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안엘리엇

#변화

요 며칠 사이에, 그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보이기는 했었다. 무언가 어딘가로 떠날 듯이,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저 착각이라 여겼다. 제가 이곳에 있는데 자신을 두고 어딘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어느 날의 일상처럼, 제 곁에 오리라 생각했던 이가 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쁜 일이 생겼나 보다,라며 또다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것이 하루, 이틀… 일주일.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느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어디서든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때야 비로소 그가 제게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갈증이 휘몰아친다. 언제나처럼 제 피를 그에게 내어주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쾌감에 몸을 맡기고 싶었고, 언제나처럼 저를 한껏 애태우면서도 그 이상으로 만족시켜 주는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어째서 지금껏 계속 그가 제 옆에 있을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어째서, 단 한 번도 그가 제게 말도 없이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걸까.

‘이대로 떠나보내라고…?’

이대로 그를 놓아주기 싫었다. 비록 처음엔 원하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제가 손에 넣은 제 것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 아니다. 이건 갈망이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언제나처럼 주는 자극에 고개를 내밀지 않았던 갈망, 그리고… 소유욕. 질리지도 않은 제 것을, 세상에 풀어두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서 제 손아귀에 쥘 것이다.

“찾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앞에 데려와.”

사람을 풀었다. 모습이 바뀌는 건 아니라 했으니 분명 가깝고 그의 발걸음이 쉽게 닿았던 곳에는 없을 것이기에, 제 상단이 닿을 수 있는 곳뿐만 아니라 닿지 못했던 곳까지 세계의 전부에 사람을 풀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찾아내어 데려와 더는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그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루가 영원과도 같은 시간, 계속되는 갈망과 함께 기분은 점차 진창으로 처박혀간다. 예민해져 가는 기분에 주변에서 제 눈치를 볼 때쯤, 기분 전환이라도 해보고자 그와 만나고 자연스레 그만두었던 다른 이를 제 품 안에 안아보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를 찾아내는 동안, 하나뿐인 동생에게 제 자리를 넘겨줄 준비를 해 나갔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제가 어떤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 가문을 이어나가게 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영원히 그를 찾지 못할까 봐 초조해져가고 있던 와중, 마침내 그를 찾아 제 영역으로 데려왔다는 보고를 들었다. 긴 시간이었다. 바닥난 인내심에 하던 일들을 내팽개치고, 감금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급히 옮긴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서 저와 눈이 마주치는 그를 본 순간에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저를 멋대로 떠난 것에 대한 분노, 겨우 찾아내었다는 안도, 그리고… 어서 그의 품에 안기라며 아우성치며 이는 갈망. 그 모든 복잡한 감정과 함께 문을 닫고 그에게로 가까이 걸음을 옮긴다.

“저를 떠나니 좋으셨습니까.”

막상 그에게 말을 꺼내니 나오는 말투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혹여나 도망갈세라, 단단히 묶여 있는 채로 그는, 그를 찾기 전까지 진창에 처박혀있던 자신과 달리 차분한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으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법이었다. 제게 말을 건네는 그는, 오랜만에 보는 낯선 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조금 어이가 없어 하,라는 탄성이 저도 모르게 내뱉어졌다.

“그냥 보내주십시오. 나는 당신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며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보내달라고? 다른 시간을 살고 있으니? 내가 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니 목소리 톤이 한층 낮아진다.

“그럼 평생 여기에 있으면 되잖습니까. 누가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제 소유인데.”

오랜 시간 이어진 갈증, 그리고 제 앞에 있는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그의 입술에 맞부딪힌다. 그러나 루시안, 그가 제 가슴팍을 꾹 밀어내며 저를 거절하기에 입술을 떼어냈다. 부족했지만, 더,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제 감정을 무시한 채 그를 바라보니 드물게 감정이 올라와 제게 말하기에 조금 멈칫한다.

