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곡식이 여물 때

2019 달글모


 A는 등 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맞으며 걸었다. 가을이라기엔 여름같은 따스한 햇빛이 종아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 감촉은 너무나도 포근했지만, 미적거리다간 버스를 못 탈 수도 있었다. A는 친구에게서 빌린 품 안의 인형을 붙잡고, 버스의 전 정거장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야 너 그거 들었어?
                             올리브영 갔다가 학원 기?
                                                                                               아..진짜 숙제하기 싫다.....

                                                                           누가 학원 좀 폭파 안하나.

                                헉, 우리 배우님 신작 떴다!

     내 새끼들은 신곡 떴어! 


 앞 정거장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학생들로도 가득했다. 가뜩이나 버스의 탑승구도 좁은데, 오늘은 더욱 치열하게 올라갈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버스가 저 멀리 보일 즈음에 A는 카드를 빼어들고 잽싸게 뒤쪽으로 가 서있었다. 버스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는 곳보다 조금 더 뒤에 정차했다. 학생들은 벌떼같이 앞뒷문으로 몰려들었다. 딱 뒷문 위치에 서있던 A는 뒷문을 통해 가장 먼저 올라 자리를 차지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으니 어느새 하늘은 다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A는 창문에 기대어 늘 같고 단조로운 풍경을 감상했다. 문득 옆자리가 시끌시끌했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나고, 친구들에게 부축받던 사람이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땀냄새가 훅 풍겨왔다. 이야기를 주워듣자니 우승하고 싶은 마음에 달리다가 그만 발을 접질린 것 같았다. 야. 괜찮아? 뭐 어때. 1등 했으면 그만이지! A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곤 친구에게 빌린 인형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A는 땀냄새가 배이고 싶지 않았다.

 폭신한 인형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창밖으로 드문드문 넓은 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내로선 보기 드물게도, 아주 넓은 논이 근처에 있었다. 주인이 아주 부자라 저 논은 절대로 팔지 않고 팔지도 못하도록 버티고 있다는, 그런 괴상한 소문이 있는 논이었다. 사람들은 그 논의 주인을 부러워만 했다. 저 논은 아주 비싸게 팔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도 같고 싶다고. A의 생각은 달랐다. 저 논이 아주 비싸질 수 있는건 오직 가을뿐이었다. A는 자신이 탄 1-2번 버스를 타고 논을 지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팔아도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을거라 짐작했다. 며칠 전부터 논은 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실한 곡식들은 바람에 맞추어 몸을 휘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어느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늑대가 달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주 날쌘 바람의 늑대.

 그러나 아직은 완벽한 밀빛이 아니었다. 아직 물들지 않은 초록빛의 곡식들이 군데군데 눈에 뜨였다. 꼭 죽어가는 세균같이 대부분이 밀빛인 논의 한 켠을 굳이 잡아먹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논을 지켜보던 A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햇빛도 따듯하고 비도 오는데, 굳이 뚝심있게 자리잡고 있을 건 무언가 싶었다.

 버스가 멈추어섰다. 끼익, 사람들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뒤로도 쏠렸다. 앞으로 쏠리다가 인형을 붙잡은 A는 어느 여자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아인 특정한 사람들 앞에만 서면 실수를 연발하곤 했다. 어느 아이 앞에서는 말도 더듬었고,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목이 쉬어라 노래도 부를 줄 알았다. 넘어지고 꾸지람을 들어도 아 쌔앰~하고 앵기던 아이는 무엇 하나 완벽히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무언갈 하려고 하다가도 칭찬을 들으면 갑자기 삐끗, 했고, 아무리 잘 하는 것도 늘상 한 두 개 쯤은 틀렸다. 새콤한 풋사과보다도 시큼한 인생을 사는 것만도 같았다. 얼른 모든 걸 잘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저 애매하고 어리숙한 풋곡식보다는, 더 반짝이고, 빛나고, 가슴뛰도록 아름다운 모습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꼭 그래서...

여기서 뭐해?

허 윤수. 허허허허 허 윤수 아니고, 허 윤수.

괜찮아? 많이 아파?

이거 먹어. 금방 사온거야.

이거? 학교에 두긴 불안하고 집에 가져가자니 귀찮고.. 빌려갈래?

 윤수. A는 윤수를 떠올렸다.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자신에게 코코팜을 건네던 허윤수.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과 투명한 피부. 목소리는 건조했었지만 맞잡은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었다. 코코팜도 달았고, 과육은 부드러웠고, 그리고..눈이 마주치자 미소짓던, 윤수도... .

 A는 황급히 인형에 얼굴을 묻었다. 마냥 웃고있는 아보카도 모양 인형이 그의 이마에 맞닿았다. 미적지근했던 인형은 A에겐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A가 붙잡고 있을수록 점차 인형의 감촉은 점차 부드럽기만 할 뿐이었다.

 설마.

A는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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