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IGO!
2020 호수조 일상개그 단편(?) 연성
똑똑.
오랫동안 닫혀있던 신전의 문이 울렸다.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 신전의 난데없는 방문객에 수행원들은 부리나케 기사들을 찾았다. 신전 구성원들의 출입이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으나, 이 방문객은 명백한 외지인이었다. 즉, 이 곳을 찾아왔다는 점에서 더더욱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애초에 근처 마을은 주기적으로 방문인을 보내는데, 지금은 그럴 시기도 아니었다. 차라리 적이라면 문을 부수고 들어왔겠지만 이 사람은 무척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혹시 정체 모를 적의 침입일까, 바짝 긴장한 수행원들은 애타게 기사들을 불렀다.
"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는 어드밴스드 어스 브레이크.
“ 지금 문 앞에 있다는 거니? "
모두가 후이스라 부르는 이였다. 기사들 중에서도 강하기론 손꼽히는 자로, 수행원은 그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네! 얌전하게 있긴 한데요.. 이상하게 아무런 존재감이 없어요. "
" 존재감이 없다고? 좀 이상하네.. "
" 그쵸! 보통 여기 오는 사람들이면 느껴져야 정상인데… 뭔가 꺼림칙해서요. "
" 내가 한 번 확인해볼게. 문앞에 있다 그랬지? "
" 네! "
문에 가까워질수록, 후이스는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보통 이 정도 거리라면 사람이 있다는 감각도 느껴져야 정상인데, 감각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축축한 습기에 더 가까웠다. 몬스터인가? 후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검은 놓고 왔지만, 어지간한 몬스터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후이스는 문을 열기에 앞서 감각을 퍼뜨렸다. 확실히 무언가가 있는 건 맞았지만… 출렁이고 차가운 감각만이 어렴풋이 잡혔다. 문을 열었을 때 수상하면 치고 아니면 치지 말아야겠다, 속으로 다짐한 그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 오래 기다리셨.. "
문 앞에 있는 것은 길쭉한 장신의 사내였다. 이렇게 큰 사람을 보는 게 간만이라, 후이스는 고개를 높이 들어야 했다. 이 정도면 피어스보다 큰 것 같았다. 말끔하지만 오래되어보이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드러나는 것은 한껏 올라간 입꼬리 정도였다. 전신에 드러나는 거친 흔적들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두른 망토는 미처 털어내지 못한 흙먼지가 하단에 묻어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라기보단 떠돌이 용병에 가까웠다. 게다가 허리에 매단 검까지. 만약 그가 악의가 없어도, 큰 덩치는 위협적이었다. 상대방의 의중을 모르니 섣불리 안으로 들일 수도 없었다. 후이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친다! 실행은 빨랐다. 후이스가 내디딘 바닥이 움푹 패였다.
팡!
풍압이 터지며 남자의 후드를 터뜨렸다. 연약한 옷자락이 폭죽처럼 터져나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쳐 지나간 주먹을, 남자의 손이 받아냈다. 옆으로 기울어진 반투명한 파도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평범한 용병이라면 자신의 주먹을 받아낼 리가 없었다. 위협을 느낀 후이스는 바로 몸을 틀었지만,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을 묶었다.
" 자,자,잠깐만! "
박액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터져 나왔으나, 후이스는 개의치 않았다. 무릇 전사라면 상대방이 애원해도 머뭇거리면 안 되는 법.
" 잠깐은 무슨..! "
그는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뒤로 당겼다. 남성은 더욱 절박해진 음성을 토해내며 한 손으로 후드를 잡아 젖혔다. 그의 드러난 얼굴은 무척 다급해 보였다.
“ 나, 나라네! 그대 정녕 모르겠는가! “
“ ...어머? “
낯익은 얼굴. 이제 보니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 .. 오랜만이야, 후이스 그대. "
그의 오랜친구, 신이었다.
AMIGO!
" 미안, 신아. 너인 줄 몰랐어. "
" 아니야. 나라고 밝혔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
후이스는 응접실에 앉은 신앞에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고마워, 짧은 감사인사와 함께 신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을 삼키는 동안, 후이스는 신의 모습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더 반투명해진 머리칼은 창랑한 바닷물 같다는 점, 복장은 바뀌었으나 여행자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 비스듬히 뉘어놓은 장검의 손잡이 가죽이 많이 닳아있다는 점이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보았더라. 후이스는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었다. 한창 기억에 젖어있을 무렵, 우연히 돌린 눈 끝에서 신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잘 지냈어? 여행은 좀 어때? "
" 즐겁게 보내고 있다네. 그대는 잘 지냈는가. "
" 그럼.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
" 오랜만에 그대들 보고 싶어서 왔지. 오는 길에 신기한 것들도 많이 샀다네. ”
“ 선물? ”
“ 보겠나? ”
신이 다짜고짜 가방에서 꺼낸 것은 코쟁이 안경이었다. 가짜 매부리코가 달린 네모난 뿔테안경은 우스꽝스러운 파티용품 같아 보였다. 아니, 파티용품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함에 틀림이 없었다. 이걸 왜 지금 꺼내는 것인지, 후이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 이건 왜? "
" 우연히 만난 상인에게서 얻었다네. 이걸 쓰면 착용자를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할 수 있지. "
싱글벙글 웃으며 안경을 쓴 신은 이 밖에도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원하는 인형과 세상 반대편에서도 위치를 뒤바꿀 수 있는 이름표, 주문을 외우면 이 세상 누군가의 속옷색을 알 수 있는 마법의 오렌지, 하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모두 임의의 색으로 칠해버릴 수 있다는 초강력 영구 물감, 던지면 무조건 앞면이 나오는 동전, 가만히 두면 유니콘 동산으로 돌아가는 환각을 느낄 수 있다는 야광모빌, 뭐든지 헬리콥터를 달아버릴 수 있다는 무궁화칼…
" 저기, 신아.. 혹시..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
물건들은 한눈에 보아도 싸구려 티가 풀풀 났다. 꼭...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수상한 노인이, 저어기 마침 지나가는 면상 반반한 사람을 붙잡으며 과거에 이게 신들의 물품이었다니, 고대인들의 마법이 걸린 아주 귀한 유물이라니, 미주알고주알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며 쓰다만 물건들을 한아름 쥐여줘서 얻은 진주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이게 웬 횡재야… ! 했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눈앞에 그려졌다. 후이스는 살며시 뒷목을 잡아 눌렀다.
