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명헌태섭] 고백을도와줘! 下

산왕IF 3학년 이명헌 2학년 송태섭, 크리스마스


“엣취.”

“감기 걸렸어? 너 아까부터 자꾸 재채기 하더라.”

“글쎄,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꾸 재채기가 나. 체육관 공기가 안 좋나?”

“1학년들이 얼마나 열심히 청소하는데 들으면 서운하겠다, 야.”

“아니, 걔네가 청소를 안 했다는 얘기가 아니잖아.”

“송태섭 꼰대네. 1학년들 청소 트집이나 잡고.”

“어이없네. 재채기 옮겨 버릴까보다.”

“됐고 이따가 컵라면 고?”

“안돼, 나 오늘 공부 할 거야.”

“변했네, 송태섭. 공부 왜 열심히 하냐고.”

“뭐래, 넌 계속 낙제 갖고 살아라.”

“이리 와. 낙제 옮겨 버리게.”

“됐거든요!”

낙제를 옮겨 버리겠다는 녀석을 재빠르게 피해 후다닥 물건을 챙겨 라커룸을 나섰다. 미쳤나 봐, 어떻게 벗어난 낙제를. 그런데 으슬으슬하니 춥기는 했다. 급히 나오느라 대강 걸친 겉옷 위로 양 팔뚝을 한 번 쓸어보고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잠갔다.

중간고사가 무사히 끝났다. 가채점을 해보고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교실이라 참았다. 대신 방에 가서 아주 짧게 예! 하고 소리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5박 6일 동안 쉬지 않고 소리 지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기숙사라 참았다. 당장 선배에게 달려가서 시험지를 내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사실 선배에겐 아무것도 아닐 점수겠지. 그리고 너무 들떠 보이잖아. 차분하게, 차분하게. 아니,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낙제가 아니야! 낙제가 없다고!

컵라면, 밤에 기숙사 휴게실에 둘러앉아 후루룩 마셔버리는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는데. 같이 먹고 싶었지만 오늘은 금요일이다. 방에 도착해 가방만 던져놓고 재빨리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선배의 방에 갔다. 자랑스럽게 선배에게 척 내밀었지만 그것을 받아든 선배는 시험지를 한참 넘기며 들여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앞장에 적힌 점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보자마자 전부 낙제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슬아슬했던 과목들이 모두 낙제를 벗어난 건 물론이고 점수가 (내 기준) 엄청나게 올랐는데. 기대도 하지 않은 점수에 분명 선배도 뿌듯해 할 거라 여기고 신나서 선배와 만나는 오늘만을 기다렸다가 시험지부터 내밀었는데. 그랬는데.

“흠.”

“낙제는… 없어요.”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들뜬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너무 오바한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낙제는 없다고 했다. 원래 낙제와 거리가 머니까 몇 점 부터가 낙제인지 모를 수도 있잖아. 그러나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험지를 꼼꼼히 훑어보던 선배가 날 바라보더니 틀린 문제를 하나 가리켰다.

“이건 왜 틀렸어. 지지난 주에 같이 풀었던 문제를 변형한 거잖아.”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맞을 줄 알았는데, 잘 안됐어요.”

허리가 절로 똑바로 펴져 등받이와 수평을 이루었고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어쩐지 공손하게 앉아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영어 시험지를 보던 선배는 또 틀린 문제를 가리키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어만 알면 맞출 수 있는 건데. 저번에 단어 시험도 봤었지.”

“죄송해요….”

“그런 게 아니라, 태섭.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였는데…. 태섭.”

“네.”

“태섭.”

조금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선배가 단호하게 날 불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체육관에서 들을 수 있었던 그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듣는 주장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숙함이 느껴지는 힘 있는 목소리와 다르게 선배는 약간의 다정함이 깃든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발견한 아주 약간의 다정함 한 조각이 뭐라고, 그게 대체 뭐라고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선배 말 하나 틀린 거 없다. 선배가 외우라고 했던 단어를 외우지 못했고, 중요하니 다시 한번 풀어 보라고 했었던 문제를 놓친 건 나다. 그 때문에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까. 선배가 이러는 이유도 다 날 위해서니까 내가 서러워할 이유는 없는 거지.

