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회랑

시간의 교차로 1. 동쪽으로 가는 길목(알카이드)

시간: 3년 전

소화가가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무렵.

머플러를 두른 소년 하나가 시장의 동쪽 입구로 들어섰다.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혼잡한 거리. 져가는 석양 빛을 반사하는 옅은 금발의 머리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막 입장하는 소년에게 직원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직원: 시간상 곧 폐점할 부스도 있을텐데, 괜찮겠어요?

알카이드는 상대의 호의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응답했다.

이 마켓레이드에 들르는 것 자체가 그의 여행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즉, 이곳에 도착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10여일 전, 그는 이전에 몇 번 사진을 실어보낸 잡지사 ‘Radiant’의 편집자로부터 풍경 사진을 몇 장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잡지 편집자: 실은, 이전에 의뢰한 사진 작가에게 문제가 생겨서…… 네게 대역을 부탁하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없을까? 제발 부탁한다.

알카이드: 걱정 마세요. 안그래도 연말연시에는 여행을 갈 예정이었거든요. 지금 그 여행 계획표를 짜고 있는 중이었죠.

알카이드: 물론 카메라도 가지고 갈 예정이었고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맡을게요.

전화 너머로 안도한 듯한 한숨이 들려왔다.

잡지 편집자: 고마워. 아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어떤 사진을 찍을지는 네게 맡길게. 어차피 네 사진은 사내에서도 독자들에게서도 평이 좋으니까 말이야.

잡지 편집자: 이번에는 어떤 사진을 찍어올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알카이드: 너무 띄워주시네요.

알카이드의 겸손한 답변에 편집자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잡지 편집자: 정말 기대하고 있다니까! 그 계획표에도 적어 둬. ‘열흘 안에 사진 다섯 장!’ 하고!

알카이드: 알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잡지 편집자: 지금 적어 둬! 절대로! 적고 그거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더 좋고!

잡지 편집자: 미안, 난 너를 믿지만… 이번은 진짜 정말 긴급 사태라서…… 어쨌건, 잘 부탁할게.

전화가 끊긴 후, ‘억지로’ 계획표에 추가된 글자를 본 알카이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약속을 깨는 짓은 절대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계획표에 적은 것은 반드시 달성할 것. 그것이 알카이드의 신념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험을 사랑하고 미지에 관한 탐구심이 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것은 ‘계획대로 진행할 것’이었다.

즐거운 여행이든, 별을 보는 것이든 상관 없었다. 알카이드에게 낭만이란 일상과 우연이 겹쳐지며 생겨나는 설렘이었으니까.

예를 들면, 일기 예보에서는 맑을 거라고 했던 날씨가 갑자기 폭설로 바뀌었을 때라든가. 혹은 별을 보다가 우연히 별동별을 발견했을 때라든가.

그리해서, 이번 여행은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이 도시가 계획표에 쓰여진 마지막 장소였으니까.

본래에는 지난 밤 비행기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는 여행지에서 반나절을 더 머물렀다.

그랬더니 그 반나절 사이에 집 근처가 안개에 휩싸이더니, 급기야 비행기가 결항되어버렸다……. 항공사에서는 ‘항공편 재개 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는 말만을 전해올 뿐이었다.

다행이랄지, 서둘러 돌아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알카이드는 공항 내의 호텔에서 머무르며 그간 찍은 사진을 정리해 출판사에 보낼 준비를 했다.

데이터 용량이 제법 커서 전송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심심풀이로 마켓레이드 홍보 사이트의 링크를 눌렀는데, 개중 어떤 동영상이 눈에 띄었다.

그 영상 안에서는 일렬로 늘어선 정교한 단안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알카이드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꽤나 오래 전부터 단안경을 하나쯤 가지고 싶었다. 적절한 렌즈를 장착하면 여행 중에 망원경 대신 별을 볼 수 있을테니까.

위치를 확인해보니 마켓은 공항에서 10분 정도 거리의 시장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카메라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이미 사진을 전송하는 중이니 더 찍을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알카이드는 카메라를 두고 빈손으로 시내로 향했다.


마켓에 입장한 알카이드는 영상에서 확인한 표지판에 의지해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이 주변은 비주얼 디자인을 테마로 한 부스가 모여있는 장소 같았다. 늘어서 있는 상품을 보고있자니, 어느 작품이든 매우 흥미로웠다.

영상으로 봤을 때, 분명 저 멀리에 시계탑이 보였었다. 이 근처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주위를 확인하자, 역시나 저쪽에 붉은 탑이 언뜻 보였다.

그렇게 시계탑 주위를 둘러보려던 그 때, 출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스마트폰 너머로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사진이 무사히 전송된 모양이었다.

잡지 편집자: 알카이드, 사진 확인했어! 편집부의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고!

알카이드: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서 다행이네요.

알카이드는 통화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잡지 편집자: 어라, 시끄럽네. 혹시 바깥이야?

그가 아이디어 마켓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편집자는 흥미롭게 말을 이었다.

잡지 편집자: 그러고보니 우리 잡지도 이번에 그 마켓에서 부스를 냈던 거 같은데.

