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명헌태섭] 고백을도와줘! 上

산왕IF 3학년 이명헌 2학년 송태섭

* 인터하이에서 큰 이변 없이 산왕이 우승했다는 설정입니다.

똑똑.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눈꺼풀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기지개를 쭉 켜는데 온 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멍했다. 눈앞의 책상에는 문제 풀이를 한가득 적어 놓은 건 나지만 무슨 사고 과정을 거쳐 이 결론에 도달했는지 모를 풀이가 적힌 연습장과 아무리 매달려도 이해를 할 수 없는 문제가 가득 적힌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지우개 가루를 보고 있으니 잠들기 이전에 했던 것들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그냥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아, 왜 졸다가 깼는지 알겠다. 정신이 참 없네,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명헌 선배.”

“이거 태섭 빨래 맞지.”

잠시 굳었다. 명헌 선배가 빨래 바구니를. 저건 틀림없는 내 빨래 바구니였다. 그래, 나는 풀리지 않는 수학 숙제와 씨름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전에는 세탁기에 땀 냄새를 풀풀 풍기는 빨래를 쏟은 후 작동시키고 나서 다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숙제를 시작했었고.

“죄송합니다.”

1년 반이나 함께 운동을 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선배였다.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주장을 막 내려놓은 선배는 2학년이 되어서야 갓 벤치 멤버로 선발되었으며 공식 경기에서 교체 멤버로 간간이 짧은 출전 경험이 있는 나와는 다르다. 같은 농구부원이라고 해도 큰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연습 게임에서 상대로 만나본 적도, 전술 훈련을 하며 같은 팀으로 뛰어본 적도 있지만 선배의 머리 속 내 존재감은 희미할 것이다. 그러나 선배의 존재감을 희미하게 여길 사람은 드물다. 적어도 농구를 한다면 말이다. 이명헌 선수와 송태섭 선수에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농구부 전원은 기숙 생활이 의무이니 1년 반 동안 함께 운동을 하며 함께 살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와 마주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칠 때면 항상 누군가 주변에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이나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려는 후배들 같은…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단 둘이 마주 보고 대화하는 일이 그 전에 있었던가? 그것도 내 방에 찾아온. 아니, 처음일 것이다. 

우리는 늘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했고,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는 적었고, 땀에 전 빨랫감은 넘쳐났고, 세탁 시간은 길었다. 게다가 소음과 진동이 크기 때문에 이용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탁기 선점은 늘 치열했다. 그 곳에서 죽치고 있기엔 지루했기에 대부분 빨래를 돌려놓고 할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에 맞춰 세탁물을 찾으러 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종종 발생한다. 다음 순번이 같은 학년이라면 욕 한 번 얻어먹고 말겠지만 선배라면 좀 그랬다. 그런데 내가 잊고 있던 빨랫감을 가져다준 건 친한 선배도 그냥저냥 아는 얼굴인 선배도 아닌 명헌 선배였다.

그래서 나는 바짝 얼어버리고 말았다. 아, 머리라도 박을까.

“머리라도 박을 것 같은 표정이네, 삐뇽.”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농구를 저렇게 잘 하면 속마음을 읽는 능력까지 같이 따라오는 걸까? 아니면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농구를 잘 할 수 있는 걸까? 그때 큭큭 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박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1학년 1학기, 갓 고등학생이 됐을 땐 종종 기합을 받기도 했다. 누군가가 규칙을 어기거나 사소한 실수를 하면 연대 의식 고취라는 명목하에 1학년 전체, 때로는 3학년 아래로 전부 체육관에 모여 기합을 받거나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나 명헌 선배가 주장이 된 1년 전부터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고개를 드니 명헌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명헌 선배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견고해 보이는 무표정이었다. 화가 나거나 짜증 난 기색은 없었고 후배의 빨랫감을 손수 배달해 준 것에 귀찮아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다름 없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이거 받아줄래.”

“네.”

잔뜩 얼어 뻣뻣하게 긴장한 것이 부끄러워 선배의 손에서 낚아채듯 바구니를 돌려 받았다. 또 허둥지둥 해버렸다.

“눈곱, 삐뇽.”

