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종말

정의되지 못한 마음, 빗방울에 굴절되어 펼쳐진...

대지 by 서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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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비가 왔어요.
12학년이 되어 옮긴 교실은 항상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오늘은 바깥에 내리는 비를 머금어 눅눅하기까지 했죠. 같은 교실에 있는 아이들도 웃고 떠들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은은하게 퍼진 불쾌감은 나까지 알 수 있었죠. 그 뿐일까요, 나도 몸에 들러붙는 천들이 불쾌해 몇 번을 옷깃을 팔랑거렸는지 몰라요. 친구들 중에는 일부러 눅눅해진 몸을 붙이며 다른 친구를 귀찮게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나는 그 사이를 피해다니며 웃었어요. 아우, 지금도 습기 탓에 찐득거리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의 살이 붙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지….

떠들썩한 아이들 대다수는 수업 준비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고, 조용한 아이들은 책을 읽다가 한 번씩 친구들을 쳐다봤어요. 그리고 그 시선에 미안해져 자꾸 흘끔흘끔 그 자리를 쳐다보고는 했죠.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거예요. 시끄러운 아이들에게는 눈 한 번 주지 않고, 해야 할 일만 하는 아이가요.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오해할지도 몰라요.

너드인가?

친구가 없다거나, 혹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관심사가 완전히 달라서 어울리지 못한다거나.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음, 그래요. 선망의 대상? 한국으로 치면 아이돌 같은 거였죠. 모두가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했어요.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 그리고 그와 반대로 우직한 눈썹은 그를 순하면서도 강단있어 보이게 만들었고, 언뜻 빛이 스쳐들 때면 언뜻 금발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보석같았죠. 옛날 석상을 닮은 콧대하며, 유명한 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옆 모습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훤히 드러난 이마가 그렇게 시원해보이는 사람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있어도 멀리에서도 보이는 사람을 실제로 본 게 저 아이가 처음이라면 믿을까요? 어쩌면 나의 안목이나 내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지는 않을까요.

저 아이가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에는 외모만 있지 않았어요.
저 아이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에 큰 거리낌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선을 잘 지켰어요. 누구든 자만하고 남을 휘두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러지 않았죠. 친해질 즈음이면 은근히 물러서고, 그럼에도 아이들이 토라질 즈음이면 다가와 사소한 말을 붙이고는 했어요. 누군가 말을 걸면 언제나 친절히 답했고, 아는 것이 많아 그의 대답을 듣는 것이 기대될 때가 많았어요. 내뱉는 말의 어휘 하나하나가 비슷한 나이인 우리들이 듣기에 고급스러운 단어 위주로 쓰니 괜히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고는 했죠.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유럽의 어느 성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 성이 윈체스터이니 어쩌면, 하는 생각까지도 떠오르고는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한 게 나뿐인 건 아닐 거예요.

“윈체스터, 학생회 관련으로 전달할 게 있으니 다음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오렴.”

자신을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말소리가 잘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거예요.
교실의 모두가 저 아이의 말을 듣기 위해 말소리를 줄이는 걸, 저 아이만 모르고 있으니까요. 사소한 말 한 마디 넘치게 하는 일이 없으니, 우리는 윈체스터가 모르게 우리의 소리를 죽여 윈체스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했어요. 그리고 말이 끝날 때에면 마치 수업 준비를 하느라 조용해진 양 움직이는 거죠. 나였다면 다들 나를 따돌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아이들은 비슷했어요.

참, 학생회장 같은 건 왜하는 걸까요?
저 정도로 가진 게 많으면 굳이 하지 않을 일인데. 괜한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저 애는 항상 할 일을 다 하지만, 나는 알아요. 저 아이는 저걸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걸요. 그냥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 낯빛이 이해되지 않은걸요. 무언가를 하든 열심히하는 행동이나 부드러운 표정과 반대되는 낯을 해요. 생기가 다 빠져나간 채로, 무언가를 지독히 붙잡고 있는 것만 같죠. 항상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그게 편한 표정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정말 저 상태가 편한 것이라면, 수업이 아닐 때 자꾸 바깥으로 돌 리가 없잖아요. 내게 보이는 건 항상 수업을 듣는 모습이나 선생님이 불러서 나가거나,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을 하러 나가는 것 뿐, 편히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냥 편히 있어도 좋을텐데….”

“갑자기 무슨 말이야?”

“윈체스터 말이야. 매번 바쁘기만 하고 힘들어보이잖아.”

