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s]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날(下)
2019 엠엔엠즈 미카엘라 백스 백업
※ Trigger warning : 과도한 폭력, 상해 묘사가 있습니다.
※ 세베루스의 폭력과 성정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쾅!
굉음과 함께 포탄이 터졌다. 한 끗 차이로 비껴나간 포탄과, 피어오르는 여기를 검은 불꽃이 갈랐다. 가까스로 빗겨나간 불꽃은 천장을 녹였고, 그대로 녹아내린 금속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 와, XX 빡세네. XX, 괴물XX여. "
" 욕할 시간 있으면 한 발이라도 더 쏴라. "
" 아~ 네에~~~~~~ XX, 니나 잘하세요. "
" -앞에!! "
코앞으로 날아오는 검격에도 둘은 피하지 않았다. 투닥거리던 둘은 내가 소리치고 나서야 옆으로 굴렀고, 몸 반쪽을 날려보냈을 불꽃은 궤도 그대로 뒤의 벽을 녹여냈다. 검격을 날려보낸 쪽으로 끼어든 ■ ■ 가 주의를 돌리는 사이에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 정신차려 이 새끼들아! 지금 농담이 나와!! "
" 죄송합니다. "
" 시정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문득 그의 근처에서 나뒹구는 □ □ 의 시신이 보였다. 늘 선두에서 가장 많은 적들을 죽이던 □ □ 가 죽어있는 모습은 낯설고, 기괴했다. 언제나 밝기만 했던 □ □ 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몸통에 구멍이 나 있었다. 둘의 시선도 □ □ 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는지, 투탁거리던 둘의 얼굴도 굳어져있었다.
" 윽! "
" 대장! "
그뒤로도 공방은 쉼없이 이어졌다. 입버릇 -아주 험한 욕설 - 과 함께 검을 맞대던 ○ ○ 는 날아간 팔을 움켜쥐고 자리에 쓰러졌다. ○ ○는 잘린 팔과 사이좋게 바닥으로 날아가처박혔다. ○ ○는 몇 번 움찔거리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 가 날 다급하게 부르짖는 소리에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벌써 3명이다. 내가 결정을 미루는동안 죽어나간 사람이. 날 믿겠다고 하며 저 멀리 싸늘하게 식어있는 ■ ■ 가 눈에 밟혔다. 그 너머로 보이는 로봇군대가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군대는 시커먼 불길에 가로막혀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고,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나머지는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를 확실하게 따돌릴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다. 속이 타다 못해 새카맣게 그을려 가는 것만 같았다.
" 후... "
○ ○을 베고 돌아서는 그는 짐승, 그 외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우린 짐승 앞의 토끼와도 같았고, 토끼들의 뜀박질이 굶주린 짐승에게 위협적이면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조준경을 그에게 맞추어도 방심할 수 없었다. 다른 대원들은 내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난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는 검을 고쳐잡고 내게로 걸어왔다. 뚜벅, 뚜벅.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구두 특유의 발소리가 숨구멍을 점점 더 조여오는 듯 했다. 구멍으로 들어온 바람에 그의 머리칼들이 흩날렸다. 조준경안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것이 피부에 와닿았다. 들고있는 총을 언제 떨어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바짝 몸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할 수 있을거라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를 기다렸다. 그가 우리의 덫으로, 살기 위한 마지막 함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생각도, 말도 할 수 없었다. 잭팟이 뜨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빚쟁이 도박꾼보다도 간절하게, 그가 자신있게 걸어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숨이 막혀왔다. 그의 깔끔하고 광이 나던 구두가 붉은 빛을 내는 센서만을 무심코, 혹은 알면서도 밟기만을 기다렸다.
쾅-!!
센서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동시에 ◇ ◇의 마법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검 한자루만을 들고 있던 그에게로 ● ● 의 포탄들도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나는 가장 밑바닥의 수명까지 전부 짜내어, 거대하고 예리한 거신창을 쏘아보냈다. 큰 폭발이 일어났음은 당연하고, 그 위로 자욱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우리는 곧장 몸을 돌려 달아났다.