“잘했어.”

“감사합니다.”

“아니, 빈 말이 아니라 정말 잘했어.”

“네….”

“솔직히 이렇게 열심히 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노력한 게 보여서 뿌듯하네.”

“정말요?”

“...삐뇽.”

농담처럼 붙이는 삐뇽 하는 괴상한 추임새에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사실은요.”

“사실은?”

“가채점 해보고 낙제는 면했다는 거 알자마자 선배한테 와서 당장 자랑하고 싶었는데 오늘까지 꾹 참고 기다렸어요.”

“그랬어? 칭찬이 늦었네. 정말 잘했어.”

“엣취.”

이 칭찬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여기서 눈치 없이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는데 또 이러네. 엣취, 엣—취. 연거푸 두 번을 더 하고 나서야 재채기가 멈췄다. 콧물이 안 나서 다행이다.

“태섭. 오늘은 시험 끝난 지도 얼마 안 됐고 컨디션도 별로인 것 같으니 이만 가봐.”

“진짜 괜찮아요?”

“내가 괜찮지 않을게 뭐가 있어, 삐뇽.”

“그래도.”

“그래야 내일 오전 훈련에 괜찮은 컨디션으로 나올 수 있지. 쉬고 내일 봐.”

“네.”

챙겨 온 각종 문제집이 무색하게 그대로 다시 들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문을 닫기 전 인사하려던 찰나 선배가 날 먼저 불렀다.

“태섭.”

“네?”

“잘자.”

선배가 먼저 인사해 버렸네. 나도 고개를 꾸벅 하고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정작 나는 고맙다는 말도 못했구나.

“선배.”

“왜.”

“정말 감사해요. 선배 덕분이에요. 그리고… 좋은 꿈 꾸세요.”

문이 닫히기 전에 본 선배의 얼굴은 기분 좋게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요새 선배의 웃는 얼굴을 많이 보네. 아닌가? 내가 선배에게 익숙해져서일까? 내일은 선배를 보면 이렇게 만날 때처럼 먼저 다가가 웃으면서 인사해야겠다.

사실 부원들과 다 같이 훈련하러 체육관에 모여있을 땐 웃으면서 친근하게 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그 곳에서 만나는 선배는 내가 다가가기엔 뭐랄까… 좀 다르니까. 무엇이 다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체육관 밖에서 하던 것처럼 하지는 못한다. 그치만 음. 이젠 제법 친해진 것 같기도.

이렇게 많은 걸 받아 버렸는데, 선배는 왜 선배의 연애에 대해서는 내게 물어보는 게 없는 걸까. 안 되겠다. 내일부터는 내가 선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활짝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엣취.

결심이 무색하게도 나는 전날 마음 먹은 것처럼 선배에게 웃으며 인사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뜰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신고 한 걸음 내딛자 어깨가 필요 이상으로 무거웠고, 두 걸음째 내딛자 몸이 지나치게 뜨끈한 것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재채기가 계속 나왔다. 이를 어쩌나.

“아니야, 괜찮아. 할 수 있어.”

“내 말 들어.”

“정말 괜찮아. 땀 한 번 쫙 빼면 나아진다니까?”

아침 구보에서 계속 뒤처지고 그 이후에도 계속 평소 같지 않게 비실대자 주장이 다가왔다.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진상을 파악한 주장에게서 귀가 후 휴식이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추계 대회는 늘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내 출전 시간이 점점 늘었고, 나를 바라보는 감독님의 표정이 만족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주장과 감독님이 무언가 상의를 하다 날 바라보는 일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학교 성적도 만족할 만큼 나오고 있고. 안돼, 나 요새 불붙었다고. 사실, 우기고는 있지만 지금 몸에도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태섭.”