신은 와중에도 끊임없이 물건들을 꺼내놓고 있었다. 아예 노인의 신비한 마법가방이라도 통째로 받은것인지, 자그마한 가방에서 어디서 그렇게 많이 쏟아지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신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고 줄줄줄줄 설명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 응? 뭐라고? "
" 아, 아니야. "
판매 사기를 정정해주기엔 신의 얼굴이 드물게 들떠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대로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싶었다. 어디까지나 친구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니까. 인생, 아니 바다생(?)을 살다보면 사이비도 만나고, 뭐 그런 게 아니겠는가. 이것저것 말하던 신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후이스에게 물었다.
“ 후이스. 이번 주말에 요 근처 마을에서 축제가 열린다던데. 같이 가겠나? “
“ 축제? “
" 제법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네.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
" 글쎄, 가고 싶긴 하지만.. "
후이스는 가만 생각했다. 지금은 축제가 많이 열리는 기간이니만큼, 주변의 곳곳에서 지원요청이 적지 않게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정기적인 토벌과 며칠 전 일어난 산사태가 맞물려 신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쉽게 나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 피어스도 같이 가면 좋지 않겠나. 단둘이 데이트도 하고, 응? "
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 요즘.. "
반짝반짝.
“ 다들 바쁜... “
반짝반짝.
“ 그.. 그,그래, 알았어. 가자. “
반짝거리던 눈동자가 초승달을 그리며 둥글게 휘었다. 말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맑은 미소를 짓는 그에게 들뜬 웃음이 깃들었다.
“ 그대가 그러리라 믿었네. “
하하. 예전과 다름없이 웃은 신은 밝은 얼굴로 이것저것 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축제에 특이한 행사가 있다더군, 가판대들의 음식이 그렇게나 맛있다고 하더라네… 누가 보아도 잔뜩 들뜬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랜만에 그가 웃는 걸 보니 덩달아 후이스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 그럼 피어스도 같이 가는 거지? “
“ 음, 한 번 물어봐야겠지만.., 요즘 일이 많은 것 같던..누구? “
달칵,
“ 후이스? “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짙은 남빛의 남자가 들어섰다. 제복을 목 위까지 바로 채운, 남빛의 눈이 묵직하게 빛나는 우직한 기사.
“ 피어스! "
“ 여기 계셨네요, 후이스. 의논드릴 게 있어 한참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 분은.. “
한껏 빛나던 신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바로 저를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던지, 신의 얼굴은 영락없는 귀가 축 처진 강아지였다. ‘피어스가 그를 잊었다.’ 라는 가정이 꼬리를 물고 물어 저 멀리 절교 바로 직전에, 후이스는 그제야 신이 아직도 그 코쟁이 안경(..)을 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피어스가 보이지 않게, 신에게 눈 옆을 톡톡 짚어준 후이스는 능청스레 몸을 돌렸다.
“ 아~ 혹시 못 알아보겠어? "
“ 네? 저도 아는 분입니까? “
“ 그럼~ 아-주 유명하거든. “
“ 으음... “
“ 처음 뵙겠습니다, 피어스. “
고민하고는 (귀여운)피어스를 보던 그는 슬슬 말해줄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 낯선 목소리가 후이스의 말허리를 잘랐다. 뭔가가 미심쩍은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신은 어디가고 그 자리에 멋들어진 콧수염을 가진 중년이 서 있는 게 아닌가!
‘ 시..신아? ‘
“ 안녕하세요, 피어스씨. 후이스씨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
“ 아, 예.. 반갑습니다. “
남자는 가볍게 목례하고, 손을 내밀었다. 단정하고 격식 있게 차려입은 남자는 어디 귀족가의 사용인같았다. 온화한 얼굴에 깔끔한 수염까지, 신이 아닌 영락없는 중년 남성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악수까지 끝낸 남자는 호호, 웃으며 그럴듯한 통성명까지 했다. 엉겁결에 손을 마주 잡은 피어스는 굉장히 미묘한 얼굴로 그의 말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 제가 두 분 볼일이 있으실텐데, 방해했네요. 어서 볼일 보세요. “
그럼 이만, 반가웠습니다 피어스씨. 교양있게 인사한 남자는 응접실의 소파로 척척 돌아가 앉았다. 그러곤 이쪽을 향해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잠시 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한 피어스는 다시 손안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잠시 방문한 손님보단 지원임무 시의 인력분배가 더 중요했다.
“ 무슨 일이야? “
“ 아, 이번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 말입니다. “
피어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후이스는 남자가 앉아있는 곳을 힐끔거렸다. 남자는 기품있게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흡사 그의 응접실이라고 착각할만큼, 찻잔을 들고 내려놓는 과정이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찡긋, 남자가 힐끗거리는 후이스에게 윙크했다. 몸집 큰 남성의 윙크는... 그다지 외관 연령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신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의 몸 위로 잔상처럼 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
신이가 맞는 건가? 후이스는 당황스러웠지만, 피어스 앞에서 티 낼 수는 없었다.
‘ 아, 혹시.. 안경 때문인가? ’
“ 후이스? ”
“ 아, 미안 미안. 그럼 누구를 파견할 거야? “
“ 네, 일단 … “
* * *
“ 이따 뵙겠습니다. “
“ 응, 먼저 들어가~ “
피어스가 서류를 들고 저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후이스는 문을 꼭 닫았다. 황급히 뒤돌아본 소파에는 중년의 남성이 아니라, 코쟁이 안경을 쓴 신이 차를 우아하게 마시고 있었다.
“ 신아! “
“ 응? “
“ 어떻게 된 거야? 그 안경이란 게 설마.. “
“짐작한 그대로라네. 어땠나? “
제법 뿌듯하게 웃어 보이는 신이, 다시 방금의 남성으로 바뀌었다. 당황한 후이스는 눈을 비비며 크게 눈을 깜박였는데, 그 위로 아른거리는 신의 잔상이 떠올랐다.
“ 그 안경 때문이구나! “
“ 나도 진짜일 줄 몰랐다네. 그대같이 본 모습을 아는 이에게는 얇게 덧씌운 상처럼 나타나는 모양이야. 이름을 부르면 마법은 풀리겠지만. “
“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인척했어? 밝히면 피어스도 반가워했을 텐데. “
“ 그대. 피어스가 요즘 바쁘다고 했지? “
신의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의 입꼬리가 짓궂게 휘어졌다.
* * *
‘ 누구지. ‘
요 며칠간 피어스는 한 고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찾아온 중년의 남성. 후이스의 말로는 자신의 지인이라 했다. 언뜻 보기에 두 사람은 상당한 친분이 있어 보였다. 은근슬쩍 던진 물음에도, 후이스는 그의 친우라고만 알려줬다. 차마 먼저 캐물으면 의심한다고 여길까 말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특히 훤)은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 날 이후로부터 신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온화하고 성정이 부드럽다고 수행원들 사이에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수행원들은 까르르 웃었다. 신전의 잡일도 도왔는데, 힘이 센 지 종종 무거운 짐을 번쩍 들고 갔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엔 어린 수행원들과 함께 노는 것도 드물지 않은 걸 보면 친화력도 상당한 자였다.