“당신이 죽고 나면 혼자 남을 제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영원한 시간을 함께해 줄 것도 아니면서 소유하려 들지 마시길.”

그는 제게 그리 말하고 고개를 돌려낸다. 아리송한 그의 말은, 제가 그를 이리 원한 것처럼 저를 원한다는 것일까, 하는 희망이 피어오른다. 그럼 어째서 저를 두고 도망간 것인지,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한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면 제게 그리해 보자고 꼬셔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달콤한 말로 저를 그 시간에 가둬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여태까지 제게 제멋대로 굴어놓고, 이런 행동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아 저와 눈을 마주친다.

만일 당신이 제게 함께 같은 시간을 걸어가자, 라 그리 말했다면 순순히 그리하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저, 묻지 않았으니 이대로도 좋은가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허나, 이렇게 제게 말도 없이 떠날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이 관계를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시작했으면 제게 함께 하자고 해봤어야지. 하는 원망의 감정이 희망 속에서 피어오르기에 꾹꾹 내리누른 채 차분한 투로 말을 꺼낸다.

“그러면 계속 그리 도망만 치실 겁니까. 저를 이렇게 헤집어놓고 제가 영원한 시간을 함께하고 싶도록 저를 꼬셔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신 겁니까.”

제 앞에 있는 이가, 처음으로 떨리는 눈동자와 함께 동요를 보인다. 하, 정말 제게 함께하자고 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걸까.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와 만나 들떠 있던 기분이 다시 바닥으로 처박힌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평온한 척, 그와 눈을 마주친다.

“영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당신은 모릅니다. 그것은 영혼이 메마르고 지쳤음에도 휴식을 허락받지 못하고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긴 형벌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삶을 함께 해주신다고요. 분명 저를 원망하게 될 겁니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 표현하는 것을 듣는 것은, 당연하게도 처음이었다. 딱히 살아가는데 필요하지 않았기에 굳이 묻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가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 유한한 생명을 가진 제가 무한의 삶을 어찌 알겠는가. 그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였고, 저 또한 그런 인간이었다.

“원망이라 하셨습니까?”

원망? 제 자신이 선택한 그 어떤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아니, 후회했던 것은 단 한순간이었다. 언제나 저는 옳았고, 제 선택을 두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제가 선택한 길이 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제 의견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저를 두고 떠난 지금의 현실이 더 원망스러운데, 차라리 영원을 함께해서라도 제 곁에 당신을 묶어두고 싶다는 이 마음이, 제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절대 틀린 길 일리가 없었다. 제 첫 후회가 당신이 떠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음에도 눈을 돌렸던 것이란 걸, 당신은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모르니 이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제 선택이 충동적으로 보였습니까? 유한한 삶을 살아간 제가, 영원의 시간을 모를 것이라고? 당신이 제 곁을 떠난 시간은 제게 있어서 영원과도 같았는데, 이것도 제가 영원 모르는 겁니까?”

그가 살아온 영원의 시간은, 저는 모른다. 그러나 제게 있어 그가 없던 시간은 영원과도 같아서, 지금 제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른다. 당신이 제게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원망이 쌓여간다. 제 삶은 그를 만난 이후로 그에게 맞춰져 있는데, 저는 그저 지나가는 이였을 뿐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이전에는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아니 최소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제 말 앞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당신의 모습에, 자신이 그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라고, 또 바란다. 이미 당신을 찾으며 제 삶의 전부였던 이곳을 떠날 준비는 되어 있으니, 부디 당신이 저를 떠나지 말길. 부디 찰나의 곁이 아니라 영원한 당신의 곁을 제게 내주길. 그리 바라며 침묵하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거절의 말을 내뱉을까 봐 점차 초조해진다. 괜찮다. 만약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저 또한 이곳에서 그를 내보내주지 않으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겨우 평온을 되찾는다.

“영원은 당신에게 족쇄가 될 겁니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으신가요.”