“네? 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가지가지한다. 얼른 바구니를 발치에 내려두고 눈 앞머리를 비벼 닦았다. 그러나 손에 묻은 것은 없었다. 재차 문질러 닦으려 해보는데 선배가 또 큭큭 웃었다.

“농담이야, 삐뇽.”

“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면 좋겠다. 너무너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하였지만 더 이상의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코트에서 활약하는 멋진 모습으로 동경하는 선배의 기억에 남고 싶었지 이런 바보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니다, 그냥 흘러가는 기억이 될 지도 모르지. 손을 내리자 선배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태섭. 피곤했어?

“네.”

“훈련 강도는 평소와 비슷해 보이던데.”

날 지켜 보고 있었나? 오늘 내게 특이한 점이 있었던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보려 했으나 그다지 특이한 점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젠 주장도 아닌데 벤치 끄트머리의 멤버의 일상 훈련 강도까지 파악하고 있나? 날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나 주장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습관을 버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저 일상 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오늘 유난히 선배의 눈에 띄었을 수도 있지. 그래, 그런 것이겠지. 열심히 생각을 하는데 선배가 계속 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곧 있을 추계 대회 예선전을 위해 분발하려 했다고 할까. 그러나 잘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낙제 과목이 생기면 안되니까 숙제도 하고 복습도 하다 보니 최근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발 끝으로 바닥을 작게 긁었다. 

“낙제?”

그런 단어를 마치 처음 들어본 것 처럼 낯선 말투였다. 나는 그만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차라리 거짓말을 할 걸 그랬네.

“네.”

“무슨 과목?”

“...일단은 수학이 제일 문제라서요.”

“공식만 잘 외우면 할 수 있어.”

“.......”

더 말해야 할까.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고서 대화를 끝내는 방법을 모르겠다. 선배가 잊고 있던 급한 일이 갑자기 생각나면 좋겠는데, 전혀 그런 눈치가 아니었다. 오늘은 그만 솔직하고 싶어. 그런데 거짓말도 나오지를 않아. 차라리 처음부터 거짓말 할 걸. 할 수 없이 또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외웠는데도 안 되던데요.”

내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는 것을 느꼈는지 선배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3과목까지는 낙제해도 괜찮을 텐데."

"......."

"아."

처음으로 선배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동요한 표정의 선배를 보며 나는 차라리 처음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던데,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안녕히, 선배. 선배의 플레이는 정말 멋졌습니다. 선배를 닮고 싶었고, 언젠가는 뛰어넘는 게 목표였어요. 아무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지만요. 그리고 빨래 바구니 가져다주신 건 죄송했어요. 선배는 의외로 상냥하시네요. 아무튼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그게 제일 문제인 건가.”

"네, 다른 건 공부하면 좀 알 것 같은데. 수학은 아무리 봐도 잘 안되니까 계속 붙잡고 있다가 새벽까지 하게 되고."

"내가 좀 가르쳐줄까."

"네?"

"나 수학 잘해, 삐뇽.”

이건 뜻밖의 전개였다. 공부에만 매진하여 전교 등수를 다투는 학생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선배의 성적이 객관적으로도 준수한 편인 것을 알고 있었다. 수치심과 맞바꿔 쭉 동경해왔던 멋진 선배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 그 정도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아니,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어쩌면 공부도 가르쳐 주고 내 플레이에 도움이 되는 뭔가 특별한 조언 같은 걸 들을 수 있을지도... 좀 더 친해져서 형 동생 하게 될 수도… 너무 멀리 나갔나. 그런데 그런 걸 나에게 그냥 베푼다고? 뭐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든 무형의 것이든 내게 선배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걱정 마, 공짜 아니다 뿅....삐뇽."

지금 어미를 헷갈린 것 같은데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래, 차라리 이런 것이 편하다. 그렇다면 선배는 내게 어떤 걸 바라는 걸까. 과외비일까. 마지막으로 확인한 통장 속 잔고를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매달 보내 주시는 용돈을 아껴서 생활하고 있는 중이지만 과외비를 턱턱 낼 정도로 저축액이 많지는 않았다. 

어떡하지, 정말 과외비라면 이걸 어떻게 거절한다? 또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하기가 힘들었다. 왜냐면... 좀 구질구질해 보일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그만 솔직해지고 싶었다. 어떻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서 잘 거절할 수 있을까, 하고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는데.