갑자기 윈체스터?,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친구를 뒤로 하고 텅 빈 자리를 보면, 거기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요.
방금까지도 있었는데 누가 책상을 저렇게 깔끔하게 쓰는지. 하고 싶은 게 없는 눈으로 하는 게 많으니 자꾸 의아한 건 당연한 일일 거예요.

“뭐… 학생회나 동아리 준비하러 간 거 아냐?
걔는 동아리도 자기가 책임지고 있잖아. 힘들어보이지는 않던데. 왜? 대화했었어?”

힘들어보이지 않다니, 어디가?
의아함에 휙 돌아보면 친구가 눈만 끔뻑거리고 있죠. 주변의 친구들도 윈체스터라는 말에 괜히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느껴져요. 아니이, 그런 건 아니고 하는 게 많아보이니까, 바빠서 힘들겠다 뭐 그런 생각을 좀 했어., 괜히 말을 늘려요. 내가 잘못 봤나? 그런 거라면 나로 인해 괜한 걱정을 사고 다니게 될텐데, 그러면 안 되니까.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별 거 아닌 이야기였음에 눈과 귀를 돌리고서야 내심 안심하죠.

“걱정 안 해도 될걸? 힘든지 궁금하면 물어보기라도 해봐.”

아니면 내가 물어볼까? 안 그래도 나 요즘 윈체스터에게 말 걸 게 없었거든. 대화하고 싶었는데.
친구의 말에 고개를 휘휘 저어요. 물어볼 거라면 내가 물어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평소에도 대화 잘만 했으면서. 부럽게 과제나 학교 일정에 관해 얼마나 편히 대화하는지 모르는 게 아닌데, 괜히 입을 삐죽거리니 옆에서 한참 웃는 소리가 들려요. 어이없어, 사람을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나?

끼익, 얼마 전부터 소리가 나기 시작한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금 고민이 깊어져요.
아무리봐도 힘든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다들 아니라고 할까.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걸까? 다른 애들처럼 그냥 졸린 것일지도 모르는데.

어느 날은 그런 모든 게 속상했던 것도 같아요.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나는 내가 생각보다 더 많이 윈체스터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이 가니까, 그래서 눈을 감아도 그 아이의 옆 모습이 눈에 선명할 정도가 되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 그만큼의 관심이 없어요. 아니, 사실 아무에게도 어떠한 종류의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느껴요. 그게, 너무나도 속상해요.

“윈체스터, 내 이름 알아?”

누구라도 너의 발을 땅에 붙들어둘 수 있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아니라해도 좋아요. 그냥, 네가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무언가가 있으면. 그 날 너의 앞에 앉아 평소보다 앞뒤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은 나의 불안이 만들어낸 결과일 거예요. 다시 나갈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던 윈체스터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 나를 보았을 때 괜히 시선을 책상에 붙든 건 나의 후회일 거예요. 네 입에서 나를 모른다는 말이 나오면, 그러면 나는 네게 향하는 모든 관심을 끊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뱉은 말에 현실이 찬물처럼 들이닥쳤어요. 네가 내게 관심이 없다는 걸 들어야한다니, 왜 스스로 이렇게 무서운 일을 벌인 걸까요. 네가 내게 눈길 한 번 주기를 바라면서 네게 무관심을 확인받고 싶어하다니, 왜 나는 이렇게나 모순적으로 굴고 있는 걸까요.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뭉그러진 것 같은지….
얼굴 안 쪽이 싸늘해지고, 동시에 손 쓸 수도 없이 뜨거워지고 있는 느낌이 혼미해서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어요.

“알레이 가르시아, 알고 있어.”

아마 네가 내뱉은 이름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히.

“…왜 알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네 이름을 모를까봐 알려주러 온 거야?”

친절하구나, 윈체스터가 내뱉는 말이 내 심장에 박히는 것만 같아요.
스스로도 알고 있어요. 저 아이가 기억하는 ‘다’라는 건, ‘알레이 가르시아의 모든 것’이 아니라 ‘같은 학년의 이름 모두’라는 것을요. 저 아이가 나를 특별히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럼에도 내 가슴이 왜 이렇게까지 요동치는지 알 수 없어요. 왜 이렇게까지 심장이 수런한 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냥, 모르고 싶었어요.
더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날 어떤 말을 이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어지러운 심장박동 뿐이에요.