알카이드: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상대는 아랑곳 않고 알카이드의 말을 끊어냈다.

잡지 편집자: 네가 존경하는 마빈 슐리의 작품도 다음 호 특집에 실릴 예정이거든. 마켓 부스에 샘플이 있는데, 괜찮다면 네 몫을 남겨두라고 말해둘게.

알카이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스마트폰 너머의 상대는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것처럼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잡지 편집: 물론, 전부 미공개 사진이야. 특히 설산의 오로라가 진짜 장엄한데, 이건 직접 봐야만 하거든.

알카이드: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마빈 슐리는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적부터 목표로 하던 인물이었다. 구도에서부터 색감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사진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봐왔기 때문에 알카이드는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마빈 슐리가 촬영한 장소를 전부 직접 경험해보고 그와 같은 사진을 찍는 것은 알카이드의 오랜 꿈이었다.

잡지 편집자: 좋아, 그럼 공식 SNS에 계제해둘게. ‘인기 사진 작가 알카이드, 15분 한정 깜짝 등장! 현장에서만 증정하는 엽서도 놓치지 마세요!’

알카이드: 정말,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는군요…….

알카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기존 종이 매체인 잡지는 온갖 활로를 찾아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기꺼이 협력하는 수 밖에.

편집자는 곧바로 그에게 부스의 위치를 전해주었다. 지금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가는 길에는 개인 미디어와 방송사에서 나온 이들이 촬영 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떤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일상 블로거: 이번 마켓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있나요?

인터뷰를 받고 있는 소녀는 무언가를 먹느라 조금 웅얼거렸다.

16살의 소화가: 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도 길고…… 앗, 하지만 군고구마는 맛있어요.

일상 블로거: 아하하, 정말 솔직하네요. 그럼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볼까요?

알카이드는 무심코 미소 지었다. 아마 소녀의 말은 취재진이 원하던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득 소녀의 얼굴이 궁금해진 그가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당초의 목적지였던 단안경 부스가 그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빠르게 부스로 다가간 알카이드는 영상에서 보았던 단안경을 손에 쥐고, 저 멀리 우뚝 솟은 시계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멀리 있는 경치가 눈 앞에 비칠 거라고 생각하던 그는 이내 당황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린 알카이드는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다시 확인했다.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게 단안경보다 훨씬 가볍단 사실을.

그는 시선을 내려 ‘가짜’ 단안경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웃음 지었다.

알카이드: ……만화경이었구나.

분명 멀리있는 것을 보기 위한 단안경이라고 생각했으나, 우연히 손에 쥔 만화경 덕에 생각지도 못한 다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알카이드의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넘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또다시 세상의 ‘낭만’에 휩쓸린 것이었다.

신의 달콤한 장난처럼 느껴지는 이런 순간을, 알카이드는 정말 좋아했다.

그 때,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항공사에서 온 연락이었다.

안개가 가라앉아 비행기가 뜰 수 있으니 원하는 시간대의 항공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급격한 날씨 변화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개는 언젠가 걷히는 법. 예정에 없던 여로도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간다.

공항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금 막 활주로를 벗어나는 비행기가 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언뜻 보였다.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는 비행기. 지구상에는 모르는 사이 같은 항공편을 타고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일, 같은 비행기를 타게될 사람은 도대체 어디의 누구일까?


소화가는 프린터 앞에 서서 기념 스탬프에 적혀있던 엽서 교환 코드를 입력하고 있었다.

삐ㅡ,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글자가 표기됐다. ‘코드를 확인했습니다. 엽서를 인쇄하기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배출구에서 1세트의 엽서가 천천히 뽑아져나왔다.

한 장 한 장 확인해보면, ‘Radiant’라는 잡지사에서 고른 사진 엽서가 전부 매우 아름다웠다.

개중에서도 소녀의 눈길을 끈 것은 새하얀 설산과 하늘의 선명한 오로라였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에는 사진 작가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M으로 시작하는 알파벳이었다.

소화가: 마…… 비……인……?

어떻게든 그 이름을 읽어보려던 소녀는 이내 포기했다.

소화가: 되게 멋지다…… 언젠가 가보고 싶네.

그렇게 말하던 소녀는 이내 인쇄가 끝난 엽서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밤. 집에 돌아온 소녀는, 그 엽서를 책상에 장식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오늘 느꼈던 충동을 실행으로 옮기게 된다.

소녀를 취재한 블로거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촬영본을 편집해 영상을 업로드했다. 그 영상의 가장 끝자락에는, 알카이드와 소화가가 언뜻 비추고 있었다. 흐릿한 두 개의 점으로.

영상은 조회수가 적었고, 이내 다른 인기 동영상에 묻혀 가라앉았다. 이후에도 이 영상의 기적을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ㅡㅡ

다음 해 겨울, 그들은 재회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네 번째 봄에는 단 둘이 여행도 간다.

그날부터 알카이드의 계획표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계획에 소녀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다.

소녀는 알카이드의 시선 끝에 우연히 비춰진 작은 별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별은 훌륭하게 그의 삶을 궤도를 탔다고 말할 수 있었다.

2. 남쪽으로 가는 길목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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