"금전적인 대가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걱정은 말고, 삐뇽."

다행이긴 한데, 이 선배 정말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여전히 선배의 의중을 읽을 수 없어 그 무표정을 바라보기만 하자 선배가 길게 한숨을 쉬며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이 있는데."

오늘 자꾸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하며 대화에 좀 더 집중하게 됐다. 여태 선배와의 대화에 집중을 못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이 연애 경험을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집중하는 것처럼, 정말 그런 것일 뿐이다. 

"졸업하기 전에 고백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데 왜 나에게? 아, 내가 아는 여자앤가? 농구부 말고는 딱히 친한 여자애는 없는데… 우리 반일까. 선배는 이미 도쿄 모 대학의 스카우터가 제시한 조건을 충족한 상태였다. 그러니 졸업을 하면 그 학교에 가기 위해 이 지역을 떠날 것이고, 더 이상 우연히라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졸업하기 전에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태섭은… 꾸미고 다니는 걸 좋아하니 누굴 만나본 적이 있을 것도 같고."

어떡하지.

꾸미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는 모두가 공평하게 빡빡 밀린 머리를 하고 다니고 항상 편한 옷, 교복, 운동복. 이 세 가지 선택지 뿐이지만 세탁에 신경을 쓰고 섬유 유연제를 들이붓고 헤어드라이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눈에 띈다. 그래봤자 빡빡인데 유난 떤다는 비아냥도 더러 들어봤다. 거울을 끼고 사는 건 아니더라도 항상 땀범벅이니 옷에서 꿉꿉한 땀 냄새가 나지 않도록 세탁과 건조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 정도로도 꾸민다고 할 수 있지, 여기서는.

그러나 꾸미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누굴 만나본 적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산왕에 진학하기 전에는 겉모습에 신경을 많이 쓰고 다녔지만 그때도 딱히 누군가를 만나본 적은 없었다. 여기에 여학생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공업고등학교라는 특성상 소수였으며, 그마저도 농구에 미친 빡빡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눈 팔 여력조차 없었다. 여기서 미친 빡빡이는 나까지 포함이다. 나보다 더 잘하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건 더 힘들었다. 

그러니까, 선배는 무언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진짜 어떡하지. 선배님, 선배님. 왜 자꾸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나는 태섭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태섭은 나에게 연애 조언을 해주고. 어떠냐, 삐뇽."

그렇지만 아까 생각했잖아. 오늘은 이제 그만 솔직하고 싶다고.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잖아. 동경하던 선배와 친해질 수도 있는 좋은 기회가 제 발로 내 앞까지 굴러들어왔는데. 굳이 솔직해야 할까? 조금 찔리긴 했다.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고 했으니 그 마음이 결코 작지는 않겠지. 아, 양심 찔린다. 따끔따끔.

"저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

"질문하시면 뭐든 답해 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

“그 과목은 재밌어요. 그래서 그건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혹시, 태섭은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는 타입?”

“어떻게 아셨어요?”

“태섭… 잘하는 과목은 현상 유지를 할 정도의 요약본을 만들어서 훑어보고 심화 과정을 봐야 해. 게다가 태섭은 낙제만 면하면 되니 부족한 과목을 위주로 계획을 짜야지, 삐뇽.”

“음… 하지만 잘하는 과목은 재밌어서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선배는 ‘낙제’라는 말을 처음 듣는 것처럼 굴더니 수학 점수를 보고 난 이후에는 또 어떤 과목이 낙제냐고 물어 보았다. 두 과목을 더 이야기 했는데, 됐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그럼 제일 잘하는 과목의 최고 점수는 몇 점이냐고 물어 보았다. 이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배는 점수를 듣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런 건 표정이 읽히지.

선배는 아예 공부 계획까지 짜 주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연습장에 표를 그리고 글씨를 적어 넣고 있는 선배에게 도저히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당초 계획은 일주일에 한 번이었는데 내 성적을 알게 된 선배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하루를 더 추가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금요일과 일요일이 우리가 만나는 날이 되었다. 금요일은 모르는 것 위주로 짧게, 일요일은 오후 내내.

처음 시작은 수학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는데 선배가 짜 준 플랜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어째 주요 과목을 전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선배가 설명해 주면 이해도 잘 됐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왔다.