" .. "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곱게 죽기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회랑을 빠져나가고, 복도를 지나 비스듬히 열려진 출구를 활짝 열었다. 불투명한 햇살들이 눈꺼풀 아래로 쏟아졌다.이제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맞이한건 로봇들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군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사자들처럼, 불투명한 렌즈에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 낄낄낄. 내가 너희들을 빠져나가게 그냥 둘 것 같나? ]
" ...겔리메르. "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있던 로봇에게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작 들은 적은 손에 꼽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한 음절 한 음절마저 지독하게 증오스러운 목소리. 저절로 이가 갈렸다. 동시에 철컥, 하는 소리와 로봇들의 포에서 푸른빛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 내 로봇들에게 죽는걸 영광으로 알아라, 버러지들아. ]
" 웃기- .. "
" 안죽는다. 겔리메르. "
예열된 로봇들 앞으로 한 걸음 나선 건 ◇ ◇였다. 우리의 앞으로 내밀어진 팔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그는 결연해보였다. 거절의 표시로 그의 팔에 손을 올리자, ◇ ◇는 날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 대장. "
" 안돼. "
" 대장. 이건 제 몫입니다. "
" 너 지금 떨고 있잖아. 어떻게 상대한다고? "
" ● ● . "
● ● 는 가만히 내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 ● 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 두렵지만 해야하는 일입니다. 해야함을 알고 있어요, 대장. "
" 웃기지마. 지금 명령불복종인거 알지? "
" ..대장. "
헤이즐넛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의 미소는 슬퍼보였고, 정말 행복해보였다. 나를 지칭하는 목소리는 애달펐고, 내 손을 덮은 그의 손은 단단했다. 나는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떨고 있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살아남을 것만 같았다.
[ 정말, 레지스탕스들은 눈물겨워. 귀찮고, 쓸모가 없지. 하나를 위해 모두가 죽는 꼴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군. ]
잠잠했던 포에서 다시 빛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 ◇는 그의 지팡이로 사신을 불렀다. 시종일관 귀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사진은 그 몸집을 부풀렸고, 이내 우리와 그의 사이를 갈라섰다. ● ● 는 나를 잡아 이끌었다.
" 대장. "
" .. "
" 대장은.. 끝까지 살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죽는다고 해도, 당신만은요. "
" 우린 죽지 않을 거잖아. "
" ..그렇지요. "
" 안죽기로 약속했잖아. "
" 맞아요. .. 네, 그렇고 말고요.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
억지로 목소리를 꾸며냈다. 다행히 내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 냉정한 목소리가, 내 안은 같이 가자고 타오르는데도 내 얼굴과 표정은,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안에서 거세게 해일이 거대한 제방에 가로막혀 몇 번이고 철썩대는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이는 것같기도 했다. 더이상 이어질 말을 찾지 못해, 아랫입술만을 깨물었다.
" 먼저 가서, 아이스크림 좀 꺼내주세요. "
● ● 의 손에 이끌리자, 울음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잡은 ● ● 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힘없이 돌아본 뒤엔 그에게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리고 있었다. 사신의 휘날리는 망토자락 사이로 짧게 깎은 그의 뒷통수가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늘 최전방에서 날카로운 공격을 담당하던 그였는데, 그런 그가 서럽게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러다간 정말로 떠나야할때 떠나지 못할 것 같아 느슨해진 주먹을 꽈악 쥐었다.
