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M&M's]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날 (上)

2019 다시 보니까 오글거려서 미칠 것 같은데

 타닥타닥 온전치 못한 것들이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매캐한 냄새가 폐부를 찌르고 하늘은 검붉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우성들은 고막을 찢어내고, 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내 인생의 전부와도 같은 도시는 생지옥이다. 흙먼지 피비린내 자욱한 도시가 그만 세상을 떠나지 못한 이들의 비명과 함께 절망으로 잠겨든다. 이래서는 안되는 거였다. 이럴리가 없었다. 간신히 버티던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날

 

검은 연기들만이 피어올랐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들과 폭격에 맞은 건물들이 현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에 도열한 군인들은 날개모양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쏘았다. 물건을 들고 있는 자는 그 팔을 쏘았다. 두 다리로 멀정히 서 있는 자는 다리를 쏘았다. 크게 울부짖는 자는 그 식솔을 쏘았고, 그마저도 없는 자들은 머리를 쏘아 죽였다. 산등성이에서 보이는 에델슈타인은, 그 어떤 시기의 에델슈타인보다도 잔혹했다. 

 분명, 분명 원군이 오기로 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마다 검이 훑고 간 왼쪽 어깻죽지가 견딜 수 없을만큼 쑤셨다. 

"으윽!"

 숨이 가빠왔다. 땅바닥에 처박힌 몸뚱아리는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원군이 거의 왔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서 멈추면 에델슈타인은 영원히 해방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약속한 장소가 머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될것이다....

나뭇가지에 매어둔 붉은 스카프.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는만큼 희망이 점점 더 차올랐다. 이제 저 멀리 시그너스 기사단의 깃발이 보일 것이고, 그 원군이 에델슈타인을 다시 수복할 수 있는 카드가 될 것이다. 아프고 괴롭지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행복한 일상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다각가면 다가갈수록 차올랐던 희망은 점차 끈적거리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몸을 옮길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럴리 없다는 마음, 갈수록 조급해지는 마음에 아픈 것도 잊은채 발을 재촉했다. 찢어질듯 아픈 몸을 이끌고 스카프 옆에 바로 섰을때는, 그 어떤 것들도 보이지 않았다. 

※ ※ ※ ※ ※ ※ ※ ※ ※ ※ ※ ※

" 함정이다! 함정이야! "

 핵심부로 이어진 문의 문지기를 쓰러뜨리자마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우왕자왕하던 부대의 저 위에서부터 군대가 차례대로 도열해있었다. 살인로봇들로 가득한 겔리메르의 군대. 불투명한 빨간 렌즈가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제 3부대 후퇴하라! 후방은 길을 뚫고 퇴각로를 확보하라! "

" 대장! 우리도! "

" --! 후퇴! "

잘못되었음을 알아챈 지휘관이 소리쳤다. 달려가던 부대는 곧장 몸을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부대와 합류하려던, 합류했던 잠입조들도 곧바로 몸을 숨겨 달아났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사했다. 레지스탕스의 병력이 퇴각하는데 그 누구도 뒤를 쫓지 않았다. 달아날수록 커지는 의구심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누구도 쫓아오지 않았다. 달릴수록 멀어지는 로봇들은 그저 우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에델슈타인 지부내의 큰 회랑에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지부내의 모든 조직원들이 모이는 곳이나 시설내에서 규모가 가장 컸고, 또 출구와는 그리 머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만 지나면 한시름 놓았단 생각에 구겨졌던 얼굴들이 펴지는게 눈에 보였다.


" 제법 많이 모았군. 레지스탕스가 그정도 여력이 있던가. "

한창 달려가는데, 회랑 가운데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신이 섬짓했다. 회랑의 정중앙에는 한 사내가 서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맣고, 검은 케이프를 두른 사내는 허리춤에 검을 한 자루 차고 있었다.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저 자는 위험했다. 가지 마, 안돼. 

" 모두 그만! 전진 금지! 가지마! "

 

 목청 높여 소리치자 대부분이 주춤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작전 우선권은 지휘관에게 있었지만, 직급은 내가 더 높기 때문에 다들 어찌할 줄 모르는 것만 같았다. 


