제이드는 유화를 둘러싼 장소를 돌아봤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숲속의 작은 카페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 곳일 것이다. 한 줌의 향기처럼 그와 함께하는 이 장소는, 고즈넉하다던 편지속의 글자가 고스란히 현실로 옮겨진 것만 같았다.
“ 여긴 어쩐 일이니. “
“ 어쩌긴요, 쌤 보려고 왔지요. “
둘 사이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건 뾰족나온 입으로 대꾸하는 청년이었다. 달콤한 팬케이크와 커피, 그리고 스무디가 먹음직스럽게 세팅된 테이블로 손을 옮기며, 혜연은 유화에게 물었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아직도 막, 막, 총쏘고 다니세요? “
“ 어련히 잘 살아. “
“ 선생니임.”
무심한 손끝에서 사륵, 책장이 넘어갔다. 투명한 자안이 자신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다. 유화는 활자에 시선을 두지 못하고 애꿎은 녹빛 가름끈만 노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유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 너희 자꾸 이런 식으로 찾아올 거면 나 잠적한다. “
“ 안그러실거 알아요. 이래 보여도 선생님 수제자들인데. “
제이드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유화는 다 안다는 듯이 웃는 제자들의 코를 확 비틀어주고 싶었다. 이 고얀 놈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라 마땅히 대꾸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유화는 부루퉁한 눈썹으로 차만 한 모금 삼켰다.
“ 런던은 어때요? 세미나 때문에 몇 번 오긴 했는데, 그래도 쌤은 다를 거 아녜요. 네? “
" 우울증걸리기 딱 좋은 날씨지. 한두 번 오니? "
" 하하, 오늘은 운이 좋네요. 선생님도 뵙고, 런던의 햇살도 받고. "
" 좋을 대로 생각하렴. "
아 쌔앰… 또 그러신다, 왜그러세요 자꾸… 그러시면 저희 상처받아요 한국에서 쌤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참새 같은 경쾌한 조잘거림이 혜연에게서 쏟아져나왔다. 제이드는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모습은 자연스럽기 짝이 없어 하마터면 영국인이라 착각할 만도 싶었다. 유화는 공항에서 짐을 강탈당했다가 추격전을 벌인 끝에 다시 찾았다 같은 무용담을,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피식 웃기도 하면서, 가만 들을 뿐이었다.
문득 눈이 부셨다. 가늘게 눈을 뜬 유화는 느리게 손을 들어 감겨오는 햇살을 휘저었다. 창에서 반사된 햇빛이, 반지에 부딪혀 빛나고 있었다.
유화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렸다. 과하지 않게 달콤한 향이 은은했고, 선명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여느 때보다 따사로웠다. 그는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창가로 기울였다. 어깨 위로 드리운 백발에, 그림자가 걷히고 눈부신 머리칼을 한 움큼 차지한 빛이 선명한 경계를 그었다. 열린 문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커튼이 파도처럼 스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주변의 모든 소리가 뭉개지듯 들렸다. 혼미한 감각에 주름투성이의 소리가 잡힌다. 템스강을 따라 흐르는 자전거의 차임벨, 원형을 그리며 부어진 뜨거운 물에 원두가 자글자글 튀는 효과음, 찻잔이 원목에 내려앉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성긴 털실처럼 희끄무레하게 들리는… 아. 눈꺼풀이 무겁다. 유화는 봄바람처럼 따스한 졸음에 저항하지 않는다.
“ …선생님? “
그래, 혜연아.
“ 주…시는…? “
잠시만..잠시만…
*
비가 내렸다. 누군가를 애도하기엔 너무 차가웠다. 허망한 장대비가 내렸다. 누군가를 몰아세우기엔 지독하게 쓸쓸한 비가 내렸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삽시간에 온몸이 젖어, 찝찝했던 불쾌감이 가시고 나서야 유화는 숨을 들이켜본다. 축축한 소매로 흐린 시야를 문질러 닦으니 그제야 눈앞이 약간 또렷해진다. 잔뜩 젖은 머리칼은 뻣뻣해져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유화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댄다. 총구를 버팀목삼아 올려놓듯 지지하는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아마 추운 날씨때문일 것이다. 유화는 얼룩진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쓸어본다. 가냘픈 숨이 헐떡이며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곧 죽겠군.’
누워있는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강물 위에 흘러가는 관처럼 차디찬 뺨이, 아스라히 희미해진 손가락에 와닿았다. 멀어지는 온기의 잔향만이 은은하게 풍겼다.
유화는 눈을 내리지 않았다. 흐트러진 의사 가운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오물과 피로 더러워진 것을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유화는 그의 오뚝하게 솟은 콧날을, 짧게 깎은 머리를, 진흙처럼 물을 맞아 쭈그러든 것 같은 피부를 응시했다. 아마 짙은 안개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젊게 보이는 것은.