" 딸기맛으로요. "
" .. "
" 대장? "
" ...응. "
● ● 는 다시 내 손을 이끌었다. 진짜 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발을 떼면, 결국 ● ●마저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과 시신없는 장례를 결국 치러야 함을, 난 인정해야만 했다. 해방이란 목적아래 저질러온 수많은 죄악들보다도 지금 이순간의 죄책감을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날 이끄는 ● ●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나는 끌려가듯, 몇 번이고 뒤를 바라보며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익숙한 주문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위주의 마법을 구사하는 그 특유의 보랏빛이 터져나왔다. 사신의 낫에 숲쪽의 로봇들이 일제히 타오르고, ● ●은 그대로 달렸다. 단단하게 잡고있는 ● ●의 손은 나로 하여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보다 훨씬 참고 있을 ● ●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꾹 다문 입 사이로 울음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주위가 수풀이 우거진 숲으로 바뀔때까지도 나는 ◇ ◇ 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보랏빛들이 번쩍이고, 언뜻언뜻 사신의 낫이 어른거렸다. 산까지 울려오던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점차 잦아들음엔 풀리려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 이끌어야했다.
" 대장. "
" ... "
" ..썅, 이거 비밀인데.. 나 대장이랑 애들 몰래 꿍쳐둔거 있다. 명장이 만들었다는 그 딸기 아이스크림. "
" .. "
" 딸기맛인거 알면 ◇ ◇가 엄청 화내겠지? "
" ...● ●. "
" ...쓰러지지마, 대장. 대장은 쓰러질 자격도, 애도할 자격도 없어. "
" 나는, ... "
" 그러니까 얼른 가서 아이스크림 먹을 생각이나 해. "
대답해야하는데,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 ●는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정신없이 가파르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오른지 몇 분이나 되었을까. 산등성이가 보였다. 그제야 스쳤던 상처들이며 동여맨 어깨며 아파왔다. 급한대로 옷자락으로 싼 어깨는 붉게 물들어 무엇이 피고 무엇이 옷이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 어흑! "
험한 길에 발을 잘못 디뎠다. 그대로 주저앉아 발목을 부여잡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손을 떼고 살펴보니 접질린 듯 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날카로운 통증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늘 그랬듯이 금방 따라올 줄 알고 앞서 걸어나가던 ● ●는 다시 돌아와 내 발목을 살폈다.
" 접질렀네. 대장, 걸을 수 있겠어? "
" ..한 번 걸어볼게. "
" 내 손 잡고 일어나. "
" .. 고맙, "
푸욱,
● ●가 내민 손을 잡으려는데, 사다리꼴의 금속이 그의 복부를 찢고 튀어나와있었다. 나를 똑바로 마주하던 ● ●의 입에서 울컥, 붉은 피가 내 손으로 쏟아졌다. 뜨뜻한 액체의 감촉이 피부에 와닿기도 전에, 초점이 사라진 그의 눈을 마주하기도 전에, 살을 찣는 소리와 함께 금속은 그대로 사라졌다. ● ●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커헉, 컥, 하며 몸이 잘게 흔들리던 ● ●는 내 앞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손을 내밀고 있던 그 자세로 시체처럼 쓰러져 내가 받아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 ...● ●? "
하늘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맥박이 크게 뛰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 어깨에 맞닿은 ● ●의 입에서는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져나왔고, 지저분한 셔츠는 피로 점점 더 붉어졌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 ●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그를 방치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눈앞을 가리고 숨통을 죄었다. 병원이 어디있지? 어디로 가야하지? 내, 내 주치의는 어디-
" 이제 정말로 혼자로군, 미카엘라. "
.
.
.
아.
저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공포감. 막상 맞닿았을때도 무섭지 않았던 몸이 달달 떨렸다. 찬찬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고급스런 갈색 가죽 구두와, 바짓단이 찢어진 스트라이프 정장바지, 단추가 잠기지 않은 자켓, 흰 셔츠 위 검은 넥타이를 지나 날 보며 뚜렷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사람이 당황하면 머릿속이 백지가 되듯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손에 잡히는 뜨듯미지근한 감촉이, 미끌거리는 붉은 감촉이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만을 말하고 있었다.
"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던건 근래들어 처음이야, 미카엘라. 아끼던 케이프가 불탄건 아쉽지만.. 아주 소중한 것도 아니니. "
" ..세베루스..."