" ....이래서 해커들이란. 사람 수가 안맞잖아. 더 많을 거라더니. "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회랑을 가득 메웠다. 도저히 한 사람이 메울 수 있는 크기가 아님에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귓전을 때렸다. 위험한 사람이라고 머릿속에서 경고등을 울려댔다. 더 나아가다간 모두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였다. 그 증거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규모 전투병력을 앞에 두고도 사내는 바나나 껍질을 잘못 밟은것마냥 투덜거렸다. 긴장감이 가득한 부대 앞에서  가볍게 목을 돌리는 모양새가 마실나온 것 같았다. 주춤거리던 지휘관은 달려왔던 길을 돌아봤다. 그는 사내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거라 여겼는지, 혹은 겁에 질린건지 큰 소리로 전진을 외쳤다. 어쨌거나 작전 우선권은 그에게 있었다. 대열을 이끄는 그를 따라 병력은 사내 주위로 큰 원의 공백을 남기며 달려갔다. 지나치자마자 일이 벌어질거란 예상과는 달리 사내는 지휘관이 자신을 지나쳐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중얼거린 한 마디만 제외한다면.

 " 누가 가도 좋다고 했지? "

 사내는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검은 불꽃이 눈에 아른거리자, 육신이 베어지는 소리만 허공에 흩어졌다. 주위에서 달려가던 사람들은 달려가던 그대로 원 모양의 공백을 남기며 시체가 되어있었다. 오직 양 끝의 두엇명이 시체들의 피를 뒤집어쓴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다. 멀찍이 떨어져있던 사내는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대열의 허리를 잘랐다. 검을 휘두른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다 차분히 가라앉았다. 단정하게 매인 케이프는 피가 튀어 지저분해졌다. 창백하리만치 허연 검신에서 피가 물처럼 흘러내렸다.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낸 사내는 말갛게 웃었다. 

" 으, 으, 으아아악! "

 대열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달려갔다. 지휘관은 그에 휩쓸려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중에는 오줌을 지린 경우도 있었다. 잘린 대열의 후방에 서 있던 나는 들고있던 총을 고쳐잡았다. 혼비백산 달려가던 전방을 주시하던 그는 홀연히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그들 앞에 나타나 퇴각로를 가로막았다. 

" ...도주는 좋은 선택이지. "

 그가 단신으로 가로막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가장 앞에 서있던 지휘관에게 사내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짝 얼어붙은 그에게 사내는 그림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한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천천히 잡아올랐다. 그리곤, 맨손으로 지휘관의 뱃가죽을 꿰뚫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끔직한 관경에 사람들은 뒷걸음쳤다. 뱃가죽을 뚫고 나온 장갑 낀 손이 꼼질거렸다.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손을 빼내자, 잡혀 들어올려졌던 사내는 바닥으로 떨어져 경련하다 젖어들었다. 멀리서 보아도 온몸이 저리한 기세가 퍼져나오고 있었다. 타고난 맹수. 여기서 그를 막을 수 있는건 극소수 였다. 아니, 버티기라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길 수 있을까, 손에 땀이 났다. 

 정적을 가르고 뒤에서부터 쿵,쿵,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을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니 로봇들이 회랑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은 맹수, 뒤는 살인병기. 이보다도 더 진퇴양난인 상황은 없었다. 속에서 욕지거리가 저절로 차올랐다. 이거 아주 제대로 걸렸군.

 여기서 모두 죽을 순 없었다. 다른 곳들도 여기와 마찬가지라면 최대한 병력을 보존해야 후일을 도모할 터였다. 적어도, 죽더라도 시간을 끌 이가 필요했다. 

" 시간이 없으니 얼른 할까. "

 가장 최선의 방법. 가장 많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 머릿속으로 아무리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저 자의 존재는 모든 결과를 씹어먹었다. 그와중에도 저 자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결론을 나는 따를 것임을 ,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게 맞다면, 저자는 강한 자였다. 그것도 악명이 드높은. 그의 약점이 뭐가 있더라? 없었지. 이를 악물며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사냥감을 갖고 노는 포식자처럼 한 명씩 숨을 끊어내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는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다. 

" 대장, 그... "

" 대장으로서 명령이다.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나머지 병력들을 무사히 기지까지 복귀시켜. 이견 안받는다. "

" 아무리 그래도, 그건... "

" 그건 명령 불복종인가? "

" ... 따르겠습니다. "

 내가 그와 싸우기 위해 힘을 끌어올리는동안 팀원들은 조용히 할 일을 했다. 각자 통신기구로 지휘관들에게 짤막한 암호를 수신했고, 무기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긴급상황, 에레브 긴급지원요청바람. 그를 맞이할 준비를 끝낼무렵, 검을 휘두르던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바로, 지금!


