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법

파우리키

읏차.

까무잡잡한 손이 한창 잠들어 있는 남자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흐린 새벽빛이 수려한 이목구비에 부딪혀 떨어졌다.

나 왔어.

잠든 반려에게 나직이 속삭여 봐도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거슬린다는 듯 미간만 구기자 상체를 기울였던 남자가 작게 킬킬댔다. 더 부를 생각은 없는 듯 입만 몇 번 더 벙긋거린 남자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유러피안식 수트가 기지개를 켠 팔을 따라 팔뚝을 보기좋게 조여왔다.

걸터앉느라 바닥에 늘어뜨렸던 두 다리도 매트리스 위로 올라왔다. 겨우 한두 시간 신었다고 발목이 얼얼하고 발바닥이 화끈거리는 신발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신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걸리적거리는 힐을 발끝으로 밀어놓고, 느긋하게 발목을 겹쳐 올렸다. 적당히 푹신한 매트리스와 이불이 다리 궤적을 따라 옅은 음영을 그렸다. 이만큼의 움직임에도 쉽게 깨는 제 반려는 다행히 곱게 잠들어 있었다. 픽하는 웃음소리가 입술 새로 샜다.

평소였다면 현관에서부터 맞이했을 텐데, 자신이 침대에 앉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여간 피곤한 게 아닌듯 싶었다. 최근 아네스 측과 충돌이 잦아지며 세력을 갈무리하는 데에 있어 종종 불려 나갔다더니. 그렇게 체력 좋은 반려가 뻗어있는 모습을 보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뻔하지. 눈치 빠르게 이때다, 마지막이다 하고 토끼 같은 반려를 잔뜩 부려 먹었을 것이다. 열이 뻗쳤다. 아 확 엎어버려? 남자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언론사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시간이 더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때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특종을 잔뜩 풀 수 있을 것이다. 

무릎을 세워 뺨을 기댄 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취향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부합하지 않았던 얼굴이 별나라의 왕자님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다들 제가 미친 줄로 알 것이다. 그것도 동족을 여럿 죽이고 고문하는 것을 삶으로 삼아온 데다 자신마저 꾸준히 감시하고 날을 갈아온 남자라면 더더욱. 파우닐. 얕은 속삭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손가락 끝으로 은백색의 눈가를 긁은 남자가 웃음을 삼켰다. 자신에게 더는 뱀파이어도, 인간도 필요 없다는 걸 너는 알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모두를 미워할 이유가 더는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는 반려를 보며 느꼈던 울렁임이 연민 때문에 시작된 감정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꼭 연인이나 반려의 형태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널 연민한 순간 어떤 갈래로든 마음의 반절은 네게 두고 살아갈 것임은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지금을 버리고 널 더 행복하게 만드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내가 왜 돈을 잘 벌었는지 알아? 간절해서 그래.

절박한 욕심만이 미래를 움켜쥔다는 문장은 그 자체였다. 그는 항상 두려움에 차 있었기에 손에 쥔 것을 절대 놓지 않았다. 반려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혼자였을 땐 반려가 있기만 해도 세상 두려워할 것이 없었을 것만 같이 보였다. 그러나 갖고 나니 이를 잃는 것이 영영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남자는, 반려가 가끔은 무서워도 옆에 있기만 하면 됐다. 그냥 세상이 전부 멸망해 버려도 좋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며 다정하게 속삭이는 반려에게 자신이 속해 있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괜찮을 것 같았다. 살면서 평생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큰 공포에 처한 셈이 되었으나 괜찮았다. 적어도 자신의 반려는 적선하듯 내려온 애정으로 기워낸 것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주 절박하고 겁이 많은 그는 되도록 반려를 놓아줄 생각이, (반려가 자기를 죽이려 들거나 심장을 뜯어먹으려 하면 재고해야겠지만) 없었다. 이것은 그의 반려도 모르는 사실이었고, 앞으로도 모를 사실이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원하는 것을 따내는 것은 사기꾼의 제1 덕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희푸른 빛이 점점 화사해졌다. 착한 뱀파이어는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 시간이었다. 남자는 침대 옆 협탁의 리모컨을 꺼내 눌렀다. 검은 암막 커튼이 밀려 나오며 빛을 쏟던 창을 가렸다. 장막 너머로 삼켜지는 새벽빛은 남자의 허벅지 위로 도드라진 레이스 자국을 훑으며 결국 사라졌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집에 들어오긴 했으나 아침이면 또 나가야 했다. 나가서, 피치 못하게 바꿔 신은 컨버스 화도 돌려받고 약속한 케이크도 사야 했다. 물론 반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재빠르게 움직여야 함은 당연했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잠들기 직전, 느슨히 풀어진 눈동자가 캄캄한 어둠이 정교하게 깎아낸 얼굴을 내려다봤다. 눈가에 찍힌 점 두 개, 남들보다 큰 송곳니,  도톰한 입술, 단단한 어깨와 허리, 억센 손, 싸늘한 피로 물든 붉은빛 머리카락... 이 모든 건 자신의 것이었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젖혔다. 닐.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까? 널 잃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걸 알까? 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날 살게 하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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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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