그 때, 뒤에서 명헌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물었다. 선배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는 싫었는데, 이런 모습 보이기도 싫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하지?

“저 정말 괜찮습니다.”

엣취.

아, 정말 몸까지 안 따라주네.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 재채기가 나와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전혀 설득력이 없잖아.

“하루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네. 부원들에게 전염될 수도 있으니 오늘은 들어가 봐라, 삐뇽.”

어깨를 가볍게 탁탁 두드리며 등 떠미는 손길이 닿은 곳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정말 몸이 정상이 아니긴 한가보다. 부원들에게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더는 할 수 있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결국 부원들을 뒤로 하고 기숙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동안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마음을 놓아서일까. 역시 인체는 신비로워. 당장 눕고 싶었지만 땀범벅인 몸으론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휴식을 취하고 나중에 이불 빨래를 싹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정말 안 되겠다.

마지막 힘을 짜내 샤워를 했다. 평소보다 더 따끈한 온수로 씻었는데도 으슬으슬 춥고 떨렸다. 머리를 말리는 것까지는 도저히 못 하겠다. 이제는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쑤셔왔다. 수건으로 벅벅 문질러 물기만 없애고 침대에 누웠다. 이럴 땐 빡빡이인게 좋았다.

긴 팔 긴 바지를 입고 발가락 끝 아주 작은 틈도 맨 공기에 드러나지 않도록 이불을 잘 덮고 누워있는데도 오한이 들었다. 추위에 떨며 잠들기를 기다리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추운 것도 싫었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이 싫었고, 새빨간 단풍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 창밖도 싫었다.

하지만 제일 싫은 건 송태섭이었다. 몸 관리도 실력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내 몸 하나 뿐이었는데, 이것 하나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에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최악인 건 따로 있었다.

내일은 선배와 오후 내내 공부하는 날인데 이 상태로 어떻게 해야 하지. 선배를 생각하니 또 그랬다. 선배가 내게 준 것들. 나는 선배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내가 선배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선배가 알고 있는 거, 그거 아니에요. 저는 선배에게 받은 만큼 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겠어요. 죄송해요.

한참을 울다가 어느 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슴푸레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훈련 일과를 끝낸 친구들이 들여다보는 것일까. 좀 더 꿈속을 헤매고 싶었다. 그 사람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안돼, 땀이랑 눈물 때문에 더러워. 손바닥이 차갑진 않은데 서늘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그렇구나, 지금 열이 나는구나.

볼을 어루만지던 손바닥이 이마를 짚어보더니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손바닥이 내게서 멀어지려 해서 아쉬운 마음에 나는 얼굴을 그 손에 가져다 댔다.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어.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자. 하는 익숙한 목소리.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놓인 나는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땐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눈을 떴을 땐 책상에 포장된 죽과 약이 있었다. 혼자였지만 누군가 왔다 간 흔적에서 위안을 느꼈다. 이건 학교 밖 시내에서 파는 건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열에 들떠 잠이 들어있을 때 선배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받으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는 걸까. 조금 식은 미지근한 죽을 입에 떠 넣으며 선배를 생각했다. 그냥 후배에게도 이렇게 상냥한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잘해줄까. 아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

꼬박 하루를 앓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잠에 취한 눈으로 창밖을 보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책상에는 선배가 남기고 간 작은 쪽지가 있었다. 오늘은 공부를 하러 오지 않아도 좋으니 푹 쉬고 내일 건강한 모습으로 연습에 나오라는 내용의 쪽지. 한숨을 쉬며 책상에 있던 교과서에 그 쪽지를 책갈피처럼 끼워 넣고 책을 닫았다. 최악이야, 정말. 죄송해서 어떡하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자면서 땀을 흠뻑 흘려 몸이 끈끈하니 기분이 좋지 않아 재빨리 물만 끼얹고 나왔다. 이제 더 이상 으슬으슬 춥지는 않았다. 몸살의 여파가 아주 약간 남아있긴 했지만 아주아주 약간이었고 확실히 기운이 났다. 조금 두꺼운 옷을 챙겨입고 바람을 쐬고 싶어 기숙사 건물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무거웠던 머리는 약간 쌀쌀한 저녁 바람을 맞으니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기숙사 앞 마당을 두어 바퀴 돌아보다 교정에까지 발을 들였는데 저 멀리 선배가 보였다. 반가워서 뛰어가는데 선배가 향하는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거긴 담 밖에 없는데 어디 가시는 건가요?