{ 궁그닐 디센트 - 발동 }

 순간적으로 끌어올린 힘을 남김없이 사내에게로 쏟아보냈다. 스스로를 소모해 구현한 거신창이 금빛 촉을 반짝이며 그에게 날아갔다. 나와 눈을 마주친 사내는, 초승달같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쾅!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일었다. 이걸론 아직 부족했다. 다시 한 번 거신창을 쏘아보내려는 찰나에, 구름을 찢고 튀어나온 인영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창으로 밀어내자, 바로 눈앞까지 떨어졌던 검은 그 주인과 함께 옆으로 밀려나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위로 거센 충격파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인영의 윤곽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창백한 검신이었다. 검으로 창을 방어한듯 검등이 창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는 방어한 자세 그대로 바닥이 패이도록 밀려나있었고,  검과 함께 엑스자로 교차하여 얼굴을 가린 왼팔은 소매가 터지고 피부가 터지듯 벗겨져 울긋불긋했다. 충격파에 밀려난 사람들이 팀원들의 지휘에 따라 도망치기 시작하는데도 그는 미동 하나 없었다. 나는 장전되어있던 총을 그의 머리에 정조준했다. 

" 이대로 한 발만 쏴도 즉사다. 허튼짓 마. "

 그는 대답대신 검을 든 팔을 회랑의 입구방향으로 휘둘렀다. 어느새 삼분지 일정도 들어와있던 로봇들의 상단이 깔끔하게 잘려 떨어졌다. 눈으로도 쫓지 못할만큼의 빠르기에 겨눈 조준경을 바싹 눈에 붙였다. 

 로봇들이 잘리자마자 천장에서 치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회랑에 웅웅거렸다. 겔리메르. 그 썩을놈의 목소리였다.

[ 도사견!! 지금 뭐하는거야! 빨리 다른 애들 안잡아!!? ]

" 내 일에 상관마라, 겔리메르. "

[ 한낱 개새끼가 어디서 반항질이야!! ]

 쇳소리같은 버럭질이 회랑에서 웅웅거렸다. 불길에 주춤했던 로봇들의 군대가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튕김과 동시에, 회랑의 입구에서부터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화염이 로봇들에게 옮겨붙고, 결국 가장 선두에 있던 로봇들까지 불타올라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이, 이 개새끼가! 당장 저거 치우지 못해!? 이 일은 명령불복종으로 상부에다 항의하겠어! ]

" 그러던가. "

 알아듣지 못할 문자들과 함께 마이크는 꺼졌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그가 손을 튕기자 펑, 하며 검은 불꽃이 터졌고, 스피커도 같이 터졌다. 역시 미친 새끼. 타인의 말은 좆밥으로 취급하는걸 보니 잔혹하다 알려진 성정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 ...시작할까. "

 총이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거리낌없이 움직였다. 그는 나를 보고 나른히 웃어보였다. 내가 오늘 살아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방아쇠에 걸은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질것만 같았다. 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조준을 바로잡았다. 조준경에 흔들리는 내 눈동자가 비춰졌다.

" 마지막 유언은 들어주지. 말하도록, 공격하지 않을테니까. "

 그는 나에게 선심쓰듯 상냥한투로 말했지만, 바라보는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검정색 투성이었다. 하지만 눈에서만큼은 강렬한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방금전 관조적으로 투덜거리던 사내는 어디갔나 싶을정도로 표정이 달라져있었다. 날 보며 휘어진 눈꼬리가 아니더라도, 그의 얼굴에서부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며칠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게 떠올랐다. 군단장들의 충견. 군단장의 직위를 받았으나 특정 군단장을 상관으로 모시며 죽을둥 살둥 한다는 희대의 개새끼, 살육에 미친 군단장들의 앞잡이, 지옥견. 전쟁터에 미친 새끼라던데, 군단장의 직위를 받은 자라면 최소한의 이성은 있겠지. 적어도 싸움터에서 자기가 한 말을 어길 위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걸고 있던 펜던트를 열어 금속성의 작은 액자에 입맞추었다. 신께서 보우하시길.

" 난 오늘 살아서 돌아간다, 군단장 세베루스. " 

" 날 아나? "

" 모를리가. "

" 그렇담 이야기가 짧아지겠는걸."