" 그래, 드디어 불러주는군. 나야, 세베루스. "
순수한 열망으로 끓어오르는 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 ※ ※ ※ ※
세베루스는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싸움이라 할 수 있는 싸움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목숨걸고 달려드는 이들은 많았지만, 자신의 욕망이 아닌 모두를 위해 처절한 욕망을 품은 자는 드물었다. 늘 지키려는 자들의 싸움은 보는 맛이 있었다. 세베루스는 그런 자들과의 싸움을 즐거워했다. 자신이 그들을 꺾어 누를때 절망과 공포로 일그러지는 얼굴들을 사랑했다.
그의 눈에는 아무에게도 비춰지지 않은 자책이 있었다. 세베루스는 그에게서 자책을 가장 먼저 읽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도 자신의 총을 고쳐잡는 모습이 귀여워 웃었다. 그럴 능력도 자신도 없으면서도 앞에 나서는 건 만용이나, 자리의 책임이 정당하고 무겁다면 나오는 건 의무이며, 의무이기 전에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며 세베루스, 자신의 앞에 나서는 모습이 신기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전장만은 공평하다 누가 그랬던가. 세베루스는 그가 하는 만큼 자신도 예의를 갖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외부의 개입을 막았다.
무엇보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이목구비가 익숙했다. 세베루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다. 보잘것 없는 마법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었으나, 세베루스에겐 얇디 얇은 막에 지나지 않았다. 블랙윙측에 협력하는 대상회의 주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첩자였나. 세베루스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가 괘씸하게 느껴지면서도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쩜, 첩자인 주제에 이리로 온 용기는 칭찬해주고 싶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여기고 온 거겠지.
중간에 그의 팀원들이 합류했다. 슬슬 흥이 돋았다. 검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적어도 누군가를 죽일만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싸움은 생각보다 길었다. 세베루스는 점점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몹시 아름다웠다. 단순히 정의와 대의를 논하는게 아닌, 자신에게 잔혹한, 잔혹할 삶을 갈구하는 그의 아름다움은 세베루스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날파리는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만 보였다. 어쩌면 이런게 첫사랑일지도 모르겠다고, 세베루스는 생각했다. 그는 미카엘라를 꺾고 싶었다.
모두를 죽이고 혈향을 쫓아 산까지 들어왔을때, 그의 체취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코를 간지럽히고 검이 우는 짙은 향에 세베루스는 스스로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단내를 쫓아가니 넘어긴 그와 그의 동료가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려는데, 자신의 시야를 그의 동료가 막고 있는게 거슬렸다. 세베루스는 그냥 간단하게 치우기로 마음먹었다.
.
.
.
" ..세베루스..."
아.
세베루스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소름끼치도록 섬세한 공포란!
단호하고 생기발랄하던, 동시에 깊은 증오를 품고 있던 눈은 절망에 젖어있었다. 또렷한 검은 눈에 웃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검은 눈은 절망하면서도 살기를 간절히 절망(切望) 하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끓어오르는 욕구에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베루스가 원하는 건 일그러짐이었다. 삶을 바라는 그의 눈이 그만 밝았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단순무식한 세베루스는, 가장 간단하게 실행하기로 했다.
우드득,
" 흐아아악!!! "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짓밟힌 그의 다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아직 그의 눈은 성에 차지 않았다.
" 씨이, 발.. 큭, 아...흐윽, "
그는 한 손으로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의 동료를 받치느라 고통스런 부위를 그저 놔두어야만 했다. 뼈가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상당히 아픈 것은 틀림없었다. 세베루스가 그를 지켜보기도 잠시, 그는 쓰러진 동료를 뉘인채 몸을 숙여 기어가려했다. 어디로 가는가 싶어 세베루스는 막지 않았다. 그가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기어가는 방향은 세베루스도 아는 곳이었다. 나무에 매어진 붉은 스카프. 세베루스는 웃었다. 멍청한 미카엘라.
