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아무말해요

내가 가야 할 길

긴장된다_강 운의

작전이 종료된 후, 경계가 풀리고 나는 조용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사고 났을 때 어딜 잘못 부딪혔나, 심한 복통으로 배를 붙잡은 채 목적지를 찾아 무작정 걸어서 도착한 곳은 작전 직전까지 사용했던 아지트, 다행스럽게도 발견되지는 않은 듯 떠났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저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소원이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치료였기 때문에.

"아… 그거 어디에 뒀더라……."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구석에 잘 정리된 가방을 떨리는 손으로 열고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확인했다. 클라우디. 일을 하지 않을 때 쓰는 위조된 신분이다. 나는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옷을 대충 벗어 던졌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후드티로 갈아입고 나가 도어락의 암호를 재설정했다. 솔직히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 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아, 119가 몇 번이더라.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어쩌면 긴 잠이 될지도 모르는 안식으로 빠져들었다.

*

한참이 지나, 병원. 기절해 있다 일어나니 약 하루가 지나있었다. 유예 시간은 끝났네……. 멍하니 생각하며 바깥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내 옆에 온 간호사가 내 상태를 이것저것 체크했다. 손목에 환자용 팔찌를 내려다본다. 클라우디, 여전히 나는 들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편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우선은 디소난테와 관련된 정보를 노르 씨나, 잭형… 아, 형이라고 하지 말랬지. 잭 씨에게 보내고, 나머지 정보는 가방에 챙긴 다음에 히어로들이 출동할 때를 노려서 체포된다면…….

"안 무섭다…안 무섭다……."

긴장이 됐는지 손바닥에 배어 나온 땀을 이불에 문지른다. 솔직히 무섭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처벌을 받는 건 둘째 치고, 어떤 충돌이 있을지, 어떤 희생으로 이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 같은 걸 구한다고 싸움이라도 일어났다가는…….

"아니야.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퇴원은 빠른 게 좋겠군. 나는 일단 얌전히 치료받기로 했다. 일반 병원으로 실려 왔으니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겠지. 그 전에 퇴원하면 좋고. 나는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긴장에 잠 못 이룰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은 생각보다 평화롭고 아늑해서… 나는 어쩐지 입원하기 전보다 건강해져서 퇴원했다. 병원 밥은 솔직히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건강하고.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직전까지 사용했던 그 아지트로 되돌아왔다. 나가기 전과 같군. 다행스럽게도 발각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또 대충 정리해 놔야지. 나는 단출한 방을 내려다보다가 최소한의 짐만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가방 안에는 틈틈이 정리 해 놓은 자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에 올라타 그 가방을 보조석에 내려두고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는 디소난테의 아지트, 이것저것 모아둔 거라 정말 필요할까 싶은 자잘한 정보까지 들어있지만, 솔직히 가지고 나가는 건 유출이니 배신이다. 알아서 잘 걸러주겠지. 나는 그렇게 다시 평화로운 도시에 녹아들었다.

*

그렇게 며칠간은 또 바쁘게 보냈다. 은퇴 소식을 전하고, 정보를 모조리 넘기고 될 수 있으면 넘보지 않을 테지만 각오하라고 농담도 던져놨다. 솔직히 지인이라던가 친구라던가, 얼굴 아는 게 뭔지, 알아도 그쪽은 다루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어찌 됐든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다. 이제 남은 건……. 나는 한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든 채 익숙한 대문 앞에 섰다. 이런 사회에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이 열려있는, 그런 대문. 이곳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문이 열려있다는 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나는 그 낡은 철문에 가볍게 노크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평상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저 왔어요. 아버지."

"…운? 너 운이냐?"

내쫓으려나? 히어로들이 와서 댁네 자식은 흉악한 범죄자요, 그런 말을 했을까? 이번 일로 거의 까발려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솔직히 지금 이 자리에서 내쫓아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춥다. 들어와라."

아빠는 별말 안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엔 이 집이 참 커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엉거주춤 앉으며 과일 바구니를 아빠한테 내밀었다.

"한 겨울인데 뭘 그런 걸 사와."

"그냥요~ 빈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 아, 깎아올까요?"

"됐다."

별로 마음에 안들었나… 역시 음료수가 나았을까? 하지만 병원도 아니고……. 한참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아빠는 몸을 일으켜 칼과 접시를 가져왔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배를 하나 꺼내 깎는 것이다. 이렇게 있으니 꼭 어릴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어렵사리 말을 붙였다.

"율이 형은요?"

"나갔다. 좀 됐으니까 돌아오겠지."