‘ 수상하기 짝이 없군. ‘
수행원들이 그를 맞은 날, 사색이 되어서 후이스를 찾았다고 들었다. 신의 사람들이 그 정도로 당황하는 건 흔치 않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그 안에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물론, 후이스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본 사람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강한 분이니. 하지만.. 오래 사는 것중에서 작정하고 후이스를 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원래 영생에 가까운 존재들은 어딘가 맛이 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한없이 착하고 다정한 그분에게 접근하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묘하게 자꾸 마주친다. 시간을 내어 후이스에게 가면, 두 분이서 이야기 한 두번 하는 게 아니었다. 수련하고 있는 와중에도 물이며 수건이며, 후이스의 부탁이라 전하러 온 일도 왕왕 있었다. (차라리 후이스가 오면 좋을텐데.) 분명 단련된 몸은 아니었으나, 힐끔거리는 시선은 정확히 내 검을 쫓았었다. 검을 쥔 손이 아니던데… 동경인지, 변태인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결론지은 피어스는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상체에서 솟아오른 땀방울이 머리칼을 적시고 뚝뚝 떨어졌다. 맞은편의 기사, 훤이 얼굴로 한껏 짜증을 부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맘 같아선 맘껏 짜증 내고 싶지만 누군가 때문에 참는 듯이 보였다. 그는 잔뜩 지친 모양새긴 했으나, 아직 검을 놓지는 않았다.
“ 피어스! 딴 생각하지 마! ”
“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훤. “
말이 끝나자마자, 벌어진 거리를 단숨에 도약한 피어스가 자신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 수고하셨습니다. ”
“ 너도 수고했어. “
대련이 끝나고, 서로 정중하게 인사한 피어스는 자신의 방을 향했다. 오랜만에 훤과 검을 맞대니 복잡했던 생각들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전까지 막혔던 문제들이 지금이라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잠깐 집무실에 들릴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피어스는 후이스의 시간을 어림했다. 한창 업무 중이실 테지만, 언제든지 와도 괜찮다고 하셨었다. 이제 곧 저녁 시간이니까..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도 괜찮겠지. 그동안 둘 다 바빴으니까 같이 별도 보고, 뒤의 정원도…
땀으로 젖은 눅진한 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뽀송뽀송해진 피어스가 후이스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 후이스? 들어가도 될까요? ”
고요한 정적. 몇 번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본능적인 감각이 등골을 타고 기어올랐다. 후이스? 계십니까? 후이스? 그는 문을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다른 곳이라도 가신 건가? 그렇다면 다들 나에게 알려줬을 것이고, 외출하셨다기엔 어딜 나가긴 늦었는데…
주인도 없는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피어스는 애꿎은 문손잡이만 달그락거렸다. 순간의 악력을 이기지 못한, 손가락이 맞닿았던 부분이 안쓰럽게도 살짝 패였다. 나중에.. 뭐라고 변명하지. 눈 깜짝할 사이에 고민거리가 는 피어스는 문짝에 툭 머리를 기댔다. 예전에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고민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 어?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
“ 아.. 후이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지금 계실 시간인데 안 계셔서요. “
“ 후이스님 아까 나가셨는데. 모르셨어요? “
수행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난생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피어스는 얼빠지게 되물었다.
“ ...네? “
“ 전해달라고 하셨었는데, 아직 전달이 안됐나 보네요. 그 자상하신 친구분이랑 토벌 때문에 좀 다녀오신다고.. 좀 먼 곳이라 모레쯤 돌아오신다고 그러셨어요. 좀 더 걸릴 수도 있댔구요. “
“ 아.. 감사합니다. “
“ 뭘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
살갑게 인사한 수행원은 다시 빨래바구니를 들고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맛있게 저녁 먹으라는 인사가 무색하게, 피어스는 다시금 문짝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아예 기대는 게 아니라 콩, 콩, 두드리고 있었다.
‘ 말도 하지 않으시고 외출… 외박… ‘
‘ 그것도 친구분이랑… ‘
‘ 아냐, 바쁘셨으면 그럴 수도 있지. ‘
‘ .......별..누구랑 보지.. ‘
‘ 후이스..... ‘
매우 안타깝지만, 피어스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체를 가졌다면 틀림없이 우..우.. 하는 소리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패이다 못해 반으로 찌그러진 문손잡이를 움켜쥐며, 잔뜩 가라앉은 애처로운 그의 상념은 그날 밤 신전을 오래.. 아주 오래... 떠돌았다.
* * *
“ 뭔가... 이상합니다. “
“ 뭐가 이상한데요? “
하늘빛 머리의 기사, 에드워드가 바늘을 천 바깥쪽으로 빼내며 물었다. 샛노란 청미래덩굴의 마지막 꽃잎이 단아하게 놓인 손수건을 들어보이며, 에드는 어제부터 우중충한 기운을 팍팍 내뿜고 있는 피어스를 바라보았다. 무릎은 달달달, 손에 쥔 펜은 아까부터 제 갈 길을 잃고 애꿎은 귀퉁이만 긁고 있었다.
" 벌써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돌아오시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
' 아하. '
어제부터 유독 실수가 잦다했던가. 에드는 가깝게 지내는 아이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금방 괜찮아지겠거니 했으나 이번에는 꽤 오래가는 모양이었다. 후이스가 알리지 않고 외출했다고 했던가? 에드는 그가 왜 그러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특별한 일은 아닌지라, 그는 태연하게 실로 매듭지으며 물었다.
" 그 이야기라면 나도 들었어요. 불안해요? "
" ... ..네. "
" 후이스라면 금방 돌아올 거예요. 피어스도 그를 잘 알잖아요. "
" 그렇지만.. 다 제 잘못입니다. "
석륫빛 눈이 의아하다는 듯 피어스를 응시했다. 그럴 일을 저지를 성격이 못 된다는 건 에드도 알았고, 훤도 알았으며, 심지어 피어스의 슬리퍼까지 알고 있을 터였다. 분명히 또 자신 혼자 오해를 쌓았거니 싶은 에드는 넌지시 물었다.
" 피어스 잘못이라니요? "
" 그.. 며칠 전에 말입니다. "
(* 피어스의 주관적인 회상입니다.)