그리 제게 물으면서도, 망설이는 듯한 그의 모습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제가 살아온 터전을 떠날 준비는 해놨으니, 자신은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더는 제가 상업을 유치해서 키울 수는 없는 게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지만, 그게 그와 함께 하는 것만큼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으니, 상관 없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어서 저를 루시안, 당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주세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비로소 그를 구속하고 있던 것을 풀어낸다. 만일 그가 이를 노려 저를 떠난다면, 분명 저는 그에 의한 후회를 하고 말 것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또다시 그를 믿는다. 그러자 하루 이틀이 걸리는 것이 아닌데 분명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누울 공간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말에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제 침실로 향한다.

제 침실에 도착해 사람을 물리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본다. 그와 눈이 마주치니 보이는 여전한 망설임. 저는 괜찮다는 듯, 더는 망설이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그의 목에 제 팔을 둘러 가까이 끌어당기곤 입술을 맞춘다. 익숙한 듯, 제 입안에 그의 혀가 들어와 제 입안을 온통 헤집으며 탐한다. 만족감이 드는 것과 함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붙은 입술이 떨어진다. 떨어진 입술에선 은사가 길게 늘어서며, 동시에 그의 품에 안기라며 아우성치는 제 몸의 반응을 뒤로한다.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나직이 웃어 보이다, 그에게 저는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분명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챙긴 것인지, 날카로운 것을 꺼내어 제 팔에 피를 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런 제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 걸까, 작게 웃어 보이던 그는 안심시켜 주듯 제 머리칼을 다정히 쓰다듬는다. 흘러나오는 그의 피는 제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뱀파이어도 별다른 것이 없구나,라는 실없는 생각을 한다. 이내, 그는 제게 자신의 팔을 가까이 가져대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이 피를 마시면 됩니다. 며칠 동안 마시면, 뱀파이어가 되겠지만, 많이 아플 텐데 괜찮은가요.”

저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말. 이미 준비도, 각오도 끝났기에 그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시며 그에게 제 의지를 보인다. 어느 정도 마시자 제 팔을 떼어낸 그는 제게 팔을 둘러 침대에 제 몸을 눕힌다.

처음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어 그의 손바닥에 제 입을 맞추며 장난을 치고 있으니, 저를 자극하지 말라며 그의 손이 제 손을 벗어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 몸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며,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아팠던 적은 태어나서 단 한순간도 없었다. 자연스레 달뜬 숨을 내뱉으며, 조금이라도 시원한 것을 찾아 손을 뻗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머리 위에는 물에 젖어 촉촉해진 수건이 올라온다. 조금이나마 퍼지는 시원함에, 제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의 손을 찾아 겨우 붙잡은 채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다.

며칠간 그의 피를 겨우 목구멍에 넘기고, 열병에 걸린 듯, 심하게 오른 열과 두통에 나날을 보낸 것도 잠시, 점차 제 몸에 오르는 열이 줄어듦을 느낀다. 그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고 자리를 지킨 그의 모습이 걱정되어 겨우 이젠 조금 괜찮으니 쉬고 오라는 말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 말을 거절하는 그의 모습에, 제 옆자리를 누군가 지켜준다는 안심이 드는 것과 동시에 괜찮은 걸까, 하는 걱정이 함께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열이 가라앉았다. 정성스레 저를 간호해 준 그를 보며 이제 괜찮다는 듯, 나직하게 웃어 보인다. 저와 마주친 그의 눈동자. 그 속에서 별반 다를 게 없는 제 모습이 비친다. 실감이 나질 않아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그가 저를 찬찬히 살펴본다. 마치, 제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는 듯이.

“엘리, 눈 색이 조금 더 하얗게 변했네요.”

아, 그의 말에 그제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는 실감이 난다. 온몸에 차오르는 희열에, 기쁨에, 만족에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이젠 더 이상, 인간으로서 살 수 없겠지만 상관없었다. 제 삶에 찾아온 이와 저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평생 함께 할 것이고, 그 속에서 저는 언제나 행복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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