아빠는 나에게 잘 깎은 배를 건넸다. 나는 그걸 받아먹으면서 다음은 뭘 말할지 고민했다. 다른 때는 잘만 나오던 말이 유독 아빠 앞에선 나오지 않았다. 너무 어색해. 이런 분위기는 질색이야! 한참 말없이 주는 배만 먹고 있는데 그 무뚝뚝한 아빠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아비가 어려우냐?"

"아뇨! 아, 그게……."

"티 다 난다."

"…진짜요?"

이럴 수가. 나는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요.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음… 아, 이거부터 물어봤어야 했나. 잘 지내셨어요?"

"못 지낼 건 없지."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빠의 시선도 나를 향해 있었다. 아, 이건.

"저는 잘 지냈어요! 음, 나름대로 직장도 있었고, 아, 이제 음, 잠깐 쉬려고요. 이제 제대로 살아야 할 거 같아서……."

두서없는 말이 쏟아져나온다. 아, 정말.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들어 가고 싶었다. 아빠는 그런 나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미안했다."

"네? 뭐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아빠의 고개를 번쩍 들어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어릴 때 강하게 커야 한다고, 소심하지 말라고 혼냈던 거."

간단하게 말한 아빠는 몸을 일으켜 싱크대에 껍질 따위를 대충 두고 손을 닦았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으면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율이한테 많이 혼났다. 너 그만 괴롭히라고."

"아빠가요? 형도 참……."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더구나. 너는 너고 율이는 율이고, 나도 나인데. 지금은… 건강해 보이니 됐다."

그 말을 들으니 괜스레 가슴 언저리가 아린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놀라 가득 고였던 눈에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다녀왔습니다! 못 보던 차 있던데? 누구 왔어요? 어? 너… 운이구나! 뭐야, 잘 지냈어? 키 많이 컸네! 예전엔 쪼끄마했는데. 아, 생활비 계속 보낸다면서! 안 그래도 돼~ 형 돈 많이 벌었어. 아버지 한 명 커버 칠 정도는……. 잠깐, 너 울어? 아니, 아버지! 애 좀 그만 괴롭히라니까요! 운이 너도, 아빠가 괴롭히면 말만 해. 형이 아빠 이겨."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진다. 나왔던 눈물도 놀라 쏙 들어갈 정도였다. 나는 어버버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빠 나 안 괴롭혔어! 정말로!"

"정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리고 아빠를 봤다. 아버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튼. 그래, 무슨 일이야? 7년 연락도 없더니! 일이 많이 바빴어? 이마는 또 왜 그래. 너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나는 사실을 말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작은 몸으로 공사판 같은 데서 죽도록 일해서 우리 생활비 보내주는 거 아니지? 그런 거면 하지 마. 걱정된다. 형이 아직은 너까지 봐 줄 수 있어. 아버지도 종종 바다에 일 나가니까 모자란 거 없이 살 수 있고."

"아, 아니야. 그런 거. 이거 음,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사고? 어떤 자식이야. 내가 당장 가서―"

"아냐! 아니야! 지금 진짜 괜찮아! 내가 운전하다가 단독 사고 난 거야. 아빠도 형 좀 말려봐요!"

"못 말린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나는 그제야 자리에 앉은 형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형은 요새 뭐 해?"

"나? 가끔 배도 몰고, 쉬기도 하고, 그렇게 여유롭게 보내고 있지! 근데 넌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한참 연락도 없다가 뜬금없이 내려오고."

"나는……. 그냥 잘 지내. 하던 일은 은, 아니, 그만 두고 음, 잠깐 여행! 여행 다녀오려고. 그래서 또, 연락 잘 안 될 거 같아서… 보러왔어."

"또? 오랜만에 얼굴 비춰서 효도 좀 하나 했더니."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 기념품 사와라, 기념품~ 알았지? 연락 할 틈 생기면 아버지한테 연락 좀 하고. 아버지 저렇게 무뚝뚝해보여도 너 많이 걱정하신다."

아빠는 일부러 헛기침하며 형의 말을 말리려고 했지만, 형은 멈추지 않고 떠들었다. 나는 형의 말에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티비를 틀어 소리를 높이고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아빠가 나를…….

"…노력해 볼게."

또 가슴 한쪽이 찡하게 울린다. 아, 나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집에만 오면 뭔가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라니까. 나는 그렇게 하루 이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집을 나섰다. 감옥에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고 그 안에서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아, 에릭 형한테 연락하면서 그 이야기도 하면 되겠다. 미안하긴 하지만, 형이라면 잘 전해줄 거야. 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다른 범죄조직들의 정보가 담겨있는 하드들과 내 진짜 신분증을 챙겼다. 원래라면 이대로 사고를 쳐서 아르모니아에 직접 잡힐 생각이었지만. 그러다 보면 역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어깨 펴고, 당당하게!"

어디선가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 거대한 건물로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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