' 피어스, 이번 주말에 시간 나? ‘
‘ 안납니다. ‘
' 그래..... ‘
“ 제가.. 그때.. 안된다고 해서 그런 걸 겁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다......... “
“ 거절이 잘못이 아니란 걸 알잖아요, 후이스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도 아니구요. 자꾸 땅바닥만 파지말고, 집무실에나 한번 가보지 그래요? 혹시 몰라, 편지라도 남겨뒀을지. “
“ 주인이 없는 방에 어떻게 함부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
“ 용무가 없다면 용무를 만들면 되죠? “
둥근 안경 너머의 적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맹하니 바라보던 피어스가 무얼 알아챈듯, 벌떡 테이블을 밀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아슬아슬 떨어지려던 찻잔을 붙잡은 에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마주한 피어스에게 에드는 그 특유의 여유로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안경을 밀어올렸다.
“ ^^ "
" 저, 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에드. 나중에 다시 뵐게요! “
휴게실의 문을 열고 조급하게 나가는 피어스의 뒷모습을 보며, 에드는 소리 없이 경쾌하게 미소 지었다.
‘ 나는 청소하러 들어온 것이다. 며칠 동안 먼지가 쌓인 후이스의 집무실을 청소하러 온 것이다. ‘
수행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청소 수레(?)를 끌고서 피어스는 스스로 몇 번이고 되 내였다.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들이미니 한적한 집무실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슬금 문을 열어 달달 수레를 끌고 와, 야무지게 문을 꼭 닫은 피어스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지금은 청소 중이니까. ‘
청소를 한다 > 먼지가 날린다 > 누군가가 들어온다 > 기침을 하고 폐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 고로 잠근다.
암, 타당한 논리이고 말고. 우선 지금은 청소 중이었으므로, 피어스는 창문부터 열기로 했다. 후이스의 집무실은 제법 창이 커 햇살이 잘 들어왔다.
그런 창을 한껏 열어놓으니, 따뜻한 햇볕 냄새와 라일락 향기가 바람을 타고 훅 밀려들어 왔다. 우아한 조명 아래 책이 느슨하게 들어선 서재,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과 옅은 보랏빛의 벨벳커튼. 햇살이 쏟아지는 창 근처에 놓인 푹신한 베이지색 소파와 깨끗한 유리 테이블과 다기들. 바닥에 깔린 금빛 붉은색의 카펫의 무늬부터 푸른 파일에 철해진 서류 몇 장, 언젠가 그가 선물했던 꽃이 꽂힌 화병 아래 정갈하게 놓인 만년필까지. 이곳을 들어올때마다 후이스를 닮지 않은 곳이 없다고, 피어스는 종종 생각했다.
라일락 향. 달콤한 냄새가 묵은 공기를 휩쓸며 집무실을 화-하게 채웠다. 창 앞에 서서 청량한 바람을 마시기도 잠시, 피어스는 책상 위에 작은 종이쪼가리를 발견했다.
‘ 이건 뭐지? ‘
보통 청소하는 이들이라면 이런 쪼가리는 응당 버리는 게 당연했으나, 우리의 피어스는..순수한 청소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한 걸음... 두 걸음 정도는.
「 밤에 잠깐 들렸어. 말 안 하고 가서 미안해 피어스. 정말 미안하고, 미안한데.. 네가 꼭 필요한 일이 있어. 솔직히, 너가 없다면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어. 와줄 거지? 이틀 후, 노을이 지면 목련꽃이 피는 마을 입구로 와줘.
- 후이스 - 」
틀림없는 후이스의 필체였다. 그 특유의 반듯한 글자는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백덤블링하면서 보아도 후이스의 글씨였다. 안도감과 차오르는 환희가 가슴을 간질였다.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곤란하다는 듯 손으로 가리며, 큼큼 기침한 피어스는 꼼꼼하게 편지를 다시 읽었다.
‘ .. 이틀? 오늘이 며칠이지? ’
분명 어저께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랬는데.. 어저께 밤에 오셨던 건가? 그럼 벌써 하루가 지났고, ..오늘이군.
..오늘?
오늘?!
‘ 지금이 몇 시지?! ‘
째각, 째각. 서재 위에 걸린 시계는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피어스는 테라스로 뛰쳐나갔다. 저 멀리서 붉은 해가 뉘엿뉘엿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큰일 났다. 늦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피어스는 황급히 열어놓은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 만약에, 날 기다리시다가 지쳐서 가버리신다면.. ‘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머리는 나쁘고 나쁜 일들만 계속해서 떠올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에서 외출용 망토만 잡아챈 피어스는 목련꽃이 피는 나무로 달려갔다.
그곳이라면 잘 알았다. 신전 인근, 이번에 축제가 열리는 작은 도시의 입구와도 같은 곳이라 신전의 일원이라면 소풍을 못 해도 백 번은 나갔던 곳이었다. 그 도시는 신전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걸음으로 제법 떨어있다뿐이지, 그의 걸음은 그것보다 빨랐다. 익숙한 길을 성큼성큼 달리자,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 만약, 바쁜 시간을 내어 오셨는데 다시 가버리셨다면... ‘
그가 그곳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은 꼬박 하루가 걸리는걸 고려하면 놀랍도록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달리는 내내, 피어스는 자신이 하루를 달리고 있다고 느꼈다. 발음은 조급한데, 정작 자신은 지나친 나무를 또 지나친 것 같았다. 시간이 느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공기 하나 없는 우주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이스와 있을 땐 그렇게 빠르던 시간이, 고작 한 초를 넘기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가. 당신이 없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 초가 두 배는 느려진 거 것 같았다.
자신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더는 아무것도 알 것이 없고 이해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요 몇 년간 들어서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예를 들어 후이스와의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분명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안개가 낀 듯 분명히 알 수 없었고, 자신을 향했던 그의 눈빛들을 저는 헤아리지 못했었다. 우리가 맞대었던 검에는 무엇이 어려있었는지, 처음으로 손을 잡던 날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었는지, 맞닿았던 체온은 왜 그렇게 따뜻했는지, 왜 우리가 등을 맞대면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지. 피어스는 그 모든 것들을 혼란스러워했다. 온통 알 수 없었다.
어찌보면 신에 한없이 가까운 이들이, 인간이 아닌 규격외의 존재들이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할 수가 있나. 우리는 완전무결함에 가까워야하는 것 아닌가. 이 또한 신의 안배인가. 그렇다면 완벽하지 않은 우리를 신은 왜 창조하셨나. 우리는, 나는, 당신을 담아도 괜찮은 걸까. 당신을 품에 안고 엮은 화관을 쓴 당신을 그리고 은하수 아래 이마를 맞대고 되는걸까. 당신을 사랑해도 되는 걸까. 신께서는 그걸 허락하신 걸까.
