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헌태섭/우성태섭] 그 남자가 추억하는 방법
업로드 2023.09.12
* 태섭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 세같살
***
"자. 밤 11시까지 오면 되는거에요. 알죠?"
무언가 못마땅해하는 두 남자의 표정이 뚱하다. 태섭은 그런 두 남자에게 웃어보이며 바닥에 딱 들러붙은 발이 질질 끌리도록 등을 밀었다. 우성과 명헌의 못마땅하게 톡 튀어나온 입술과 꽉 쥐어진 주먹 속에 잔뜩 비틀린 종이 쪼가리가 태섭의 눈에 들어왔다. 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앞으로 돌아가 부루퉁한 입술에 한번씩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펴질 줄 모르는 미간이 살짝 펴졌다.
"그래도 오늘 태섭 생일인데."
"맞아. 맨날 생일도 제대로 못 보내고 항상 끝무렵에 함께할 수 있게 숙제나 잔뜩 내주고."
"그럼 어떡해. 나를 위한 날이니 나를 위한 선물을 제대로 구해달라고 하는 건데."
"매년 생일마다 전국을 돌게 하는데?"
"싫어요?"
1년에 두 어번 볼까 말까한 태섭의 애교섞인 목소리는 결코 아무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앓는 소리를 내는 명헌과 한숨을 쉬는 우성이 태섭에게 미련 가득한 시선을 보내다 문을 열고 나갔다. 둘의 큰 손에 쥐어진 작은 쪽지에는 태섭이 전국 각지에서 갖고 싶다고 적힌 생일 선물들이 적혀 있었다. 포항의 과매기, 영덕의 게 찜, 부산의 어묵, 대전의 튀김소보로……등등. 각 지역에서 유명한 것들은 하나씩 적어다 나눠서 우성과 명헌에게 쥐어주는 것이다. 태섭이 생일에 받고 싶은 선물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한 두군데도 아닌 여러 지역을 하루만에 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섭을 사랑하는 만큼 더 특별한 날인 생일에 더욱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은 두 남자의 사랑이 지금까지 단 한번도 태섭의 생일 선물 리스트를 놓친 적이 없도록 이끌어왔다. 생일 선물 마련하느라 그 특별한 하루의 마감 직전에 직전까지 밖에 내몰려야한다는 게 문제지. 태섭을 이겨본 적도, 이길 생각도 없는 두 남자가 한숨을 쉬며 각자의 차로 흩어진다. 그리고 바깥 베란다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태섭이 명헌과 우성의 차량이 시야 밖으로 빠져나가고 나서야 제 방으로 향한다.
***
셋이 함께 사는 공간이지만 개인적인 공간도 있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태섭이었다. 평소 잘 때는 가장 큰 방에서 큰 침대를 놓고 같이 자고, 저마다 일이 있거나 할 때 각자의 방에서 지내는 식으로. 저마다 메달이라던가 트로피 같이 장식할 거리가 많은 명헌과 우성이었기에 태섭의 말에 긍정해 작은 방 3개에 큰 방 하나, 그리고 거실이 딸린 집을 구했다. 돈이야 뭐, 잘 나가는 농구 선수들인데 부족할 일은 없지.
그렇게 개인적인 공간은 저마다의 취향이 담뿍 담긴 방이 되었다. 다들 개인 방에서 시간을 보내더라도, 잘 때는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큰 방의 큰 침대에 같이 엉겨 잠들었다. 피곤에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끈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제 방에 들어와 문을 닫은 태섭이 작은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의 문을 열어 조각 케이크를 꺼낸다.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 생수병들과 비교하면 이질적인 조각 케이크. 폭신한 생크림이 시트 사이사이를 품고, 그 위로 한가득 자리한 케이크였다. 하얀 생크림 위로 두 개의 딸기가 놓여있고, 딸기에 기대어진 화이트 초콜릿에는 마일드 초콜릿으로 '준섭&태섭'이라는 글자가 그려져있었다.
"……."