그는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한 방향으로만 기어갔다. 왼쪽 어깨는 베이고 두 다리는 성하지 못한 터라, 사실상 오른팔만의 힘으로 기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대로 가다간 닿기 전에 혼절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가는 꼴이 우스웠고, 사랑스러웠다. 세베루스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폼은 볼품없었지만, 표정은 단단했다. 세베루슨느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어쩔 수 없다는듯 살레살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구둣발로 그의 허리를 밟았다.
" 아악!! "
" 그만하지. 어차피 소용 없을텐데. "
땅바닥에서 기어가는 그의 눈은 고통으로 눈물이 고여있었다. 혼절하지 않으려 깨물어댄 입술에선 피가 흘렀다. 팔다리를 발발 떨면서도 세베루스를 노려보는 눈빛은 타는 듯 매서웠고, 강렬했다,
" 소, 용없기는..윽! "
" 소용없지. "
세베루스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 네 깟게 함부로 재단할게, 아니지. 세, 베루스. "
" 너, 그리고 동료들, 그리고 레지스탕스까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그래. "
" 죽음이 아니라 미래다. 해방으로 가는..윽, "
" 벌써 몇이나 죽었는지 모르는게 아닐텐데. 의미가 있나? "
" 의미? 너는, 당연한 것에 의미를 두나? "
" 너희는 눈이 뽑힐거다. 사지가 매이고, 혀가 잘릴테지. 그게 오늘 너희가 한 짓의 댓가가 될 것이다. "
" 해방에 맹인과 농인을 가리는 자가 있더냐? "
" 위대하신 분을 숭배하진 못할 망정.. 왜 그렇게 발버둥을 치지? 다른 이들처럼 눈닫고 귀닫으며 살면 되는거 아닌가. 평범하게, 순응하면서. 도저히..너희를 이해할 수 없군. "
세베루스는 쪼그려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성한 곳이 없었다. 그를 보는 내내 세베루스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껄끄러웠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가래가 목구멍에서 끓는 것만 같이 불편했다. 목을 가다듬어도 여전한 불편함에, 세베루스는 눈을 찌푸렸다.
" 그만 좋게좋게 갈까. 정해진 섭리를 거스르면 결국 불이익은 너희에게 돌아온다. "
" 당연한 것을 위한 당연한 싸움이, 섭리에 반한다? 그딴 섭리는 시궁창 개새끼한테 줘도 안먹겠군. "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세베루스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아파서 빌빌대는 주제에 보란듯이 비웃고 있는 얼굴은 더 거슬렸고, 가죽장갑 특유의 마찰음이 경쾌하게 울린 것은 찰나의 뒤였다.
짝-!
" 내앞에서 그 분을 모욕하지 마라, 미카엘라. "
" 듣자하니, 네 주인은 검은마법사가 아니라... "
짝-!
발갛게 부은 뺨의 핏줄이 터져있었다. 그는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었다. 세베루스가 그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렸자 얕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를 바라보는 세베루스의 눈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사랑스럽다는듯이 쳐다보던 그는 온데간데 없이, 오직 흉흉한 눈으로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 .. 어느 군단장이라던데. 걔 밑에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한다며?
" .. 여기서 혀가 뽑히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는데. "
그런 것들에 굴할 미카엘라가 아니었다. 세베루스의 손이 다시금 높게 올라갔다. 검은색 가죽장갑이 마찰음을 울려내기 직전에야 내뱉어진 말에, 그는 그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너. "
" 자유가 뭔지는 알아? "
" !! "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세베루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세베루스의 눈은 초점이 날아간 뒤였다. 공기를 가르며 미카엘라의 뺨을 내리치려던 순간에, 세베루스의 코에 역한 냄새가 스쳤다. 지독히도 향기롭고 신성한 냄새에, 세베루스는 그를 내팽개치고 일어나 흘러온 방향을 주시했다.