“선배!”

담 앞에 서서 무언가를 가늠하는 모습에 선배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돌아본 선배가 나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배가 지금 하려는 것이 혹시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요?

“푹 쉬지 여긴 어쩐 일이야.”

“선배 지금 담 넘으려고요?”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그러고 계신 건데요.”

“몸은 좀 괜찮아?”

“네. 오늘 하루종일 자다 일어났더니 이젠 괜찮아요. 계속 자느라 선배 왔다 가신 줄도 몰랐네요. 죄송해요.”

“오늘은 어차피 공부는 안 하고 일찍 끝내려고 했었으니까, 상관은 없지, 삐뇽. 그런데… 흠.”

갑자기 선배가 날 훑어 보았다. 뭐지?

“넘자.”

“네?”

“넘자고.”

“왜… 왜 그래야 하는데요?”

“원래 갈 곳이 있었는데 이젠 거기 갈 필요가 없어져서 다른 곳을 가려고, 삐뇽.”

“담 넘으려던 거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같이 가."

도대체 말이 통하지를 않아서 선배가 가리키는 담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딜 가자는 거지? 것보다 외출증도 없이 담을 넘었던 것이 발각되면 벌점이 많이 쌓이는데. 가만있자, 내가 벌점이 몇 점 쌓였더라. 속으로 계산을 해보는데, 그런데 이런 일탈 행위, 무지 재밌을 것 같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성적도 올랐고, 농구도 요새 잘 되고 있고. 주말 훈련을 빠진 건 조금, 사실은 조금보다는 더 많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막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몸이 가뿐해지니 의욕이 넘쳤다.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었다. 재밌어 보이는 이 일탈 행위는 꽤 유혹적이었다. 원래 못된 짓은 재밌다.

“어딜 가는지 알려주시면요.”

“안 따라올 거면 말고.”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 대신 즉시 행동에 옮겼다.

“뭐해요, 선배. 빨리 와요, 누가 오겠어요.”

“태섭, 알고 보니 불량 학생이었네, 삐뇽.”

“누가 가자고 한 건데요.”

끙끙 대며 담을 넘고 있으려니 선배가 뒤에서 발목을 잡고 힘껏 밀어 올려 주었다. 예상치 못한 힘에 담 바깥쪽으로 몸이 쏠릴 뻔했으나 균형을 잡았고 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착지해서 몸을 일으키는데 선배가 순식간에 담에서 뛰어내렸다.

“선배, 이거 한 두 번 해본 거 아니죠.”

“.......”

“참나, 누가 불량 학생이죠?”

“그래도 난 꽤 모범 학생이지, 삐뇽.”

“네네, 맞습니다.”

억울하네, 난 여태 담 한 번 넘어본 적 없는 착한 학생이었는데.

“가자.”

처음 타보는 버스였다. 돈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버스비는 선배가 내주었다. 몇 정거장을 이동하더니 벨을 눌러 내렸다. 조금 걷자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밤에 보는 바다는 여름이나 가을이나 까맣게 펼쳐져 있는 건 매한가지인데, 어쩐지 쓸쓸한 정취가 느껴졌다. 단지 가을이라서일까. 먼 바다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와 선배가 걷고 있는 해변을 한 바퀴 휩쓸고 지나갔다. 탁한 붉은빛을 띈 메마른 낙엽 하나가 내 어깨에 부딪치더니 모래밭 위를 굴러갔다. 그때 내 어깨 위에 무언가 내려앉았다. 선배의 옷이었다.