자신이 살아온 생의 시간만큼 뛰었다고 느껴질 때쯤, 피어스의 눈이 다채로운 색채로 물들었다. 답지 않게 화려한 빛으로 가득 찬 도시의 입구에, 만발한 목련이 다홍빛을 드리우며 하늘하늘 피어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산들바람에 붉고 하얀 비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만큼 붉은 심장박동이 점점 세차게 뛰었다.
익숙한 인영은 하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눈처럼 내리는 비를 올려다보며, 누구보다도 고아한 자태로. 아주 오랜 밤 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온 것처럼, 서있었다.
눈과 함께 날린 푸른빛 머리칼이 피어스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짙은 바다 위로 달빛이 드리우듯, 반짝이는 장식들이 그의 머리칼 위에서 넘실댔다. 분명, 땅을 딛고 달리고 있음에도 피어스는 자신이 달리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우주를 달리는 것 같았다. 바람에 나부끼던 망토 자락도, 거칠게 달아오른 숨소리도 심장소리도 전부.
고요.
숨을 쉴 수 없었다. 매질이 되어줄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당연했다. 이곳은 우주니까. 오롯이 푸른빛과 보랏빛만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나의...
“ 후이스! “
익숙한 웃음, 익숙한 눈매, 익숙한 향기. 유일한 별이 피어스의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피어스는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하얀 손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눈이 그의 손에 부딪혀내렸다.
“ 왔어? “
고운 청발을 한 갈래로 땋아 내린 후이스는 꽃으로 엮은 화관을 쓰고 있었다. 은은하게 뿌려진 조그마한 장식들과 가루가 은하수처럼 그의 머리칼에서 빛나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쪽지를 방금 봐서.. “
“ 아니야.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
고요하게 웃은 후이스는, 정말로 후이스였다. 원인 모를 안도를 느끼며, 피어스는 숨을 골랐다.
“ 나 진짜야. 그렇게 뚫어지게 안 봐도 되는걸~ “
“ ..네. 그럼요. “
등 뒤에 있던 후이스의 손이 슬쩍 피어스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피어스는 당황스러워해도 손을 빼지는 않았다. 노을의 햇살 때문인지, 달려서인지는 몰라도 얼굴이 더웠다. 그를 보기 민망해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는데, 갑자기 후이스가 손을 붙잡고 몸을 돌렸다.
“ 거짓말로 불러내서 미안해. 오늘 축제가 열린대서.. 너랑 꼭 와보고 싶었거든. 다들 바쁘다보니까.. “
“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다고 하고. 아, 너가 보면 좋아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피어스? “
어물거리는 피어스의 어깨너머로 해가 저물어갔다. 일순간 쏟아진 환한 빛에, 후이스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눈을 찌르는 햇살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앞을 바라본 후이스는 답지않게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 또, 오늘 밤엔 불꽃놀이가 열리고 내일은... “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이 피어스를 앞질렀고, 그보다 조금 느린 걸음이 후이스를 뒤따랐다. 그리고 같은 템포의 숨을 들이켜며, 둘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다행이다. ‘
‘ ..다행이야. ‘
둘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얼굴을 네게, 당신께 들켰더라면.. 둘은 앞을 향해 걸었지만, 반대방향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탓에 상대가 어딜 보고 있는지는 몰랐다. 환한 노을을 등지고, 피어스와 후이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무르익은 축제의 이튿날을 한창 즐겼다. 내일이 하이라이트라 그런지 유난히 떠들썩한 사람들 사이로 둘은 점포를 하나하나 들렀다.
그렇게 북적북적한 인파를 뚫고 튀어나온 후이스의 품에는 다트로 얻은 거대한 곰인형, 선남선녀라며 얻은 닭강정 한 컵, 힘으로 내리치는 망치게임의 기계를 부수고 얻은 영원히 피어난 라일락과 원하는 모양으로 피울 수 있는 1회용 불꽃놀이세트..가 있었다. 반면 피어스의 머리에는 하트뿅뿅 머리띠(후이스와 세트다)와, 후이스가 직접 뺨에다 그려준 남색 곰돌이 페이스페인팅, 대장간 특별 서비스로 얻은 10년 무상 A/S 마법 숫돌, 서역에서 들여온 스티커사진이라는... 요상한 마도구, 귀를 대면 바닷소리가 들려오는, (이상한 코쟁이 안경을 쓴 잡상인에게서 산) 끊임없이 파도치는 투명한 수정(그 안에는 탄자나이트와 자수정까지 있었다!)..이 쥐여져 있었다.
“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하, 신나게 놀았네. “
“ 네, 저도 그래요. “
“ 즐거웠어? “
“ ..네. 후이스덕분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지금쯤 일하고 계실 다른 분들껜 좀 미안하지만요. “
“ 몰래 비밀로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
“ 그렇겠죠? “
풍선을 두 손에 나누어 들고 두 사람은 마을 광장 정중앙의 분수대에 앉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방금 받은 따끈따끈한 닭강정을 나누어 먹었다. 얻어낸 곰돌이의 이름을 브리트니 킹스제네럴과 양아공파 37대손 마춘상 사이에서 한창 옥신각신할 무렵이었다.
파앙!
기민한 피어스의 감각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덧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겉보기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피어스의 눈에는 하늘을 감싼, 불투명한 마력의 막이 선명하게 보였다. 막이 씌워지는 부분부터 새파랗던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음습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벌떡 일어난 피어스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갖다 대며, 37대손 마춘상을 옆에 내려놓았다.
“ ..후이스. 느끼셨죠? “
“ ...후이스? “
뒤를 돌아보자, 분수대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썼던 머리띠와 영원히 피어나는 라일락상품만이 놓여있었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린 피어스의 기세가 바로 사나워지기 직전, 마을 전체를 가르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 안녕하신가! 나는 이 마을을 점령하러 온 대마왕, 루시퍼 님이시다! ]
[ 그리고 나는 바알이지. 오늘! 바로 이제부터 이 곳은 마왕령임을 선포한다! ]
마을 광장의 허공에서, 우락부락한 형체를 가진 이 두 명이 망토 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소개한 바와 같이 흉측한 외형과 거대한 날개를 가진 그들의 목소리는 마법처럼 귓가에서 들리는 듯 생생했다.
피어스는 그들이 후이스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꾸욱, 피어스는 로브 안쪽에 숨겨두었던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 이 도시 전체가 환상마법의 범위 안이다.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야. ‘
‘ 저들의 전력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니 신중해야 한다.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
‘ 우선 신전에 도움을 청하자. 그리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는데... ‘
피어스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검에 손을 얹었다. 사람 수를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 피어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 이번년엔 이거구나.. 고생깨나 했겠는데. '
' ㅋㅋ 야 이번엔 각오해라? 내가 이길 거라고. '
' 와 근데 진짜 실감 난다. 나도 이정도 마법사만 될 수 있음 좋겠는데. '
이긴다? 실감? 마법사? 등 뒤에 들려오는 소곤거림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패닉에 빠지거나, 패닉에 빠지거나.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전부 즐기는 듯 보였다.