" ..역겨운 신수. "
세베루스는 감각을 끌어올렸다. 시그너스 기사단의 복색이 저멀리 보이고 있었다. 선발대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의 인원이지만, 개중에는 제법 쓸만한 자들이 섞여있었다. 살아있는 영혼에 깃든 신수 특유의 향이 세베루스가 있는 곳까지 풍겨왔다. 발걸음의 소리는 그들이 본격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님을 알렸다. 쇠냄새가 희미하고. 걸음이 가벼웠다. 세베루스는 그들의 목적을 잠시 궁리했다. ..하긴. 그쪽도 바빴을테니. 불확실한 상황에서 많은 이들을 보낼 리가 없었다. 세베루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아, 미카엘라.
" 윽! "
세베루스는 그의 배를 걷어찼다. 그는 멀쩡한-그나마-오른팔로 복부를 감싸며, 날카로운 고통에 경련했다. 차마 숨이 쉬어지지 않을정도로 찾아드는 끔찍한 고통에, 시야가 아른거리고 주체하지 못한 타액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세베루스는 나직이 그에게 경고했다.
" 앞으로 혀는 잘 놀리거라, 미카엘라 셀레스테. 다시 만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
그가 전신을 경련하며 그를 바라보기도 전에, 세베루스는 그 자리에서 검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희미한 검은 불꽃을 마지막으로, 미카엘라는 혼절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전신 가득히 누적된 부상과 피로에, 군단장의 발길질을 제정신도 아닌채로 견뎌낼 수가 없었다. 가쁜 호흡과 체액을 줄줄 떨어뜨리던 그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는 통증이 어느정도 잦아든 후였다. 일어설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지만, 겨우 몸을 까딱일 수 는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곳으로 가야할 이유가 아직 있었다. 몇 번이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피부가 까지더라도, 그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더라도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에델슈타인의 시민인데, 추한 꼴로 귀한 손님들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의 계산 안에서는, 그는 아직 에델슈타인이 건재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부러진 다리탓에 자꾸만 힘이 빠졌다. 부들거리는 왼쪽 팔에 억지로 힘을 주어도 영 제구실을 하진 못했다. 안에 받쳐입는 조끼와 먼지투성이 셔츠가 얇은 천인냥 찢어지고, 피로 인해 달라붙고 흙먼지로 잔뜩 더러워졌을 무렵에야 그는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그는 터진 입술을 악물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기적과도 같았다. 잔혹하고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운 감각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허술하게 끼워맞춘 도자기 파편처럼, 한 걸음만 옮겨도 온 몸이 우수수 떨어져내릴 것만 같았다.
언뜻언뜻 바람에 흩날리는 스카프 자락이 보였다. 마침 절벽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바람도 거셌다. 풀어헤쳐진 머리칼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익은 곳이었다. 어릴적엔 여기서 뛰어놀기도 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에델슈타인을 가장 먼저 마주했었지. 문득 자신의 고향이 생각났다. 죽을 사람도 아닌데 주마등처럼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한창 기억들을 떠올리다 현재의 에델슈타인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작전 지역은 도시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고, 자신과 함께였던 부대는 퇴각시켰으니, 설령 작전이 실패했다고 해도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절벽 너머로 에델슈타인의 지붕들이 보였다. 그는 그 쪽으로 다가갔다.
※ ※ ※ ※ ※
온전치 못한 것들이 타닥타닥 타들어간다. 매캐한 냄새가 풍겨오고 불꽃들로 번쩍이는 하늘은 검붉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우성들은 고막을 틀어막고, 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도시는 지옥이 되어있다. 레지스탕스의 총격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피비린내가 가득한 도시가, 미처 죽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에 휩싸여있다. 이래서는 안되는 거였다. 이럴리가 없었다. 간신히 버티던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검은 연기들만이 피어오른다. 항전의 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길거리에 나뒹굴고 공중을 나는 시체들과 폭격에 맞은 건물들이 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날개 모양 브로치를 단 군인들과 그 장교가 질서정연하게 거리를 잠식해온다. 그들은 물건을 들고 있는 자의 팔을 쏘고,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는 자는 그 다리를 쏜다. 크게 울부짖는 자는 그 식솔을, 그마저도 없는 자들은 머리를 쏘아 죽인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되는양, 평온하기 그지 없는 이 절벽위에서 다시 없을 잔혹함만이 뚜렷하게 그려질 따름이다.