궁상이란 궁상은 다 떨던 그는 죽을 때가 다 돼서야 초연하게 보였다. 독한 술을 들이킨 속이 화끈거리는 탓인지, 눈앞으로 떨어지는 눈꺼풀의 빗방울이 굵은 탓인지, 유화는 자신의 손도 얼핏 매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 늘 고왔지, 당신은. "
속이 화끈하니 입이 방정이군. 유화는 그리 생각하면서 물에 젖은 앞머리를 엄지로 쓸어내렸다.
" 처음 만났을 때도, 우리가 싸우고 다시 만났을 때도... “
한없이 펼쳐지는 추억이란 달기는커녕 아릿하기만 했다.
“ 이렇게나 고운 사람이... 왜 날 따라와서. "
사람의 뇌는 사후에도 잠시 활동을 계속한다. 내 말이 들릴지도 모른다. 속으로 탄식을 삼키며 유화는 천천히 얼굴선을 눈으로 좇았다. 낡디 낡은 단어들의 바스러진 잔해만이 흩어진다. 유화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미처 무너지지 못한 것들의 일부분을 띄엄띄엄 흘려내는 것 뿐이었다.
“ ——... “
별것 아닌 이름 석 자에 가슴이 터질 듯 아프다. 심장박동이 세차게 쿵, 쿵,쿵, 살갗을 내려찍는다. 탄알이 복부에 박혔을 때도, 이렇게 화끈거리진 않았다. 불로 지져졌을 때와 비슷했다. 사람의 심장이 이렇게 뛰어서는 안 되는데, 한 번 울릴 때마다 빠르게 피가 돈다.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혈액이 혈관 벽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유화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민다. 빗방울을 맞아 서늘하게 식은 손끝이 찢어진 셔츠 앞섬을 헤치고, 붉은 기운 씻겨 내려간 가슴팍에 맞닿는다.
....쿵.....쿵.....
느리기만 한 박동이 숨을 뚝뚝 흘린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울음섞인 호흡이 힘을 잃어간다. 유화는 손을 거둬들인다. 손을 뻗어 검지손가락을 걸어내어 들어 올리는 늘씬한 총신은 탁한 물 물들어 군청빛이 돌았다. 한 줌 온기 남아있는 가슴팍에 총구를 올린 그는 검지를 당겼다. 방아쇠엔 옮겨간 체온이 따뜻했다.
쨍그랑!
" 선생님! "
" ..혜연아. "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익숙했던 카페의 천장이 흔들거렸다. 매유화는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깨진 유리잔을 치우고 있었다.
" 괜찮으세요? "
" 아..그럼, 당연하지. "
" 어디 편찮으시면 들어가실래요? 저희가 모셔다드릴게요. "
제이드가 유화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셔츠 깃으로 땀을 닦아낸 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테이블을 치우고 트레이를 다시 카운터에 가져다놓는 사이, 유화는 아직도 쏟아지는 햇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함께 페달을 밟는 자전거 두 대가 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벨이 울렸는지 앞서가던 사람들이 옆으로 벌어졌다. 문득 떨어져내리는 물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원두 특유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 옆에선 단란하게 대화하던 연인이 뜨거운 찻잔을 화들짝 내려놓고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비릿한 물냄새와 오물투성이 가운도 이 곳엔 없었다.
‘ ... ‘
매유화는 가만 눈을 깜박였다. 수 초가 흐르고서야 지금 이 곳이,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맞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크로스백을 챙기고 일어난 제자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유화는 책을 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 See you tomorrow, 주인장에게 간단히 목례하고 나선 카페의 너머에는 유화가 틀림없이 보았던, 한없이 따스한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넘치고 있었다.
“ 비가... 내리지 않는구나. “
“ 당연하죠, 지금은 화창하잖아요. “
“ 선생님, 이 앞에 맛집이 있다던데 가보실래요? “
“ 야, 쌤한텐 거기서 거기지. “
“ 조용히 좀 해봐. 선생님, 선생님? 가실거죠? “
“ 그럴까? “
“ 무르기 없기에요! “
“ 쌤, 오늘 제이드 거덜내시죠. 모시겠습니다. “
“ 선생님, 강혜연은 길 몰라요. 제가 모실게요. “
유화는 변함없는 둘의 모습을 눈으로 느리게 좇았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어도 한결같은 대화가 여상히 이어지고 있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화는 그 따스한 서늘함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정도면 자신에게 충분한 것 아닌가. 유화는 앞서나가는 둘을 따라 발걸음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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