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이후의 이야기
2020 Pendeo 에리얼 마셸페호뤼_ 펜데오 엔딩 아주 이후의 이야기
" 옘병, 어깨 빠개지겠네. "
오른 어깨를 빙빙 돌리며, 에리얼은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오랫동안 쉬지않고 이동한 탓에 온 몸이 쿡쿡 쑤시다못해 흐물흐물 늘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 상처를 동여맨 왼팔은 무리했는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진짜 이러다 죽겠네.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에리얼은 담벼락에 머리를 기댔다. 마침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내 때문인지는 몰라도, 왼팔이 더 따끔거리는 것만도 같았다. 어차피 돌연변이들은 이곳에 없는걸 확인했으니, 지금만큼은 안심해도 괜찮을 것이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에리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내 팔자가 상팔자네, 에휴,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다고. "
펜데오는 와해됐고, 남은 사람들은 끝없이 전진해야했다. 그 와정에서 누군가는 희생하고, 낙오되고,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으며... 어쨌거나, 그 결말이 그닥 희망적이지 않으리란 것은 엔비스에서 돌아올 때부터 알았다. 이제 시간이 제법 흘렀건만 에리얼은 그 시간들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다른 곳도 더 찾아봤더라면. 빛바랜 후회들을 에리얼은 쉽게 흘려보내지 못했다. 엔비스 새끼들을 조금 더 일찍 털었다면, 막혀있는 장소는 지나치고 다른 곳부터 살펴봤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에리얼은 홀로 떨어진 순간부터 몇 번이고 같은 장소를 맴돌았다. 덧없는 미로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으나, 이상하게도 그것을 벗어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질척하게 달라붙어 늘어지는 후회가, 밖으로 나가는 갈림길에서 발을 돌렸다. 그리고 이는 에리얼이 그를 사랑했을 적부터 변하지 않던 사실이었다.
후회는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주술을 쓸 줄 알았더라면,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너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후회는 편견이 되고 편견은 고집이 되고 고집은 아집이 되어왔다. 에리얼은 이제껏 그 아집들로 똘똘 뭉쳐 살아온 이였다. 이제와서 벼랑 끝자락에 몰린다고 그 아집이 흩어질리가 없었다.
마침 에리얼이 기대고 있는 담벼락은 한때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신전이었다. 지금은? 허리가 깨어져 반토막난 신상과 다 무너지고 부서진 담이 아주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담에 기대어, 에리얼은 익숙한 냄새를 음미했다. 바다 특유의 짜고 청량한 바람냄새. 향수를 일으키는 냄새에 에리얼은 그 어느때보다도 편안함을 느꼈다.
'... 돌아가고싶다.'
고향이 그리웠다. 바다내 생태계에서 인어의 위치는 피식자에 훨씬 더 가까웠지만,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았다. 바다 밑바닥에 자리잡은 기이하고 웅장한 건축물들. 저는 그것들을 제법 좋아했었다. 아무리 돌이켜도 인간의 것들은, 영...좀.
" 그, 으으.. 이, 이봐. "
" ..엥? "
검은 혈관이 도드라지게 불거진 형체가 담벼락을 붙들고 비틀거렸다. 이미 몸의 대부분이 검은 색으로 변한 그는 울음소리와 목소리가 기괴하게 섞여들렸다. 바로 이성을 잃고 달려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얼은 그보단 조금 더 당황스러웠다.
" 야, 너, 설마.. "
" 윽, 너, 추방자구나. 그렇, 지? "
" 미친, 동족을 여기서 보네? "
에리얼의 눈썹이 황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다의 수많은 개체중에서도 저 자는 자신과 같은, 인어 일족이었다. 하필 여기서 마주칠게 뭐람. 딱 봐도 오늘내일 하는 자였지만, 돌연변이가 된다면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달려들 것은 불보듯 뻔했다. 긴장해야한다. 에리얼의 감각이 곤두섰다.
" 너, 당장..문을 열어. "
" 미쳤냐, 내가 왜? "
" 당장..열라고! 당장!! "
" 너 들어가면 뒤져, 지금 다 오염된거 모르냐? "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에 형체의 얼굴이 잔혹하게 일그러졌다. 과격하게 몸을 흔들며 분노에 찬 까만 신음은 몸을 빠르게 잠식해갔다. 그림자병이 성질을 돋군다는 헛소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거친 욕설을 랩처럼 쏟아졌다. 언뜻 듣기에도 도를 넘는 욕설에, 에리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 커흑, 야, 흑, "
등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확히는 '낙인'이 달아올랐다.