분명, 분명 원군이 오기로 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옮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마다 검이 훑고 간 왼쪽 어깻죽지가 몹시 쑤셔온다.
" 으윽! "
숨이 가빠온다. 땅바닥에 처박힌 몸뚱아리는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다. 어쩌면 원군이 거의 도착햇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서 멈추면 에델슈타인은 영원히 해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약속한 장소가 머지 않았으니,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될 것이다...
나뭇가지에 매어둔 붉은 스카프. 스카프 자락이 점점 더 거세게 펄럭일수록 희망이 차오른다. 이제 저 멀리 시그너스 기사단의 깃발이 보일 것이고, 그 원군이 다시 에델슈타인을 수복할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고 다시는 펜마저도 잡지 못한다하더라도, 내가 아주 조금만 더 가면 행복했던 평일을, 업무에 시달려 신음하는 주말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차올랐던 희망이 점차 발밑을 잡아먹고 날 끌어당긴다. 끈적거리는 늪에 잡힌 것마냥 앞으로 나아갈수록 빠져나올 수도 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다. 갈수록 조급해지는 마음에, 서둘러. 서둘러 몸을 재촉한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붉게 휘날리는 스카프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 줌 파편이 떨어져내린다.
쓰러지듯 땅에 주저앉는다. 더이상은 털끝이라도 움직일 힘이 없다. 입을 벌려도 목소리가나오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절벽 위의 하늘은 지독히도 푸르르다. 재채기가 나올 것만큼 파아란 푸르름에, 별안간 눈앞이 부얘지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 도시, 내 고향, 내 사람들.
흘러내리는 것은 목을 타내려가 옷깃을 적신다. 뚝, 하고 떨어져나가는 감각이 있다.
에델슈타인, 나의 에델슈타인.
내가 마을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리를 질러보지만 나오는 것은 없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있는 절망이란 없었다.
이것마저도 내게서 빼앗아가는구나.
가슴이 답답하다. 한평생을 쌓아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것만 같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지?
하늘이 대답했고 대답하던 것은, 대답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북받치는 마음에 주먹으로 땅을 두드린다. 한참을 두드리며 소리없는 괴성을 질러보지만 목소리는 커녕 억눌린 소리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격한 움직임에 벌어진 상처는 붉은 것을 다시 토해내기 시작했다. 돌멩이에 짓이겨져 난 상처는 흙투성이였고, 점차 욱신거리는 통증에 주먹을 힘없이 내려놓는다. 후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며 흙바닥에 동그란 자국들이 번져나갔다. 결국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서야 울음이 터진다.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땅을 울리는 진동과, 이랴! 하고 모는 목소리. 아직 물들지 않은 하늘의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다.
" 에델슈타인측 대표 되십니까? "
단정한 목소리가 울린다. 흘끗 돌아본 뒤에는 시그너스의 기사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밀빛을 닮은 금색의 머리칼. 부드럽게 담아내는 푸른빛의 눈. 순간 그의 뒤에서 내려비치는 햇살에 눈을 찡그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 저희는 에레브의 지원군입니다. 그리고 저는 시그너스 기사단의 메이지라고 합니다. 부족하게나마 한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몸입니다. 이름을 여쭐 수 있을까요? "
지원군.
" ... 혹시 특수부대장이십니까? 지원오기 직전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지원.
머리가 멍하다.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가 않는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드문드문 끊기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 햇살이 찡하게 내려쬐는 그의 얼굴을 뒤로 하자, 뒤에 서 있는 자들은 눈이 마주치자 헛숨을 삼킨다. 너덜너덜한 꼬라지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상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기 때문인지, 큰 상관은 없었다.사실 눈이 마주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중에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날카롭고 뾰족한 촉이 달린 기다란 물건을 움켜쥐는 자도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모르겠다.