[ 자아! 우리는 자애로우니, 특별히 그대들에게 벗어날 기회를 주지. 바알! ]
설마, 매혹마법을 쓸 수 있는건가. 보통 사특한 자들이 아니군. 침을 꼴깍 삼킨 피어스는 검을 고쳐잡았다. 저들의 허점을 노릴 때,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피어스는 뛰어오를 준비를 하며, 검을 반쯤 빼내 들었다.
그때였다.
쿠-웅!
일순간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무언가에 들이받은 듯, 서 있던 모든 것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 으아악! “
“ 뭐야! 이런 건 말 없었잖아! “
피어스는 간신히 버텨냈다. 크게 흘러넘친 분수대의 바닥에 마춘상이 반쯤 잠겨있었다. 설마 밖에서 대규모 마법을 시전 중인 건가? 이 근방에 그런 실력자가 있던가? 여러 수를 헤아린 피어스는 고개를 들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 그 곳에 있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허공에 서 있던 자칭 마왕들의 표정이 얼핏 굳는 걸 피어스는 보지 못했다. 작은 소리로 바알에게 귓속말한 루시퍼가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걸 본 피어스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지금 사악한 무언가를 꾸미러 가는구나!
[ 잘 들었겠지? 이 진동은 우리 마왕들의 군대가 밀려오는 진동이다. 이 진동이 세 번 울리면, 너희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
“ 아, 효과였네.. 그런데 효과치곤 너무 강하지 않나? '
“ 어차피 이거 마법이야 등신아. “
“ ...하긴, 뭔 일 있겠냐 ㅋㅋ “
쿠우-웅!
조금전보다 더 큰 진동이 울렸다. 땅이 흔들리고 건물 일부가 부스러졌다. 세워둔 점포들의 물건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 뭐야! 원래 이렇게 빨라? “
“ 좀.. 이상한데. “
“ 뭐 문제 생긴 거 아니야? “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그가 나서야 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판단한 피어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분수대 끝을 밟고 뛰어올라 베어내는 간단한 시뮬레이션이 흘러갔다.
키이잉, 피어스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신의 힘이 그의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피어스는 힘껏 뛰어오르..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졸지에 폴짝 뛰어버린 피어스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홍빛 가루가 공중을 잠식하고 있었다. 피어스는 그 가루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최상등급의 몬스터 토벌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가루였다.
수면향.
반사적으로 숨을 멈춘 피어스는 소매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라면 이정도 향엔 크게 영향받지 않았으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침음한 피어스는 검을 움켜쥐었다.
‘ ..? ‘
그런데 가루의 진행 방향이 이상했다. 만약 이 수면향을 마왕이 뿌렸다면 적어도 그의 주위나, 마을 중앙에서부터 흘러나왔어야 했는데 이건 특정한 방향에서부터 퍼지고 있었다. 설령 마법으로 위치를 조정했다 해도 그로부터 파생되는 마력의 흐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남은 가설은 단 하나였다.
지금 이 마법밖에 수면향을 뿌리는 몬스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몬스터는 홀로 다니지 않았다. 독립적인 최상급의 몬스터들을 향으로 홀려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지금 그 녀석이 밖에 있다면, 한 마리 한 마리가 재앙으로 불리는 몬스터들이 떼로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 미친놈들. ‘
아주 이 마을을 말아먹으려고 작정했군. 저절로 이가 갈렸다. 이대로라면 불 보듯 뻔한 사람들의 죽음에도 화가 났지만, 신전의 관할범위 안에 있는 마을을 습격한다는 것 자체가 신전을 적으로 둔다는 뜻이었다. 현재 이 상황에서 마땅히 생각나는 단체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서둘러 지원요청을 하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빠르게 판단한 피어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건물 위로 도약한 피어스는 지붕을 타고, 진동이 가장 크게 들렸던 외곽으로 향했다. 환상마법에 틈을 내고 빠져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불과 몇백 미터를 남겨두고 그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 막지 마라. “
[ 미안하지만... 그 앞은 지나갈 수 없어. ]
쾅!
새카맣던 하늘이 다시 흔들렸다. 한결 약해진 마법에, 피어스에게도 저 너머의 광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높이만 해도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괴수들이 한 방위를 메우고 있었다. 개중에는 그가 상대했던 것들도 언뜻 보였다. 하나같이 까다롭고, 높은 지능을 가진 개체들뿐이었다.
피어스는 다시 뛰어갔다. 캉! 귀를 찢는 금속음이 피어스의 검과 맞부딪혔다. 만만찮은 힘에 밀려난 그는 손잡이를 고쳐잡으며 다시 앞으로 발을 내대뎠다.
[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지금 가면 안 돼. ]
“ 장본인 주제에 말이 많군. “
[ 피어스, 제발.. 지금은 지원요청부터 해야 해. ]
“ 내 이름도 아나? ..대답해라. 너는 어디에서 왔지? “
계속되는 검의 공방은 빠르고, 치열했다. 어지간한 이들도 쉽사리 눈으로도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큼, 혹은 생각보다 더 강한 마왕의 실력에 피어스의 표정이 뒤틀렸다. 게다가, 공방이 이어질수록 피어스는 짙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마왕의 검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몹시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캉!
더 세게 휘두른 피어스의 검이, 마왕 바알에게 막혔다. 피어스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지금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다. 후이스가 안전한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고작 여기서 발을 묶일 순 없었다.
더 매서워진 검이 마왕의 허점을 노렸다. 매우 날카롭고 강렬한 검이 찔러들어왔으나, 그 검은 번번 가로막혔다. 그 모습조차 익숙한 대련을 떠올리게 해 피어스는 기분이 더욱더 가라앉았다.
파삭- 시이잉!
시커먼 하늘이 거두어지며, 일순간 거대한 빛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점멸된 시야에 치열하게 싸우던 둘은 뒤로 물러났다. 하늘을 올려다본 바알의 얼굴이 한층 굳어졌다.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던 피어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환상 마법이 깨졌다. 피어스는 드러난 광경에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도 위험한 몬스터들이 많았다. 비행하는 개체부터 풍뎅이를 닮은 개체, 코뿔소를 닮은 개체.. 그 수도 다양했다. 신전의 기사들이 함께한다면 토벌하긴 어렵지 않겠지만, 혼자라면 버겁다 못해 목숨을 장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변에 바다가 없어 물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없다는 점이었다.