“아니, 이걸 주시면 어떡해요. 선배도 춥잖아요.”

“난 몸에 열이 많아, 삐뇽.”

“아니에요, 가져가세요.”

“원래 널 데리고 나오면 안되는 건데.”

“여기까지 나왔으니 그냥은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럼 그거 입어.”

저 멀리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선배를 따라잡으려니 내 어깨에 걸쳐진 선배의 옷이 금방이라도 날아가 검은 바다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팔을 꿰어 넣고선 뛰어가 선배의 곁에 섰다. 그러자 선배는 내 앞에 멈춰섰고 나도 멈춰섰다. 선배는 허리를 숙이더니 옷자락 끝에 매달린 지퍼의 끝을 맞췄다. 옷에서 낯선 냄새가 훅 끼쳤다. 선배에게서 나던 향이었다. 그러나 선배의 옷에 둘러싸여 있으니 좀 더 진하게 났다. 향수 냄새일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체향이 조금 섞인 섬유 유연제 향 같기도 하고.

그 향이 좋았다. 선배가 목 끝까지 지퍼를 잠가주며 손이 내 턱 끝에 약간 닿았는데, 손이 뜨거웠다. 몸에 열이 많다는 게 정말인 것 같았다. 열이 오른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 손바닥이 생각났다. 선배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시선을 내렸다. 왜, 왜 저렇게 나를 보는 거지? 걱정하는 눈빛. 선배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내 목울대도 따라 움직였다. 아까 굴러가던 낙엽이 떠올랐다. 메마른 입술을 살짝 축였다. 선배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우면 또 감기 걸린다, 삐뇽.”

“감기 아니고, 이제 다 나았어요.”

쓸쓸한 가을 바다를 거닐었다. 선배도 저 바다가 쓸쓸하다고 생각할까. 나와 이렇게 밤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괜찮을까. 난 좋은데, 정말 좋아서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데 선배에게는 어떤 추억으로 남을까. 그냥 이것도 흘러가는 기억이 될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후배일 뿐인데. 어쩌면 저 밤바다가 쓸쓸해 보이는 건 내가 쓸쓸한 기분이라서 그럴 지도 몰랐다. 바다의 밤은 언제나 저런 풍경일 텐데.

왜 그럴까. 그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으면 끝인데 왜 선배에게 이 순간이 어떻게 기억될지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굳이 내가 선배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선배는 내게 조그마한 다정함을 보여준 것 뿐인데.

아. 그것 때문이구나. 아주 잠깐 보여준 걱정하는 표정, 아주 조금 나눠준 다정한 마음. 그것 때문이구나. 그 아주 조그만 감정의 조각들이 나를 이렇게…. 춥지 말라고 덮어준 선배의 옷이 나를 옥죄는 것처럼 느껴졌다. 싸늘한 가을 밤바람에 대한 반작용인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선배가 내게 보여준 친절에 절대로 보답할 수 없겠구나. 그래서 고개를 푹 숙였고, 내가 추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선배는 그만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목이 메어왔다. 선배의 얼굴에 보인 걱정하는 마음과 열이 오른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서늘하고 뜨거운 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

(브금과 함께 감상해 주셨으면 해서 링크 첨부합니다)

https://youtu.be/-SBSa4N1VGE?si=Yez2_RMleQEtXAJ_

삑—.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 유니폼 상의를 끌어 올려 땀을 닦으며 벤치를 힐끔 바라보았다. 선배의 표정은 변함 없이 무표정, 그러나 미소 지은 듯 만 듯한 무표정이었다. 나는 차라리 선배의 표정을 읽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다음 경기 일정을 알리는 문구가 붉은 색으로 연신 깜빡거렸다. 내게는 그것이 위험 신호처럼 보였다. 주의, 마음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으니 넘쳐 흐르지 않게 잘 간직하시오.