" 대답하지 않을셈인가? 답하지 않는다면 널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
적.
" 그만해. "
" 하지만, 스파이일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
" 그만하라고 했다.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창 치워. "
창. 창이었다. 그가 말하자 비로소 보인다. 어느새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를, 그는 손을 들어 저지시켰다. 그의 단호한 눈빛에 병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가 나에게 고개숙여 말한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귀를 가득 메운 소음에, 한 줄기 파동으로 메아리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다.
" 부하의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대장께서 괜찮으시다면 현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
" ... "
" ..아, 제가 알아차리는게 늦었네요. 곧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저기. "
그는 내가 특수부대장이란걸 확신하는 눈치다. 천천히 훑어내리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그의 신호에 주변에 있던 병사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복색이 다른 이들과 다른걸 보아하니 치유계 마법을 쓰는 이 같다. 병사보다 먼저 그는 내게 걸어 다가온다. 그의 움직임을 좇아 눈을 움직이니 어느새 그의 손이 눈앞에 내밀어져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보인다. 꼭, 편안한 기분이 든다. 안심하고 맡겨도 될 듯한, 기묘하고 찜찜한 기분이 든다.
" 지원이 필요한 곳이 있을까요? "
..꼭, 나를 이해하는 것 같다. 내밀어진 손이 몹시 거슬린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떠다닌다. 지원..지원군? 머리가 혼란스럽다. 지원? 지원군? 어디에? 그가 말하는건...어딘가 이상했다. 지원이라니. 갑자기 무슨 지원을 한다고 그러는거야. 지원이 있을리가 없잖아.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손 대신 멱살을 잡아챈다.
" 지금, 누가 누구더러 지원군이라고? "
흔들리는 푸른 눈이 보인다. 부드럽게 웃고 있던 눈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 지원군? 잘도 거짓말을 하는 군 그래. 너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면서, 지원군? 하! 너희는 전멸 뒤의 수습을 지원군이라고 하나? "
" 자, 잠시만요. 전멸이라뇨? "
" 너희만 제때 왔었어도, 개죽음 같은건 없었겠지 시그너스!! "
그래, 씨발. 너희를 믿는게 아니었다. 고상한 여제의 추종자들이 에델슈타인을 도울 이유도 동기도 이득도 없는데 믿는게 아니었다. 내가 반대했을때 모두가 들었어야 했어! 그는 내 손을 꽉 붙들었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모든 거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연기하는게 가증스럽다. 이익과 명분을 저울질하다 결국 이익을 택한 새끼들. 블랙윙과 전면전을 벌이면 생길 손실에 눈감은 빌어먹을 에레브. 에델슈타인은 그 치들 때문에 해방되지 않은 것이다. 그 새끼들때문에!
" 블랙윙에서 달콤한 사탕이라도 주던가? 지렁이라도 받아 처먹었나? "
" 이봐! "
" 주둥이란게 있으면 말을 해보지 그래, 잘나신 기사님 나으리. 우리가 죽어나가는 꼴은 재밌었나? "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 더 짜증이 치민다. 여기서 숨이 끊어지더라도,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들은 내가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머릴 가득 채운다.
" 히익! "
" 저거 뭐야!! "
" ..가증스러운 시그너스. 너희들은 늘 그런식이지. "
등 뒤엔 언제라도 쏘아보낼 수 있는 창이 있다. 이글거리는 이 창이면 너를 꿰뚫고도 남을거다. 점점 더, 몸집을 키우는 창이 상대방의 몸을 찢기 위해 촉을 날카롭게 벼린다. 내 손을 떼어내려는 너의 힘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흔들리면서도 곧은, 역겹게도 찬란하며 푸른 눈이 보인다.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철컥,
탕-!
※
메이지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엠엔엠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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