" **, 야! 저 호로자식이..!! 큭! "
인어일족이 새기는 추방자의 낙인은 모든 인어 일족이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 정해진 시동어를 외우기만 하면, 낙인이 찍힌 추방자는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시달린다. 이러한 추방자는 스스로를 숨길 수 없는데다 한 번 찍히면 모든 동족에게서 배척받았다. 개중 악질적인 무리는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노예로 부리기도 했으며, 가장 기본적인 생명체로서의 대접도 받지 못한건 당연했다.
" 가, 감히 크르륵, 추방자, 따위가, 대들어? "
" 큭, *..*...이, 새끼가...! "
에리얼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인어의 상극인 타오르는 고통에 제법 힘들기도 하련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 야, 내가 아무리 개털됐어도 너네 여럿 조지고 다녔거든? 자꾸 나대면, 윽.. 니 아가리고 나발이고 다 찢어버린다. "
" 하,하! **, 인간새끼한테 홀라당, 넘어가서 다, 그르으윽, 팔아넘긴...*%^@!! "
푸욱!
손을 떠난 창이 인어-인간의 모습이긴 하지만-의 몸통에 박혔다. 인어가 제 복부에 박힌 창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이럴리 없다는 듯, 축소된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윽고 인어는 크게 울음을 내질렀다. 마지막 남은 눈까지 완전히 검은색으로 뒤덮이고, 이제 돌연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모습을 갖춘 인어는 창을 매단채로 에리얼에게 달려들었다.
" 이 새끼가 진짜... "
퍽! 에리얼의 발차기가 돌연변이의 옆통수를 때렸다. 몸이 돌아가는 회전력을 이용해, 찼던 발을 딛고 다른 발바닥으로 비틀거리는 몸통을 후려쳤다. 보통의 것을 훨씬 상회한 힘에도 불구하고, 돌연변이는 비틀거렸을뿐 제법 멀쩡해보였다.
에리얼은 돌연변이의 머리를 붙잡았다. 퍽,퍽, 단단한 바위라도 깨부쉈을 니킥이 연달아 복부를 때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팔꿈치를 돌연변이의 등으로 세게 내려찍었다. 충격에 주저앉은 돌연변이의 뒷목을 발로 밟고, 한 팔을 통째로 뜯어냈다 .
돌연변이로 변한 시점부터 낙인은 그 효력을 다했지만, 이미 눈이 뒤집어진 에리얼은 그딴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다리가 꺾여진 돌연변이에 올라타 축 늘어질때까지 가격했다. 정확히는, 으깼다.
" 하.. "
한참 후에야 에리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방울을 닦으며, 터덜터덜 걸어가 돌연변이가 달려올때 떨어뜨린 창을 주워들었다. 이가 나갈 창 촉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 그러니까..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말랬잖냐, 쯧. "
지친 상태에서 힘을 바닥까지 쥐어짜니 전신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창 끝으로 사체를 절벽 끝자락까지 밀어내고 나니, 그제서야 검은 것이 잔뜩 튄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휴, 너무 흥분했네. 애초에 먼저 시비를 턴 건 그쪽이니 이 결과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체의 절반 이상이 절벽밖으로 밀려났다. 부산스럽게 풀어진 머리칼을 다시 묶어올린 에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쪽빛 바다가 수평선 너머를 향했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에리얼은 창을 꽂아 고정해둔 사체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추방자들이 자유롭게 열 수 있는, 정확히는 '처벌을 위해' 열 수 있는 인어일족의 문을 열어달라고 애를 썼으니, 이대로 바다로 돌아가게 해주면 기뻐할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어떡해, 나 너무 착한가봐.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지?
스륵,
창을 빼내니 하중이 실린 사체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철썩! 파도가 절벽에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체가 사라지자, 이제 정말로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 진짜... ** 사는 것도 못해먹겠네. "
다른 사람들은 잘 있을까, 에센이나, 다른 펜데오 사람들.. 그리고 몇 안되는 지인들... 바다의 짭쪼름한 내음이 밀려오고, 이불속 같은 공기의 감촉이 피부로 감겨들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배경으로, 흐릿하게 스쳐지나가는 그리운 풍경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에리얼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 깜박거렸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저절로 밀려왔다. 포근하게 나른한 기분에 에리얼은 히죽 웃었다. 그동안 생고생 장난아니게 했지. 그래, 이제 좀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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