케이크를 접시째 든 태섭이 침대로 다가가 그 위로 자리를 잡았다. 창가쪽으로 몸을 붙여 창틀에 접시를 올려놓고 고개를 기울여 벽에 기댄다. 태섭의 시야가 열린 창을 향했다. 여름의 한참을 알리는 듯 구름이 거의 없는 새파란 하늘에 가열차게 울어대는 매미의 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말없이 밖을 바라보던 태섭이 손을 들어 딸기 앞에 세워진 초콜릿을 집어든다.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초콜릿을 반으로 부러뜨린다. 태섭이 살짝 혀를 내밀어 반으로 부러진 초콜릿들을 동시에 입에 집어넣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하고 단단해진 초콜릿이 태섭의 저작활동에 의해 산산히 부서져간다. 잘게 부서진 초콜릿들이 태섭의 입 안에서 조금씩 녹아든다. 비스듬하게 기울었던 고개를 바로하고, 태섭이 중얼거렸다.
"생일 축하해, 형."
***
명헌이나 우성에게는 말 못한 부분이었다.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저 혼자만의 생일인 척을 했다.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강한 척했다. 형을 부정한다거나 숨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저 형의 생일을 얘기하게 되면, 더 과거의 일들을 꺼내는 순간 둘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까봐. 그래서였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고 마음을 먹어도 쉽지 않았다. 형인 준섭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유까지 설명할 즈음에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얘기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둘에게 털어놓게 되면, 둘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도 상상하면 두려웠다. 미움받지 않고 싶었다. 있는 힘껏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에게서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사랑만 주고, 사랑만 받고 싶었다. 기쁨과 행복만을 함께 하고 싶었다.
고등학생 시절, 산왕공고와의 시합 후로 송씨 집안의 관계가 이전보다 진전되었음을 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섰던 그 시간을 기억한다. 그것은 가족이기에 시간이 지나도, 오래 걸려도 결국에는 다가갈 수 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연인이면서도 명백한 타인인 명헌과 우성은 달랐다. 타인이니까. 이해관계가 성립하는 가족들과는 다른 관계. 다른 사이. 태섭은 비겁하지만 겁을 집어먹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얘기를 하지 않는 게 오히려 그들을 서운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렵사리 얘기를 꺼낸 것이 민망해질만큼, 부드럽게 웃으며 따듯하고 단단하게 안아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두려웠다. 심장이 더욱 쿵쾅거렸다. 입 밖으로, 가슴 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이 쿵쾅거렸다.
―그러니까, 이것은 태섭이 좀 더…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마음정리가 될 때까지.
지금보다 조금만 더, 형의 생일을 잘 축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때까지만 두 사람으로 밖으로 내보내는 거다.
형의 생일을 축하하고, 그를 온전히 추억할 수 있도록.
고등학생 시절 항상 착용했던 검고 붉은 두 아대를 케이크 접시 옆에 두었다. 오래 착용했기에 그 때보다 많이 헤진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아주 잘 보여주는 듯 했다. 이제는 더 헤질까 우려되어 착용하지 않고 태섭의 책상 첫번째 서랍에 고이 넣어두고 있는. 태섭은 그 아대를 보며 왼손목을 슬쩍 문질렀다.
태섭이 매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꿈에 그리던 타도 산왕을 이루어내고, 미국의 유학을 지내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선수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시간이 태섭의 눈 앞에 펼쳐지듯 그려졌다. 산왕공고와의 시합을 연으로 미국에서 우성과, 돌아온 한국에서 명헌과 연이 닿으면서 연인이 되기까지의 시간도 그려진다. 태섭의 시선이 다시금 아대로 향한다. 남자와,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두 명과 만나고 있다는 걸 형이 알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 상상해본다. 남자라니 어림도 없지! 하고 반대할 형의 모습과, 그래도 동생이 좋다는데 이 형은 만족한다! 라며 개구지게 웃는 형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자신만큼, 자신보다 더 어른이 된 형은 과연 태섭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었을까.