일부러 거리를 더 두었어요.
이런 나를 더 겪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윈체스터도 기분이 나쁠 거예요. 나조차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마음을, 나조차 정의하지 않으려 하는 감정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 될 테니까. 오히려 마주칠 일을 줄이고, 인사도 최소한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도 참았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어요.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관심이, 정의하지 않은 감정이, 나의 뭉그러진 자괴감이 사라진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 날은 유독 날이 좋았어요.
날이 너무 덥지 않아 선선했고, 그 날의 수업은 유독 집중이 되지 않았고, 많은 아이들이 들뜬 게 보였어요. 곳곳에서는 파트너를 구한 아이들이 웃으며 서로 대화를 즐겼고, 어떤 아이들은 아직 구하지 못한 파트너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어요. 물론 파트너 없이 다니겠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내 눈에는 유독 파트너를 구한 아이들과 구하고 있는 아이들이 더 눈에 띄었어요. 누군가에게 파트너를 하자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도요. 내게도 파트너 신청을 하러 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다수가 다음날을 기약하며 학교를 떠난 시간, 거의 사람이 남지 않은 학교를 왜 그렇게나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어요. 여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책상을 몰래 바라보기도 하고, 도서관에 들러 줄거리가 선명히 기억나지 않는 책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교무실을 기웃거리며 선생님들의 모습을 슬쩍 훑기도 했어요. 평소에는 관심이 없던 정원의 꽃도, 그리고 정원과 숲 경계에 있는 파빌리온까지도.

그래요, 그 날은 뭔가 이상했어요.

선선한 바람, 따스한 햇빛에 날이 그렇게나 좋았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내렸죠.
옅은 물방울이 코 끝에 부닥치는 순간 학교로 발을 돌려야 했는데 마음은 달랐어요. 학교가 아니라 정원이 더 가까우니까, 이 정도의 비라면 잠시 비를 피하면 곧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평소라면 발을 들이지 않았을 파빌리온까지 들어갔을 때, 나는 그 곳에 지친 표정의 윈체스터를 마주쳤어요. 아니, 마주쳤다고 하는 건 옳지 않을지도 몰라요. 본 것은 나 뿐이고, 그는 파빌리온의 기둥에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모습이 망막에 맺혔죠. 바람은 여전히 선선했고, 그 바람이 스치는 머리결은 금방 사라질 아지랑이처럼 아름답고 혼몽했어요. 단정한 이마를 쓸고 가는 머리칼은 밀밭을 떠올리게 하는 갈색이었지만 볕뉘가 닿는 곳곳마다 햇빛을 머금어 반짝였고, 빛이 아롱거리는 얼굴은 평소보다 지친 것 같으면서도 무방비해보였어요.
닿지 못할 선망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사람같았죠.

나의 무엇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그 때에 깨달았어요.
불을 꺼둔 방에 빛이 밀려들 듯, 내가 버려둔 관심과 감정과 자괴감이 이리저리 눈을 어지럽혔죠. 나는 아무것도 없애지 못했던 거예요. 그저, 그저… 내가 더 뭉그러지고 싶지 않아서, 내가 더 못나지고 싶지 않아서 모든 걸 못본 채 한 거예요. 내가 정의하지 않은 사이 감정은 더 자라서, 더는 정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어요. 심장이 제 박자를 잃고 뛰어대는 동안, 나는 지친 윈체스터를 본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더는 움직이지 못했죠. 태풍은 내 안에 있었고, 네가 있는 세상만이 태풍의 눈이 되어 잠잠했어요.

좋아해. 네가 좋아. …네가, 나처럼 나로 인해 마음이 부풀었으면 좋겠어.

꺼내지 못할 말이 입 안을 맴돌았어요.
꺼내지 못할 마음, 너는 알지 못할 나의 약점, 네가 싫어할 지 모를 나의 관심 모두가 결국 내 목소리로 화해 도둑같은 고백을 스치듯 꺼내었을 때에서야 나의 격랑에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어요.

“……미안.”

깊이 잠든 줄 알았던 너의 눈이 뜨이고, 그 순하고 예쁜 얼굴이 평소보다도 창백해지는 것을 마주했을 때, 너의 입에서, 들어본 적 없던 떨림을 들었을 때에서야…. 나는 외려 네게 미안하다고 해야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겨우 잘못된 선택을 흘린 죄악인지, 딱 붙어버린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그저 네가 없어지고, 내 볼을 성글게 긁는 빗방울이 그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어요.

하늘은 여전히 새파랗게 물들어있었고, 잠시 바닥을 긁던 빗방울은 이제 사라졌어요.
산재한 물방울들에 굴절된 햇빛이 길게 하늘을 색칠했고, 무지개 아래 나무들도 잎마다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났죠. 기억 속 너의 얼굴도, 머리카락도, 그 순간마저도 세상과 동일하게 반짝이는데, 나만이, 빛바랜 감정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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