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ity in the pink
리어다머는 간이 의자에 앉아 뺨에 짧은 줄 여섯 개를 그리는 찰나에도 초조하게 바깥을 곁눈질했다. 고작 천막을 사이에 두고 세 걸음쯤 떨어져 있을 뿐이지만 무화과를 혼자 놔두기 불안했다. 페이스페인팅 부스는 사람이 두 명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빠듯하게 찰 정도로 좁았고, 리어다머는 봉사자를 앞에 두고 남자친구와만 대화하려 들 정도로 염치없지도 못했다. 저런 섹시 다이너마이트 남자친구를 퀴어퍼레이드에 데려오다니 용기가 대단한걸요. 물감 묻힌 붓을 든 봉사자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리어다머는 모든 농담이 그렇듯 그 한 마디 안에 진실이 너무나도 많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들여다볼 화면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테니 심심할 것 같고 방금 전까지는 좋기만 했던 햇볕도 이제는 따갑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그보다도 무화과의 얼굴에 불쑥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상대를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더 싫었다. 리어다머의 옷장에서 꺼냈고 무화과에게는 지나치게 딱 맞는 핑크색 티셔츠를 입은 무화과는 짝다리를 짚지 않아도 이 거리의 누구보다도 멋졌고 퍼레이드를 보던 사람들조차 시선을 던지다 못해 몸을 돌릴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였다. 리어다머는 결국 양 뺨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오른쪽 뺨에 그린 무지개를 거울로 확인하자마자 일어났다.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 해시태그 붙여서 인스타그램에 올릴게요! 리어다머는 손을 부산스럽게 흔들며 몸을 굽혀 부스를 빠져나왔다. 무화과는 눈 아래에 무지개를 그린 리어다머를 가까이에서 보고는 구름 뒤에서 드러나는 해처럼 환히 웃었다.
"귀엽네요."
"무화과 씨도 할래요?"
다행히도 무화과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리어다머도 뺨에 귀여운 그림을 그린 무화과를 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이 무화과의 뺨에 닿는 것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무화과와 리어다머는 서로를 놓칠세라 손을 꼭 붙들고 인파 사이로 들어갔다. 무화과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물결 사이에서도 리어다머만 바라보면서, 주변의 물살에 목소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힘을 주어 말했다. 전에 와 봤습니까? 리어다머는 여전히 염화의 존재를 잊은 채 거의 소리지르듯 답했다. 저도 처음이에요! 둘은 헤어지지 않고 무사히 길 건너편에 도착했다. 발 디딜 곳이 충분히 있으니 한결 나았다. 리어다머는 이제 평소처럼 목에 힘을 많이 주지 않고도 무화과에게 말할 수 있었다. 무화과 씨가 제 첫 남자친구니까요. 무화과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에 걸리던 것을 해결한 듯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익숙해 보여서요."
툭 던진 한 마디가 어떤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리어다머는 자신의 질투심 많은 연인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리어다머는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왼쪽 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화과는 늘 리어다머에게 주의를 기울여주었기에 이번에도 리어다머가 무화과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곳을 주의깊게 응시해주었다. 리어다머는 무화과의 시선이 자신이 의도한 곳에 제대로 닿아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서론을 꺼냈다. 사실 반대편에 무화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막상 자리에 앉으니까 무화과 씨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빨리 일어났거든요. 리어다머가 그렇게 말하자 무화과의 눈썹이 안타깝게 기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리어다머는 약간 뜸을 들이려던 뒷말을 바로 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할 겨를이 없었다. 리어다머는 무화과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무화과가 집에 붓과 물감이 있느냐고 묻지 않기를 바라며 부탁했다. 무화과 씨만 괜찮으면, 집에 가서 그려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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