12월 24일, 오늘은 2차전을 치렀고, 내일은 3차전이다. 역시나 이변 같은 건 없었고 순조로웠다. 예상과 달리 흐르고 있는 건 오직 나 뿐이었다. 나는 이제 선배가 내게 연애 조언을 구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미안해하지도 않기로 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선배가 도와준 덕에 잘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낙제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기말고사까지 무사히 넘어갔다.

그 이후에도 선배는 여전히 내 성적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했고, 그러면서도 내게 얻어가기로 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에 매번 안심했다. 쌓여가는 죄책감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지만 못 본 척 했다. 나는 더 이상 선배에게 먼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못된 말, 비관적인 말을 내뱉어 선배를 상처입히고 그것이 내게 돌아올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래, 결국 모든 게 다 날 위해서였다. 커져가는 자기혐오에 비례해 기량은 나날이 좋아졌다.

빠르게 땀을 씻어내고 관중석으로 돌아가 남은 경기들을 지켜보았다. 내일 우리와 대진할 학교가 정해지자 숙소로 돌아와 그 학교에 관련된 정보를 습득하고 경기를 분석하고 전략을 짰다. 늦은 저녁을 먹고선 숙소로 복귀했다. 같은 방을 쓰는 녀석은 일찍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눕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호텔 로비를 떠돌고 있었는데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맞닥뜨렸다.

“방에 없더니. 한참 찾았네, 삐뇽.”

“저를요?”

“옷 입고 나와.”

“어디 가는 건데요.”

“옷 입고 나오면 알려주지.”

한참 선배를 바라보다 일어났다. 그리고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계속 생각했다. 이대로 들어가 나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선배는 로비에서 오지 않을 나를 기다리다 지쳐 혼자 나가거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거나… 그러고 나면 내게 화가 나거나 실망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수업은 지난주로 끝이었다. 윈터컵이 끝나면 방학이 시작될 거고 선배는 졸업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선배는 이미 고백을 했을지도 모른다. 옷을 껴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현관 옆 거울을 바라보았다. 파렴치한이 보였다. 파렴치한,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러운 사람. 그 사람이 거울 속에서 날 보고 있었다.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이 내겐 없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대형 쇼핑몰이 있었다. 바로 옆의 백화점은 문을 닫았지만 그 곳과 이어진 쇼핑몰은 더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지 인산인해였다. 그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기뻐 보였다. 선배의 무표정에도 설레는 기색이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렇게 기쁜 날로 와닿는 걸까. 나도 최대한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사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배와 둘이서 화려한 불빛과 예쁜 장식을 보고 있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그 기뻐하는 마음이 무겁게 쌓여만 갔다.

쇼핑몰 1층 로비에는 고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꾸며진 거대한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그 곳을 지나치려 하는데 선배가 나를 붙잡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사진 찍자.”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았다. 선배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부탁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이 선배의 카메라를 받아 들었고, 선배는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내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선배의 곁으로 훅 다가갔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선배?”

“왜 우울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찍을 땐 웃어야지, 삐뇽.”

선배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역시 내가 그런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선배는.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으나 카메라 앞이었기에 선배가 지은 표정을 따라 지었다. 선배와 조금 거리를 두려 했으나 내 어깨에 둘러진 선배의 팔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이 좋았다. 선배의 온기가 내게 느껴지듯이 선배에게도 나의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플래시가 몇 번 반짝 터졌고, 선배는 감사합니다. 하며 카메라를 돌려 받았다.

“오늘 경기도 잘 풀렸는데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이야.”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그냥?”

“다들 기뻐 보여서요.”

“정말 그것 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음….”

슬픈 얼굴이라니, 최대한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똑같아 보이려 애썼는데. 선배의 표정도 더는 설레고 기쁜 표정이 아닌 것 같았다. 선배의 기분까지 나 때문에 가라앉았다는 사실에 또 다시 우울해졌지만,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거야.