"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미카엘라 아리안느 셀레스테. "

" 헉, 허억, ...크헉! "

" 생각보다 재밌는걸. 사막 전사들의 힘이 왜 네게 있지? "

 복부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창을 아끼려다 총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온 그에게 복부를 얻어맞은 탓이었다.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은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지만, 발차기에 같은 곳을 얻어맞으니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파오는게,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아프고, 욱신거렸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여기가 뚫리면 그는 곧장 부대를 추격할테고, 그럼 전멸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마쯤 지났지? 10분?15분? 이정도 끌었으면 대부분은 기지로 피신했을까?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검이 다시금 내게로 쏟아졌다. 가까운 거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총신을 부여잡고 막아내는 것밖엔 없었다. 다행히 내 총은 그 어떤 무기에도 뒤지지않을만큼 단단해서, 그가 아무리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혹여나해서 어릴때부터 배워온 방어술도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그는 아무리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는 총에 심기가 불편한듯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쯤되면 빈틈을 보일법하거만 숨쉴틈도 없이 몰아쳐오는 검격은 손이 떨릴정도로 묵직했고, 한손검이라곤 믿기지 않을만큼 빨랐다. 

캉-! 

" 아니지, 힘을 가진게 아니라 그 자체 같기도 하고.. "

 다시 한 번 맞부딪힌 총신이 달달 떨렸다. 손목이 아려왔다. 검에 할퀴어진 상처들이 공기와 맞닿아 쓰라렸다. 몇 번의 공방끝에 누적된 몸의 피로가 독이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은 헐떡이고 있는데, 저쪽은 숨소리조차 고요했다. 꼭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마냥 평온한 그의 표정에, 이러다간 잡아먹히고 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죽어도 후회는 없을테지만 나는 좀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승산없는 싸움에선 어떻게 하라? 튀어라. 내 스승이 알려준대로, 나는 이제 튀는 법을 실행하기로 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 해도 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실력차가 천지차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저쪽이 날 얕보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빈틈이 생길것이다. 그와 맞붙다 보면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그와 한 번 붙을수록 이어지는 검격들은 빠르고 매서웠지만, 반드시 한 템포 쉬는 구간이 있었다. 최대한 뒤로 빠져서, 거신창으로 엄호하며 거리를 벌리고, 튀자. 

캉, 챙, 카칵, 캉-! 

" ! " 

" ! " 


 검격이 느려진 그때, 곧바로 거신창으로 사내를 밀쳐냈다. 그리고 그를 겨누고 총을 쏘았고, 팅 하는 소리를 내며 한 발이 그의 어깨로 박혀들었다. 지체할 틈이 없었다. 곧바로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꺼내들어 그것을 매개로 창을 구현해냈다. 원래의 창은 강력한 에너지 집약체에 가까웠지만, 물질을 매개로 구현을 한다면 물리적 성질도 띄었다. 지팡이를 창처럼 들자, 더이상 지팡이가 아닌 거대한 창이 손에 잡혔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을 봐야했다. 그렇게 그에게로 창을 내리꽂으려는 그때, 


" 이제야 알겠군. "


[ 서버러스 - 제 1격 ]

[ 서버러스 - 제 2격 ] 

" -!! "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내가 꽂으려 했던 거신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휙, 휙 하는 단 두번의 휘두름에 지팡이는 세동강나 바닥에 떨어졌다. 곧바로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드는 검에 황급히 몸을 숙였다. 미처 피하기도 전에 살을 파고든 검의 궤적을 따라 뜨거운 피가 베어나왔다. 거신창을 정확히 누르고 휘두른 움직임, 여유로운 표정과 단조로운 말투. 그는 꼭 내 마음을 읽은것만도 같았다. 

" 너는 나와 동류였어. "

나를 바라보는 눈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것같이 보였다. 

" 안그런가? "

 

 흥겹게 콧노래까지 부르는 그는 무척 신나보였다. 리듬에 맞추어 한 손으로 검을 돌리던 그는 섭섭하단 투로 물었다.

" 어딜가는거지? 섭섭하게. "

" 가기는 무슨. 내가 어딜 간다고. "

" 거짓말 말고. "

 사내는 성큼성큼 나에게 걸어왔다. 입은 분명 웃고 있었는데, 눈은 서늘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들은 요요하고 섬뜩한 검이 내 목덜미에 와닿을때까지도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외형적인 변화는 하나 없었지만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손 끝이 저릿저릿했다. 움직이는순간 그대로 썰려버릴것만같은 감각에 눈동자 하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서있는 건 방금전의 사내였지만, 그가 아니었다.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아까까지만해도 여유롭게 검을 휘두르던 사내는 어디가고 내 목을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만이 그르릉 거렸다. 이제 죽는건가.