원래 선배는 나에게 공부를, 나는 선배에게 연애 조언을 해 주기로 한 약속이었지만 선배는 날 붙잡고 문제 풀이를 해주고 단어를 외우게 시킬 뿐, 내게 얻어가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선배는 아마 내가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 알고 있겠지만 실은 고백하면 차여보기만 했는 걸. 고백받은 적은 당연히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허구헌 날 시비 걸려서 얻어 터지고, 그러면 나는 반격하고 그것을 반복하고… 그때의 나를 내가 봤어도 별로 좋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차이고 다닌 건 당연한 것도 같고?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이게 다행인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과외받게 될 줄은 몰랐다.

“집중해, 삐뇽.”

“네.”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낸 선배는 내가 문제 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읽던 책을 마저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선배.”

“어디서 막혀.”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선배랑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무슨 뜻?"

"선배가 도와주시는 건 너무 감사한데 좋아하는 사람이랑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으신가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졸업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학교를 떠나기 전에 고백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에 선배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같이 시간을 좀 보냈다고 이젠 선배의 무표정이 다 같은 무표정이 아니란 것 쯤은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저 표정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는 조금 난감한 표정일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맞췄다. 내가 풀던 문제는 정답일지 확실히 알 수는 없어도 명헌 선배의 표정은 맞출 수 있게 됐구나.

“일단 그 애는 바빠.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시나 봐요.”

“그렇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그래서 내가 귀찮게 할 수도 없고.”

“그래도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에 저랑 공부하고 있는 게 저는 죄송해서… 그렇잖아요. 선배는 이미 대학도 합격했고, 이런 문제집 같은 거 더 이상은 안봐도 상관 없는데.”

민망함에 샤프를 든 손을 약간 꼼지락댔다.

“죄송해?”

“네? 네… 죄송하죠.”

“그럼 이거.”

선배는 바로 전까지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던 연습장을 콕 가리켰다.

“이 문제는 반드시 맞출 것.”

“엑.”

“딴짓한 벌이다, 삐뇽. 틀리면 음료수 사기.”

결국 그 문제는 틀렸다. 내가 산 콜라 캔을 원샷하는 선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게… 되나? 괜찮은 건가? 안 뿜나? 탄산 음료잖아.

“맛있다, 삐뇽.”

그게 되네. 되는구나... 목소리는 산뜻한데 표정 변화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냥 무표정이 아니라 약간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미소 지은 듯 만 듯한 얼굴을 한 선배를 보니 또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경기를 마치고 선배가 선물이나 편지를 한 아름 안고 와 가방에 넣는 것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경기나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종종 편지를 받아 오곤 했었다. 대부분 산왕의 농구부 주장에게 보내는 팬레터였지만 러브레터도 더러 섞여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수없이 받아 본 선배도 정작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전하기 힘든 걸까.

편지, 편지라고? 오랜만에 쓸 만한 생각을 해냈네.

“편지.”

“삐뇽?”

“편지를 쓰는 거에요.”

“무슨 편지?”

“좋아하는 분께 마음을 전하는 편지요.”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어.”

“하지만 고백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마음의 준비.”

“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어.”

마음의 준비는 무슨 마음의 준비? 고백하고 싶다고 지금 나랑 이러고 있게 된 건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선배는 졸업 전에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었지 당장 하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다. 졸업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거참, 얼마나 좋아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선배 지금 귀가 빨개요.”

그 말에 선배는 귀 끝을 만져 보더니 정말이네. 하고 계속 귀를 매만졌다. 상대방의 어떤 점이 그리도 좋아서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고, 이렇게 부끄러워 하면서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걸까?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상대방도 선배 마음을 알아 줄 거에요.”

“정말 그럴까.”

“그럼요,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그래 보여?”

“네? 음…”

나는 잠깐 선배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선배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인기도 많고 농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선배를 싫어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여자들은 의외로 이런 점을 귀엽다고 생각한다지. 이제는 귀 끝만 붉은 것이 아니라 뺨도 수줍은 빛깔이었다. 큰 키와 널찍한 어깨에 어울리지 않게.

“네. 제가 봐도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잘 전해질 거에요.”

“그러면 좋겠네.”

지금 선배는 미소 지은 듯 만 듯한 표정이 아닌 확실히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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