“슬픈 건 아니고, 그냥 들뜨는 게 싫어서요.”

“이럴 땐 좀 들떠도 괜찮다, 삐뇽.”

그러면서 억지로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서 들려주었다. 한겨울에 무슨 아이스크림이냐며 손사래 쳤지만, 원래 아이스크림은 겨울 제철 음식이라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기어코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서 하나를 내 손에 들려주고 나서야 선배는 만족했다.

여유있게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핥아먹으려 했으나 추운 바깥 날씨 때문에 쇼핑몰 내부에는 난방을 세게 틀어놓아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서 뚝뚝 흘러내렸다. 선배의 아이스크림을 보니 이미 다 먹어 치우고 남은 건 과자 부분 밖에 없었다. 내 손 위에 흘러내리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본 선배는 휴지를 가져다주겠다며 근처의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그냥 내게 화장실로 가서 손을 닦고 오라고 보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선배가 편의점으로 달려가는 건가요. 선배의 뒷모습을 보는데 아이스크림이 계속 뚝뚝 녹아 흘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내 얼굴에서도 무언가가 흘러 내렸다. 저 멀리서 계산을 마친 선배가 서둘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태섭!”

선배가 소리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쇼핑몰 출입문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손에서 아이스크림이 줄줄 흘러내려 옷이며 신발에 마구 묻는 것 같았지만 지금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선배에겐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나는 그저 선배가 잠깐 보여준 친절과 다정함에 갈피를 잃은 것 뿐이니까. 이제 선배는 떠날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선배가 날 잡을 수 없도록, 찾을 수 없도록 인파에 섞여 들어 쇼핑몰을 나섰다.

로비 뿐만 아니라 바로 앞의 광장에도 커다란 트리가 서 있었고 그 위로 밝은 전구를 둘러둔 다음 주변에 화려한 조형물들을 가져다 두었다. 그 옆을 지나는데 강한 힘으로 몸이 휙 돌았다.

“선배.”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죄송해요, 아이스크림이. 지금 다 녹아서.”

“아니잖아,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말을 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알아듣게 제대로 말해. 누가 괴롭히기라도 해?”

수많은 인파를 기어이 헤치고 나와 나를 붙잡은 선배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넘쳐흘렀다. 막을 수가 없었다.

“선배, 고백하지 마세요.”

“뭐라고?”

선배는 더 이상 이상한 어미도 붙이지 않았다. 당연히 화가 나겠지. 나였어도 화를 냈을 거다. 그러나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뒷 일을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책임지지 못 할 말이 마구 터져 나왔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를 않아서 터져 나오는 것이 마음인지 눈물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고백하지 마세요,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크리스마스 이브들이 모두 최악이라 해도 오늘만큼 최악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윈터컵이 끝나면 선배를 다시는 볼 수 없겠지.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유력한 결승 후보다. 아마 끝의 끝까지 남아서 경기를 치러야 하겠지. 그 때까지 선배를 계속 봐야만 하겠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대책도 서지 않으면서 나는 멈출 수가 없어서 되는대로 마구 내뱉었다.

“선배는 저한테 너무 많은 걸 주셨는데 저는 선배에게 준 것도 없이 고백하지 말라고 해서 미안해요, 정말 너무 죄송해요. 근데, 고백하지 마세요. 제발 고백하지 말아 주세요.”

“태섭.”

격양된 나와 다르게 선배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잘 보이지를 않아 얼굴을 닦으려다 손이 아이스크림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뒤늦게 겨울바람에 손이 빨갛게 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감출 수가 없어 대신 아이스크림 범벅이 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선배가 내게로 한 발짝 내딛어서 나는 뒤로 물러났다.

“가만히 있어.”