와중에 피어스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늘이라 보았던 것은 반투명한 반구의 물이었다. 그 물이 마법 대신 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물?
안력을 높여 주변을 두리번거린 피어스는 저 멀리 서 있는 한 사람의 인영을 알아챘다. 방금까지 루시퍼라 자칭했던 자였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마왕의 것이라 봤던 것과는 달랐다. 더 체구가 작고, 킨 머리칼이 흩날렸으며, 창랑하게 터져 나오는 기세에 그 몬스터들이 주춤거렸다.
“ ..! “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몬스터들을 지휘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대적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그에게서 터져 나온 섬뜩한 기운은 막에 막힌 듯 직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으나, 저 괴수들조차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 피어스. ]
“ 당신들.. 뭡니까. 목적이 뭐예요? “
괴수들이 만들어낸 불덩이, 낙뢰들이 도시로 쏟아졌다. 텅! 쿠우웅! 굉음이 연이어 울리며 막이 크게 출렁이는 모습은, 흡사 멸망이라도 온 듯 착각하기 좋았다.
[ 원래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지. ]
“ 무슨 소릴 하는겁니.. “
바알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끌렀다. 바닥에 무거운 벨벳이 떨어지며, 체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얕은 빛무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뜬 바알은 더이상 마왕이 아니었다.
“ ...! “
목련꽃을 닮은 입가가 올라갔다. 미안하다는 듯 맑은 자안과 함께 눈썹이 내려갔다. 성스럽게 빛나는 활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피어스는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이, 오직 그에게만은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쿵!
다시 굉음이 울렸다. 아까부터 몇 번이고 막을 두드려대던 괴수의 날카로운 꼬리가 막을 기어코 찢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짖는 외침이 어렴풋이 들렸다. 쿠웅, 그들이 서 있던 건물이 흔들렸다. 바닥을 반쯤 꺼뜨리며 착지한 전갈의 꼬리 위로, 극독을 머금은 불덩이가 정확하게 피어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 피어스!! “
그의 부름에 얼빠진 정신을 부여잡은 피어스는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피하기엔 늦었으니, 정면으로 막아내려는 것이다. 빠르게 뜨거워지는 대기에 마른 침을 삼킨 피어스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피어스가 본 것은 맹렬한 불이 아닌, 뒤로 붕 넘어간 세상이었다.
“ 피어스, 미쳤어? 저걸 어떻게 막아내려고..! “
바닥에 엎어진 피어스가 정신을 차리는 데까지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코끝에 은은한 향이 스쳤다. 그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자신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라일락을 닮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아. '
자신을 밀어 넘어뜨린 그가, 제 위에서, 저를 위해서, 저에게 화난 눈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초점이 흐렸다. 피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느슨해진 검의 날이 달그락,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 정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피어스? “
“ 정말.. 맞으신거죠? "
“ ..피어스. “
“ 그러니까, 정말.. 후이스, 맞으신거죠? “
후이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피어스를 바라봤다. 비스듬히 빗겨간 시선은 자신이 아닌 그의 손등이었다. 반쯤은 울음 기가 섞인 것도 같았다. 후이스는 눈가를 가린 손등을 붙잡고, 아래로 내렸다.
“ 피어스. 나 봐줄래? “
잔뜩 일그러진 눈썹이 드러났다. 그다음엔 발개진 눈가와 물먹은 남빛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후이스는 힘없이 딸려온 손등을 붙잡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가 나누던 익숙한 온도는 더 따뜻했다. 분명 검을 잔뜩 움켜쥐어서 그랬을 것이다.
“ 내가 누구라고? “
“ ..후이스.. 입니다. “
작은 꽃이 피어나듯, 느린 어조로 피어스에게 물은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피어스를 꼭 껴안은 손이 다정하게 그를 토닥였다.
“ 나야, 후이스. 놀라게해서 미안해. “
피어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꼼지락대는 그의 손이 자신의 등을 감싼 건 느껴졌다. 손보다도 더 따뜻한 포옹이었다. 후이스는 남몰래 조용히 웃었다. 미안한 것은 미안한 거고,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고작 며칠이지만 자신은 이 온도가 그리웠다. 이 온도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가.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더 그리웠을 테지만, 저에겐 영 탐탁잖았다. 오래 기다려 더 애틋하기보다 이 따뜻함이 늘 제 곁에 있었으면 했다.
“ .. 후이스. “
“ 응? “
“ 피하세요. “
말이 끝맺어지자마자 피어스가 후이스를 내던졌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그는 반사적으로 활을 꺼내 들었다. 저 앞에서, 피어스가 전갈괴수의 집게를 바닥에서 올려 막고 있었다.
후이스는 곧바로 시위를 당겼다. 그의 손끝에 반투명한 화살이 잡히자 그대로 놓았다. 휘이잉! 돌풍을 일으키며 날아간 화살이 그대로 집게에 박혔다.
“ 피어스! 얼른 이리로 와! “
자세 그대로 세 발을 쏘아 보낸 후이스는 다시 시위를 크게 당겼다. 주위의 빛을 흡수하듯 주변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예기를 띤 화살이 나타났다.
빠르게 벗어난 피어스가 후이스의 옆에서 자세를 취했다. 제법 거대한 전갈은 막이 찢어질 당시에 넘어온 조무래기 같았다. 물론 최상급의 괴수들에야 비하면 조무래기지, 수십 명은 족히 죽이고도 남을 녀석들이었다.
피이잉!
단 한 발에 주변의 공기가 찢어졌다. 으레 만화에서 나올법한 연출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시위를 떠나간 화살은 빛이 산란하듯 수백 갈래의 화살로 분화했다.
파파박!
멋모른 채 날아오던 한 발에만 집중하던 전갈은, 몸에 속속들이 박힌 화살들에 고통스럽게 소리 질렀다.
먼지 구름을 가르고 인영이 전갈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푸른 이펙트가 날을 세워 올려 긋자, 섬광과 함께 구름이 갈라지고 집게에 쩌적 금이 갔다. 전갈이 다른 집게로 내려치면 피어스는 맞받아쳤다. 그의 힘에 튕겨 나간 집게를 벌리고 꼬리를 휘두르면 측면에서 날아온 화살이 번번이 가로막았다.