가장 든든한 모습이 형 같았던 북산의 영원한 주장 치수를 떠올린다. 주먹다짐하던 과거가 있을지언정 자신에게 항상 부드럽게 웃어주는 모습이 형 같았던 북산의 슈터 대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직하게 제 옆을 지키고 선 명헌을 떠올린다. 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생같은 동갑인 우성이 덩달아 떠오른다. 슬며시 눈을 뜬 태섭이 피식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형의 부재를 채워줄 누군가를 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그 때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에 그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태섭은 뼛속 깊게 파고드는 시린 외로움을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진짜 제 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형의 부재를 어느 누구든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걸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인으로 만나고 있던 명헌에게 마저 형의 그림자를 찾지 않았나. 그것을 깨닫고 명헌에게서 형의 그림자를 찾는 것을 그만뒀지만, 그 눈치 빠른 사람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제게 묻지 않았다. 제게서 누구를 비쳐보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처 옆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기다릴 뿐이다. 먼저 얘기할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무례하게 군 자신에게 치대온 것은 우성이었다. 연인에게서 형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받아 허우적 거리던 태섭을 건져올린 것이, 우성이었다. 우성은 태섭에게 평소보다 배는 많은 사랑을 쏟았다. 따스하게 이름을 부르고, 망설이는 손을 먼저 잡아오고, 시린 몸을 먼저 안아왔다.
태섭이 케이크 위에 놓인 두 개의 딸기를 보았다. 명헌도, 우성도. 그 누구도 태섭을 재촉하지 않았다. 태섭을 의심하지 않았고,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저마다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태섭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정리가 다 되면 먼저 얘기할 수 있도록. 옆에서 기다리고,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태섭의 입 안에서 부서져 녹아내린 초콜릿의 단 향이 느껴졌다. 케이크 위 딸기 하나를 집어든다. 반을 베어문다. 상큼한 딸기의 향과 과육이 태섭의 입 안을 적셨다. 초콜릿 향과 딸기 향이 한데 섞였다. 태섭이 딸기를 씹었다. 다른 딸기를 마저 집어들어 입 안에 넣는다. 과육이 터지고, 초콜릿 향보다 딸기 향이 더욱 강하게 남았다.
7월이 되면, 태섭은 평소에는 그냥 보고 지나칠 것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케이크가 그랬다. 특히, 형과 함께 생일을 축하할 때마다 샀던 생크림 딸기 케이크는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 케이크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터질 것같이 쿵쾅거렸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러봐도 소용이 없었다. 7월과 생크림 딸기 케이크. 생일과 생크림 딸기 케이크. 형과 동생의 생일. 과 생크림 딸기 케이크. 형과 동생의 이름이 그려진 초콜릿. 생크림 딸기 케이크. 7월의 생일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태섭의 숨이 가빠지는 날이 많았다. 형의 얼굴이, 함께 농구하던 순간이, 초콜릿을 반으로 부러뜨려 나눠먹던 순간이. 케이크를 잘라 나누어 먹던 순간이.
농구하자는 저를 두고 바다로 나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던 순간이.
아.
태섭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 새 손바닥에 식은땀이 들어찼다. 전신을 뒤덮은 식은땀을 인식하고 나서야 태섭이 숨을 헐떡였다. 목 안으로 넘어간 초콜릿 향이 딸기 향을 도리어 덮어들었다. 케이크의 맨 위를 덮은 생크림은 더운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녹고 있었다. 케이크 시트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아……."
축축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넘긴 태섭이 한숨을 내뱉었다. 양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는다.
아무래도, 올해도 그른 것 같다.
누구나 저마다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안다.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마음의 준비를 해온 사람도 소중한 사람이, 가족이, 친구가, 연인의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이 울면서 장례를 치를 때 무너지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채찍질하면서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참아내도. 어느 순간에. 상실의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면 참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고 만다. 태섭에게서는 생크림 딸기 케이크가 그러했다. 즐겁게 웃으면서도 그것을 마주하게 되면 참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잊었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커다란 구멍이 되어 순식간에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가려졌다고, 아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색하게.
상실은 태섭조차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올해도 조각 하나인 케이크는 다 먹지 못할 것이다. 명헌과 우성이 오기 전에 음식물 처리기에 들어가 흔적을 조금씩 감추게 될 것이다. 용기는 진작 자리를 잃었다. 모두 흩어졌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있는 힘껏 한다는 강한척은 의미가 없어졌다. 올해도 한 자리에 자신을 기다리고, 사랑을 쏟아주는 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밤늦게 제 말도 안되는 억지에 어울려 선물을 잔뜩 가져와 지친 얼굴로 제게 웃어주는 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이것이 태섭이 형을, 준섭을 추억하는 방법이었다.
올해의 생일도. 그렇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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