나는 말을 듣지 않고 선배가 한 발짝 더 다가오자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렇게 계속 물러났는데 뒤로 감춘 손 끝에 차가운 건물 외벽이 닿았다. 더 이상 도망칠 수가 없었다. 선배의 얼굴 대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배가 뒤로 감춘 내 손을 끌어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손에 무언가 닿았다.

선배는 아까 사 온 휴지로 내 손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는 끈적한 것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선배의 손도 끈적해질 텐데. 선배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한 손으로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아직 깨끗한 손등으로 내 얼굴을 톡톡 두드려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태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않을게. 대신 왜 고백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줘. 그러면 하지 않을게.”

“왜냐면, 왜냐면….”

말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할래. 그러나 이제 진짜 솔직해져야 할 시간이었다. 누굴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선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직접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만한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진짜 속마음을 꺼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선배가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이 저일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선배가 고백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선배가 당장 등을 보이며 떠난대도 나는 선배를 잡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일정 동안 선배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래도 그것만 잘 견디면 되지 않을까. 최대한 쥐 죽은 듯이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어떻게든….

“그런데도 내가 고백하겠다면?”

“그럼… 그러면. 그렇게 되면….”

제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나는 활짝 웃었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거짓말.”

“네, 거짓말이에요.”

“솔직해서 좋네.”

이런 상황에서 솔직한 게 뭐가 좋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선배.

“솔직해서 좋다고, 네가.”

“......?”

“이제 어떡하지. 고백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고백해 버렸네, 삐뇽.”

그제야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속 날 바라보는 선배의 얼굴은 다정하게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기쁘고 설레는 감정까지 담겨 있는 표정. 아니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리가. 오랫동안 좋아했다면서요.”

“태섭을 오랫동안 좋아하면 안되는 거야?”

“지금 저 놀리는 거죠.”

그 말에 선배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한 발짝 다가왔다. 차가운 벽에 등이 닿아서 시렸다. 그런데 내 등과 벽 사이에 선배의 손이 끼어들었다. 선배, 그러면 선배 손등이 시리잖아요. 그러나 나를 감싸 안은 선배의 팔이 금방이라도 풀어질까 봐, 사실은 날 놀렸다고 하는 게 맞을까 봐 말하기 싫었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에게 이제 막 고백하자마자 그럴 리가 없다고, 놀리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태섭.”

“...아주아주 슬프겠죠.”

“지금 내가 그래.”

“.......”

“그러면 태섭이 날 슬프게 만든 거겠지.”

“.......”

“대답을 해, 태섭.”

“네.”

“그러면 내 마음을 받아줘야겠지.”

“...근데 선배.”

“왜.”

“사실 저요, 거짓말 했어요. 선배가 공부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 사람을 많이 만나봤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연애 조언 해주면 된다고 했을 때, 사실 저 아무도 만나본 적 없어요. 사실은.”

“.......”

“사실은 아무도 만나본 적 없으면서 거짓말 했어요.”

“그걸 내가 몰랐을까.”

“네?”

“가만히 있어.”

너무 놀라 펄쩍 뛰고 싶었는데, 선배의 엄한 목소리에 지은 죄가 있어 다시 얌전히 있었다. 선배의 품속에서 선배가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그걸 내가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태섭?”

“...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에 대해서 내가 몰랐을 거라고?”

“...아니요.”

“대답이 왜 달라져, ‘네’인 거야, ‘아니요’ 인 거야.”

“몰라요.”

선배는, 그럼 다 알고 있었구나. 다 알면서도 나를. 그럼 선배는 진짜로 날 좋아한 건가.

“선배, 진짜로 저 좋아했던 거에요?”

“괘씸하네, 태섭. 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 해줬는데.”

명헌 선배가 나를 품에서 떼어 놓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좋아했던 게 아니라 여전히 좋아한다고.”

+)

추추(@ChuChu___02) 님께서 마지막 장면을 그려주셨습니다.

너무 좋아서 허락을 받고 게시합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을 봐주세요

https://x.com/ChuChu___02/status/1739316069259784454?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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