만만찮은 상대는 아니었다. 지능이 높을 뿐만 아니라 꼬리를 휘두르면 산성을 머금은 불덩이가 떨어졌다. 불덩이가 떨어진 곳은 불이 옮겨붙진 않았지만, 형체를 알 수 없게끔 맞은 자리가 모조리 녹았다. 스치기만 해도 피해가 클 것은 자명했다. 때문에, 후이스는 화살을 당기다가도 몸을 굴러 피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처음에 당황해서 페이스가 말렸다뿐이지 둘은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조금씩 압도해가고 있었다. 집게가 쇄도하는 속도를 피어스가 충분히 따라가고 있었다. 아니, 따라잡다 못해 조금씩 넘어서고 있었다. 집게에 붉은 상흔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내 불안해진 전갈이 기습적으로 집게를 뻗었다.
턱, 그의 검이 붙잡혔다. 피어스는 손목을 비틀었지만, 집게가 반쯤 우그러지면서도 꽉 잡은 검을 놓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피어스의 머리로 맹독을 머금은 꼬리가 쏘아졌다.
팍!
시기적절하게 쏘아진 화살이 전갈의 꼬리를 터뜨렸다. 계속 데미지가 누적된 상황에서 강한 힘을 받으니 통째로 터지지 않는게 이상했다. (후이스의 힘에 견주어볼 때)
움직임이 일순간 멎고, 피어스가 가운데를 내리긋자 전갈은 반으로 갈라졌다. 부르르 떨던 집게가 힘없이 늘어지고 나서야, 둘은 날선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 후이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덴 없으시죠? “
“ 그럼~ 너는, 괜찮아? “
“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지금 여기서 출몰하는 녀석들이 아닌데.. “
“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
“ 저 밖에 계시는 분 말씀하시는 겁니까? “
피어스는 막 밖의 인영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막은 괴수들의 체액과 피로 물들어, 본래의 맑은 물이 아닌 검붉은 것들이 쉼없이 흘러내렸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후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너도 아는 사...이런! “
그 자리에서 튀어나와간 후이스는 지붕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괴수가 휘두른 앞발에, 무언가가 막으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막이 탄성 좋은 트램펄린처럼 움푹 눌리며, 인영의 그림자가 도시 위로 비쳤다. 막 위에 올라선 후이스는, 반구로 돌아간 막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의 손목을 잡아챘다.
“ 오, 이런. 피어스는 무사한가? “
“ 지금 그게 먼저야? “
“ 그대가 말을 잘해주지 않으면 신전에서 벌설 것 같단 말일세. “
후이스가 그를 들어 올리자, 그는 몸을 바로 세우며 막에 발을 디뎠다. 막의 경사는 가팔랐지만, 서있는 이들 모두가 그에 영향받지 않았다.
“ ..당신이었군요. “
" 안녕, 피어스 그대. "
피어스는 신음했다. 아주 익숙한 인영이 제 눈앞에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순간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특유의 바닷바람 향이 선명했다. 갑자기 막 자신이 바닷가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파도가 쏴아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왠지 썬베드에 누워 모히또에 빨대 꽂고 모래찜질을 한 번쯤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이상한 상상을 떨쳐내기 위해 도리질한 피어스는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들었다. 요상하게도 그의 눈과 딱 마주쳤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푸르고 새하얀 눈동자가 청량한 빛을 띠었다.
" 신. "
" 이 모습으로는 오랜만인데 꼴이 이래서 미안하군. 화내지 말게, 다음부턴 꽃단장이라도 하고 오겠네. "
다소 머리가 헝클어지긴 했으나, 웃는 낯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좀 더 밝아 보였다. 피어스는 굉장히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오랜만에 본 그인 데다 이 일이 그가 의도한 게 아니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 장난에는 그만 가담한 게 아니었으니, 그에게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꼴이 꾀죄죄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끔한 마왕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한바탕 흙바닥에서 구른 듯했다. 그답지 않게 뺨에 난 생채기에서 붉은 기가 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피어스는 시선을 돌렸다. 묘한 빡침과 허탈, 안도가 뒤섞인 한숨을 내뱉은 피어스는 쥔 검을 한 바퀴 돌렸다.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종종 장난치던 그다운 행동이라, 그였다는걸 알고 나니 별다른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의 검이 맞닿은 막이 가볍게 출렁였다.
" 나중에 설명해주셔야 할겁니다. "
" ..나도? "
" .... "
" 정말? "
후이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눈이 애처롭게 반짝였다. 다분히 의도되었다는 걸, 후이스도 알고 신도 알았다. 그래, 피어스는 역시나 피어스였다.
" 후이스는.. 예외구요. "
" 앗, 그대 치사하네! "
" 불만이면 해신도 애인 만드시죠. "
" 내가... 애인이..... 어딨다고........ (´•̥ω•̥`) "
팡! 어디선가 날아온 전격이 그들 앞으로 펼쳐진 물의 장벽을 때렸다. 휘유, 휘파람을 분 신이 정면을 응시하자 그 벽은 한 줄기 화살처럼 날아가 거미를 닮은 괴수의 눈에 틀어박혔다.
“ 그나마 다행인 건 평소보다 반의반도 못해. 이정도면 꽤 괜찮은 핸디캡이지. “
“ 지원요청 했어? “
“ 지금 하겠습니다. “
품 안에서 남빛 동전을 꺼낸 피어스는 하늘 위로 튕겼다. 동전은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위로 올라가 거대한 신의 문양을 허공에 띄웠다. 작은 도시를 감싼 막 위에서는 저 멀리 신전의 끄트머리도 충분히 보였다. 이정도 신호라면 충분히 알아차릴 것이다.
“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 금방 지원이 올 겁니다. 신, 혹시 저것 중에 모르는게 있으십니까? “
“ 아니. 다 두세 번쯤은 죽여봤던 것들이라네. 그대들은? “
“ 우리야 토벌 나가면 자주 보는 걸. 문제없어! “
“ 몸조심하게. 지금 내가 끌어올 수 있는 강물엔 한계가 있어서.. 막이 약간 불안정하군. 최대한 주의를 돌려주면 고맙겠네. “
셋은 이 마을을 둘러싼 수많은 괴수를 바로 응시했다. 종류도 많은 데다 크기도 크기인지라, 꼭 걸리버 앞의 소인꼴이었다. 하하, 가볍게 웃은 신의 목소리에 희미한 고양감이 깃들었다.
“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이 친구들을 터뜨리게. 총알보다 빨리 달려가지. “
헝클어진 머리를 단단히 묶은 신이 손을 튕기자 둘의 주변에서 귀여운 아기 금붕어들이 나타났다. 저들이 약한 지금, 한두 마리라면 단신으로도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많았다. 지원은 언제 올지 모르고, 수는 많았다. 어차피 대비책은 많아서 나빠질게 없었다.
“ 다들 조심해~ 알지? “
“ 후이스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 무운을 비네. “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형이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가까운 순간, 세 방위에서 천지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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