 턱 밑을 훑는 서늘한 감촉에, 나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더이상은 거신창을 구현할 기력도 없었다. 거신창을 구현하다가 그대로 숨이 멎으면 어쩌나, 싶어 구현하고 싶지도않았다. 그저 진작에 다했을 수명이 이제야 다했노라고, 생각했다. 뒷수습은 집사가 잘 하겠지. 

" 만나서 즐거웠다, 미카엘라. "

" -이 대가리를 뜯어버릴 개새끼가!! "

" ! "

 사형선고가 들리고, 눈을 더욱 굳게 닫은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눈이 번쩍 뜨였다. 투사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몸이 공중을 날았다. 이대로 머리가 찍혀 죽나, 싶었는데 날 부드럽게 안아드는 사람이 있었다. 

" -저 개새끼는 지 맘대로 우리 대장을 죽이고 살리고야, 개빡치게. XX를 XX해버려서 XX를 뜯어내고 XXX해서... "

" 대장 있다. "

" 아헉! 죄송함다! 그리고 우리 돌아왔습니다, 대장! "

" 늦어서 ㅈㅅ. 복귀 안료. ㅃㄹㅃㄹ ㄱㄱ. "

" 와~  존나 시꺼멓네. 저 폭탄이믄 쟈도 뒤졌을까요? "

" 조심해. 괴물이다. "

" 대장, 괜찮으십니까? "

" 죽을 정도는 아니지. 다들 대피한거 맞지? " 

" 야-스. "

 눈에 익고 익어 지겨울정도로 익숙한 얼굴들. 개성 하나는 넘치는 말투와 그리웠던 목소리. 다들 병력들을 잘 피신시키고 돌아온 내 팀원들이었다. 이렇게 죽나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 눈물이 찔끔날정도로 반가웠다. 날 안아든 이는 조심스레 날 내려놓았다. 

" X팔..... "

 폭탄이 터졌던 자리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팀원들은 곧바로 무기를 고쳐잡았다. 만신창이가 된 내 모습에 다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큰 구덩이 안, 검을 바닥에 꽂은채 한 손으로 붙들어 주저앉아 있었다.

" 저 새끼, 검은 불꽃을 써. 손을 튕겨서 쓰기도 하고, 검에다 실어서 쓰기도 하는데 굉장히 빠르다. 묵직하고, 방심하면 그대로 죽어. 왼쪽 어깨에 총상 하나. "

" 대장, 그건 우리에게 맡기시고, 좀 쉬시요. 우리 없는 사이에 또 얼마나 쓰셨을거 아닙니까? "

" .. 알았어. "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닥에 박히고 폭탄은 직격탄으로 맞은 검임에도 흠집 하나 없이 오히려 더 요사스런 빛을 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감싸던 케이프는 타올라 조각밖에 남지 않았고, 고급스러웠던 스트라이프 정장은 군데군데 찢기고 그슬린 자국이 있었다. 고작 저정도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고작 그 폭발을 맞고도 고작 옷이 상하는 걸 보니 더욱 안믿겼다. 그가 일어서자 높게 묶었던 머리칼들이 풀려저 길게 휘날렸다. 그리고 아주, 아주... 화나보였다. 나는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 우리가 못잡아. 전원 생존 귀환을 최우선으로 둔다. 알았나? "

" 롸져 댓. "

" ㅇㅋ. "

" 맡겨만 주시라요. "

" 존명. "

" 야-스. "

일어선 그는 방금까지와도 비교도 안되는 기세를 무섭도록 내뿜었다. 방금 전의 그가 맹수였다면, 지금은 꼭 마계에 산다는 마물 그 자체같았다. 우리가 서있는 이 공간 전체가 그에게 지배당하는것 같았다. 이대로 개죽음 당할 수는 없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 죽을 놈들이 더 많아졌군. 모두 살아남으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할거야. 

                                                  이들이 모두 죽는건 미카엘라, 네가 자초한 일이다. "

                              " 아까부터 헛소리를 하는군 그래. 누가 죽는다고? 

                                                                                           살아서 돌아가자, 얘들아! "


과거의 나 진짜 미치겠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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